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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⑨합병비화, 매국노들은 무슨 짓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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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3,098회 작성일 14-09-30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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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⑨합병비화, 매국노들은 무슨 짓을 했나
김갑수 | 2014-9-23 18:50


합병비화, 매국노들은 무슨 짓을 했나

1910년 8월 초 어느 날 밤이었다. 조선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는 관저 응접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가 침실로 옮겨 왔다. 그는 잠옷을 꺼내 입으려다가 그냥 침대 옆에 걸쳐놓았다. 장마가 일찍 끝난 조선의 날씨는 유달리 뜨거워서 늦은 밤까지 더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속옷 차림으로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게이오의숙을 나온 후 미국 예일대학을 거쳐 프린스턴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고마쓰는 바야흐로 본격적인 출세 가도의 정점에 있었다. 다행히 그는 주색을 밝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밝히지 않는 게 아니고 관심이 없었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 기능을 거의 잃어버린 듯했다. 그는 요정 회식이 있더라도 일을 핑계로 가급적 참석을 안 하거나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것이 데라우치에게 성실한 관리라는 인상을 준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오늘도 송병준으로부터 그가 새로 낸 요릿집 청화정에 은밀히 초청을 받았지만 고마쓰는 단호히 거절했다. 송병준은 일진회를 움직여 작년 연말에 이미 일한합병청원서를 내놓고 있는 사람이었다. 일진회는 이토 통감이 안중근에게 죽자 기회가 왔다는 듯이 합병의 시급성을 공공연하게 거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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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완용

문제는 이완용 내각이었다.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이완용은 일진회의 합병론에 제동을 걸고 있었다. 그는 대신회의를 열어 합병청원서를 각하하도록 했고 대한협회나 국시연설단 등을 동원하여 일진회의 청원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은 너무 더웠다. 막 침대에 누워 잠이 들 듯하던 고마쓰는 전화벨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현관 수위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웬 일인가?”
“조선인이 찾아와 뵙자고 합니다.”
“이 밤에 누구야?”
“이완용 총리가 보낸 사람이라고 합니다.”

야밤에 비밀 내방한 조선인은 얼굴에 온통 땀을 흘리며 응접실에 앉아 있다가 고마쓰가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했다.
“고마쓰 교수님.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 기쁩니다.”
“지금 날 교수라고 불렀습니까?”
“예. 저는 동경정치학교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제자입니다.”

그는 명함을 꺼내 고마쓰에게 건넸다. 그는 이인직이었다. 만세보 주필을 하면서 신소설 <혈의 누>를 연재하기도 한 문인이었다. 그는 신극 단체인 원각사 대표를 하다가 지금은 조선 총리대신의 비서로 있었다. 그는 청강생으로 정치학교의 강의를 수강했으니 고마쓰가 자신의 은사라는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지금 총리대신 각하께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십니다.”

이인직은 다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아무리 보아도 그는 조선인의 골상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얼굴 윤곽이 옹졸했고 입술이 얇았다. 행색도 초라해 보이는 오십 가까운 중늙은이였다. 조선 총리대신은 어째서 이런 사람을 비서로 쓰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계속 말씀하시오.”
“큰일에 대한 교수님의 고견을 듣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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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완용의 비서 이인직

이인직은 일한병합 문제에 시중 여론이 매우 시끄러워졌다고 말했다.
“총리께서는 지난 해 하얼빈에서 이토 공이 한인 악한의 총에 돌아가신 후 병합이 화급히 시행되리라 보고 여러 준비와 고려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통감께서 아무 언질도 안하셔서 일이 어렵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지금 내각이 5적신, 7적신 소리를 듣는데 과연 이보다 더 친일 내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시며 매우 침울해 하십니다.”

고마쓰는 이인직을 상대로 대화를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이인직은 이완용의 속마음까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인직과 대화하는 것은 이완용을 직접 상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판단이 섰다.

이완용은,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일본이 내면 자기는 사직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자신이 사직하면 조선에게 변명할 여지도 없으며 일본에게도 등을 돌리는 일이므로 자신은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탄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총리께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모르던 차에 마침 교수님과 면식도 있어 고견을 듣고자 온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되겠는지 말씀해 보시지요.”
“교수님은 중대사를 소상히 아실 만한 요직에 계시니 조선이 어떤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조금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고마쓰는 흥분을 자제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는 내심으로 ‘병합 담판의 서막이 열리고 있고 내가 그 주역이 되고 있다.’는 희열감을 느꼈다.

이인직은 일본 종교인 천리교 신자였다. 그의 정신세계는 거의 일본화되어 있었다. 그는 마침내 고마쓰가 기다리던 말을 해 왔다.

“병합의 형식을 알고 싶습니다.”
“내가 아는 바만 말하겠소. 병합은 결코 압제의 형식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전승국과 패전국의 관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프랑스가 마다가스카르를 병합하고 미국이 하와이를 병합한 예와는 달라요. 우리는 피병합국의 원수를 학대하는 일은 전혀 없을 거요. 마다가스카르 왕은 섬으로 유배 갔고 하와이의 왕은 일개 평민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일한 병합의 경우 한국의 원수는 일본 왕족의 대우를 받게 되며 그 유지를 위해 충분한 세비를 지급할 겁니다. 이것은 우리 천왕 페하의 우악(優渥)한 배려라고 나는 전해 들었습니다. 또한 내각의 대신은 물론 다른 대관들에게도 그들이 병합을 위해하지만 않는다면, 공·후·백·자·남의 영작을 수여하고 세습 재산을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합은 오히려 한국의 치안과 민복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한국은 세계의 대국인 일본의 일부가 되고 한국인은 일본제국의 신민이 됩니다. 이것은 정복이 아닐 뿐더러 외국 병합의 예와는 그 취지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요컨대 분란이 끊이지 않는 한국이 질서 있고 높은 문화 국가에 오르는 것이므로 병합으로 인해 조선이 망한다는 생각은 기우에 불과합니다.”

그 날 밤 이미 자정이 지났지만 고마쓰와 이인직 두 사람은 아주 기묘한 역사관에 일치된 견해를 보이며 서로를 추켜세우게 된다. 주로 이인직이 말하고 고마쓰가 동의하는 대화 방식이었다. 그들에게 병합은 그리 놀랄 만한 대사건이 아니었다.

원래 조선은 삼한 시대부터 역성혁명이 빈발했다고 그들은 말했다. 오히려 병합보다 바람직하지 못한 정복도 조선에서는 이미 여러 번 있었다고 했다. 예컨대 신라 김씨 왕조는 고려 왕씨 왕조에게 정복되었다. 왕씨 고려는 500년 후 이성계에게 망했다. 이때 이성계는 고려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500년이 지났다고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대외 관계를 보더라도 조선은 시종 중국에 예속되어 명·청조로부터 책봉을 받아서 왕이 되었다. 이씨는 중국 왕을 천황폐하라 부르고 중국은 이씨를 조선왕 전하라고 불렀다. 그런데 청일전쟁으로 일본은 조선을 구출했다. 그러므로 일한병합을 아무리 나쁘게 보더라도 종주국을 청에서 일본으로 바꾸는 정도라고 그들은 말했다. 게다가 일본은 청국보다 선진국이니 조선의 위치는 이제 격상되는 것이라는 데에 그들은 동의했다.

이인직을 돌려보낸 고마쓰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완용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마쓰는 그 이유를 아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송병준보다는 이완용이 한 수 위였을 뿐이었다. 이완용은 병합의 주도권을 송병준이나 일진회에게 주지 않으려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일단 반대하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서 송병준에 비해 더 유리한 여론을 얻으려 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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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통감 겸
초대 총독 데라우치

데라우치가 육군대신 겸 통감으로 부임한 것은 불과 한 달 전인 7월 2일이었다. 그는 조선 이 왕가를 예방해 경의를 표하고 내외 관료들에게도 인사를 했지만 병합 문제를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한국 내각은 더 긴장하며 초초해 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8월이 되어 날이 무더워졌을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부는 가을 전에는 분명히 한국에서 먼저 추파를 보내리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 내각은 가을이 되기 전에 사람을 보낸 것이었다.

‘이 여름이 유달리 더워서 견디기 어려웠던 건가?’

데라우치는 여유작작하게 독백해 보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문신들은 온건하게, 무신들은 강경하게 하자고 주장했다. 일본 내에서도 두 기류가 있었다. 데라우치는 때가 되었다고 확신했다. 물론 고마쓰에게 모든 보고를 받고 난 이후였다.

며칠 후 예상대로 이인직은 다시 찾아왔다.
“일전에 말씀하신 조건은 제가 보기에 관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라면 이 총리께서도 사퇴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오는 찾아 뵌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난 번 말씀하신 바를 총리께 전해도 되는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절대 비밀이지만 책임 있는 대신인 이 총리에게만은 말해도 되겠습니다. 만약 다른 곳에 누설되면 저는 배를 갈라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찾아와서 총리의 심중을 이 은사에게 알려 주시면 고맙겠소.”

이완용은 3일 후 다시 이인직을 고마쓰에게 보냈다.
“관대한 조건에 사의를 표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아는 이가 생기면 시끄러워질 수도 있는 일이니 비밀리에 그리고 조속히 시행하자고 하셨습니다.”
“데라우치 통감은 이토와 달리 무사 출신이므로 복잡한 계산이나 임기응변을 하지 않는 분이오. 공연히 감정을 사서 소탐대실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라오.”
그들의 최종 면담은 10분 만에 끝이 났다.

고마쓰의 3차 보고를 받은 데라우치는 20년 간이나 조선어 통역관을 지낸 온후한 인물을 뽑아 이완용의 집에 보냈다.
“통감 각하께서 병합의 취지를 전하고 싶으니 한 번 내왕해 주시라는 전갈을 갖고 왔습니다. 다만 세간에서 쓸데없는 오해를 할 수 있으니 밤에 오셨으면 하십니다.”
이완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일본에서 호우 피해가 크게 발생하였다. 이완용은 통감 관저에 연락했다. 피해 위로 차 농상무 대신 조중응과 함께 오전에 방문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불과 30분 후 이완용은 조중응과 함께 이두마차를 타고 통감의 관저로 들어갔다.

내외신 기자들이 병합 담판이라며 취재 경쟁을 벌였지만 이완용과 조중응은 불과 25분 만에 관저에서 나왔다. 그 시간 동안에 이완용은 통감부에서 작성해 놓은 병합각서를 일독하고는 조중응에게 소지하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조선 국왕을 배려나 한다는 듯이,
“한국 원수의 칭호를 대공(大公: 소국의 군주)으로 하자는 건의가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데라우치가,
“예로부터의 칭호인 왕이 더 낳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하자 이완용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완용은 단 6일 만에 데라우치의 조인 요구에 협조하였다. 황제의 재가를 받아낸 것이었다. 이완용과 데라우치는 이 사실을 비밀에 붙이고, 정치 단체의 결성과 집회를 일절 허락하지 않는 가운데, 원로대신들을 모두 연금했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순종으로 하여금 나라 양도의 조칙을 내리도록 하였다.

8개조로 된 이 조약은, 제 1조에서, 한국 정부의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 정부에 이양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이로써 1910년 8월 29일부로 조선왕조는 건국 27대 519년 만에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다음 날 영국의 권위 있다는 신문 <더 타임스> 지는,
“일한병합은 여러 가지 난제를 해결할 유일하고 현명한 정책”
이라는 논평 기사를 실었다.

두 달 후인 10월 12일 조선총독부는 76명의 조선인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이완용은 가장 높은 백작을, 조중응은 한 단계 낮은 자작을 수여받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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