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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益烈장군 실록유고- 4‧3의 진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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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378회 작성일 11-04-08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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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益烈장군 실록유고

 

4‧3의 진실

서 문

4‧3과 김익렬(金益烈) 제9연대장. 4‧3 발발 전후를 통틀어 김익렬 연대장만큼 4‧3 진상의 핵심에 있었던 체험자도 드물 것입니다.

김익렬 연대장은 4‧3을 현지 군지휘관으로서 직접 체험했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김달삼(金達三)과 담판, 평화적으로 사태해결을 모색했던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화평정책은 미군정 당국에 의해 거부되었고, 이로 인해 9연대장의 자리에서 해임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김익렬 장군은 이 글을 집필하면서 4‧3의 기존기록들은 부정확하고 왜곡된 점이 많다고 지적, “제9연대장으로 재직했던 역사의 증인으로서 내가 경험한 사실을 진실되게 기록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김장군은 이 원고에 대한 재정리 작업을 하다가 마무리하지 못한채 1988년 12월 작고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앞서 “내가 죽은 다음에 이 원고를 역사 앞에 밝히라”고 유언했습니다.

필자는 또 원고말미에 “정직한 역사기록에 초점을 두었지만 혹시 잘못된 것은 나의 무식의 소산이거나 교양부족에서 오는 편견일 수 있다”는 글을 남겨 더욱 그의 기록의 정직성을 신뢰케 하는 바 있습니다.

한 예비역 대장은 그를 가리켜 “명예욕 보다는 정의감이 강했고 물욕이 전혀 없었으며 아첨배들을 멸시하는 직언파여서 손해도 많이 봤으나 후배장교들의 두터운 존경을 받았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강직한 군인상을 심어줬던 김장군의 유고가 난맥상을 빚고 있는 4‧3의 진상규명에 큰 보탬이 되는 한편, 4‧3초기의 미군정과 군‧경의 대응전략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몫을 하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이 유고의 사료적(史料的) 가치가 워낙 막중한 것이기에 친필 원문을 그대로 살렸습니다. 단, 한자를 한글표기로, 옛 맞춤법을 새 맞춤법에 적용하는 기초 교정만 했으며 보충설명이 필요할 경우엔 편집자 주를 괄호 안에 처리해 원문이 다치지 않도록 했습니다.

 

 

*김익렬 장군 약력

△1921. 6 慶南 河東 출생    學兵출신

△1946. 1 군사영어학교 졸업   소위임관(군번 47번)

△1947. 9 제9연대 부연대장(소령)으로 濟州에 부임

△1947.12 제9연대 3대 연대장(중령)

△1948. 5 제9연대장 해임

△1948. 5 제14연대장

△1948. 8 제13연대장 (6‧25 참전)

△1950. 8 北進작전 참가

△1952. 6 제8사단장

△1954-55 美참모대

△1955. 7 제7사단장

△1957-58 국방대학원

△1960. 제1관구 사령관

△1962. 제1‧2 군단장

△1964. 1 육군전투병과 사령관

△1967. 5 국방대학원장

△1969. 1 중장 예편

△1988.12 永眠 (국립묘지 안장)

 

제주도 4‧3사건의 발생원인이 단순히 육지인과 미군에 대한 도민의 배타정신과 미군정하의 압정에 대한 반발에서 일어난 민중폭동이냐, 또는 공산이데올로기적인 폭동이냐 하는 문제에 관하여 아직까지 확실한 결정을 내리고 있지 않다. 미군정에 관계한 관리들이나 경찰 또는 토벌에 관련된 군인 또 반공체제하에 있는 우리 사가(史家)들은 맹목적으로 제주 4‧3사건을 공산당의 사전음모에 의한 우리나라 공산화를 위한 여순(麗順)‧지리산 등지의 공산반란과 같은 사건으로 단정짓고, 정사(正史)와 기타 서지(書誌)에도 이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그러나 제주도민 중에 중년이상의 지식인들이나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이 역사의 부정확과 허위성에 불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선조의 땅 제주도가 사상 최초로 공산반란을 일으켰다는 불명예로 더럽혀지고, 미군정의 경찰의 압정에 못이겨 살기위해 일어났던 폭동이 공산폭동으로 낙인 찍히고, 또 그 당시 살해된 사람들의 후손들은 대대로 공비의 후손이라는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불운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행한 운명의 억울함을 변명할 방법과 기회조차도 없이 단순히 억울하다는 불만 속에 살고 있다. 일부 지식인들은 4‧3사건을 정확하게 그 원인과 결과를 한국정사(韓國正史)에 기록하려고 도민운동도 하고 있으나 이를 뒷받침하여 줄 아무런 역사적 증거도 인물도 없다. 나는 이런 점에서 후세 사가들이나 제주도민들이 정확한 역사를 아는데 도움이 될까하여 그 당시 제주도민의 생사를 좌우하는 중요한 직책에 있던 제주 제9연대장으로 재직한 역사의 증인으로서 당시 나의 직권범위 내에서 알 수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다.

 

1. 사건 발생前의 실정

내가 제주도 제9연대 부연대장으로 부임한 것은 1947년 9월 초였다.

그 당시 일반미군관리들도 마찬가지였지마는 국방경비대 장교들도 제주도 제9연대는 모두 가기싫은 부임지였다. 대부분의 장교들이 경미한 상관과의 의견충돌이나 사고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귀양(추방)되는 부대이기도 하였다. 당시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인 송호성(宋虎聲‧준장‧중국에서 독립운동 했음)장군은 풍모는 독립운동가나 장군다운 면이 있었으나 중요한 군사지식이나 두뇌나 인격은 중국대륙에서 독립운동을 하다보니 정규의 교육이나 군사교육을 받지못한 관계로 보잘 것 없었다. 특히 인격면에서 그리하였다. 자기의 비위에 어긋나면 “너는 제주도로 귀양이다” 호령하고 즉시 9연대로 전근시키는 것이었다. 연대장 이치업 참령(李致業 參領)도 그리하였고 부관 심흥선 부위(沈興善 副尉)도‧‧‧ 모든 장교들이 대부분이 그리하였다.

나도 태릉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서 장교교육을 받던 어느 날 명동거리를 산보하다가 송장군의 부인(중국인)에게 경례를 안한 죄로 9연대로 추방되어 부임하여왔다.

 

목포에서 선로(船路)로 10시간 제주읍에 도착, 화산석으로 시야를 가린 일주도로를 따라 약 4시간 후에 대정면(大靜面)에 있는 제9연대에 부임하였다. 9연대는 연대라 하여도 실제 병력은 1개 대대가 조금 넘는 약 9백여명이었으며 병사들의 90%는 전라도 경상도 방면에서 모병하여온 병사들이었다. 제주도 청년들은 군대지원을 꺼려 지원자들의 대부분은 일제시대 일본군 하사관 출신이었다. 일정한 직업이 없어 일시적으로 의식주가 해결되는 경비대를 지원한 사람도 있었다.

 

당시 제주도 청년들은 역사적인 배경도 있었겠지마는 관리나 군인으로 출세하겠다는 희망을 가진 청년은 육지청년과 비교하여 지극히 희소하였다. 또다른 문젯거리로, 제주도 출신 병사들은 나태하며 육체노동을 싫어한다는 것이 정평이었다. 군사훈련이 심하거나 군대작업이 심하면 도망을 쳐버리는 것이 일쑤였다. 그러므로 장교들은 제주도 출신 사병들은 으레 어느 땐가는 도망치리라 생각하고 그리 신경도 쓰지 않았다.

 

6개월 이상 복무한 사병은 불과 10명 이내였다. 이들은 장교들에 의해 대단히 중용되었으며 제주도 풍속이나 물정을 아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 이들은 제주도에서 모병하는 문제에서 전장교들의 고문 역할을 하였으며 군대와 대민(對民) 접촉의 매개체 노릇을 하였다.

당시 제주도민들은 전통적으로 배타성이 강하였으며 제9연대 장병을 대하는 것이 일본군인이나 미국인을 대하는 정도였다. 이렇게 자기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였다. 노소남녀를 물론하고 군인들과 교제하는 것을 제주도민들에 보이는 것을 꺼렸다. 장병들의 대부분이 육지출신이고 보니 제주도의 독특한 방언으로 인하여 대화가 원활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보다도 더 곤란한 것은 제주도민과 육지인들의 풍속의 차이였다. 제주도 풍속에 숙달되지 않은 육지출신 장병들이 풍속 예의 언어 등에서 도민의 자존심과 긍지를 해치는 일이 일쑤였다.

 

그러므로 군인들을 백안시하고 교제를 꺼리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군대와 접촉하는 한계는 지극히 제한되어 교육받은 지도층 인사들이든지, 군대와 이해관계를 맺고있는 상인이라든지, 관계자들과 그 가족들이었으며 심지어 이들 가족들마저 군인들을 외면하는 형편이고 보니 제9연대는 외국에 주둔하고 있는 인상마저 주었다.

이런 실정이고 보니 제주도에서 모병은 사실상 불가능하였고 육지에서도 바다 건너 제주도까지 지원하여 오려는 청년이 드물었다. 그러나 경비대 병력의 증가를 위한 급한 사정도 없고 보니 9연대 병력증강을 서두르지 않았다. 현재 병력을 정밀히 훈련시켜서 장차 완전 연대 편성을 위한 기간요원 양성이 그 당시의 목표였다.

 

당시 연대는 모슬포(摹瑟浦)에 소재한 옛 일본군 항공대가 사용하던 광대한 병사(兵舍)를 사용하였다. 9연대의 첫째 문제는 보급이었다. 그 다음은 도민의 배타성과 비협조였다.

보급의 일체와 주식‧부식까지 육지에서 공급받아야 할 형편이었고, 병사의 수리‧신축까지 육지에서 공급받다보니 경비가 막대하였다. 부식의 일부인 어류마저 현지에서 생산되나 군에 납품할 사람이 없었다. 당시 광범위하게 사업을 하던 좌달육(左達六)씨를 방문하여 제주읍에 있는 유지들을 설득시켜 군에 협조하여 달라고 수차 빌다시피 했다. 그래서 좌달육씨는 공사 일체를 책임지고, 카나리야 상회가 부식일체를 책임져 납품하겠다는 협조를 얻어 부대를 유지할 형편이었다.

 

연대 군사고문관은 군정장관 맨스필드 중령이 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민정(民政)에 바쁘다보니, 1~2개월에 1회씩 소위 혹은 중위를 연대에 보내어 연대장과 상의할 정도였으므로 제9연대는 사실상 미군정 고문관도 없는 형편이었다.

 

연대 장비는 총기는 구(舊) 일본군의 99소총과 대검뿐, 그나마 탄환은 1발도 보유하지 못했다. 물론 기관총이나 미군무기인 M-1이나 카빈총은 1정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반면 당시 경찰은 경비대보다 월등하게 우월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전원이 카빈소총과 구 일본군의 92식 중기관총, 미군 수송장비에다 각종 미군 신식 무전기와 기타 통신장비 등 상당한 기동력과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미군정은 국내치안을 전적으로 경찰에 맡겼으며 일체의 전투장비 보급도 경찰에 우선하였고 미군정에 대한 충성심에서도 경비대 보다 경찰을 신인(信認)하였다. 경비대는 비상시에 경찰의 보조역할을 하다가 장차 독립되면 국군의 모체가 될, 그러니까 평시에는 놀고 먹는 말하자면 미군정의 천덕꾸러기며 객원 노릇을 하였다. 그러고 보니 자연 경비대의 미군정하의 존재 위치는 빛을 못보았으며 따라서 보급지원도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제9연대의 기타 장비를 보더라도 99식 소총과 대검 이외에 수송장비는 1과 1/2t 차량 1대, 3/4t 1대, 지프 1대가 전부대의 보급과 연락용 전부였다. 무전기는 물론 없었고 대내(隊內) 행정용으로 몇대의 구식 전화기가 있을 뿐이었다. 연대와 상부와의 연락은 전근대적인 장교전령과 일반전령이 맡아 비밀명령과 문서를 전달하였고, 일반 행정문서는 민간우편과 전화전보로 연락되었다. 긴급을 요하는 연락은 연대의 1과 1/2t, 3/4t 차량, 지프 등 3대가 보급 전령 일체를 행하는데 이 3대의 차량마저 노후와 부속품 부족으로 1주일간 수리해서 가동하면 2~3일 쓰고 고장이었다. 부속품도 부산, 서울 등지에 가서 구입하는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부대가 별다른 고통을 느끼는 일도 없었다. 그 이유는 수개월이 가도 급한 연락사항이나 중요한 문제도 없었고, 하등의 긴급을 요하는 일이 없으므로 순조롭고 평온하기만 하였다.

 

그런 중에도 군대훈련과 군기는 엄격하였으며 부대는 장병 공히 일치단결되어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매일같이 하는 것이 교육훈련 뿐이고 단결을 저해할 문젯거리들이 전연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연대통솔은 근무시간에는 열심히 훈련하고 그 밖의 시간은 가족처럼 지내는 것이었다.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은 장교들과 서귀포로 가서 해수욕도 하고 유람도 즐겼다. 동기(冬期)에는 수렵(꿩)하여 장병이 회식하는 것이 낙이었다. 특히 당시 장교들 간의 단결은 상하간 보다는 형제간 같은 것이었다.

 

 

2. 도민 동향과 정치활동

 

4‧3사건 발생전의 군‧관‧민의 관계는 현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미묘한 관계에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이 항복하고 우리 민족이 해방돼 전 국내는 해방의 기쁨과 자주독립의 희망에 벅차고 있었으나 제주도의 실정은 그렇지 않았다. 1946년에서 1948년 4월 3일 폭동이 발생할 때까지 도민의 표정은 일제시대나 미군정시대나 별다른 감격이나 희망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해방이나 독립이 됐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처럼 일제시대와 마찬가지로 묵묵히 자기 생업에 종사할 뿐이었다. 해방과 독립은 관리나 군인들이나 관심을 가질 일이지, 우리 제주도민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일제가 미군정으로 바뀌고, 제주도에 대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대신 미군과 경비대 군인으로 대체되었다는 그런 단순한 감각이 지배적이었다. 그 밖의 표정은 없었다는 것이 그 당시의 도민의 감정에 대한 나의 솔직한 인상이었다.

 

4‧3사건을 계기로 하여 야기된 격앙된 인상들만이 여러가지 기록이나 역사나 논평에 보도되고 있고, 어떤 전문가들은 제주도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고도(孤島)이므로 해방 후부터 공산주의 사상가들의 온상지였으며 자유스럽게 공산주의 사상교육과 공산주의의 투쟁을 위한 조직과 훈련을 하여서 4‧3 공산폭등을 일으켰다는 그럴싸한 이론을 전개시키고 4‧3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4‧3사건 발생의 원인과 그 당시의 제주도의 도민의 실정을 전연 모르는 자들이 떠도는 유언(流言)만 갖고 창작해 만들어 낸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당시 제주도민이나 우리민족에 대하여 용납못할 민족적 죄악을 저지른 미군정 시대 집권자들의 죄악과 과오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어용자들의 작품에 지나지 않다고 나는 확언한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정직하여야 되며 사실 그대로 충실히 기록되어야 후세 국민들이 그 역사를 참고하고 반성하고 배우게 될 것이다. 어느 특수 인물의 죄악을 은폐하거나 또는 영웅화 시키기 위한 창작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사적(史賊)이다.

제주도 4‧3사건의 역사는 재편집되어야 하며 재평가되어야 된다.

 

역사의 증인으로서 나는 4‧3사건은 둘로 나누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4‧3사건 발생원인과 발생, 또 하나는 발생 후부터 토벌과 진압까지이다. 그 이유는 전자는 순수한 민중폭동이었으며 그 후자는 민중폭동이 공산폭동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전연 상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구별되어야 한다.

 

나는 전자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생존자 중의 유일한 증인이다. 4‧3사건의 실상이 밝혀지더라도 나에게는 피해나 이익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서 내가 경험한 사실을 기술한다. 사명감과 책임감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그 당시 도민들은 해방과 독립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다. 그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제주도는 동일민족인데도 불구하고 지리적인 관계로 식민지 비슷하였으며 본국의 관리들이 부임하여 통치하였고 일제시대에도 관리들은 대부분은 책임자는 일본인이고 그 부하들은 육지인이었다. 해방이 된 미군정하에서도 군정장관은 미국인이고 도지사‧군수‧경찰청장‧서장은 전원 육지출신이고 행정관리와 경찰관의 대부분이 또한 육지출신이고 보니 제주도민은 정치와 행정에 아무 관계없는 존재였다.

 

이렇게 해방도 말단의 서민 농민의 눈에는 일제시대와 별다른 감정의 변화를 주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또 하나는 관습상의 문제가 있었다. 제주도는 화산도여서 토지가 척박한데다 석괴(石塊)가 많고, 또 계절풍의 통로여서 농업 어업 공히 풍랑으로 부적당하다. 자연히 경제는 지극히 빈곤하였으며 활동성 있는 청년들은 일본 부산 목포 인천 서울 등지에 출타하여 취직해서 그 송금으로 향리에 있는 부모 처자들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고향에서 좀 경제적 여유가 있게되면 식수 등이 불편한 농어촌에 살지않고 제주읍으로 자리를 옮겼다. 더 부유한 자는 부산 서울 등지로 떠나버림으로 제주도내에는 오고 가지도 못하는 빈민들만 남아있는 형편이었고 보니, 제주도는 인구도 늘지않아 항상 30만을 전후하였다. 한편 근대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은 거의 전부가 제주도를 떠나서 육지에서 관리나 사업을 하는 것이 오랫동안의 관습이었다. 따라서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하여 극소수의 지식인과 사업가들이 남아 있었고 대부분의 도민은 빈민들과 문맹자들이었다. 그러나 도민들은 성격이 온순하여 주먹질하고 싸우는 것을 거의 볼 수 없었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제주도는 빈곤하긴 하지만 육지와 같이 전통적으로 지주와 소작인과 같은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이 없었다. 즉 공산주의자들이 항상 애용하는 계급투쟁의 구실을 줄 수 있는 착취계급이 없었다. 도민이 빈곤한 것은 지리적인 자연환경과 문화수준이 낮은 데에 원인이 있었으므로 정부의 시책을 원망할만한 건덕지도 없었고 정부에 대한 불만이라 해보았자 기껏 원조가 적다는 정도였다.

 

이런 실정이고 보니 공산주의 사상가가 있었다 하더라도 일반 도민들에 잘 먹혀 들어가지 않을 형편이었다. 당시 도민의 정치와 사상활동은 거의 무풍지대였으며 해방과 독립 민주주의 사상활동이라는 것도 현수막을 행정관청이나 경찰서에 걸어놓는 정도였지 실질적인 계몽이나 활동은 지극히 미미한 실정이었다. 정치단체나 청년단체도 있기는 했지마는 간판뿐이고 실제 행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해방직후 소위 ‘인민공화국 정부’라 하는 것이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에 있었으나 그것은 대부분이 공산주의 이념과 거리가 먼 일부 지식인들의 권력에 대한 야망에서 나온 것이지 별 것이 아니었다.

 

도민들이 정치활동에 무관심하였던 사실은 현재 우리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별다른 관심을 가질 사유가 없었다. 그것은 정치활동이나 청년운동을 할 만한 인물이 드물었다는 데도 원인이 있었다. 정치활동이나 청년운동을 할만한 똑똑한 청년들은 대부분이 제주도에 남아있지 않고 육지에서 취업하고 있었으므로 도내에는 문맹자들이나 노인 부녀자 어린 소년들 뿐이었고 가정적인 무슨 사정으로 제주도를 떠나지 못한 지식인들이 도내에 남아서 정치 청년운동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운동이라는 것도 상부조직 뿐이고 중간과 말단조직은 전연 존재하지 않기 십상이었다. 말하자면 간판만 지키는 사람들 뿐이었다.

 

그 당시 연대 정보과에서 수집한 도민 실정은 호적상으로 나타난 인구가 30만이었고, 성별로는 남자 14만이고 여자 16만이었다. 여자가 2만 더 많았으나 실제로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는 남녀의 비율차는 더 심하였다. 18세 이상 40세 미만의 노동력이 활발한 남녀비율은 남자 1인에 대하여 여자 25명 정도였다. 이 통계를 보면 노동력을 가진 자는 대부분이 여자였다. 실제 내가 본 바로는 밭이나 어촌에서 노동하는 자는 대부분 여자였으며 청년들은 거의 볼 수 없었다. 남자는 특수한 기술부문에서 일하고 중노동은 주로 여자가 맡아했다. 상대적으로 남자는 나태하게 보였다. 이런 실정을 알고나면 정치활동이나 사회청년운동 하는 자가 지극히 미미하였다는 것과 제주도 제9연대의 모병이 거의 불가능하였다는 사실을 납득할 것이다.

 

제주도는 옛적부터 걸인과 도적이 없다고 자랑한다. 민심은 순박하고 정부에 잘 복종하는 전통적인 도민의 기풍을 가졌다. 범법자나 치안을 문란케하는 위험성을 가진 자는 거의 전무상태였으므로 경찰이나 행정관리 또는 군대를 번거롭게 하는 사건은 거의 없었다. 사건이라고 해야 항구나 읍내에서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싸움하는 것과 교통사고 정도였다.

 

이런 평온한 치안상태이고 보니 경찰관은 하는 일이 없어 한가를 달래기 위하여 백주에도 근무지를 비워놓고 술마시는 것이 예사였고, 나의 9연대도 군대가 경계하여야 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전 연대가 탄환 한발없는 빈총을 가지고 있어도 조금도 불안을 느끼거나 탄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 당시 서울 부산 등지에서는 치안이 확보되지 못해 야간이 되면 미군 MP나 경찰의 총소리가 그치는 날이 없는 불안한 치안상태였고, 각지에서는 민중의 시위‧폭동, 공산주의자들의 선동 유언비어 정치밀회 등이 난무하였었다. 그러나 여기 제주도는 다른 세계와 같은 평온한 별천지였다.


출처 :사람사는 세상 -- 워싱턴 원문보기   글쓴이 : 도르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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