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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1-10. 꼴롬비아에서의 반제반미게릴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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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4,701회 작성일 21-09-12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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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침략과 반미열풍

 

□ 꼴롬비아에서의 반제반미게릴라전쟁

 

남아메리카대륙의 북서부끝에 있는 꼴롬비아의 태평양연안에 에스빠냐침략자들이 처음 상륙한것은 1499년이였다. 침략자들은 그 지역에서 B. C. 1만년전부터 평화롭게 살고있던 현지의 많은 인디안족들인 Chibcha, Andean 그리고 Caribbean 등 여러 부족들을 닥치는대로 살륙하고 침략하여 1539년에는 지금의 꼴롬비아의 수도인 보고따에 침략의 요새를 구축하였다.

1544년에 에스빠냐는 남아메리카침략의 속도와 지역을 확대하고 촉진하여 지금의 뻬루에 《식민총독부》를 설치하고 남아메리카대륙 북서부전역을 식민지화하여 총독부가 총괄통치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뻬루, 꼴롬비아, 베네수엘라, 에꽈도르, 빠나마 등 여러 지역들은 에스빠냐ㅡ뻬루총독부의 관할구역에 속하였으며 총독부의 통치를 받고있었다.

에스빠냐침략자들은 원주민인디안들을 무자비하게 대량살해하였으며 살아남은 인디안들을 노예로 삼았다. 침략자들은 노예가 모자라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들을 대량적으로 끌어오기도 하였다.

그후 3세기동안 에스빠냐의 식민통치는 튼튼하게 확립되였으며 이로 인하여 유럽에서 에스빠냐왕국은 부귀와 영화를 마음껏 누리면서 태평세월을 구가하고있었다.

하지만 에스빠냐식민통치는 3세기가 지난 후에 서서히 사양길에 들어서게 되였다. 그 리유는 유럽에서 프랑스의 나뽈레옹이 에스빠냐를 침공하여 승리함으로써 에스빠냐제국의 위상은 날이 갈수록 점점 기울어져가고있었기때문이다.

유럽에서 대세가 기울어진 에스빠냐제국은 동시에 남아메리카에서도 식민지통치를 계속 유지할수 있는 위력이 점점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1739년경부터 뻬루총독부의 가혹한 지배권에서 조금씩 벗어나 어느 정도 융통성있는 사회적환경의 변화가 발생하고있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변경의 변화에 대하여 민감한 지역들은 꼴롬비아, 베네수엘라, 에꽈도르, 빠나마 등 여러 지역들이였다.

그러나 아직은 에스빠냐식민정권이 여전히 존재하고있었으며 에스빠냐는 이 지역에 또 다른 총독부를 새로 설립하여 1800년대초까지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이 지역에 새로 설치된 총독부를 《그라나다총독부》라고 불렀다.

노예제도, 에스빠냐의 과중한 세금, 관세, 상업의 독점 등에 대한 저항이 서서히 전지역에서 불길처럼 일기 시작하였다.

에스빠냐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흐름이 바다의 물결처럼 《그라나다총독부》가 통치하고있는 모든 지역에서 동서사방으로 퍼져나가고있었다.

 

 

      파란만장한 꼴롬비아독립

 

이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시작된것은 1810년부터였다. 혁명적지도자 나리뇨를 선두로 하여 최초의 독립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던것이다. 에스빠냐침략자들이 처음 상륙한 후부터 꼭 311년후에 발생한 력사적사건이였다.

1819년에 그 당시 남아메리카에서 혁명적영웅으로 맹활약을 펼치고있던 볼리바르장군이 이끄는 독립혁명군이 《그라나다총독부》를 침공하여 에스빠냐군을 무찌르고 드디여 꼴롬비아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볼리바르장군은 오늘날까지도 남아메리카에서 《볼리바르주의》라는 명칭으로 그의 혁명정신과 업적이 대중속에서 기억되고있다.

독립된 나라명칭을 《대꼴롬비아공화국》(Republic of Greater Colombia)이라고 명명하였다. 독립된 공화국은 꼴롬비아, 베네수엘라, 에꽈도르, 빠나마 등 4개 지역들이 련방제로 구성된 신생공화국이였다.

련방제국가로 독립은 하였지만 10년후인 1830년에 베네수엘라와 에꽈도르 두 지역은 련방제에서 탈퇴하여 제각기 독립국으로 떨어져나갔다. 두 지역이 떨어져나간 주된 리유는 국가형태문제, 정부구성문제, 카톨릭교회와의 관계문제 등 지역간에 완전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였기때문이였다. 련방제공화국을 창건한 후에 이 두 지역은 10년동안의 서로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적으로 각각 분리되여 떨어져나갔다.

그후 꼴롬비아와 빠나마는 《대꼴롬비아공화국》이라는 명칭을 포기하고 새로운 국호를 채택하였는데 《꼴롬비아공화국》이라는 새 명칭을 가지고 다시 새 출발을 하였다.

새 출발을 하기는 하였지만 《꼴롬비아공화국》은 보수파와 자유파로 분렬하여 서로 대립함으로써 격렬한 싸움을 하는 불행에 또다시 빠지고말았다.

꼴롬비아는 백인이 20%, 흑인 4%, 인디안원주민 1% 그리고 60%이상의 혼혈인구가 절대다수를 이루고있다. 백인과 흑인의 혼혈인구는 전체의 14%이며 주로 해안평야지대에 살고있다.

300여년동안의 에스빠냐식민지착취로부터 해방되여 독립을 쟁취하기는 하였지만 독립후에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은 백인대지주계급에 속하는 사람들과 외국자본과 결탁한 소수의 지배세력들이였다.

천신만고로 쟁취한 독립의 의미와 보람을 특권지배층들이 완전히 외곡시켰으며 이에 격분하여 나선 사람들은 소위 《자유파》로 락인을 찍히고말았다.

많은 땅을 소유하고있는 지주들과 대자본가들이 서로 결탁한 지배세력은 《보수파》라는 명칭을 붙여놓고 자유파와 상호간에 격렬한 분쟁이 발생하도록 뒤에서 유도하였다.

꼴롬비아에서는 독립쟁취후 특권중심의 중앙집권적보수세력과 이에 반대하는 련방주의적성향의 진보주의세력간에 치렬한 투쟁이 계속됐다.

무려 50여차례의 폭동과 8번의 내전을 겪는 동안 신생꼴롬비아공화국에서 10만여명의 사람들이 비참하게 희생되였다.

1900년대에 들어서서 신생국 꼴롬비아는 또다시 재난을 당하는 운명에 처하게 됐다. 이번에는 력사상 처음으로 미국이 직접 개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미국은 빠나마운하를 건설하기 위하여 꼴롬비아에 《운하건설권》을 요구하였다. 약세의 꼴롬비아정부는 미국의 강요에 굴복하여 《빠나마운하건설권》을 무조건 승인해주었다.

그런데 《꼴롬비아의회》가 정부가 승인한것을 거부함으로 인하여 미국과 불편한 관계에 처하게 되였다.

미국은 빠나마를 꼴롬비아로부터 독립하여 떨어져나오도록 공작을 하였다.

미국에 매수된 빠나마는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아 1903년에 꼴롬비아로부터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다.

1914년에 꼴롬비아는 할수없이 빠나마를 독립국가로 공식적으로 승인하였으며 또한 미국에게는 《빠나마운하건설권》을 공식적으로 승인해주었다.

결국 꼴롬비아는 미국에 빠나마를 빼앗겼으며 또 운하건설권도 빼앗기고말았다.

미국은 11년후에 꼴롬비아에 약간의 배상금을 지불하는것으로써 문제를 완결하였다. 꼴롬비아정권이 비극적으로 외세에 굴복하는것을 보고 이를 비판하는 국민의 원성이 자연히 터져나올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꼴롬비아정권은 정당한 대중의 목소리를 리념적으로 불순한 비난이라고 사실을 외곡하여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이때부터 꼴롬비아정권은 대중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면서 보수적우파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꼴롬비아의 게릴라투쟁은 어떻게 시작됐나?

 

꼴롬비아의 게릴라투쟁은 어떻게 시작됐으며 도대체 그 정체는 무엇인가?

먼저 꼴롬비아의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진보주의자들사이에 벌어지고있는 분쟁과 그 분쟁의 근원에 대한 옳바른 리해가 필요하다. 이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보수주의자들은 예전의 에스빠냐식민지시대의 지배체제를 가능한껏 그냥 유지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막강한 정치력을 행사하면서 대지주들과 대기업들의 리익만을 적극 옹호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후 특히 1952년이래 꼴롬비아의 우익보수세력은 친미적반공주의로선을 기본정책으로 삼았으며 미국과 군사원조협정을 맺기도 하였다.

이와는 정반대로 꼴롬비아의 자유진보진영은 지난 시기 에스빠냐의 노예로동제도와 같은 봉건적사회제도의 유산들을 깨끗이 청산하고 카톨릭교회의 봉건적지배체제를 반대하면서 빈곤계층의 리익의 대변자로 역할할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반제반미와 자주자립정신을 투쟁의 기본로선으로 삼았다.

이와 같이 기본로선이 서로 상이함으로 인하여 량진영의 갈등과 투쟁은 항상 계속되여왔다. 그런데 승리하는쪽은 항상 보수주의자들이였다. 보수주의자들은 일찍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는 집권세력이였다.

꼴롬비아에서 끝없는 내전과 게릴라투쟁이 일어나고있는 그 불씨는 바로 여기에 기인하고있는것이다.

꼴롬비아에서는 단 10년동안에 비극적폭동으로 인하여 30만여명이 죽음을 당하는 비극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비극적폭동의 시작은 1948년 대통령선거에서 후보자로 등장한 Jorge Gaitan을 암살한 사건때문이였다. Gaitan후보자는 토지개혁과 로동법개정을 과감하게 주장하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근로자들을 위한 유력한 후보자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Jorge Gaitan후보자는 우익강경보수파에 의하여 암살을 당하고말았다. 그뿐만아니라 자유진보파에 속하는 유능한 정치적지도자들도 련이은 암살로 제거당하였다.

격분한 서민층대중은 길거리에 나가 분노를 터뜨리면서 폭력적인 시위를 벌리였다. 이와 같은 상황속에서 진보주의적자유파들은 대통령선거에 일절 불참할것을 선언하면서 전국적인 항의와 시위를 계속해나갔다.

꼴롬비아정권은 대중의 웨침을 완전히 무시하고 예정대로 대통령선거를 강행하였으며 Gomez가 단독으로 출마하여 보수파들만의 지지를 받으면서 당선되여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3년후인 1953년에 Rojas Pinilla장군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Gomez대통령을 밀어내고 정권을 탈취하였다. 하지만 1957년에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Pinilla장군은 개인적부정과 부패로 인하여 권좌에서 축출되고말았다.

이와 같이 보수파와 진보파 어느 편이 결정적승리가 없는 불투명한 국가적현실속에서 1958년에 《보수적우파》지도자들과 《진보적좌파》지도자들은 10년동안의 분렬과 싸움에 대하여 지칠대로 지친것을 서로 시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량측은 사상과 리념을 포기하거나 혹은 서로 어떤 종류의 야합을 시도한것은 절대 아니였지만 어쨌든 10년동안에 30만여명의 생명이 희생된것에 대한 책임감을 서로 실감하고 정치적합의를 보게 됐다.

량편의 합의에 의하여 《국민전선》(National Front)이라는 련합정부형식의 정권을 창출하는데 합의하였다. 《국민전선》은 대통령을 량측에서 교대로 선출하고 내각은 량편이 서로 절반씩 차지하는 분배식으로 운영하기로 합의하였다. 《국민전선》은 1958년에 출범하여 1974년까지 16년동안 계속됐다.

그러면 《국민전선》의 정체는 무엇인가?

《국민전선》은 비극적으로 희생된 30만여명의 생명에 대한 민족적량심으로 책임의식이 있는가? 《국민전선》은 쫓겨난 농민들과 해고된 실업자들을 빨갱이들이라고 몰아치는 우파정권과 무엇이 다른가? 《국민전선》은 집권 16년동안에 절대빈곤층비률이 25%에서 50%로 증가한것에 대하여 책임감이 있는가?

《국민전선》은 시급한 농지개혁법안과 로동자권익을 위한 법개정을 위하여 결사투쟁할것을 결의하였는데 그 결의를 잊어버렸는가?

《국민전선》은 우파든 좌파든 저들끼리의 상생의 기회로 전락하여 국민에 대한 약속이나 근로대중의 희망은 완전히 망각하고있었다.

꼴롬비아의 절대다수인 농민들과 근로대중은 《국민전선》에 동참한 《진보적좌파》정치인들에 대하여 실망과 배신감을 느끼고있었다.

《국민전선》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분노는 기존의 게릴라투쟁에 휘발유를 끼엊는 격이 되고말았다.

꼴롬비아의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상황하에서 오히려 저항조직들은 보다 더 강화되였고 보다 더 강력하고 광범위한 방법으로 게릴라투쟁을 전개하게 하도록 하는 또 하나의 시발점과 기폭제로 되였다.

꼴롬비아의 이와 같은 어처구니가 없는 곤난한 사정을 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을 하려면 《한국》의 김영삼을 생각하면 된다.

김영삼은 《3당합당》을 통하여 《정권》을 잡은 후에 지금까지 함께 투쟁을 해온 민주인사들과 동지들에게 등을 돌리고 오히려 원쑤로 변하였다.

김영삼은 《중앙정보부》를 페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 리용하여 민주투사들을 탄압하여 《정권》의 안전을 유지하였다. 그뿐만아니라 그는 반통일친미정책을 오히려 더 강하게 추진하는 우익분자로 변신하였다.

 

 

      꼴롬비아혁명군(FARC)의 조직과 활동전개

 

꼴롬비아의 《보수주의우파》든 《진보주의좌파》든 모든 기성정치인들에게 실망하고 배신감에 분노를 느끼게 된 인민들은 참되고 새로운 해방의 길을 찾아 나서야만 하였다. 《국민전선》이 16년을 랑비하고 또다시 저들끼리 《보수당ㅡ자유당》량당체제를 유지하면서 반민족적인 친미로선을 고수할것이 불을 보듯 뻔한 실정이였다.

로동자, 농민, 지식인, 남녀할것없이 모든 반정부반군들은 아직 개간되지 않은 마르께딸리아쟝글과 오지로 숨어들어가 정착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꼴롬비아혁명군(Fuerzas Armadas Revolucionarias Colombia)을 조직선포하여 전국단일조직으로 출범하였다. 그뿐만아니라 꼴롬비아혁명군은 1964년 7월에 《토지개혁강령》을 전국에 발포하였고 나중에는 독립국가를 선포하였다.

또한 꾸바혁명의 성공에서 충격적자극을 받은 학생들이 1964년에 《꼴롬비아민족해방군》(ELN)을 조직하여 주로 농촌중심의 게릴라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시종 꼴롬비아혁명군(FARC)과 게릴라활동을 동조하고있다.

마르께딸리아쟝글에서 꼴롬비아혁명군을 조직한 기원에 대하여 그들자신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있다.

《꼴롬비아의 전통적인 정당들, 보수당ㅡ자유당의 야합으로 인하여 발생된 재앙을 겪으면서 마르께딸리아쟝글에 집결한 게릴라들은 생산물을 운반할수 있는 길과 아이들을 교육할수 있는 학교를 건설하였다. 당시 준군사집단이였던 반정부단체인 파라호스와 밀접한 련대를 맺었다.

한편 꼴롬비아정부는 우리들을 매카시적방식으로 몰아붙이면서 산적, 무법자, 국제공산주의의 첩자들이라고 협박하였다.

이후 꼴롬비아정부군의 공세가 림박해오자 우리는 의회, 교회, 국제사회에 호소하려 하였으나 정부와 미국의 간섭으로 인하여 무위로 돌아갔다. 우리 농민들은 마루란다를 중심으로 하여 최초에 48명이 무장하였다. 1964년 5월 27일에 미국은 마르께딸리아를 포위하고 미군이 직접 지휘하면서 우리를 위협하였다. 이때 마르께딸리아에 집결하였던 그룹이 〈꼴롬비아혁명군〉의 모체가 됐다. 이후 37년동안 미국과 꼴롬비아친미정권은 우리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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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우리를 향하여 꼴롬비아작전ㅡ전멸작전ㅡ협공파괴작전 등 다양한 명칭으로 군사작전을 감행하였다.

케네디대통령이 시작한 〈플랜 꼴롬비아〉도 역시 그러한 작전의 연장이다.》

케네디시절에 국제적공산주의를 경계하기 위하여 꼴롬비아의 게릴라를 전멸시키려고 《플랜 꼴롬비아》를 들고나왔다. 하지만 부쉬는 공산당이 아니라 마약으로 침략과 개입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미국은 꼴롬비아에서 게릴라와 마약(guerrillasㅡnarco), 두마리 파랑새를 잡으려고 케네디시대부터 부쉬때까지 수천억US$를 투자하였다. 하지만 파랑새는 꼴롬비아에 있지 아니하고 백악관지붕에 앉아있는것을 부쉬는 모르고있다.

미국의 꼴롬비아개입은 물론 석유의 리권이 포함되여있다. 그러나 보다 더 큰 문제는 남아메리카에 뿌리깊은 볼리바르정신으로 무장되여있는 여러 이웃나라들때문에 미국이 꼴롬비아에서 손을 떼지 않는 한 미국의 립장은 편할수 없다. 미국은 꼴롬비아에서 진퇴량난에 빠져있다.

꼴롬비아게릴라는 미국의 말처럼 공산주의자들이 분명히 아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우리에게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다른 뿌리가 있다. 우리의 뿌리는 혁명적그리스도교인이였던 Camelo Torre신부(1929~1966)와 체 게바라 등 다른 많은 라틴아메리카의 영웅들의 민족정신에 뿌리를 두고있다.》라고 주장한다.

꼴롬비아게릴라들은 대중의 자기 결정, 소수자에 대한 존중 그리고 풀뿌리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자본가들의 착취의 대상이 되고있는 원주민, 흑인, 빈민 그리고 녀성의 해방을 강력히 주장하고있다.

꼴롬비아게릴라는 세계 어느곳에 있는 게릴라들과 비교할수 없다. 그들은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으며 실질적으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1) 게릴라의 지도체제는 농민이거나 농촌과 깊은 련계속에 이루어지고있다. (2) 지리적으로 게릴라활동에 유리하며 지형에 친숙하다. (3) 게릴라들은 선거혁명보다는 정치협상에서 사회경제적개혁을 더 중요시하였다. (4) 꼴롬비아게릴라들은 완전히 스스로 재정을 조달하므로 외부의 압력이나 요구에 종속되지 않는다. (5) 게릴라들은 1984~1990년에 정부와 평화협정시기를 가졌다. 그때 3 000명의 중요한 운동지도자들이 전격적으로 암살을 당하였다. 여기에는 물론 미국의 정보원들이 개입되여있었다. 이로 인하여 게릴라들은 미국은 물론이고 제도권과 기득권자들과 융합한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교훈을 얻게 됐다. 미국은 꼴롬비아의 게릴라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이른바 《플랜 꼴롬비아》라는 작전계획을 세워놓고 케네디때부터 오늘까지 활용하고있다. 이 계획에 의하여 준군사집단인 꼴롬비아민병대(련합자위군ㅡAUC)를 조직하여 운영하고있다.

1만명으로 추산되는 민병대의 주요임무는 반정부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랍치와 암살 그리고 매수작전을 펴는것이다. 미국은 꼴롬비아의 테로집단명부에 FARC, ELN은 넣으면서 AUC는 제외하고있다. 민병대는 마약조직에 깊이 침투하여 자금을 조달하고있다. 300명으로 추산되는 미국의 군사고문단이 이 민병대를 용병화하여 리용하고있으며 용병들은 10만US$를 년봉으로 받는다고 한다.

미국은 꼴롬비아군부내에서 협조적인 간부들에게는 보상하고 미국에 비협조적인 사람들에게는 징벌하거나 금전적인 지레대를 사용하고있다. 미국의 힘이 꼴롬비아에서 막강하지만 실제 꼴롬비아인민들의 시각은 랭담하다. 그들은 미국이 꼴롬비아의 내전을 민족전쟁으로 확대시키고있다고 말한다. 꼴롬비아농민들의 눈에 비친 미국은 화학고엽제를 더 많이 사용, 코카나무보다 다른 농작물들을 더 많이 박멸시키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제거하기 위하여 더 많은 군사력이 필요한 나라라는것을 의미한다.

군인들이 마약퇴치를 한다고 농민들을 쫓아내고 가정을 파괴시키면 시킬수록 그 집의 자식들은 곧바로 게릴라가 된다는 사실을 미국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있는듯 하다. 미국이 꼴롬비아게릴라에 대하여 과소평가하고있는 점은 FARC가 기본적으로 농민들의 리익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 투쟁하고있다는 점이다. 게릴라들에게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그것은 사회정의를 실현시키는것뿐이며 사회복지에 복무하는것이 그들의 유일한 이데올로기이다.

게릴라들은 농민들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농민들이 스스로 무장하도록 하고있다. 그러는 리유는 게릴라들의 삶은 전적으로 농민들의 삶과 동체를 이루고있기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반제반미꼴롬비아게릴라투쟁이 최후의 승리를 위하여 오늘까지 지속되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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