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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 독립운동사 모두 새로 써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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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083회 작성일 11-06-22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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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독립운동사 모두 새로 써야 하나? (1부)

 

신해혁명과 한국의 독립운동, 공화주의자 김규흥의 역할은?

 

김상구  2011/06/16  역사복원신문                     

 

본 역사복원신문에서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사 새로 써야 한다."를 기획시리즈로 연재하기로 했다. 일부 독립운동사가 당시 있었던 사실과는 다르게 이승만정권에게 중용된 친일사학자들의 손에 의해 잘못 평가된 부분이 있다는 지적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큰 공을 세운 분의 공적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아서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복원을 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이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기록될 때 그 가치가 있는 것이지 임의로 올리고 내리고 고치고 왜곡하는 행위는 역사발전을 위해서 금해야 하며, 또 그러한 기록이 발견되면 과감히 고쳐야 하는 것이 지금의 역사를 살아가는 후손들의 책무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진실이 무엇인지 타임머신을 타고 그 때로 돌아가보기로 한다.

 

 


1. 머리말

<?xml:namespace prefix = v /><?xml:namespace prefix = w /><?xml:namespace prefix = o />중국 정부는 다가오는(20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辛亥革命) 100주년 기념행사를 대만과 공동으로 거행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200억 위안(3조4천 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혁명군 본부 건물을 복원하고 홍루광장, 의거문, 열사릉, 손문 동상 등을 대보수하고 있는 우한시(武漢市)의 모습도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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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무한시 정경, 중국 제2의 고층건물이 이채롭다.  

 

중국근현대사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고 할 수 있는 신해혁명, 그렇다면 그 사건은 우리 민족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신해혁명의 전개 과정과 결말은 우리나라의 역사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을까? 사실 신해혁명에 대한 조명은 중국 뿐 아니라 상당수의 한국 학자들도 논문 등을 통하여 고찰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해혁명에 참여한 한국인의 역할과 신해혁명이 한국독립운동사와 한국의 공화주의 사상에 끼친 영향 등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본 글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정보와 새롭게 발굴된 자료를 중심으로, 신해혁명 특히 제1차 혁명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무창기의(武昌起義) 이전에도 중국의 혁명지사들과 동지적 관계를 맺었으며 혁명 후에는 혁명 정부의 고위직을 역임하기도 했던 한국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한편, 신해혁명의 주역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직간접으로 기여했음을 밝히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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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 부터 손문, 진형명, 추노 이들은 신해혁명의 주역이자 범재 김규흥의 평생 지기들이다.


우리가 해방되었을 때 왕정의 복고나 입헌군주제를 고려하지 않고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공화제 도입을 지지했다. 정치체제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제헌헌법 제1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명문화되기에 이른다. 공화주의에 대한 천명은 1919년 4월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의 헌장 제1조도 마찬가지였다. 

500년 왕조가 무너진 자리에 새로운 정부를 세울 때 전제왕정의 부활은 물론이고 입헌군주제조차도 의제로 상정되지 못했다. 민주공화제에 대한 우리의 의식과 준비가 그만큼 철저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1910년 8월29일, 대한제국의 황제 순종은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그날을 다르게 해석한 우리의 조상들이 있었다. “융희황제가 삼보를 포기한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 사이 순간도 정식이 없다. 우리 오인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이고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즉 민권발생의 때이다.” 1917년 7월 상해에서 발표된 「대동단결선언」의 주요 내용이다. 대동단결선언은 상해임시정부 수립을 촉발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 선언문이다. <김소진 1999『한국독립선언서연구』p69, 국학자료원>

선언문은 융희황제가 삼보 즉 영토와 국민과 정치를 포기하고 일본에게 양도했지만 우리 민족자체가 그러한 행위를 합의, 허용한 일은 없으며 그날을 기점으로 민중의 권리가 발생하였다고 선언하고 있다.

「대동단결선언」은 1919년 3월1일을 전후하여 발표된 70여종의 독립선언서의 주의, 주장에 공화주의를 천명하게끔 큰 영향을 끼친 한국인 최초의 독립선언서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주요 서명자들이 1915년, 고종을 당수로 한 ‘신한혁명당’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대동단결선언」의 서명자들을 공화주의 초기 전도자로 단정하기에 주저하게 만든다.
 
그러면 대동단결 선언자 및 「대한독립선언서」의 선언자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면서 그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공화주의자가 있지 않았나하는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바로 이점, 근대사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범재 김규흥(凡齋 金奎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범재 김규홍은 누구인가?

범재 김규흥은 1913년 홍콩에서 발간된 최초의 한중합작 언론인「향강잡지(香江雜誌)」의 축사에서 자유 민주사상을 설파했으며, 1911년 제1차 신해혁명 봉기 시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참여하여 혁명정부의 고위직을 역임하기도 한 인물이다. 1908년 중국 망명 이전에는 고종의 비자금을 이용하여 상해에 무관학교의 설립을 시도했는데, 이 거사의 주도 인물 중 한 명인 중국인 조진사라는 사람과 공화제에 대한 토론 중 신분제 철폐와 빈부격차 해소를 가장 우선적으로 성취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서대숙 번역, 1987 『 The Writings of Henry Cu Kim』p92~93 참조, 하와이대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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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해혁명 당시 범재 김규흥의 관복, 혁명정부의 소장 겸 도독부 참의를 지냈다.


망명이전부터 철저한 공화주의자였던 범재 김규흥은 상해무관학교 설립과 신해혁명에 참여하면서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 회원들과 동지의 연을 맺었다. 

 범재는 <향강잡지>, <동제사>, <신한청년당> 등의 활동을 통해 중국의 혁명지사들을 상해임시정부 설립과 대동단결선언 발표의 주도인물이었던 박은식, 신규식, 신채호, 조소앙, 여운형 등에게 소개했고, 이러한 계기를 통해 그들은 민주공화주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받아들였음에 틀림없다.
 
물론 이점은 향후 우리 후손들이 보다 확실하게 규명해야할 사안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민주공화정은 외세의 도움을 받기 전에 이미 우리 선조들의 공화주의에 대한 소신이 밑거름으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기사입력: 2011/06/16 [18:25]  최종편집: ⓒ historynews.kr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366&section=sc12&sec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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