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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益烈장군 실록유고- 4‧3의 진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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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282회 작성일 11-04-08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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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경비대의 토벌개입

 

4월 3일 이른 아침 한림에서 구사일생으로 부대로 귀환한 나는 전부대에 필요한 조치를 다 취한 후, 보급관 전순기(田順基‧6‧25때 대대장으로 전사) 대위를 긴급전령으로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장군에게 보냈다. 제주도 폭동사건에 관한 일체를 보고하고 9연대가 취하여야 할 행동에 관한 명령을 받기 위해서다. 보고내용은 폭동발생의 전후 정보와 제9연대가 현재 취하고 있는 상황, 폭동발생에 관한 장병들의 심리적인 동태 등이었다. 그리고 사태가 장차 어떻게 전개될 지 예측을 불허하므로 긴급히 탄약과 기타 보급물품을 보충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 한편 나는 전 대위에게 경비대 총사령부의 각 참모부를 찾아다니며 제주도 폭동발생에 대한 반응과 서울의 공기를 면밀히 수집하여 오도록 명령하였다. 당시 총사령부 참모장은 정일권(丁一權) 대령, 작전참모는 강문봉(姜文奉) 대령이었다.

 

전순기 대위는 출발 3일후 총사령부의 지시사항을 가지고 돌아왔다. 지시내용은 대략 제주도 폭동사건은 치안상황이며 경찰의 책임상황이므로 상부 명령없이는 절대로 행동하지 말 것이며, 경비대는 장차 국군의 모체가 될 것인만큼 국민신망과 존경을 받도록 하여야 하며, 9연대의 행동은 장차 경비대의 운명을 좌우할 문제이니 연대장이 경솔한 판단이나 개인적인 영웅심이나 공명심으로 경거망동을 하지 않도록 엄중히 금하며, 명령없이 행동하면 엄벌에 처할 것이므로 부대단결과 훈련이나 잘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탄약은 지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경비대 총사령부의 명령은 미군정이나 군사고문에게 극비로 하라는 지시였다. 총사령부 장교들의 일반적인 공기는 국토방위를 주임무로 하는 군대는 외적하고 싸우는 것이므로 국내문제는 경찰의 소관이며 폭도진압에 군대투입은 반대라는 입장이라고 했다.

 

실상 당시 제9연대는 전투에 투입될 형편이 못됐었다. 연대라 하지만 실제로 전투에 사용할 수 있는 병력은 1개 대대 남짓에 불과했고, 전투훈련은 초보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형편이었다. 병사들의 대부분은 실탄사격 경험이 없었다. 한마디로 전투는 불가능 상태였다. 나는 이런 명령을 받고 마음 한구석으론 다행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경찰이 저토록 무력하다면 장차는 군대투입이 필연적이라고 판단되어 전투훈련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리고 장차를 위하여 전투정보 수집과 상황의 진행을 살피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나는 될 수 있는대로 시간을 벌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채 1개월도 못되어 전술한 바와 같이 경찰의 토벌은 실패로 돌아갔고, 나는 결국 폭도토벌의 총책을 맡게된다. 경비대 총사령관의 지시는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전속 군사작전고문이 파견되고 탄환과 장교들의 보충이 이루어졌다. 9연대 병력만으로는 부족했으므로 부산 5연대 소속의 진해(鎭海)주둔 1개 대대가 9연대에 배속되어 그 선발대가 제주읍 비행장에서 설영(設營)준비를 하는 등 토벌을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었다. 경찰토벌대가 아무런 준비없이 공명심만 탐내 작전을 시작했다가 실패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신중하고 치밀한 준비를 갖춰나갔다.

 

부임한 미 군사고문은 전에 친면이 있는 장교였다. 그는 내가 광주 4연대 작전참모로 재임시 연대 고문이었던 드루스 대위였다. 그는 계급은 대위였지만 정규군 출신에 주특기(MOS)가 정보장교였으므로 특히 이 작전에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당시 영어가 능숙한 편은 아니지마는 의사소통에는 지장이 없었다.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도 구면이고, 드루스와 나, 이렇게 3인이 과거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연고로 서로 거리낌없이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관계였다. 통역관이 따로 없이 필요하면 3인끼리만 합의할 수 있으니 작전기밀이 누설될 염려도 없어 더욱 좋았다. 부대가 전투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우리 3인은 매일같이 작전계획을 토의하였다. 맨스필드 대령은 폭동발생전 내가 제공한 정보가 정확하였다는 것을 이제야 수긍하면서 그 때 처리를 잘못해 이런 폭동이 발생하였다고 후회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우리 3인이 당면하고 있는 난처한 문제들을 설명하고 자기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하던 국제정치 문제였다. 당시 유엔은 유엔의 감시하에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실시하여 한국을 독립시키자는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북한은 이 안을 거절하였고, 남한은 1948년 5월에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어 있었다. 이를 반대하여 소련은 4월 유엔에서 “2차대전 후 미‧소 양군의 점령지역 내에서 소련 점령지역의 주민들은 평화롭기만한 반면 미군점령하에 있는 지역에서는 국민에 대한 미군의 약탈이 심하다. 미군정의 폭정에 대항해 주민들이 각지에서 폭동과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 좋은 예가 제주도의 폭동사건이다”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 미국정부를 국제적 선전무대에서 비난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미국정부는 한국에 있는 미군정장관 딘장군을 문책하고 조속한 시일내에 폭도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제주도 폭동사건은 이와같이 한국의 독립문제와 직결되어 있으므로 내가 책임지고 조속한 시일내에 진압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련의 공산주의 선전을 봉쇄하기 위하여 제주도 폭동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지어야 된다고 했다.

 

나는 이에 대해 그러한 것은 정치적인 차원에서 결정할 문제이고, 그것이 공산폭동이냐 일반민중의 폭동이냐 하는 것은 진압작전에는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문제이며, 더구나 그런 문제들은 나의 책임소관 이외라고 답변했다. 실상 폭도들 중에는 공산주의자도 있을 것이고 그밖에도 사회주의자‧배타주의자 등 각양각색이 혼합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각자 나름대로의 투쟁목적을 내세워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주의‧이념의 구호들은 거의가 위장적이거나 차용적인 것일 뿐, 그 내심을 들여다 보면 경찰에 대한 공포와 원한이 폭동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단, ‘공산반란’으로 규정짓는 것은 폭도들을 진짜 공산주의자들과 분리시키고 또 군대가 개입하여 토벌하는 대의명분도 되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우리 3인이 심사숙고한 끝에 수립된 작전계획은 1단계로 폭도 분리작전을 실시한 후 2단계는 실력으로 토벌을 감행한다는 것이었다. 1단계 폭도분리 작전의 주요골자는 폭도중 극렬분자는 불과 2백~3백명 이내이고 대부분은 부화뇌동한 자이므로 이 극렬분자와 일반을 분리시켜 극렬분자만 토벌하는 한편 폭도와 일반 제주도민과를 정신적으로 분리시켜 폭도들을 도민으로부터 고립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런 작전목적을 달성키 위해 1단계로 시도한 것이 ‘화평‧귀순공작’이었다. 즉 강력한 군대병력을 배경으로 냉각기를 두면서 화전(和戰) 양면의 귀순공작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 이외는 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죄과의 대소를 불문에 부칠 것이며, 공산주의자라도 귀순하면 용서할 것이라는 관대한 포고령을 내렸다. 이것은 공산주의자와 폭도 도민을 분리시키는 작전의 일환이었다. 나는 부대별로 지역을 분할하고 전술적인 각 지점에는 대부대를 집결시켰다. 그리고 지역내에 소수의 정찰부대를 파견하여 적정(敵情)을 수집하되 적이 공격하기 전에는 교전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당분간 정찰에만 주력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10. 귀순‧화평공작

제주도 미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은 나에게 자신이 시도했던 귀순공작이 실패하게된 경과를 설명하여 주면서 새로운 복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초기에 경찰이 저지른 실패로 인해 오히려 폭도가 증가되는 결과를 초래하자 귀순공작의 필요를 느끼고 시도해 보았지만 관민(官民)의 비협조로 실행되지 못했다는 그간의 경과를 당시 사용했던 군정 포고문의 전단 등을 보여주며 설명하였다.

 

처음 귀순공작의 책임자로 임명된 사람은 당시 제주도지사였던 유해진(柳海辰)씨였다. 그러나 유 지사는 군정장관이 폭도들과 약속한 교섭회담일이 되자 겁을 집어먹고 급병(急病)을 구실로 불참하고 말았다. 그 다음의 공작책임자는 당시 경찰토벌사령관 김정호씨가 임명됐다. 김씨 역시 겁이 났던지 폭도와 회담하기로 된 날짜가 되자 급한 출장을 이유로 군정장관의 허가도 받지않고 이른 아침에 민관(民官) 선박(제주-목포간의 정기선)을 징발하여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 세번째로 임명된 책임자는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崔天)씨였는데 그 역시 회담당일 급병을 핑계로 불참했다. 그리하여 당시 제주도 민족청년단장이 네번째 책임자로 지명되었다. 이 자만이 용감해서 수명의 청년단원들과 함께 민족청년단 깃발을 앞세우고 약속된 회담장소로 올라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폭도의 대표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맨스필드 대령은 폭도가 약속을 위반하였는지 또는 이쪽이 겁이 나서 지정장소에 가지도 않고 둘러대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우나 십중팔구 중간에서 돌아와 버린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더러 폭도와 직접 만나 담판을 하라는 명령이었다. 내가 다섯째의 지명자가 된 것이다. 그는 “당신도 회담일에 일본으로 도망을 가는 것 아니냐”고 농담조로 한국인에 대한 불신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맨스필드 대령은 귀순공작의 요점으로 민간인을 매개체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민간인은 제주도의 사정에 밝을 뿐만 아니라 도민의 감정을 판단하는데 확실한 근거가 된다고 했다. 단, 도민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야지 원성을 사는 자를 기용하면 도민이 협조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는 제주도 유지들의 명단을 내놓았다. 각자의 성분까지 분석한 잘 조사된 명단이었다. 그 중에서도 3명을 추천하면서 이들의 협조를 얻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제주신보 사장 김씨와 朴景勳씨 형제 등 3인이었다. 나는 참모들에게 지시해 폭도 공작원들과 접촉을 시도하는 동시에 폭도나 그의 협조자나 친척들과 연락이 닿을 수 있고 막후교섭을 해 줄 민간인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지들은 한결같이 협조를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명백하였다. 귀순공작이 실패하면 폭도들에게, 성공하면 경찰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이 그랬다. 만일 귀순공작과 화평작전이 실패하여 무력토벌이 시작될 경우 그 중재인은 폭도측으로부터 도민의 배반자로 낙인 찍히는 한편 경찰로부터도 폭도들의 협조자로 낙인이 찍힐 것이 뻔했다. 설사 화평공작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경찰은 내심 화평공작을 극도로 싫어하고 있었으므로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경찰은 화평이 이루어진 후 폭동의 발생원인이 밝혀지고 자신들의 죄상이 폭로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십수명의 협력자를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여하한 경우에도 미군정과 군대책임자인 내가 자기들의 생명과 재산과 가족들의 안전을 확약해 줄 것과 이를 위해서는 자기들의 명단과 협조내용을 극비에 부쳐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극비리에 막후에서만 나에게 자문역할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맨스필드와 나는 물론 이들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리하여 나의 비밀참모 역할을 하게된 인물들은 제주신보 사장을 중심으로한 박경훈씨 형제, 좌달육‧김대용(金大用)씨 그리고 읍내 천주교 신부와 몇몇 신자였다. 도내 민정의 말단에 관한 정보는 천주교 신자들의 공이 컸다.

 

우리는 비밀회합 장소로 박경훈씨 댁을 결정하고 귀순유도를 위한 선무문(宣撫文)과 전단문을 작성하고 폭도들과 접촉방법을 연구하는 등 화평공작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일체의 인쇄는 비밀리에 제주신보사에서 책임졌다. 내가 제주도민과 폭도들에 살포한 전단문의 주요내용은 ①국토를 방위하고 외적과 전투하는 것이 주임무인 군은 동족상쟁을 원치 않는다. 제주도민을 적으로 삼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②주의‧사상과 일체의 불만은 정치적으로 평화적인 수단에 의해 해결하여야지 무력수단에 호소하는 것은 무고한 도민의 유혈만 조장시킬 뿐 해결방법이 되지 않는다 ③즉시 무기를 버리고 귀순하면 내가 책임지고 안전을 보장하겠으며 일체의 전과를 불문에 부치고 귀가시키겠다. 이에 대한 요구가 있으면 그 요구조건을 다룰 회담을 하자. 연락을 하라 ④이상과 같은 관대한 처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앞세우고 무력을 사용한다면 민족분열을 조장하고 조국독립을 방해하는 민족의 공적(共敵)으로 규정하고 군은 철저한 무력징벌을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각종 전단을 L-5 비행기로 제주 각지 부락에 살포했다. 때로는 지형정찰도 겸하여 내가 직접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당시 우리는 각종 정보활동에도 불구하고 누가 폭도 지휘자이며 폭도의 근거지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구구한 낭설과 허위선전만 떠돌았다. 폭도와의 연락은 전단살포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전단이 살포된 다음 날 회답 삐라가 각지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화평 방해자들이 나를 인신공격하는 전단이었다. 그 중에서 모슬포 연대본부 근처에서 발견된 전단은 폭도들의 연락일 것으로 판단되었다. 나는 연대 정보주임 이윤락(李允洛) 중위로 하여금 전단 내용을 분석케 하고 즉시 공작에 들어갔다. 폭도들의 전단은 내가 전단으로 제의한 내용의 일부는 수락할 만 하지만 일부 내용은 의심스러우며 자기들의 근거지에 대한 정보를 얻고 지휘자를 체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냐, 또는 군대가 시간적 여유를 얻기 위한 기만작전이 아니냐는 등 다각적으로 나의 진의를 타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11. 선무공작의 진행

나는 이 무렵 또다른 고통스러운 시련을 당하고 있었다.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은 미군 고위층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제주읍내에 있는 미군 CIC에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이 와 있다고 지시했다. 지시한 시간에 CIC에 가 보았더니 군정장관 딘 장군의 정치고문이라는 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절한 그는 국제정세와 한국장래 문제를 소상히 설명하고 나서 제주도 폭동이 빠른 시일내에 진압되지 않으면 미국의 입장이 난처해지고 한국의 독립에도 유해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일을 신속하게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토작전이라고 강조하고 이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군인의 태도는 단호하고 명료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한마디로 ‘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자리를 박차 돌아 나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부의 명령이니 매일같이 자기와 의견을 나누어야 한다며 나를 붙잡아 앉히고는 다시 설득을 시작했다. 그는 나에게 당신은 정의감이 강한 청년이고 민족주의자며 애국자이고 훌륭한 군인이라고 칭찬을 하면서, 그러나 나이가 어려서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과 손실을 분별할 줄 모르고 있다고 했다. 자기에게도 나와 동년배의 아들이 있으며 성격이 나와 비슷하다고도 했다. 자기와 같이 찍은 25~26세 가량 되어 보이는 미 해군 수병의 사진을 꺼내 보이면서 이것이 자기 아들인데 이 애도 성격이 너무 강직해서 탈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비의 충고를 듣지않아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지금은 어느 곳에서 고생을 사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신도 자기의 말만 들으면 출세도 하고 부(富)도 누릴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올텐데 고집만 부린다고 말했다. 인간은 뭐니뭐니해도 출세하고 부를 누리고 싶은 욕망이 있는 법이며 자기가 목적하는 행복과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출세와 돈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여러차례 반복하여 설득하려고 했다. 내가 초토작전을 감행하여 임무를 완료한 후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한국에서 살기 어렵게 된다면 나의 가족과 친척을 데리고 미국에 이민 가 살도록 해준다고도 했다. 미국은 황금만 있으면 모든 행복을 다 누릴 수 있는 곳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미국생활을 소개하는 각종 잡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5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다가 또 10만 달러를 주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얼마가 필요하냐고 마치 어린아이 달래 듯하는 것이었다. 요점은 민족반역자 노릇을 하고 10만 달러를 챙기고 미국으로 도망가라는 것이다.

 

내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하고 응하지 않자 그 자는 오늘은 이만하고 돌아가서 심사숙고해 보고 내일 다시 만나서 대답을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군정장관 딘 장군이 본국 정부의 독촉에 쫓긴 나머지 궁여지책으로 정치고문을 보내서 경찰이 건의한 초토작전을 내가 실시하도록 세뇌공작을 하여본 것일 터이다. 이런 절반 위협적으로 절반 유화적인 설득이 매일같이 2~3시간씩 계속되었다. 그런 그 자도 끝끝내 내가 반대를 굽히지 않자 마지막에는 당신이야말로 애국자이며 훌륭한 군인이라고 칭찬하면서 설득을 포기했다.

 

한편 제9연대의 귀순 선무공작은 성공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의 선무전단이 공포와 불안에 떨고있던 도민들에 희망을 불러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군대가 폭도토벌의 제1선에 나선다고 하자 경찰보다 더 무자비하게 살륙을 감행할 줄 알고 공포에 떨고있던 도민들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중지하고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자는 연대장의 선무전단에 공감을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경비대의 선무에 신뢰와 협조의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산간부락에 정찰나온 군인들은 친절하고 닭한마리 곡식 한톨 달라는 사람이 없었다. 군인들은 양식을 가지고 와서 스스로 해결했고 간혹 민간에 취사를 의뢰할 때도 반드시 대가를 치렀다. 그 뿐 아니라 굶주리는 사람에게는 자신들의 양식을 나누어 주기까지 했다. 병자들에 약을 주는 일도 있었다.

 

군인들의 이같은 친절과 행동은 곧 전도에 알려졌다. 도민들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므로 처음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실임을 알게되자 산에서 내려와 군대주둔지 부근에 거주하면서 군의 보호를 원하는 주민이 나날이 늘어갔다. 도내에 평화분위기가 회복되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선무공작이 이런 성공을 거두기까지는 제주신보 사장을 중심으로한 제주읍 유지들의 협조와 헌신적인 노력이 절대적으로 공헌했음을 필히 밝혀둔다. 당시 상당수의 제주 유지들과 지식인들은 보신을 위하여 육지로 피신하고 있었으나 이분들은 도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끝까지 제주도에 남아 군과 나에게 협조하여 주었다.

 

선무공작이 진전되어감에 따라 제주도는 일시 소강상태가 유지되고 폭도들도 만행을 삼갔다. 경찰지서 습격은 계속되었지만 그것도 산발적이었다. 그들은 군대와의 교전은 극도로 회피하여 군 정찰지역내에서는 완전히 철수한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을 유지하면서 우리는 귀순‧화평을 위한 회담의 교섭을 적극 진행시켜 나갔다. 연대 정보주임인 이윤락 중위와 제주 유지들이 헌신적으롤 수차 적지를 왕래하면서 회담을 추진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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