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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게시판 내 결과

  • 3. 공청의 산아들청년사업은 내가 일생을 두고 심혈을 바쳐온 중대사의 하나이다. 나의 혁명활동이 청년학생운동으로부터 시작되였다는것은 길림시절의 생활이 잘 말해주고있다. 나는 길림감옥에 구금되기전에도 청년학생운동을 하였지만 감옥을 나온후에도 지하활동의 형식으로 청년학생들과의 사업을 많이 하였다. 국제당련락소 일군들과의 첫 접촉이 이루어졌던 1930년 여름부터는 공청길동지구 책임비서로 임명되여 공청사업을 하였다.물론 왕청시절에도 청년들과의 사업은 나의 군사정치활동에서 주선을 이루는 중요한 구성부분의 하나로 되고있었다. 유격대의 정치사…

  • 2. 다홍왜에서의 론쟁《민생단》문제와 관련된 나와 동만당지도부 인물들사이의 론쟁이 다홍왜회의에서 비로소 시작되였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확한 고찰이라고 볼수 없다. 그 론쟁의 시초는 벌써 1932년 10월에 있었다. 북만진출을 개시한 우리 부대가 왕청지방에 와서 얼마동안 머물러있을 때였다.나는 그때 왕청체류일정의 첫 순서로 1구(요영구)당사업을 지도하였는데 그 과정에 현당과 구당의 일부 일군들이 반《민생단》투쟁을 혁명적원칙과 배치되게 극좌적인 방법으로 망탕 진행하고있는 사실을 직접 목격하였다.어느날 아침 1구당 조직부장 리웅걸과 …

  • 제 10장. 자주의 신념을 안고1. 사나운 회오리시련의 나날들은 꿈결처럼 지나갔다.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던 중중첩첩한 설령들은 저 멀리로 사라지고 피와 고뇌로 얼룩진 원정은 승리적으로 종결되였다. 조선공산주의자들앞에는 그 승리에 기초하여 혁명을 심화시킬수 있는 새로운 전망이 열리였다. 병마에 지친 몸을 끌고 로야령산정에 오른 나는 대원들과 함께 왕청의 산발들을 굽어보며 환성을 올렸다. 수개월동안 초연과 혹한속에서 겹쌓인 피곤이 순간에 다 가셔지고 고향의 뒤동산에라도 와닿은것 같은 희열로 마음마저 구름처럼 부풀어올랐다. 하지만 나는…

  • 제9장. 제1차 북만원정1. 조선인민혁명군백성이 있는곳에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는곳에 군대가 있다는것은 하나의 초보적인 정치상식이다. 모나꼬와 같은 특수한 몇몇 나라들을 제외한 세계의 대소국가들은 거의 모두가 자체방위를 위한 민족군대를 가지고있다. 지구상의 수많은 약소국가들이 식민주의자들의 총 몇방에 자주권을 송두리채 빼앗기고 수백년동안 노예살이를 해온것은 군대가 없었거나 약한데도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구한국의 군대도 나라를 지켜내지 못하고 괴멸되였다. 내란을 평정할 때는 그렇게도 그악스럽던 군대가 외적앞에서는 대포도 변변히 쏘…

  • 제8장. 반일의 기치 높이1. 리광1. 리광나와 리광과의 우정은 길림에서부터 시작되였다.동만청총계통에서 온 김준이네 패거리들이 하루는 낯선 청년 한사람을 데리고 와서 나에게 소개해주었다. 그 낯선 청년이 바로 리광이였다.리광이 길림에 나타난것을 두고 그때 우리 동무들은 여러가지로 많은 추리를 하였다. 공부를 하고싶어 왔을것이라는 사람, 조직선을 찾으려고 왔을것이라는 사람, 길림일대의 청년학생운동실태를 알고싶어 왔을것이라는 사람 등으로 제나름의 해석들을 하였다. 김준은 리광이 길림에 온것은 성적으로 소집되는 교원들의 어떤 비밀회합…

  • 제 7장- 인민의 세상1. 보금자리우리는 1933년 2월중순에 마로인의 안내를 받으며 왕청유격구로 향하였다. 20일동안 산전막에서 정치토론만 하며 갑갑하게 지내던 18명의 유격대원들은 행길에 나서자 신바람이 나서 걸음을 다그치였다. 겨우내 겪어온 시련의 흔적들이 채 가셔지지 않았건만 대오는 청신하고 생기발랄하였다.지금 왕청지방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자기네 고장의 특징이 무엇인가고 물으면 현장의 연설이 길고 소학교의 길이가 길고 골짜기가 긴것으로 유명합지요 하는 기지있는 말로 대답하군 한다고 한다. 아마도 그것은 롱질을 즐기는 왕청지…

  • 제 6장 시련의 해1. 남만으로유격대활동의 합법화가 실현되고 항일유격대가 정식 창건된 다음 우리 동무들속에서는 그 활동의 첫 시작을 어떻게 떼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론의되였다.성시에 가서 열병행진을 하고 소사하에 다시 돌아온 우리는 농촌집 웃방에 대원들을 3~4명씩 분숙시킨 다음 그들을 며칠동안 휴식시키면서 유격대의 행동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토의를 하였다. 이 토의과정도 역시 카륜이나 명월구에서처럼 격렬한 론쟁을 동반하였다.모여서 입씨름을 하는 광경을 보면 그야말로 개개명창이였다.유격전에 대한 개념도 각이하였거니와 그 …

  • 2. 9.18사변나는 안도의 혁명조직들이 자기 궤도에 들어서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성과를 확대하기 위하여 1931년 여름과 초가을 화룡, 연길, 왕청일대의 지방조직들에 나가 5.30폭동후 흩어졌던 대중을 묶어세우는 사업을 하였다.내가 돈화를 활동거점으로 삼고 안도, 룡정, 화룡, 류수하, 대전자, 명월구 등지와 련계를 맺으면서 사업을 한창 전개해나가고있을 때 9.18사변이 터졌다. 나는 그때 돈화근처의 한 농촌마을에서 공청열성자들과의 사업을 하고있었다.9월 19일 이른 아침에 진한장이 내가 머무르고있던 마을로 뛰여와 관동군이 봉…

  • 제 5장 무장한 인민1. 수난당한 대지5.30폭동과 8.1폭동을 계기로 시작된 백색테로의 회오리바람은 1931년에 들어서면서 더 심하게 만주대지를 휩쓸었다. 적들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과 애국자들이 여러해동안 품을 들여 키워온 혁명력량을 뿌리채 뽑아던지려고 도처에서 피비린내나는 폭압소동을 벌리였다.동만에 나와보니 남만이나 중부만주일대보다 공기가 더 팽팽했다. 폭동의 후과도 더 참혹하고 파괴적이였다. 돈화남문에서 장대기에 걸려있는 폭동자의 머리를 보고 나는 혁명세력에 대한 적의 공세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가를 짐작하였다.교조주의와 소…

  • 10. 잊을수 없는 사람들나는 언제인가 평양에서 까스뜨로동지를 만났을 때 그와 함께 항일혁명시기의 투쟁경험을 두고 장시간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다. 그때 까스뜨로동지는 나에게 많은 질문을 하였는데 그 질문들가운데 하나가 무장투쟁을 하면서 식량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하는것이였다.나는 그에게 적의 식량을 빼앗아 해결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인민이 시종일관 우리에게 식량을 대주었다고 하였다.청년학생운동과 지하활동을 할 때에도 인민이 우리에게 밥을 먹여주고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다.상해림시정부나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와 같은 독립군단체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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