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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민 칼럼] 40년 만에 열린 통일열사 이재문 선생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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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2,929회 작성일 21-11-2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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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민 칼럼] 40년 만에 열린 통일열사 이재문 선생 추모제

“남민전 사건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시작돼야”

안영민 평화의길 사무처장


“오늘 추모제는 40년 만에 처음 공개적으로 진행하는 행사입니다. 그동안은 유족들과 남민전 동지들 중심으로 추모행사를 조용히 치러 왔습니다. 남민전이 내세운 목표는 박정희 유신독재 타도와 반외세 자주화입니다. 요즘 민족민주단체에서 주장하는 자주통일이 남민전의 핵심강령이고 정신입니다. 남민전의 정신은 오늘에도 여전히 살아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가야 할 우리 운동의 좌표입니다.”



2021년 11월 20일 12시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묘역에 있는 고 이재문 선생 묘소 앞에서 열린 ‘통일열사 이재문 선생 40주기 및 남민전 동지 합동추모제’에서 권오헌 선생(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폐암으로 5년째 투병 중인 권오헌 선생은 남민전 활동 시절 수배 중인 이재문 선생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함께 지내기도 했다.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습니다. 동지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자신에게는 엄격했던 지도자였고, 혁명가였습니다. 이제라도 이재문 선생과 남민전 사건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동지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자신에게는 엄격했던 혁명가

1980~9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학생회실 한쪽에 걸려 있던 고 김남주 시인의 <전사 1>이라는 시를 기억할 것이다. 당시에는 ‘운동가라면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쓴 시라고 여겼겠지만, <전사 1>은 김남주 시인이 감옥에서 이재문 선생의 죽음을 접하고 쓴 추모시였다. 시에는 이재문 선생의 삶과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

……

(전략)

그리고 동지 위하기를 제 몸처럼 하면서도

비판과 자기비판에 철두철미했으며

결코 비판의 무기를 동지 공격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조직생활에서 그는 사생활을 희생시켰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가리지 않고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먼저 질서와 체계를 세워

침착 기민하게 처리해 나갔으며

꿈속에서도 모두의 미래를 위해

투사적 검토로 전략과 전술을 걱정했다.

……

(후략)




이재문 선생은 1934년 7월 9일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1954년 경북대 정외과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대구일보> 정치부 기자로 일했다. 4.19직후에는 ‘통일민주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했고, 1961년 2월 <민족일보>가 창간되자 정치부 기자로 참여했다. 그 뒤 5.16 군사쿠데타로 <민족일보>가 폐간되자 <영남일보> <매일신문>의 기자로 근무하다 1964년 8월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뒤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구경북지부에서 활동하다 기나긴 수배 생활로 들어가게 됐다.

특히 인혁당 재건위 사건 때는 1급 수배자 신분이 되었고,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여덟 분이 대법원 선고 다음 날 사형집행을 당한 뒤, 유신독재와의 전면전을 결심하고 투쟁 조직을 구상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1976년 2월에 결성된 조직이 바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이었다. 이재문 선생은 남민전의 서기에 추대됐고, 1979년 10월 4일 체포될 때까지 유신독재 타도와 민족해방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했다.

남민전은 공안기관이 해방 이후 최대 지하조직이라고 부를 만큼 큰 조직이었다. 산하에 한국민주투쟁위원회를 두고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등 각계각층의 핵심을 망라한 조직이었다. 체포 이후 이재문 선생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이재문 선생에게는 사형이 선고됐고, 수감생활 도중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하지만 공안당국은 이를 방치했고, 결국 1981년 11월 22일 서울구치소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던 신향식 선생도 1982년 10월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했다.)




이재문 선생의 장조카인 이진일씨가 유족을 대표해 감사의 인사를 했다.

“작은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서울구치소로 갔습니다. 제가 직접 작은아버지를 집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당시는 장례조차 제대로 치를 수 없었던 엄혹한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이었습니다. 결국 인천의 한 성당에서 미사를 올리고 가톨릭 묘지에 모셨습니다. 그 뒤로도 추모행사는 꿈도 못 꾸었습니다. 1988년 12월에 양심수 석방 조치로 남민전 동지들이 출소하고 나서 그 분들과 조용히 추도식을 올렸습니다. 오늘 이렇게 많은 분들과 뜻깊은 추모제를 열게 돼 정말 감사합니다.”


모란공원에서 40년 만에 만난 남민전 동지들

2019년 3월 30일, 이재문 선생은 남민전을 함께 이끌었던 중앙위원 신향식, 김병권 선생과 함께 모란공원으로 이장했다. 40년 만에야 전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오늘 추모제는 모란공원에 안식 중인 남민전 전사 박석률 선생(2017년 작고)과 남민전 산하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 투사였던 김희상(2011년 작고) 김충희(2016년 작고) 선생 부부를 비롯해 세상을 떠난 스물 네 명 남민전 동지들의 합동추모제를 겸했다.

이재문 선생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인혁당 사건과 필연적으로 만난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던 이재문 선생은 1960년대 중반부터 대구경북지역을 중심으로 변혁운동을 전개하면서 서도원, 도예종 선생 등 인혁당 관련자들과 꾸준히 만나왔다. 이들은 특히 1960년대 후반 이재문 선생이 대구 와룡산에서 염소농장을 운영할 때 이곳을 아지트 삼아 만남을 이어갔다. 이들은 해방 이후 변혁운동에 대한 평가와 한국사회의 성격, 미국 문제, 북과의 관계와 통일 문제 등을 폭넓게 토론했다. 또한 학생운동에 대한 지도와 노동운동, 농민운동에서의 핵심 발굴 등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해나갔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결국 공안기관에 포착되면서 1974년 인혁당 재건위라는 조작 사건으로 외화되고 말았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이전부터 수배 상태였던 이재문 선생은 체포를 면하고 지하 깊숙이 들어갔지만, 당시 구속된 동지들은 결국 대법원 판결 다음날 여덟 분이 사형 집행을 당하고 말았다.

이 일을 겪고 난 뒤 이재문 선생은 박정희 유신독재와의 물러설 수 없는 전면 투쟁을 결심했고, 이를 주도할 투쟁 조직을 준비했다. 그렇게 해서 1976년 2월 결성된 조직이 바로 남민전이었다. 남민전은 결성 당시 사형 당한 인혁당 사건 관련자 여덟 분의 속옷을 모아 전선기를 만들었다. 그 깃발 아래에서 남민전 전사들은 먼저 간 동지들과 목숨 걸고 함께 하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이다.





여전히 금기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남민전 사건의 재평가

남민전 사건은 현재까지도 금기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사건 당시 워낙 어마어마한 지하조직으로 발표되면서 민주화운동에서도 함께 하기를 꺼려 했다. 1988년 양심수 석방 당시 마지막까지 논란이 되었던 것도 남민전 사건이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1980~90년대 공안사건에 대한 재평가와 민주화운동 관련 심사에서도 남민전은 배제되어 왔다. 유신독재에 맞서 전국적 규모로 가장 치열하게 투쟁했던 조직이 남민전이었지만 조직의 명칭이나 혜성대 활동, 북과의 연계 시도 논란 등이 그 역사적 의미와 역할을 외면할 수밖에 없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남민전의 활동과 강령이 유신 말기에는 민주화운동의 틀을 뛰어넘어 시대를 앞서간 급진적 내용이었을지 모르지만 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운동에서는 기본적인 인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는 남민전 사건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운동은 남민전이 목숨 걸고 개척한 길을 따라 걸었다. 남민전이 주장한 반외세자주화와 민족통일에 대한 인식은 더 이상 급진적일 수 없는 보편적인 시대 과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남민전 역시 정당하게 평가를 받아야 한다. 관련된 희생자들을 우리는 제대로 추모할 수 있어야 한다. 40년 만에 공개적으로 열린 이재문 선생과 남민전 동지들의 추모제는 그래서 더욱 의미 있고 귀한 자리였다.

이재문 선생은 남민전 사건의 항소심 선고 때,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던 안재구, 최석진 두 동지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자 눈물을 흘리며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재판정에서 이재문 선생은 1960년대부터 동지적 관계를 맺어온 안재구 교수의 손을 잡고 “부디 살아서 꼭 우리들의 역사를 후대에 전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 당부는 오늘에도 이어진다. 남민전의 역사를 기억하고 후대에 올바로 전해야 하는 것은 자주 민주 통일의 정신을 지켜 나가려는 우리 모두의 역할일 것이다.


<민족통신 강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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