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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4. 남아프리카공화국 우파정권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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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2,855회 작성일 21-11-02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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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류태영 박사

2. 아프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침략과 력사적교훈

 

□ 남아프리카공화국 우파정권몰락

 

남아프리카공화국(South Africa)의 미래가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고있다. 지금 아프리카공화국이 중도우파로 인하여 몰락하고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현재 인구 4 480만명을 갖고있는 나라로서 대부분이 흑인(79%)이고 백인은 9. 6%에 불과하지만 오래동안 백인통치하에서 지배당해왔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350여년동안 영국의 식민통치하에 있다가 1994년에 만델라의 감옥생활 27년의 장기투쟁의 결과로 영국이 물러나고 독립을 쟁취했다. 독립투사이며 건국의 아버지인 만델라는 흑인초대대통령으로 1994~1999년까지 집권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신생정부의 기초를 닦는데 성공했다. 그는 1993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여받았다.

1999년에 평화적정권교체로 음베키대통령이 정권을 인수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제2대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2008년 5월 11일부터 전세계에 머리기사로 퍼져나가고있는 소식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아파타이드에서 제노포비아》로서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하고있다.

백인우월주의적인 인종차별정책에 350여년동안이나 시달렸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이제는 흑인들끼리 제노포비아 즉 《외국인혐오증》으로 무차별학살만행이 벌어지고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소식이다. 이번 학살만행으로 인하여 5월 16일부터 19일까지 3일동안에 22명의 외국인흑인이 숨지고 수십여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200여명이 체포됐고 3 000여명이 주거지에서 피신을 했다.

오늘 《흑백대결》로 선거가 치러지는 상황을 바라보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대결》의 진상은 과연 어떠한가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력사적관점에서 살펴보면 미국의 흑백문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문제는 근원적으로 동질의 문제이며 시대적으로도 역시 동시적류사성을 가지고있다.

 

 

      유럽의 백인들 남아프리카 침범

 

유럽의 백인들은 아프리카의 최남단,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선을 타고있는 케이프반도를 두고 《우리가 이곳에 오기 전에는 이 땅은 비여있었다.》라고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있다.

고고학적자료에 의하면 약 1만년전 석기시대와 철기문명시대의것으로 보이는 유품들이 남아프리카지역에서 많이 발굴되였다.

쇼나왕국이 1200년경에 이곳에서 번영한것으로 보고있으며 또한 주요부족들인 줄루족, 코사족, 바소토족, 바페디족, 벤다족, 츠와나족, 총가족, 스와지족, 은데벨레족들이 남아프리카의 전역을 배회하고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옛날부터 11개 공용어를 가지고있는 다부족의 나라이다.

백인들의 최초의 침입은 1652년에 네데를란드의 《The Dutch India company》의 리비크가 130명의 남녀로 구성된 탐험대를 이끌고 상륙한 때부터 시작됐으며 그후 많은 네데를란드인들이 본국에서 남아공으로 이주해왔다.

네데를란드 개신교, 장로교(Presyterian)의 나라인데 로마카톨릭교회의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추구하여 1700년대에 네데를란드인들이 미지의 나라 남아공으로 이민와서 정착했다.

뿐만아니라 네데를란드의 장로교는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와도 적대적관계로 멸시와 박해를 받아온 력사를 가지고있다.

하지만 남아공에 정착한 네데를란드인들의 이민력사가 보여주는 그들의 발자욱은 장로교의 신도들이라기보다는 세속적침략자들의 행위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장로교는 《선택론》이라고 하는 특이한 교리를 주장하였다.

 

 

      《선택론》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태여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신의 《선택》에 의하여 《나는 백인으로 태여났고 너는 흑인으로 태여났다.》라고 해석을 한다. 백인은 구원을 받도록 선택을 받았으나 흑인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네데를란드인들은 장로교의 기본교리를 악용하여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데 구실과 도구로 삼았다.

네데를란드인들은 영국인들보다 약 100~150년 먼저 남아프리카에 상륙했다. 그들은 흑인들에게 철저한 인종차별적교육과 장로교의 보수적전통문화에 맹종하도록 교육했다.

백인들은 신의 선택을 받은 우월한 인종이기때문에 선택을 받지 못한 렬등한 흑인들을 지배하고 교육시킬 의무와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학교에서 흑인들에게 백인을 위해서 봉사하는 노예제도를 가르칠뿐 제대로 된 학과를 가르치지 않았으므로 흑인들은 읽고 쓰는것도 모르는 문맹자로 만들었다.

남아프리카에서 네데를란드인들을 보어인이라고 부르는데 네데를란드어로 농부라는 뜻이다.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살고있는 보어인들은 수세기동안 살아온 네데를란드인의 후손들이다. 또 한편 혼혈된 후손들도 계속 번창하여 수가 많아졌다. 혼혈된 후손들을 《보어족ㅡBoer》이라고 부른다.

혼혈이든 혼혈이 아니든 어쨌든 네데를란드의 후손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땅에서 절대다수의 《터주대감》으로서 네데를란드인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있다.

 

 

      영국인들의 출현

 

영국인들이 선교사들을 동반하면서 남아프리카에 처음 상륙하여 식민지침략을 시작한것은 1795년경이였다. 영국인들은 흑인원주민들을 침략의 대상으로 여기기는 했지만 그러나 흑인원주민들보다 더 중요한 우선적침략의 대상은 보어인들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인들은 보어인이 강력한 경쟁자인것을 잘 알고있었다.

유럽의 중세기력사는 종교들간에 전쟁의 력사였다. 대영제국의 국교인 성공회는 로마카톨릭교를 적대시할뿐만아니라 기타 소수의 나라들의 교회들을 이단시하여 적대시하였다.

특히 제네바의 장로교 신학자 칼빈의 국가관과 신학적사상을 영국의 성공회는 반대했다. 장로교의 전통과 장로교의 특이한 교리인《예정론》을 영국교회는 부인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아프리카를 침략하는데 있어서 《터주대감》인 네데를란드의 후손들과 그후에 온 늦각이(New Comer)인 대영제국의 후손들이 서로 격렬한 싸움을 벌렸다.

종교적이질감이 문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령토점령을 위한 영국인들과 네데를란드인들사이의 대결이였다. 고래들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비극이 흑인원주민들의 비극적운명이 되고말았다.

1790년대에 처음으로 남아프리카에 상륙한 영국인들은 케이프를 전격적으로 식민지화하고 점점 북상하여 반투족을 정복하는 기세를 과시하였다.

영국인들의 북상에 불안을 느낀 보어인들은 1830년에 노예들을 거느리고 새 지역으로 대이동을 했다. 보어인들은 오린즈강과 발강을 건너 이른바 《대이동》(Great Trek)을 개시하여 서북 내륙지대(지금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인 요한네스부르그)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오린즈자유국 그리고 트란스발공화국 두 나라를 창건했다.

영국침략자들은 남아프리카전역을 대영제국이 통치하는 식민지로 만들것을 목표로 하여 령토확장에 전력을 다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보어인들은 새로 창건한 두개의 공화국만은 절대로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지 않는다는 확고한 정신으로 독립된 국가라고 강력히 선포해나섰다. 네데를란드의 자존심을 분명히 밝힌것이다.

보어인들이 독립국이라고 강력히 선포한 트란스발공화국에 놀라운 행운이 찾아왔다. 그 행운은 《노다지》(No Touch)라고 말할수 있는 무진장한 금광이 처음 발견된 사실이였다.

전세계의 금보유의 25%를 차지하는 금광이 트란스발공화국에 매장되여있었다. 금뿐만아니라 다이아몬드도 대량으로 묻혀있었다.

마침내 1899년에 노다지 금과 다이아몬드때문에 영국과 보어인 두 나라사이에 큰 전쟁이 일어났다. 금광의 발견이 영국인에게는 축복이지만 보어인들과 흑인들에게는 재앙이 되고말았다.

 

 

      보 어 전 쟁

 

보어전쟁은 1899년에 시작하여 1902년까지 1차전쟁과 2차전쟁으로 치러졌는데 그 기간 무고한 어린이와 녀성 2만 7 927명이 강제수용소안에서 기근과 질병으로 모두다 죽었다.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였나?

보어인들이 새로 창건한 트란스발공화국에 무진장의 금이 묻혀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금에 목마른 영국인들은 물밀듯이 몰려들어 거주권을 달라고 강요했는데 보어인들이 거절함으로써 이를 구실삼아 전쟁을 일으켰다.

보어인들은 농부에 불과했지만 1차전쟁때 총과 대포로 무장한 민병대 5만명이 영국군을 제압하고 물리쳤다. 하지만 이것이 영국에 큰 충격과 함께 보복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영국은 2차전을 개전하고 보어인민병대를 사방으로 포위하였으며 217일동안 집중공격을 가하여 전멸시키고 이 지역을 장악했다.

영국군은 보어인민병대를 도와준 흑인들까지 원쑤로 취급하고 보어인과 흑인들의 주택 3만여가구를 불태웠다.

1차전쟁과 2차전쟁이 모두 끝난 후 1902년 5월 31일에 영국과 보어인은 《베레니킹조약》을 맺고 보어인들이 창건한 오린즈자유국과 트란스발공화국은 독립국의 존엄을 상실하고 영국의 식민지에 소속되고말았다.

영국은 남아프리카전역을 장악하고 식민지통치의 기반을 확립했다. 1910년에 영국은 드디여 남아프리카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창건했다. 새로 창건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백인주권의 공화국이며 흑인들은 전과 다름없이 학대와 멸시로 노예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처지였다.

이 새로 창건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4대지역을 포함하고있는데 케이프지역, 나탈지역, 오린즈지역 그리고 트란스발지역 등이다.

지금까지 초기침략의 력사는 네데를란드인들과 영국인들간의 세력다툼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백인들끼리의 전쟁이였다. 흑인들은 싸움의 대상이 못되고 순전히 착취의 대상일뿐이였다.

하지만 1910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처음 창건된 이후부터는 싸움의 양상이 크게 변화되여 백인과 흑인이 싸우는 《흑백전쟁》의 시대가 도래했다. 물론 백인들사이에 아직 남아있는 사소한 리해관계와 자존심때문에 벌어지는 분쟁이 다소 있기는 했지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흑백전쟁》에 있어서 보어인이든 영국인이든 하등의 차이가 없이 모든 백인들은 무조건 하나가 된다.

새로 수립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정당정치제도로 시작했으며 처음 몇년동안은 보어인계의 정당이 주도적역할을 하고있었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시기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영국편에 서서 도이췰란드와 싸웠다. 1948년시기에는 우익정당인 국민당(National Party)이 정국을 주도했다. 국민당은 《인종분리정책》을 제정했다. 이 《인종분리정책》은 법률적으로 흑인차별대우를 공식화하기 위한 법률이다.

 

 

      인종분리정책, 아파타이드

 

백인들이 지난 시기 흑인들을 노예로 삼아 착취를 했지만 이제는 흑인들이 취급하기 곤난한 《애물단지》로 변했다. 그래서 백인들이 고안해낸것이 《인종분리정책》(Apartheid)이였다.

1948년에 《인종분리정책》을 법률적으로 제도화하는데 있어서 모든 백인들은 공동으로 역할을 했지만 그 정책의 가혹한 법률적조항들을 채택하도록 한것은 뒤에 숨어있는 영국이였다. 영국인들은 케이프에서 식민통치를 시작한 초창기부터 통행법(Pass Law)을 제정하여 흑인들의 행동을 일일이 감시하고 통제하고있었다. 이 통행법은 영국인들이 살고있는 지역에 흑인들이 절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길을 차단하는 법이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새로 채택한 《인종분리정책》의 여러가지 법적조항들은 영국인들이 만든 《통행법》을 견본으로 삼아 작성한것이다.

《통행법》이란 어떤것인가?

인디아의 간디는 명망높은 젊은 변호사였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유색인이라는 리유로 통행의 제한과 온갖 수모를 당했다. 간디가 1등석 차표를 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3등석으로 옮기라고 명령을 했다. 간디가 명령을 거부하자 경찰은 그를 기차밖으로 내던졌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찰은 《인종분리정책》이라는 법률적권한을 가지고있기때문에 간디에게 취한 조치가 법적으로 하등의 잘못이 없는 조치로 생각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제정한 《아파타이드》의 주요법률의 일부를 소개한다.

인종간 결혼금지, 백인과 유색인의 성관계금지, 모든 등록증에 인종표를 반드시 명시, 반공법 엄수, 인종구역 거주제한, 공공시설의 흑인공용금지, 취학제한, 이주제한, 시민권법에 의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모든 흑인들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제정한 《인종분리정책》에 의하면 백인들은 무소불능의 권리를 가지고있는 반면 흑인들은 노예일뿐만아니라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도록 되여있다.

1948년에 시작된 《인종분리정책》은 42년동안이나 계속되였다. 1990년 2월 2일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마지막 백인대통령인 D. 클레르크대통령이 최악의 악법인 《인종분리정책》의 페지를 선언함으로써 종말을 고하고말았다.

어찌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극우정권이 《인종분리정책》을 페지했을가?

그 리유는 랭전종식후 국제정세의 변화로 인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좌경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선심이나 회개나 개혁이 아니라 좌경을 사전에 막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1990년 2월 11일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정권은 27년동안 감옥에 갇혀있던 대표적인 흑인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를 석방했다.

 

 

      인종차별철페운동의 영웅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분리정책》의 철페운동의 영웅 만델라는 누구인가?

넬슨 만델라는 1918년에 이스턴케이프에서 태여났으며 34살에 변호사가 되여 정치활동을 하다가 1963년 45살에 수감되여 종신형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였다. 기나긴 투옥과 사형이라는 압제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온 삶을 인종분리정책을 반대하는 투쟁에 바치였다.

만델라의 27년동안의 감옥살이에 대한 이야기는 허다하지만 꼭 이 하나만 이야기를 하겠다. 감옥에서도 인종차별이 극심한데 만델라는 최악의 취급을 받아 음식은 말할것도 없고 면회는 6개월에 한번씩 가족과 면회할수 있었고 한사람의 편지만 허락되였다.

만델라는 많은 사람들의 편지를 거부하고 남아메리카의 혁명영웅 체 게바라의 편지만을 받았다고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정권은 급변하고있는 국제정세에 영향을 받아 할수없이 1990년에 《인종분리정책》을 철페하고 만델라를 감옥에서 석방했다.

석방된 만델라는 1993년 75살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76살때인 1994년 4월 26일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력사상 처음으로 모든 인종이 함께 참여하는 민주적총선에서 당선되여 최초의 초대흑인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정권시대의 마지막 백인대통령이였던 D. 클레르크대통령은 총선에서 부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기적같은 놀라운 사실이였다. 백인이 흑인밑에서 부대통령을 한다는 이 사실은 지금까지의 력사를 돌이켜볼 때 례사로운 일이 아니였다.

만델라흑인대통령정권이 처음 출범함으로 인하여 350여년동안의 백인통치의 식민시대는 사실상 끝이 났고 흑인들이 자주권을 행사할수 있는 새시대가 도래하게 되였다.

만델라대통령은 집권당인 《남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당수로서 5년동안 집권을 하다가 1999년에 당시 음베키부통령에게 정권을 인계하고 은퇴하였다.

만델라대통령은 수없이 많은 공로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아직 완전히 성취하지 못한 자기의 꿈과 과제들을 후임자에게 남겨놓았다. 그가 남겨놓은 꿈과 과제들에 대하여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수 있다.

 

* 흑백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 성장보다 분배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 모든 국민에게 주택, 전기, 수도 등 기본시설 등을 제공해야 한다.

* 보건과 교육에 대한 사회적제도화는 우선적이여야 한다.

 

만델라대통령이 뿌리깊은 백인식민통치로부터 정권을 인수받고 5년동안의 짧은 집권기간에 이룩한 공적을 일일이 평가하기보다는 차라리 그의 리상과 꿈을 평가하는것으로 대신하는것이 옳을것이다.

인간의 옳고 좋은 점은 감춰질수 있지만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만델라에 대한 평가는 아프리카 8억 흑인들뿐만아니라 전세계에 흩어져있는 모든 유색인(colored people)들의 마음속에서 결코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기억될것이다.

45살에 종신형을 선고받고 27년의 옥중생활에 백발이 되여 72살의 나이에 자유와 해방을 찾은 만델라의 굳은 신념과 정열 그리고 민족애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과 백인모두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게 될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망친 타보 음베키대통령

 

타보 음베키대통령은 1999년 6월 14일에 만델라대통령의 후임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다음기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음베키대통령은 1994~1999년에 만델라대통령밑에서 부대통령으로 있다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음베키대통령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집권여당인 《남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총재이기도 하며 집권초기에 공공부문 부채가 60%인것을 2005년에 35%이하로 줄였고 외환보유고도 크게 증가하여 경제성장에 일정하게 능력을 발휘했다.

2005년 《뉴욕 타임스》는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100인중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음베키대통령을 포함시켰다.

하지만 2008년에 65살인 음베키대통령은 2005년에 제이콤 주마부대통령을 뢰물부정사건을 문제삼아 부대통령자리에서 축출했을뿐만아니라 그에 대하여 《좌경》이라는 의심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축출을 당한 주마는 2007년 12월 민족회의(ANC) 총재경선에서 현직대통령 음베키를 밀어내고 승리하여 집권여당의 총재위치를 차지하고 권좌에 복귀했다.

음베키대통령이 집권여당인 ANC의 총재직에서 밀려났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미국의 유력지 타임지가 흑인 음베키대통령을 영향력있는 인물로 선정했다는 사실이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음베키대통령은 2004년에 재선에 당선되여 2009년 4월까지 아직 6개월의 임기를 남겨놓고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음베키대통령은 임기 6개월을 남겨놓고 지난 9월 21일에 전국에 방영되는 TV방송을 통하여 대통령직사퇴를 전격 발표했다.

보도에 의하면 남아프리카공화국 집권당인 ANC는 9월 20일에 의회원 400석중 3분의 2의 회원들이 음베키대통령의 퇴임안에 찬성하였다. 지난해 12월 전당대회에서 음베키대통령이 집권당 총재직을 주마에게 빼앗긴 사건으로 인하여 음베키대통령의 립지가 약화되였다.

만델라초대대통령의 후광으로 부대통령과 대통령이 된 후 재선까지 당선되여 앞으로 임기 6개월을 남겨놓고있는데 갑자기 대통령직에서 쫓겨나는것은 결코 례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 원인과 리유가 무엇일가?

음베키대통령의 실정에 대한 요점만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외국자본들의 무분별유치로 인하여 정권은 강화되지만 대중은 또다시 외국자본의 노예가 되고있다. 빈부의 격차로 인하여 사회는 량분대립되고있다.

* 국제금융기구(IMF)와 같은 세력은 이 나라의 사회복지를 위한 지출을 못하게 함으로써 국가경제는 호전이라고 선전을 하지만 서민들에게는 단지 그림의 떡으로 되고있다.

* 음베키대통령은 만델라 전 대통령의 후광으로 집권초기에는 성공하는것처럼 보였지만 투쟁의 경험은 없고 외국류학으로 쌓은 지식으로 인하여 서민층의 빈곤에 대한 리해가 근본적으로 박약하다.

*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또다시 미국의 신자유주의와 독점자본주의에 의한 우파정권의 등장으로 인하여 흑백의 빈부격차는 여전하고 또한 흑인사회내부에서도 소수의 흑인들만 부자가 되고있다.

* 미국의 강요에 못이겨 음베키대통령은 개방과 구조조정정책을 비롯하여 공기업들의 무질서한 민영화정책, 국제금융기구(IMF)와 외국자본도입으로 인하여 분배의 불공정 등 허다한 문제들이 산적해있다.

 

이로 하여 절대다수의 흑인빈곤층실업자들이 음베키대통령을 향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 너에게 실망이야!》라고 웨치면서 길거리에 뛰쳐나와 음베키대통령을 향해 규탄시위를 하고있는것이 큰 문제이다.

성난 사람들은 항의와 분풀이로 외국인로동자들에 대한 무차별살인행위, 《제노포비아폭동》을 일으켜 세계를 놀라게 하고있다. 항쟁발생 3일에 22명의 외국로동자가 사망했고 수백명이 부상당했으며 그리고 3 000여명의 외국인난민이 발생하는 참사가 빚어졌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안은 있는가?

 

음베키대통령 축출에 앞장섰던 세력은 민족회의(ANC)내의 젊은 세력이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경제혜택을 골고루 배분받지 못하는 빈곤층의 불만에 동조하는 세력이 바로 민족회의(ANC)내의 젊은 세력들이다.

2009년 4월에 있을 대통령선거에서 추마총재가 당선될것이 거의 확실시되고있다. 음베키대통령의 사퇴로 친기업정책도 흔들릴 가능성이 있을것으로 예상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민족회의(ANC)가 투표로 대통령을 뽑는데 임기는 5년이다.

주마가 다음기 대통령이 될것으로 예상하고있는데 주마는 어떤 인물인가?

주마(64살)는 음베키대통령처럼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음베키가 영국으로 피신하여 석사학위를 받으면서 공부할 때 주마는 17살의 나이로 민족회의(ANC)에 뛰여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분리정책을 철페하기 위하여 투쟁하다가 투옥되여 10년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7주마의 반대파들은 그의 경제정책이 《좌파 포플리즘》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주마는 기득권층을 싫어하는 민족회의(ANC) 평회원들의 절대적지지를 받고있다. 주마는 또 원주민의 절대다수부족인 줄루부족출신이기도 하다.

주마는 서민층과 로동자를 대변하는 좌파적립장을 강화하면서 청년과 녀성동맹, 남아프리카공화국 로조회의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사회당으로부터 지지를 받아 정치세력을 확장했다.

만일 주마가 예상한대로 대통령이 된다면 그는 분명히 경제개혁을 앞세워 급진적개혁을 추진할것으로 보인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서는 벌써부터 우려의 전망을 력설하고있다. 미국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민족회의(ANC)가 좌파에 포로되여 아무 힘도 못쓴다고 념려와 비난의 목소리를 내고있다.

이전에 미국의 빌 클린톤대통령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공식방문을 계획했던적이 있다. 그때 《남아프리카공화국 사회당》이 클린톤의 남아프리카공화국방문에 앞서 그에게 보낸 공개편지는 매우 흥미롭다. 그 편지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당신의 남아프리카공화국방문을 환영하지 않는다. 클린톤씨, 당신이 미국의회에 제출한 〈아프리카기획조항〉이라는 나쁜조항을 우리에게 강요하면서 우리 나라를 방문하려고 한다. 그 조항은 국제금융기구(IMF), 세계은행 (World Bank)의 명령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그것에 의해 우리 나라의 주권과 경제적간섭을 목적하고있다.

당신은 우리 나라의 모든 기업체들을 사유화시키고있으며 당신의 제 정책들은 우리 나라의 빈곤층과 흑인들과 다른 소수민족들에게 더 많은 빈곤을 조장하고있다.》

만델라대통령도 음베키대통령도 흑인들의 토지무소유문제를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했다.

2001년 7월에 《토지없는 사람들의 운동》(LPM)이 결성되였다. 이 운동은 력사적으로 백인들이 식민시대에 불법적으로 토지를 강탈했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소유하고있는 토지를 되찾기 위한 농지개혁법을 제기하고있는 운동이다.

오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실질적으로 토지문제의 해결없이 말로만 식민주의청산을 론의하고있는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45%이상의 농촌인구에게 여전히 인종차별적식민통치의 유산이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만델라ㅡ음베키 두 정권하에서 토지반환의 약속은 전혀 리행되지 않았다.

주마는 앞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근본적변화를 요구하는 민심을 사로잡을것으로 보인다. 오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로동자들과 빈민대중들은 점차 여러모로 적극성을 띤 저항운동을 전개해나가고있다.

주마가 급진주의적지도자로 부상하고있기는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좌파의 과제는 적극적인 정치적대안이 필요하다. 우파적으로 말하나 좌파적으로 행동하는 풀뿌리지지기반을 전국적으로 조직하여 주마를 위한 《정치적대안》을 튼튼히 세울수 있을지 향후 주목거리고 되고있다.

음베키대통령이 임기 6개월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민족회의(ANC)가 그를 축출했다는 사실은 여러가지로 의미심장한것으로 진단된다. 이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운명을 좌우할 진보주의적정치인들과 정치적의식의 눈을 뜬 진보적근로대중의 미래가 세계의 관심사로 되고있다는것을 보여준다.

한편 우리 민족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걸어온 발자취에서 많은 교훈들을 얻을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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