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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복을 추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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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280회 작성일 11-08-22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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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史 모두 다시 써야 하나? / 김복을 추적하라 (6부)
김복은 대한 항일독립운동의 핵심인물(수령)인 김규흥의 가명

 

3) 김복을 추적하라

앞서 인용한 일제 기밀문서에 의하면 “김복은 항상 그가 즐겨하는 문필로서 지나(중국)신문을 통해 배일기풍을 고취하고 있으며 또 이들 조선인은 지나의 남방파와 통하여, 이들을 이용하길 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김복을 찾을 수 있는 유력한 근거인 셈이다.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변명, 필명 사용은 보편화된 그 당시 독립지사들의 관습이었다. 김규흥 역시 1908년 망명한 이후 김복, 김범재 이외 김성도, 김진용 등 여러 가지 변명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조심스러움은 일제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우리 후손들이 독립지사들의 유작을 찾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김규흥이 중국신문에 기고한 글은 향후 우리가 찾아내야할 과제이다. 다만 1920년 3월에 작성된 일제의 기밀문서에 의하면 1)
《朝鮮 士人 韓重生의 名으로써 「敬告中華四萬萬人」이라고 題한 別紙 寫本과 如한 印刷物을 發行하여 支那 朝鮮 兩國民에 對하여 配布한 形跡이 있다 發行地는 上海로 假政府 又는 同 關係者의 所爲로 認定된다.》 라는 내용이 있다.

작성 시기, 글의 내용 등을 종합하면 이 글의 작성자 한중생(韓重生)이 김규흥으로 추증된다.

이 글은 김규흥의 평생 지론인 “한중호혜론”과도 맥을 같이 한다. 참조로 전문을 소개하겠다.


敬告 中華 四萬萬人 (中華 四億人에게 보내는 敬告文)

上古 菇毛의 時는 人智가 아직 未發하고 그리고 世界는 卽 廣하여 一溝 內에 많은 邦國이 있고 一國 內에 亦 便色이 있어서 此國과 彼族에 無有相和하고 言語가 多少 다름을 가르켜 夷狄이라 稱하고 그리하여 少毫도 憐恤의 情이 無하였다

近世 以來 人智가 漸進하고 世界는 反히 狹少하여저서 遠者는 近하고 近者는 親하여 仁仁親親의 道는 卽貴하고 弱者는 此를 扶하고 强者는 此와 和하여 人으로 하여금 各各 其界를 守케 하고 各各 其業에 安케 하여 競爭의 弊가 없게 하였다 如是 實로 上天의 悅納이 될 것이고 또 人世의 幸福이 될 것이다

嗟吁 貪虐의 蠻族魔類는 世世種出하여 侵掠을 主로 하고 戰鬪를 業을 삼어 人을 侮함을 能으로 하고 人을 殺함을 是誇하여 世에 不平의 浪을 起케 하고 人에게 怨恨의 心을 懷케 한다

柔弱한 邦國民族은 漸敗漸衰하여 中華와 韓國에 있어서 가장 其害를 受한다 此 吾 兩國의 民族으로 하여금 俯胸痛哭케 하는 바이다 其情을 어찌 盡述켔는가 이제 우리가 中華의 手를 把하고 願컨대 뭇노니 一言으로써 此를 證할 것이다

韓國의 敗亡은 中國에 關하지 않겠는가 中國의 衰弱은 韓國에 關하지 않겠는가 唇亡齒寒은 必然의 理이다 楚를 爲하여 趙는 毛公의 血約을 하였다 孔聖은 일직이 말하였다 遠慮가 없으면 必히 近憂가 있다 이야말로 秘要의 誓言이라 하겠다 萬若 中國의 人民으로 하여금 일직이 韓國의 悲境을 慮케 하였다면 今日에 어찌 山東의 憂가 있겠는가 어찌 福州의 侮辱을 受할 것이냐 痛哭을 할 것은 此이다 늦다 고 하겠으나 亦是 두어두지 말나 同類相助는 人情의 常例 今日부터 始作하여 中韓 手를 共하고 서로 提携하여 此의 長으로써 彼의 短을 補하면 써 將來의 禍患을 禦할 것이다 써 東洋의 文明을 驅할 것이다

韓國이 小하다 하나 오히려 幾百萬의 熱血을 有하였다 中國이 弱하다 하나 오히려 幾千萬의 忠誠이 있다 韓國의 熱血로써 中國의 忠誠에 灌하면 上天은 必히 求하는 바에 應하고 必히 願하는 바를 得하여 必히 成就할 것이다 故로 玆에 數語로써 昧를 冒하여써 告한다 願컨대 中國의 愛國 僉位여 意를 留하여 再思하라

大韓民國 二年 一月 日
朝鮮 士人 韓重生拜


中韓共手의 理由

一. 地理의 形勢로써 하면 萬若 中國의 地形을 論하면 西南은 많이 大山의 橫杜함이 있고 北方 亦是 蒙古의 高原이 있다 此 三面은 卽 若干의 防備가 있으면 外患의 掛念함에 足한 바 없다 東南의 如함에 至하여는 海洋이 大虛하여 外患을 受하기 容易한 境이다 그리하여 韓國은 黃河의 一帶에 亘하여 實로 中國의 天然的 干城을 이룬다 그러면 中國과 韓國은 어찌 關念이 없겠는가 干城을 棄하고 무엇으로써 外患을 防하고 大陸을 捨하고 무엇으로써 世界에 步코저 하는가 此 中韓이 共手를 絶할 수 없는 所以의 一이다

二. 歷史로써 證한다면 稽古 五千年來 中國과 韓國은 頻頻히 서로 關係를 하여 어느때의 絶交는 則 兩國 共히 其害를 受하였음은 歷史가 이미 明載하는 바 多言을 須치 아니한다 今日에 至하여도 其證이 더욱 確然하다 十數年間 國交가 絶하여 兩國의 艱難도 亦是 이미 極하였다 此 中韓共手를 絶할 수 없는 바 二이다

三. 習俗의 形勢로써 한다면 中國과 韓國은 國이 分하였다고 하나 言語 文字 風俗은 크게 相同함이 있어서 交通도 無難하고 旅行人이 華와 韓에서 別로 差異가 없게 完全히 一國과 如하다 交通의 便宜는 於世에 最爲한다 此 則 中韓共手를 絶할 수 없는 所以의 三이다

四. 民性의 形勢로써 한다면 華人의 性은 韓人의 性과 큰 差別이 없는 故로 古來 或은 國際分爭이 있었다 하여도 民族性의 爭鬪에 있어서는 絶無하다 然하면 此 民本主義의 時代에 當하여는 此 어찌 大福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兩國의 親誼는 어찌 分離하겠는가 此 則 中韓共手를 絶할 수 없는 四이다

五. 情義의 形勢로써 한다면 古往今來에 華韓의 兩族의 交涉情義는 最久 最深하여 患難相救하여 正히 大宗小家의 義와 如하였다 或은 臣服하였다 하나 實은 兄弟의 情義가 있었다 故로 처음부터 高卑의 差別이 없어서 今日의 英米의 交誼가 篤하다 하나 어찌 昔日의 華韓交誼의 萬一에 及하랴 願컨대 中華人 韓人의 古情을 잊지 말라 此 卽 中韓共手하는 所以로 絶할 수 없는 바 五이다

六. 時局의 形勢로써 한다면 此 畏畏岌岌한 時를 當하여 疎遠의 人이라 하더라도 써 多方親近해야 할 것이다 況素親한 國誼에 있어서랴 其 暫弱으로써 依然히 棄絶하여 그리하여 患難을 願하는 것이 아니냐 貧賤의 交는 忘할 수 없다 韓人의 國體는 弱하다 하나 韓人의 熱誠은 反히 强하여 强國 人士의 上에 超出하는 것이다 華人은 마땅히 念하라 世界 最强의 國인 華人에 있어서는 卽 小弱의 韓人의 熱血에는 無益하다고 譬하고 鄕人과 如히 善하다고 하나 家人의 愚者는 不然하다 此 中韓의 共手하여 絶할 수 없는 所以의 六이다



일제가 김복(김규흥)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 독립운동가에게 조차 자신의 정체를 숨긴 김복의 용의주도함 때문으로 보인다. 평화회의에 있어서의 한인독립운동자의 행동에 관해 1922. 10. 19일자로 조선총독부경무국장이 외부차관에 통보한 요지 ‘평화회의에 있어서의 한인독립운동자의 행동’ 2) 중 일제가 입수한 ‘구주의 우리 사업’ 3)을 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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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 부터 김탕, 여운홍, 김규식     © 김상구

《金氏는 장구히 감당키 불능하므로 스위스 튜리대학 재학 중인 이근용씨를 급전으로 청하니 졸업시험 중에 있던 李氏는 이 전보를 받고 즉시 파리에 래착하여 대표사무소를 담임하다. 金復氏는 상해로부터 5월 초순에, 미국지원병으로 구주에 출전하였던 황기환씨는 6월 3일에 德國으로부터 귀래하여 대표사무소를 찬조함에 金氏 黃氏를 서기장으로 임용하다. 또 조용은씨는 6월, 여운홍씨는 7월 초에 각 상해로부터 도착하여 대표사무소를 찬조하다.》

여기서의 김씨는 김규식이다. 다른 내용은 모두 사실과 부합된다. 그러나 김복이 5월 초순에 파리에 도착했다는 것은 철저한 위장전술이었고 실제 파리로 간 것은 김탕이었다.

사진에 모습을 보이고 있는 김탕이 파리강화에 참석했다면, 자연스레 김복의 파리강화회의 참여설은 허위 정보가 되어 버린다. 실제 그 당시 김복의 나이는 47세였으니, 사진속의 젊은이와는 너무 동 떨어진다. 이 외 여러 사진이 파리회담 참석 증거 자료로 남아 있지만, 어떠한 사진에도 40대 중후반의 동양인이 김규식과 함께 했다는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 파리강화회의 참석자 명단 >

 


이름

생년

(나이)

주거주

파리도착

건국

훈장

동제사

신한청년당

비 고

김규식

1881

(38)

천진

상하이

3월 13일

대한민국장

(1989)



신한청년당 파견

이관용

1894

(25)

스위스

4월 경

애국장

(2008)



신한청년당 파견

김 탕

(김인태)

1896

(23)

상해

5월 초




?

신한청년당 파견

황기환

1923년

사망

독일

6월 3일

애국장

(1995)



임시정부 파견

조소앙

1887

(32)

북경

상하이

6월

대한민국장

(1988)



임시정부 파견

여운홍

1891

(28)

미국

상하이

7월 초





임시정부 파견

윤 해

1888

(31)

만주

연해주

9월

독립장

(1990)



노령정부국민의회 파견

고창일

1892

(27)

연해주

길림

9월

독립장

(1889)



노령정부국민의회 파견



김탕의 존재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는 이상, 당시의 상황을 참조하여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필자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파리회담 참여라는 미증유의 사건으로 인해 일제의 첩보망이 신한청년당을 넘어 동제사까지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장덕수의 체포가 결정적인 계기로 짐작되는데, 실제 장덕수의 취조문에는 신한청년당 당원뿐 아니라 신규식이 등장하고 있으며, 신규식의 나이(39세)가 김규흥의 나이(47세)로 표기되기도 한다. 5)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결국, 일본 경찰은 김규흥이란 실명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김복이란 가명까지는 접근했다는 뜻이다. 동제사측에서도 이러한 낌새를 채고, 일제의 정보망을 혼란시키기 위해 두 명의 한국인 여운홍과 김탕을 추가로 파리에 보낼 때, 김탕은 김복, 여운홍은 여운형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리지 않았나하는 짐작이다.

실제로 일제는 1926년 무렵까지도 파리강화회의 파유의 정확한 실체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1926년 3월에 작성된 「北美와 하와이 지방 不逞조선인의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6)


《1917년(大正 6) 9월 미국「뉴욕」에서 약소국회의가 열리자 朴容萬(박용만)을 조선대표로 회의에 참가시켰다. 그 후 歐洲戰亂이 끝나고 프랑스에서 講和會議가 열리자, 그들의 뜻을 이루는 것은 금년 가을이라 하여 지도층들이 모여 협의한 결과 약소국 동맹회를 배경으로 미국의 정치가와 신문기자를 찾아가서 조선독립운동에 대해 원조를 요청하고 미국 朝野의 여론을 환기시킴과 동시에 대표자로 金奎植(김규식)을 강화회의에 보냈다. 金奎植(김규식)은 1919년(大正 8) 미국을 출발하여 도중에 상해를 거쳐 3월 중순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거류하고있는 李灌鎔(이관용), 영국에 거류하고 있는 黃玘煥(황기환), 러시아에 거류하고 있는 尹海(윤해)·高昌一(고창일), 上海에 거류하고 있는 金復(김복)·呂運亨(여운형) 등이 속속 모여들어 우선 프랑스 조야의 동정을 구하고, 다시 각국대표 및 정치단체에 대해 조선의 사정을 말하여 독립승인을 애원하였으나 끝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金奎植(김규식)은 뒷일을 黃玘煥(황기환) 및 李灌鎔(이관용) 등에게 맡기로 같은 해 8월 미국으로 헛되이 돌아갔다.》

대부분의 내용은 맞다. 그러나 그 무렵까지도 김복(김규흥)이 파리로 건너가 모든 상황을 진두지휘한 것으로 착각했음이 틀림없다. 아무튼 그 후로도 일제 기밀문서에 김규흥은 무수히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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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카드는 조선총독부의 요시찰인물대장에 비치된 것을 해공 신익희가 입수하여 범재 김규흥의 조카 자중 김진영에게 전한 것임.     © 김상구

그러나 김규흥은 1936년 8월 16일, 천진에서 작고할 때 까지 망명 전 일제 통감부에 의해 투옥된 것을 제외하고 일제에 단 한 차례도 잡히지 않았다. 이것은 중국혁명당 요원으로서 신해혁명 때부터 길들여진 용의주도함 때문으로 짐작된다. 그는 신변보호를 위해 극히 일부 인사를 제외하고 동료인 한국독립지사들에게 마저 정체를 숨겼다. 오직 그늘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뜻이다. 한편, 독립신문 등을 참조하면 당시 주변국들은 김규흥을 임시정부의 수령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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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국외 용의조선인 명부     © 김상구

안창호가 임시정부 총리 대리를 맞고 있을 때, 총리직을 김규흥에게 제안하기도 했으나 적임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했다는 문서8)는 좋은 예를 보여 주고 있다. 김규흥의 이러한 행위는 그가 한국독립운동사에 지금까지 누락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신규식에 대한 학계의 인식부족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자료에 의하면 3․1운동, 임시정부수립 그리고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등 동제사가 추진한 일련의 사업들에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학계는 신규식의 업적을 외면하고 있는 듯싶다. 학계는 두 가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첫째는 참석하지도 않은 제1차 신해혁명에 신규식이 유일하게 활약을 했다고 한 것 그 다음은 3․1운동, 임시정부수립 그리고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의 총 지휘자로서의 신규식의 업적을 누락시킨 점 등이다. 신규식을 중심으로 한 동제사의 활약에 대해 잠깐 소개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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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한국독립운동사자료3(임정편Ⅲ) , 二. 大韓民國 臨時政府의 活動, 2. 臨時政府의 政治, 국사편찬위원회

2)평화회의에 있어서의 한인독립운동자의 행동에 관해 1922.10.19일자로 조선총독부경무국장이 외부차관에 통보한 요지,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p188~195, 국회도서관

3)대한민국(임시정부)2년 12월 간행, 임시정부주파리위원부통신국 간행, 실제 원문에는 金復이 아니고 金湯으로 나온다.

4)본명 김인태, 1896년 6월 부산생, 파리강화회의 후 김규식, 여원홍과 함께 미극으로 간 후 컬럼비아 대학 등에서 수학 그 후 중국으로 되돌아와 독립운동 중 1935년 1월 일제에 의해 체포된 이후 그 행적을 알 수 없음.

5)상해재유 한인독립운동자 체포에 관한 건,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p20, 국회도서관; 이 문서에 의하면 신정(47세), 김규식(37,8세), 신석우(27세), 여운형(35세), 서병호(35세), 선우혁(37세), 조동호(30세가량), 조용운(조소앙, 34,5세)로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 실제 나이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으나 유독 신규식의 나이만 큰 차이가 나게 기록되어 있다.

6)北美와 하와이지방 不逞조선인의 상황[1926. 3](『島山安昌浩資料集』)

7)“上海에 在한 朝鮮假政府의 首領 金凡濟는 일즉 法國으로 歸來한 中國勞働者首領 夏奇峯과 通謀하고 勞働會의 名義를 利用하야 一般無識한 勞働者를 入會케 하고 近日 또 漳州 陳炯明으로부터 經濟的援助를 受하야 極端의 無政府主義를 宣傳한다, 其內容은 法律을 廢棄할 事, 政府를 倒壞할 事. 人民은 相互幇助에 依하야 生活하고 一切의 所有物을 社會의 共有로 할 事, 人民 一日의 勞働時間은 二時間으로 하고 其餘時間은 사람된 바의 思想과 精神을 發展할 事, 男女는 任意로 同居함을 得할 事, 老若及廢疾者는 共公機關에셔 保護할 事, 相互幇助主義의 外 何等의 宗敎도 無한 等 事로 一般勞働者가 此에 加入하는 者 頗多하다 云云.” 盛히 流布되는 韓中俄關係의 種種說(朝鮮假政府의 首領 金凡濟), 독립신문 1920-05-22

8)“金復은 上海 鮮人을 兩分할 計劃을 實行하였다 이로 因하여 彼等 사이에는 安昌浩에 反對하는 者를 生하여 現在 安은 內務總長이면서 國務總理 代理를 兼하고 있었는데 其 書記官長을 派遣하여 總理 代理를 金復에게 讓與하고저 交涉하였던 바 金復은 스스로 其任이 아니라 하여 辭退하였다.” 獨立運動家의 狀況 1919년,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임정편Ⅲ)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548&section=sc12&sec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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