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수 근·현대사]⑬ 현해탄의 비극을 아는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제이엘 작성일 14-10-08 19:15 조회 3,471 댓글 0본문
[김갑수 근·현대사]⑬ 현해탄의 비극을 아는가 |
김갑수 | 2014-9-29 09:03 |
미국은 어떻게 제국주의 대열에 뛰어들었나 미국은 1867년에 태평양 미드웨이 군도를 획득했고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했다. 에이커 당 2센트의 염가였다. 이어서 1875년 하와이에서 타국의 권리 행사를 배타하는 조약을 맺음으로써 하와이를 미국의 도서로 편입시켰다. 1878년에는 태평양 무역 중계 요지라 할 수 있는 사모아 군도에 해군기지를 둘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미국이 조선과 만난 것은 1882년 중국의 알선으로 맺어진 조미우호통상조약에서였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해외 침탈은 다른 유럽 열강의 식민지 침공보다는 많이 늦은 소극적인 것이었다. 이에 따라 기독교 지식인들이 앞장을 서서 미국의 팽창주의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조시아 스트롱 목사는, “앵글로 섹슨의 우월한 문명이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로 전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학자인 존 피스크도, “앵글로 섹슨의 언어, 정치, 종교가 세계에 퍼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가들은 보다 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했는데 그것의 핵심은 해군력의 강화에 있었다. 알프레드 머헨이 해군대학에서 행한 강연, ‘제해권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런 분위기에서 1898년 스페인의 식민지 쿠바를 두고 벌인 미·스페인 전쟁은 미국이 제국주의로 치닫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전쟁을 선동한 집단은 뉴욕 허스트 계 신문 <저널> 지와 <월드> 지였다. 그들은 스페인의 압제에 시달리는 쿠바인의 실상을 과장해서 보도했다. 처음 미국 대통령 매킨리는 쿠바 문제에 신중히 대처하려고 했지만, 허스트 계 신문들은 “주미 스페인 대사가 미국 대통령을 모욕했다”는 등의 자극성 기사로 여론을 몰아갔다. 그러던 차에 미국인을 보호하기 위해 아바나 항에 파견된 메인호가 원인 불명의 폭발 사고로 장병 266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메인호 사건은 한국의 천암함 사건과 여러모로 유사한 성격을 띤다. 미국의 신문들은 “리멤버 더 메인”이라는 활자를 연일 크게 박아 보도하면서 스페인에 대한 선전포고를 선동했다. 여론에 밀린 매킨리 정부는 스페인에게 쿠바의 독립을 요구했는데 뜻밖에도 스페인은 이에 응했다. 전쟁을 해 봤자 미국은 얻을 것이 많은데 반해 스페인은 잃을 것만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원하는 미국 언론들은 이 사실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미국 내 호전파의 대표적 인물은 매사추세츠 부자 출신 상원의원 헨리 캐벗 로지(1850~1924)와 당시 해군부 차관보를 지내고 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였다. 특히 훗날 미국 26대 대통령이 되어 일본의 조선 독식을 배후에서 조종하게 되는 루스벨트는 “미국에 좋은 모든 것은 다 프런티어의 결과이며, 이제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새로운 프런티어를 찾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1898년 1월 25일 메인호는 아바나 항에 입항했는데 2월 15일 정체불명의 폭발로 파괴된 것이었다. 당시 이 사건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심지어 조선에서까지 신문 호외를 발행했을 정도였다.(<독립신문> 1898년 2월 19일 자 호외) 미국 정부가 메인호 폭발의 원인 규명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지프 퓰리처(1847~1911)의 <뉴욕월드>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1863~1951)의 <뉴욕저널>은 확실한 근거도 없이 경쟁적으로 추측성 기사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후발 주자인 허스트의 <뉴욕저널>이 보다 공격적이었다. 이 신문은 이미 메인호 폭발 이전에 매킨리 대통령을 “약해빠지고 말만 번지르르한 정치가”로 비판한 워싱턴 주재 스페인 대사 드 로메(1851~1904)의 편지를 입수해 공개한 데 이어, 메인호 폭발을 스페인의 소행으로 단정 짓는 기사를 내보냈다. 전쟁 개시와 더불어 미국 동양 함대 사령관 존 듀이는 필리핀의 스페인 함대를 기습했다. 사전 극비 명령이 내려져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전선을 확대하여 쿠바 인근의 푸에르토리코와 태평양의 괌을 침공했고 여력을 몰아 필리핀까지 장악한다. 스페인의 제의로 파리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쿠바의 독립이 승인되었고, 미국은 배상으로 푸에르토리코와 괌을 양도받았으며, 필리핀을 2천만 달러의 뇌물을 주고 차지했다. 물론 7,000개의 섬을 포함한 가격이었다. 여기서 잠깐, 필리핀은 한반도 면적의 1.4배, 알래스카는 필리핀보다 5배로 넓으니 720만 달러짜리 알래스카 땅값이 단연 싸게 먹힌 셈이었다. <뉴욕 트리뷴> 지의 기자 출신 국무장관 존 헤이는 미국이 벌인 스페인과의 전쟁을 ‘스플랜디드 리틀 워’ 즉 ‘빛나는 작은 전쟁’이라고 평가했다. 앞으로 큰 전쟁이 남아 있다는 뜻을 담고 있는 발언이었다. 필리핀을 점유한 당시 미국의 대 중국 무역량은 2%에 불과했다. 무역량을 확대하고 싶었던 미국은 유럽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 침략을 저지할 필요를 느꼈다. 미국은 열강의 중국 분할을 막기 위해 열강들에게 ‘오픈 도어 폴리시’, 즉 문호 개방을 요구했는데 이것은 미국에게도 대등한 무역 조건을 달라는 것이었다. 유럽 열강들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다른 열강들이 모두 동의한다면 우리도 동의하겠다는 회답을 국무장관 존 헤이에게 보냈다. 이것은 서구 열강들이 얼마나 기회주의적인지를 알려 주는 일이었다. 또한 약자에게는 한껏 무자비한 그들이 강자에게는 얼마나 무소신한지를 알려주는 일이기도 했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가 있는가 하면 <현해탄은 말이 없다>도 있다. <현해탄은 잘 있거라>도 있는데 이 모두가 8.15 이후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나 드라마의 제목들이다. 이런 제목들은 현해탄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역사가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지금은 대한해협이라고 부르는 현해탄은 한국과 일본 열도의 규슈[九州] 사이에 있는 해협으로 예로부터 한 ·일 간 해상 연락로로 이용되어 왔다. 일찍이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 사이에는 정기 항로가 개설되었는데, 여기를 운항하는 배를 관부(關釜)연락선이라고 불렀다. 이병주 작 소설 『관부연락선』이 있으며 지금 우리는 부관연락선이라고 부른다. 현해탄은 남태평양의 거친 물결과 대륙에서 처내려오는 북서풍이 마주치는 해협이다. 일본말로 ‘겐카이나다’, 한국어 발음으로 ‘현해탄(玄海灘)’이 되는 이 해협은 말 그대로 ‘검고 거친 바다’였다. 때로는 별과 달빛과 안개, 때로는 비와 바람과 물결, 때로는 구름과 뇌성과 폭우가 출몰하는 현해탄에는 뼈아픈 식민지의 역사가 출렁거리고 있다. 현해탄을 처음 건너며 담배를 배웠고 두 번째 건너며 여자를 알았으며 세 번째 건너며 돈맛을 익힌 것은 일본 청년이었고, 현해탄을 첫 번째 건넌 이는 소식이 없고 두 번째 건넌 이는 잔등이 굽어 돌아왔고 세 번째 건너 하얀 뼛가루로 돌아온 이는 조선 청년이었다. 아주 먼 세월 전에 일본인들이 숭상해마지 않았던 성덕태자의 스승 혜자가 이 물을 건너 왔고 ‘금각사’의 고구려 화가 담징은 이 물을 건너갔다. 박제상과 김춘추, 정몽주와 신숙주 그리고 김인겸이 이 바다를 건너갔으며, 수많은 몽고군과 왜군이 이 바다를 찾아온 태풍 가미카제에 휘말려 죽었다. 1926년 현해탄에서는 인구에 회자되는 ‘러브 어패어’가 발발했다. 정사(情死)란 흔히 사랑하는 남녀의 동반 죽음을 의미한다. 물론 남녀가 무단횡단을 하다가 차에 치여 죽는 것까지를 정사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루지 못하는 사랑을 다음 세상에서 이룰 수 있다는 환상이 없고서는 정사란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경성여고보와 동경음악학교를 다녔던 대중가수 윤심덕은 <사(死)의 찬미>를 불러 인기를 모았다. 그녀는 자기를 좋아하는 음악 청년 홍난파보다는 호남 갑부의 아들이면서 유부남이기도 한 김우진을 더 사랑했다. 그들은 북해도의 여관에서 며칠을 함께 보낸 후 관부연락선을 타고 오다가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사의 찬미>를 취입한 지 후 얼마 안 됐을 때의 사건이었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디이냐. 이 노래의 곡은 외국 왈츠였다. 루마니아 이바노비치가 작곡한 <도나우 강 왈츠>는 서양인들이 결혼 파티에서 연주하는 음악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사의 찬미’로 전용되었고, 이 같은 신파와 염세가 조선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상징으로 둔갑한 것은 ‘그로테스크’한 일이었다. 이미 1910년대 말부터 식민지 조선의 대중은 그로테스크 해지려는 조짐을 보였다. 이수일과 심순애가 등장하는 <장한몽>의 신파에 열광했던 그들은 그로테스크 하다고 할 정도로 위선적인 인물 이형식이 출연하는 소설 <무정>에 압도되어 있었다. 식민지는 그런 마성을 지니고 있었다. 남을 탄압하는 인간만 타락하는 것이 아니다. 탄압을 받는 인간들도 또 다른 모습으로 급속히 타락해 가는 것은 식민지라는 불평등한 인간 조건이 빚어내는 일반적 현상이었다. 물론 이런 시기에도 윤심덕의 노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내몸이 압록강을 건너올 때에 하지만 당대 식민지의 백성은 물론 지금의 국민들까지도 독립군가를 불렀던 선열보다는 이광수, 윤심덕 따위를 더 잘 기억하고 있으니 이것 또한 그로테스크한 일이 아닌가? <계속> |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