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조국 방문기 65. 비전향장기수 아파트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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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 15-07-10 22:55 조회 12,081 댓글 2본문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65
비전향장기수 아파트를 찾아서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성명이 있은지 3개월 후인 2000년 9월에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당시 뉴스로 온 세상에 알려졌고, 남북의 화해와 통일에 관심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기뻐하였다. 전향하기를 거부하며 수십년 동안을 고문과 강요에 굴하지 않고 감옥에서 버티고 투쟁해왔던 그들을 일러 ‘신념의 화신’이라 불렀다. 이번 방문기는 비전향장기수들이 살고 있는 평양의 아파트를 방문하여 북으로 돌아가서 가족들과 함께 남은 여생을 살고 있는 그분들의 삶과 그 이야기를 옮겨보기로 한다.
수십 층 높이의 이곳 아파트에 도착하자 김동기 선생님이 우리를 마중해주셨다. 82세 되신 비전향장기수로 연세는 많지만 이곳 비전향장기수 가운데는 젊은 편이라 안내를 맡곤 한다며 웃으신다. 김동기 선생은 아주 건장한 체격에 건강해보이는 분이다. 비전향장기수 어르신들은 모두 이곳 평촌구역의 고층 아파트에 모여 사는데 모두 63명 가운데 현재 2개의 층에 모두 29 명이 살고 계신다고 한다. 그동안 34명의 어르신들이 돌아가신 것이다.
비전향장기수들은 이 고층 아파트의 두 층에 나뉘어 살고 있다.
이곳 아파트가 30여 년 전에 지어졌을 때 김정일 위원장이 현지지도를 하신 듯하다.
원래 대성산 옆에 이들을 위한 아파트를 새로 건설하려고 한 것을 일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이 아파트로 모신 것은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뜻으로 그동안 감옥에서 수십 년 동안 외롭게 살아오셨던 분들인데 너무 적적한 곳으로 모시는 것보다 인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 살도록 배려한 것이라 말해준다. 이곳은 특별한 지역이 아니라 아파트 건물의 골목 맞은편에 초등학교가 있었고 그야말로 평양의 인민들이 밀집해서 사는 지역이었다. 인민들 속에서 남은 여생을 살 수 있도록 하면서 또한 비전향장기수 출신의 동지들이 서로 오가면서 의지하며 모두 함께 모여서 살 수 있도록 북부조국에서 잘 배려해준 것으로 보인다. 아파트의 엘레베이터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1985년 3월에 방문한 것으로 적혀 있어 이 건물이 30여년 전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이날 찾게 될 비전향장기수 아파트 방문에 앞서 노길남 박사님이 이곳을 찾은 김에 노환으로 자리에 누우신 윤희보 선생님을 잠깐 뵙기를 부탁하자 김동기 선생님이 윤희보 선생님 댁으로 먼저 안내해주셨다. 윤희보 선생님은 우리가 방문한 지 5달 후인 2015년 3월 18일 서거하셨다. 선생님의 생이 얼마 남지 않으신 것을 예견하고 노 박사님이 미리 찾아뵙기를 청한 것이었다
윤희보 선생님 댁을 방문하여 선생님과 큰 따님을 만나뵈었다. 선생님은 귀가 안들려 글로서 대화하였다.
윤희보 선생님은 97세였고, 댁에는 67세 된 큰 따님과 함께 살고 계셨다. 따님의 말씀으로 손녀가 약제사로 일하기에 잘 돌봐드리고 있다고 한다. 윤희보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가누긴 하셨지만 귀가 들리지 않아 공책에다 글을 쓰면서 잠깐 대화를 나누었다. 애국자 선생님께 큰 절을 올리고 물러나오는데 여러가지 생각의 갈래로 내 마음이 참으로 무거웠다. 숱한 애국자들이 평생 동안 이루길 원하던 통일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지만 윤희보 선생님과 이미 세상을 떠난 34명의 비전향장기수 어르신들은 신념을 굽히지 않고 간절히 돌아가길 원하던 북부조국에서 가족과 상봉하여 행복한 삶을 살다가 눈을 감으신 것이 그나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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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보 선생님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정리한 다음의 글을 위키백과로부터 옮긴다.
경기도 광주군의 빈농 가정 출신이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리게 되었다.
군정기에 좌익 계열에 합류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택해 월북하였다. 한국 전쟁 중인 1952년에 공작원으로 남파[2]되었다가 체포되었으며, 10년 동안 형기를 치르고 출감하여 새로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1974년에 다시 구금되었다. 이때 조선인민유격대 출신이었던 부인도 사회안전법에 의해 함께 구금되었기 때문에, 어린 딸은 친척 집에서 자라고 성도 이모부의 성을 물려받게 되었다.[3] 수감 중에 전향을 요구받으며 심하게 구타당하여 어깨가 빠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4]
1989년에 다시 출감하여 총 수감 기간은 약 25년이다. 부부가 모두 전향하지 않은 좌익수로서 출감 후 통일 운동에 함께 적극적으로 나섰고, 한총련 학생들과도 가까이 지냈다. 《해마중 가세》라는 저서를 내기도 했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었다. 부인과 딸은 동행하지 못했다. 송환 후 북조선에 남겨둔 가족과 다시 만났고, 조국통일상을 수여받았다.
………………이상 인터넷 위키백과에서 옮김..............
윤희보 선생님과 작별하면서. 우리들은 애국자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5개월 전에 찾아뵌 것이다.
2015년 5월에 북부조국을 방문한 노길남 박사가 윤희보 선생 묘소를 찾아 찍은 사진
윤희보 선생 서거 100일에 해인사에서 둘째 따님과 지인들이 추모제를 가졌다고 보도한 자주시보 사진.
그러니까 내가 윤희보 선생님 댁에서 만나뵈었던 따님은 반 세기 전에 북에 두고 왔던 큰 따님이었고, 남에는 두 번째 부인으로부터 난 둘째 따님이 계신다. 둘째 따님 윤봉혁 씨와 함께 윤기보 선생님 서거 100일을 맞아 남부조국에서 지인들이 부인 박선애 여사의 납골을 모신 해인사에서 추모식을 가졌다고 근래에 서울의소리와 자주시보에서 보도를 하였다.
윤희보 선생님 댁을 나와서 엘레베이트를 내리자 오늘 우리가 방문하여 만나뵙기로 한 김은환 선생과 리경찬 선생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준다. 김은환 선생님은 나이 지긋한 학자풍의 모습이고 리경찬 선생님은 그와 대조될만한 건장한 풍모를 지닌 분이다.
우리가 찾은 이 아파트는 김은환 선생이 거주하는 아파트로 거실 외 방 세 개와 현대식 부엌과 욕실을 갖췄다. 김은환 선생은 이 아파트에서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살며, 김책공대에 다니는 손자와 외국어학원에 다니는 손녀가 있다고 하였다. 김은환 선생의 부인은 북으로 돌아온 후 재회하여 11년 동안 함께 지내다 3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우리를 맞이해준 비전향장기수 김은환, 리경찬, 김동기 선생.
김은환 선생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방과 욕실 부엌을 둘러보게 하였다.
김은환 선생의 아들은 보통강호텔의 주방장으로 일하며 만나볼 수 없었기에 잠깐 며느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 집 아들과 어떻게 만났느냐고 물어보니 본인은 상업대학 졸업생으로 인민군대에 여군으로 있었는데 중매로 결혼할 때 김은환 선생의 아들은 대학 예과의 학생이었다고 한다. 결혼 당시 홀어머니만 있었는데 아버님은 남쪽에 ‘조국통일을 위해 나갔다’라는 것만 들어서 알고 있었다고 하면서 이 집안의 군대기질이 마음에 들었다고 해서 군대기질이 어떤 것인가고 물어보니 ‘인민군대 하면 씩씩하고 배짱이 있어 한번 한다고 결정하면 꼭 해내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며느님은 김은환 선생이 14년 전에 북으로 돌아왔을 당시부터 계속 한 집에서 모셨다고 하면서 ‘아버님은 정말 훌륭하십니다’라면서 모시면서 감옥생활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김은환 선생과 선생을 깊이 존경하며 한 집에서 모시고 있는 며느님의 모습
우리를 맞이한 사람들 가운데 한 젊은 여성이 있어 누군가 하였더니 김은환 선생의 둘째 딸에서 난 손녀로 이름은 은심이라고 하였다. 은심은 금성학원을 졸업한 후 외무성 초대소에서 근무한다고 하였는데 나이는 26세로 미혼이라 하였다. 은심의 어머니는 상업대학을 졸업하여 일하다 현재는 연로보장을 받고 있다.
김은환 선생의 외손녀 은심. 갑자기 영웅이 되어 돌아온 할아버지가 생겨서 아주 기뻤다고.
은심에게 할아버지에 대해서 말해달라고 하니 은심은 11살 때 생각지도 못했던 할아버지가 뜻밖에도 갑자기 영웅이 되어 돌아오셔서 어리둥절한 한편 너무 기뻤다면서 ‘의지가 강하고 신념을 지킨 할아버지를 모시게 되어 긍지가 많습니다’라고 말한다. 은심에게 결혼은 어떤 사람과 할 것이냐고 물어보니 할아버지가 허락해주는 사람과 하겠다고 하자 김은환 선생은 허락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면서 은심이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무조건 찬성이라며 활짝 웃으신다.
신념의 화신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는 북부조국으로 송환되어 인생의 황혼기를 보람차고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김은환, 리경찬 선생님과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하는데 아주 근사하게 차린 다과상을 내어놓고는 맥주 한 잔씩을 권하신다. 모두 상 앞에 둘러앉에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글이 길어져 다음 회에서 두 분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과 나눈 감옥생활과 북으로 송환된 이후의 생활을 포함한 여러가지 대화를 소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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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2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광개토왕 님, 그렇습니다. 감옥이란 것이 죄가 있다면 그냥 수감하면 될 것을 전향을 하지 않는다고 이루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의 고문을 가하고 고통을 주었으니 그야말로 일제때 놈들이 독립군들을 대한 것을 그대로 물러받은 것이지요. 그런 가운데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고 전향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간의 성품이 어느 정도까지 고결할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신념을 갖게 만드는 사상의 값어치에 대해서도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광개토왕님의 댓글
광개토왕 작성일비전향 장기수 관련한 다큐 영화도 나온 바가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이 분들이 오랜 억류 생활 중에 참으로 말로 표현못할 고통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압니다.
마침 좋은 시기가 있어 북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긴 것은 참으로 큰 다행
이었으며 그런 신념을 끝까진 지킨 사람들에 대한 하늘님의 보우였다 생각됩니다.
이런 분들을 개잡듯 잡아패며 고통을 준 사람들과 돌아온 이분들을 끝까지 잘
보살핀 사람들과 큰 대비가 됩니다. 미국이 애국자들을 잘 보살피는 나라지만
북한이란 나라도 그에 못지않은 국가적 정책을 가진 나라로 생각됩니다.
남한은 그런 면에서 많이 뒤지는 편이라 하겠으며 오히려 그들을 더 박해한
사례들이 많지요. 대신에 애국이란 미명하에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고 개판을
쳤던 미친 사람들을 애국자 취급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왜 그리되었는지 모두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다음편이 기다려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