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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게시판 내 결과

  • 3. 혁명전우 장울화 (1)앞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김산호가 천을 해결해가지고 마안산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다시금 그를 무송현성에 파견하였다. 20원어치의 천을 가지고서는 아동단원들에게 옷을 다 해입힐수 없었다. 싸움을 하여야 천도 로획할수 있겠는데 나는 나와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고있는 이 성시에서 백병전을 벌릴 의향이 조금도 없었다. 새 사단의 조직으로 혁명군의 면모를 일신시킨 우리는 그 성과에 기초하여 인민혁명군의 군사정치적력량을 확대해가는 단계에 있었다.힘도 축적하기전에 총소리부터 먼저 내면 무송에서의 우리의 처지가 사면초가…

  • 2. 20원마안산 서쪽밀영에서 좌경분자들이 《민생단》보따리를 뒤적거리고있을 때 새봄의 눈석이조차 시작되지 않은 마안산 동쪽밀영의 음달밑에서는 수십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병마와 기한에 떨며 울고있었다. 그 아이들의 대부분은 간도혁명의 마지막보루라고 말할수 있는 처창즈에서 어른들과 함께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고심참담한 나날을 보내다가 유격구가 해산된후 내도산을 거쳐 서정하는 인민혁명군부대들의 보호를 받으며 적들의 마수가 덜 미치는 남만주의 후방밀영에까지 굴러온 고아들이였다. 마안산밀영의 나어린 주민들중에는 연길지방에서 온 아동단원들도 …

  • 제 12장. 광복의 새봄을 앞당겨1. 새 사단의 탄생미혼진을 떠날 때의 우리 일행은 20명도 안되였다. 2명의 나어린 전령병과 오백룡을 포함한 10명의 호위성원들, 김산호와 화룡오지에서 서당 훈장을 하다가 우리를 찾아온 《대통령감》, 이들이 내가 거느린 식솔의 전부였다. 관지에서부터 우리를 따라온 왕청련대의 1개 중대도 북만의 부대들에 합류하기 위하여 의란현방면으로 떠나갔다.나는 비록 홀가분한 차림으로 길을 떠났으나 오래전부터 품어오던 소망이 이루어지게 되리라는 생각으로 하여 형언할수 없는 희열을 느끼였다.(어서 무송땅으로 나가자…

  • 5. 백전로장 최현남호두를 떠나 백두산으로 나올 때 우리가 선택했던 로정가운데서 중요한 행선지의 하나는 돈화-안도현경의 목단령산줄기에 있는 인민혁명군의 독립1사 후방밀영기지 미혼진이였다. 크고작은 밀영들이 천리수해속에 여기저기 널려있는 이 종심깊은 대밀영지구에서 우리는 왕덕태, 위증민을 비롯한 2군의 주요지휘관들과 함께 남호두회의방침을 관철하기 위한 일련의 대책적문제들을 토의하려고 계획하였다.한두번 다녀간 사람도 향방을 잡지 못해 쩔쩔 맨다는 심심산골 미혼진, 산봉우리들과 골짜기들의 모양새가 하도 어슷비슷하여 초행자들은 누구나 어…

  • 4. 전우들은 북으로, 나는 남으로우리가 남호두회의를 끝내고 백두산지구로 나가기 위해 소자지하를 떠나던 아침은 바람소리가 유난히도 소연하였다.신들메를 매고 남행길에 오를 때 내 머리에 맨 처음으로 떠오른것이 바로 천리길도 한걸음으로 시작된다는 우리 나라 격언이였다. 소자지하의 귀틀집마당을 떠난 우리는 방금 내린 함박눈우에 행군의 첫 자욱을 찍었다.일행중에는 왕덕태, 위증민과 같은 중국인군정간부들도 끼여있었다.심장병이 도져서 쏘련병원의 신세까지 지고 돌아온 위증민조차도 그날은 왕덕태와 함께 걸죽한 롱질을 해가며 명랑한 기분으로 걸음…

  • 3. 경박호기슭에서만주대륙의 으뜸가는 명승지 경박호의 남쪽호반에는 남호두라고 불리우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다. 남호두란 호수의 남쪽머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호수의 북쪽호반에 있는 마을은 북호두라고 부른다. 호수로 흘러드는 소자지하물줄기를 따라 상류쪽으로 몇십리 올라가면 깊은 계곡의 어느 한 산탁에 낡은 귀틀집 두채가 있었다. 그 집의 한채가 바로 1936년 2월에 우리가 회의장소로 사용한 집이였다.지금은 초목에 묻혀 집터자리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되였다지만 오륙십년전에는 그 귀틀집앞에 커다란 쇠스레나무와 잣나무가 각각 한…

  • 2. 기이한 인연북만의 액목지구는 우리가 길림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고장이였다. 강명근과의 련계밑에 려신청년회라는 혁명조직을 내오고 그 조직에 망라된 청년들과의 사업을 해오던 교하와 신잔, 삼송도 당시까지는 액목현에 속해있었다. 이 현이 교하현으로 개칭된것은 1930년대말기부터였다고 한다.우리는 2차 북만원정때 액목땅에서만도 수천리의 장정을 하였다. 청구자, 비파정자,남천문,삼도구,마록구,신흥툰,관지,류채구,삼과송,목단강촌, 흑석향,타요자 등은 다 우리가 그때 개척한 고장들이며 북만원정대의 무공이 새겨진 추억도 깊은 전적지들이다.…

  • 제 11장. 혁명의 분수령1. 북만의 전우들을 찾아인민혁명군의 제2차 북만원정준비는 로흑산전투와 태평구전투를 통하여 완결되였다. 왕청과 훈춘 련대의 일부 중대들과 청년의용군으로 편성된 원정대가 인민들의 성대한 환송을 받으면서 태평구를 출발한것은 1935년 6월하순이였다. 석두하자와 사도하자를 거쳐 팔인구에 도착한 원정부대는 로야령을 돌파하기 위한 어려운 산악행군의 길에 올랐다. 장사진을 이루고 흘러가는 행군종대의 대오에는 안도에서 온 독립련대의 일부 대원들도 끼여있었다. 지금 살아남은 사람들가운데서 2차 북만원정을 회상할수 있는…

  • 5. 혁명의 씨앗을 넓은 대지에《숙반》의 회오리가 남긴 파멸적인 결과를 놓고 온 동만이 비탄의 눈물을 흘리며 갈길을 모색하고있을 때 우리는 해방지구형태의 고정된 유격근거지들을 해산하고 광활한 지대에 진출하여 적극적인 대부대활동을 벌릴데 대한 새로운 로선을 내세우고 그것을 1935년 3월의 요영구회의에 상정시키였다. 이 로선은 회의에 참석한 절대다수의 군정간부들한테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에 리해와 공명을 표시한것은 아니였다. 회의에 참가한 당과 공청의 일부 간부들가운데는 유격구해산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 4. 사도구참변에 대한 대답우리가 유격구를 해산하는 사업을 지도하느라고 분망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라자구지하조직에서는 요영구에 련락원을 파견하여 나에게 사도구참변에 대한 상보를 전해주었다. 련락원이 가져온 통신문건에는 문영장부대가 로흑산지방에 있는 정안군을 끌어들여 사도구부락을 완전히 초토화하고 부락민전부를 살해하였다는 기막힌 사연이 적혀있었다.통보는 믿을만한것이였지만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문영장이 우리와의 언약을 무시하고 정안군을 대학살에로 유도하였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았던것이다. 문영장과 우리 부대사이에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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