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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대지의 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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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553회 작성일 21-12-28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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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17년이 지나 새 고장에서


2


허명숙이 연백벌을 떠나 다른 고장으로 옮겨간다는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였다. 그가 말한것처럼 큰 나무를 뿌리채 뽑아 옮겨심는것과 같다 할수 있었다. 실무적으로는 가산들을 자동차에 싣고 식구들과 같이 옮겨가면 되는 일이였다. 그러나 그동안 정을 붙인 농장원들과 헤여지고 정든 땅을 떠나자고 하니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명숙은 이미 처녀시절에 여기 연백벌에서 평생 농사를 지을 결심을 했었다. 그는 자기가 이 고장을 뜨게 될수도 있다는것을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 부닥쳤으니 무척 당황했고 지어 그는 믿어지지 않기까지 했다.

허명숙은 정든 고장을 떠나기 싫어 자기가 조동되여간다는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서운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전야를 돌아보고 작업반들에 들려보며 시간을 보냈다. 바다기슭에까지 펼쳐진 저 넓은 들 그 어디엔들 그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곳이 있으랴. 작업반사무실들과 지붕이 높은 탈곡장들이 왜 오늘따라 이처럼 정답게 안겨들가. 관리위원장으로 일하는 동안 자기도 성장하고 농장도 번성해졌으며 탁아소, 유치원들을 새로 깨끗하게 짓고 확장했다. 학생들의 글읽는 랑랑한 목소리와 풍금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소리 흘러나오는 소학교, 중학교의 해빛밝은 창문들은 오늘 별로 반짝이는듯 했다. 상점과 리발소, 목욕탕도 문화주택이 들어앉은 마을과 어울리게 다 새로 짓고 꾸렸다.

이 세상에 비밀이란 없는가보다. 리당비서의 입에서 나왔는지 군경영위원회에서 알려주었는지 어쨌든 허명숙이 타고장에 조동되여간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쫙 퍼졌다. 만나는 사람마다 서운해하며 인사들을 했다. 이전 리당위원장 라순돌의 안해가 관리위원장사무실에 뛰여들다싶이 하더니 다짜고짜로 명숙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쏟는것이였다. 명숙이가 22살에 이 농장 관리위원장으로 배치되여와서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또 낯선 고장이여서 정을 붙이지 못하고있는데 라순돌이 딸처럼 따뜻이 보살펴주고 하나하나 일을 배워주며 이끌어주었었다.

그는 명숙이가 제일 못 잊어하는 은인이였다. 그는 이 연백벌에 땀과 피를 흘렸고 지금은 땅속에 묵묵히 묻혀있다.

전쟁시기 월남한 남편때문에 마음고생을 했지만 우리 당의 품에서 삶을 새롭게 개척하고 모범분조장까지 된 녀인도 허명숙을 찾아왔다.

이 사람들은 명숙이와의 인연이 혈육보다 더 깊다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이런 사람들과 만날수록 명숙은 정든 고장을 뜨고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커갔다. 하지만 어차피 잠정협동농장으로 옮겨가야 했다.…

하루는 도당책임비서 석영진이 명숙이를 불렀다. 몸이 나고 얼굴이 불깃한 석영진은 고혈압과 심장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였다. 그는 명숙이를 반갑게 맞아들이고 차를 마시라고 부어주기까지 했다. 명숙이는 그가 자랑하고 아끼는 관리위원장들중의 한사람이였다.

농사작황과 가을걷이와 탈곡, 가을갈이 등 농장에서 벌어지고있는 일들에 대하여 일일이 물어보고 대답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석영진이는 명숙이가 대견해서 노상 웃는 얼굴이였다.

《명숙동무.》 이윽하여 정색하며 그가 말했다. 《내 동무와 중요하게 의논할 문제가 있소.》

명숙은 도당책임비서가 직접 불렀을적에는 반드시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였기때문일것이라고 예견하고있었지만 이 순간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석영진은 허명숙이를 군협동농장경영위원장으로 등용하려 한다고 알려주면서 본인의 의향을 물었다.

허명숙은 깜짝 놀라 그를 빤히 쳐다보기까지 했다.

《책임비서동지, 롱담을 하십니까?》

《내가 무슨 롱담을 하고있겠소. 나는 명숙동무가 군경영위원장으로서 군적인 범위에서 농사를 책임지고 일하는것이 모든 면에서 합당하다고 보고있소.》

명숙은 흥분으로 발그레했던 얼굴을 숙이고 머리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책임비서동지, 저는 한 농장의 관리위원장범위를 벗어나 일할 재목이 못됩니다. 제가 관리위원장으로서 농사를 좀 지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한랭전선의 영향을 이겨내고 풍작을 마련하도록 이끌어주신 수령님의 덕분입니다. 저는 다만 우리 수령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농사를 지었을뿐입니다.》

《그래서 허명숙이지. 전당적으로 도처에서 위훈떨치는 혁신자들의 모범을 따라배우기 위한 운동이 벌어지고있는 지금 나는 허명숙관리위원장을 자랑하고싶소.》

《책임비서동지, 제발 사정하는데 저를 사무실에 앉히지 말아주십시오.》

석영진은 껄껄 웃었다.

《군경영위원장이 된다 해서 사무실에만 앉아있을것 같소?》

《하여튼 저는 싫습니다.》

석영진은 허명숙이 고집이 센 녀자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런데 물론 그 성격적인 고집이 사업에서는 드팀없는 관철력으로 표현되군 하였다.

《본인이 정 못하겠다니 내 좀 생각해보겠소, 도농촌경리위원장과도 토론해보고. 사실은 그 사람이 먼저 제기한거요. 내려가있소.》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는 명숙을 보면서 석영진은 정말 저 녀성은 타고난 관리위원장이로군 하고 생각했다.

며칠후에 석영진이 도농촌경리위원회 위원장과 같이 농장에 내려왔다. 그는 작업반장들, 관리일군들, 농장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또 농장살림살이를 직접 료해하면서 허명숙이 농사를 잘 지을뿐아니라 농장살림살이를 깐지게 하고 특히는 관리일군들과 작업반장들을 훌륭히 키워낸데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허명숙과 헤여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명숙동무, 애로가 하나 있어 그러는데 이번에는 내 청을 거절하지 말아주오. 요전번에는 내가 양보를 했소. 그러니까 오늘은 동무가 양보를 하오.》

명숙은 석영진이 왜 이처럼 본론에 앞서 서론을 요란스럽게 떼는지 알수 없어 눈을 깜빡이며 쳐다보다가 말했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잠정리 관리위원장이 도병원에 입원해있을 때 가보았소?》

《두번 가보았습니다.》

《그랬겠지. 그 아바이가 어떻습디까?》

《자기 병보다 농장일을 더 걱정하고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로당원들이 그렇단 말이요.》

《예. 저는 잠정리 관리위원장을 보면서 저의 첫 리당위원장이였던 라순돌동지를 생각했습니다.》

《라순돌아바이말이지… 참 훌륭한 당일군이였소. 그 아바이가 여기 리당위원장을 할 때 나는 도당위원회에서 지도원으로 일했는데 만나면 나는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군 했소. 잠정리 관리위원장에게도 나는 머리를 숙이였소. 그런데 말이요, 명숙동무.》 석영진은 들판으로 눈길을 돌리고 계속했다. 《그 아바이는 관리위원장사업을 더 할수 없소. 병이 심하고 나이도 되였으니 휴식을 주자는거요.》

《그럼?…》

《병원에서 퇴원한 후 본인의 요구에 따라 해임시켰소. 그 대신 그 아바이가 병원침대에 누워서도 늘 걱정했던 잠정리에 쟁쟁한 관리위원장을 보내서 그의 사업을 잇고 발전시켜 잠정리가 여기 농장처럼 도에서도 그렇고 전국적으로도 앞선 농장으로 되도록 하자는것이 도당위원회의 결심이요. 그러면 누구를 그곳에 보내겠는가?》

석영진은 명숙의 까만 눈을 마주보았다.

《누구를 보내면 좋을것 같소?》

명숙은 이것이 도당책임비서가 말하는 애로라는것일가? 그런데 왜 나한테 묻는것일가? 하고 의아해하였다.

《그건 도당위원회에서…》

《명숙동무의 대답을 듣고싶어 그러오. 잠정리가 속한 재성군은 능히 10만톤군으로 될수 있는 군이요. 알곡생산을 더 할수 있는 잠재력이 있소. 그런데 그 잠재력을 다 발휘 못하고있소. 우리는 잠정리를 부쩍 추켜세워 모범단위로 만들어 다른 농장들도 뒤따라나서게 하자는거요. 그러자니 지금 해임된 아바이관리위원장대신 능력있는 관리위원장을 잠정리에 파견해야 할거요. 그렇지 않소?》

《그렇습니다.》

명숙이 얼결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석영진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단 말이요. 내 오늘 여기 와서 관리위원회 기사장도 만나보고 작업반장들도 만나보았는데 이 농장은 허명숙동무가 없어도 대신할 관리위원장감이 있고 일군들이 모두 끌끌하고 농장의 토대가 확고하오. 허명숙동무, 도당위원회의 의도를 인제는 알았겠지?》

명숙은 반대할 근거를 찾아낼수 없었다. 그만큼 석영진이 조리있고 설득력있게 말했고 또 앓고있는 잠정리 관리위원장이 농장일을 근심하던 모습이 늘 가슴에 맺혀있었던만큼 로당원들의 뒤를 이어 농촌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새로 자각하게 되는것이였다.

군경영위원장으로 뽑혀가지 않게 된것만도 다행이다. 대지에 몸을 잠그고 자기 손으로 알곡을 가꾸는 일이면 다른 농장에 가도 무방하다. 어디 가든 땅의 주인으로서 땅에 진심을 바쳐 일하면 되는것이 아닌가? 하지만 쉽게 대답할수 없었다.

《저는 우리 농장에 정이 들고 익숙되여서 생소한 고장에 가서 이곳에서처럼 일해내겠는지 그리고 과연 내가 도당위원회에서 바라는 그런 관리위원장자격이 있는지 걱정됩니다. 생각해볼 시간을 주십시오.》

그의 대답을 듣고 석영진은 만족해하였다.

이렇게 되여 허명숙은 잠정리로 가게 되였다. 그러나 정이 든 고장을 떠나기 아수해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있는데 석영진으로부터 독촉하는 전화가 왔다.

새해 1980년 정초였다.

《명숙동무가 잠정리로 아직 떠나가지 않았다면서?》 전화는 리당비서가 받았는데 석영진이 숨이 차하는 목소리를 듣고 흥분했다고 짐작되여 그는 《이제 곧 갑니다. 보내겠습니다.》 하고 급해하며 대답했다.

《〈이제 곧〉이라는것은 언제요? 나는 잠정리에다 녀성관리위원장이 가는데 집도 잘 손질해놓고 기다리라고 했단 말이요.》

《그런데 책임비서동지, 허명숙관리위원장동무가 선뜻 떠나지 못하는 그 심정을 리해하여주셨으면 합니다. 설을 농장원들과 같이 쇠고 떠나려 했던것입니다.》

《그랬어?!》

리당비서는 한동안 명숙의 심정을 대변하여 이야기하였다.

《음, 그렇단 말이지. 지금 그 동무가 어디 있소?》

퍽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아마 작업반에 나가있을겁니다. 원래 사무실에 앉아있는 성미가 아니니까.》

《찾아서 나한테 전화를 걸도록 하오.》

이렇게 지시하고 석영진은 전화를 끊었다.

리당비서는 사람들을 띄우고 전화도 하면서 한시간 잘 지나서야 명숙을 찾아냈다.

해질녘에 명숙이가 나타났다. 퇴비를 내는 들판에 나가있었는지 누빈 솜옷을 입고 솜신을 신었다. 추운 날씨이긴 해도 하늘이 맑게 개여 있어서 수평선너머로 떨어진 해빛의 여광이 노을로 타고있는데 그 고운 노을빛이 명숙이가 쓰고있는 양털목도리와 추위에 언 둥그스름한 얼굴에 어려있었다. 처녀시절에 비해 얼굴이 더 퉁퉁해지고 허리도 좀 굵어진듯 하나 변함없이 키가 늘씬하고 온몸에 정력이 넘치고있었다. 중년녀인의 풍만한 몸매와 검은 눈에서 발산하는 정열의 불꽃인듯 한 눈빛은 대지를 다루는 농민녀성의 억센 모습을 한껏 돋구고있었다.

명숙이가 찬바람을 몰고 방안으로 들어오며 목도리를 벗는데 리당비서가 석영진에게 허명숙관리위원장이 전화기앞에 와있다고 전화로 알리였다.

《전화를 바꾸오.》

《안녕하십니까. 허명숙이 전화받습니다.》

넓은 들에서 탁 트인 명숙의 힘있는 목소리였다. 그것이 석영진의 마음에 든것 같다.

《음, 명숙동무요?》 석영진이 부드럽게 말했다. 《동무네 리당비서가 그러는데 연백벌에서 다른데로 옮겨가는것이 큰 나무를 뿌리채 뽑아 옮겨심는것과 같다고 동무가 말했다지? 허… 비슷한 소리야. 뿌리채 뽑으려니까 간단치 않겠지. 나는 동무를 리해하오… 그러니까 이제는 떠나야지?》

자기의 심정을 리해한다니 명숙은 고마와서 눈굽이 화끈해났다. 그는 떠나겠다고 대답했다.

《명숙동무, 이렇게 하기요. 가족들은 뒤따라 데려가도록 하고 동무 혼자 먼저 떠나오. 나하고 같이 가기요. 내가 며칠내로 평양에 갈 일이 있소.》

《책임비서동지.》 명숙이 목메여 말했다. 《서둘러 떠나지 못하는 저의 마음을 리해하여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할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 혼자 가겠습니다.》

《아니, 기다리오. 내가 잠정농장사람들에게 할말도 있으니 같이 가자구. 그렇게 하지?》

《…》

《떠날 준비를 하고 기다리오.》

전화가 끝났다. 하지만 명숙은 송수화기를 이내 놓지 못했다.

저녁늦게 남편이 집에 들어오더니 안해를 한동안 살펴보다가 말했다.

《곧 잠정리로 조동되여간다는 말이 있더군.》

남편인 신호석은 체육선수처럼 몸매가 균형잡히고 근육이 발달되여있었으며 말이 적은 사람이였다.

저녁상을 차려주며 명숙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집에서는 명숙이가 관리위원장사업으로 바쁘고 늦게 들어오기때문에 같이 살고있는 친정어머니가 집안을 거두고 때식을 끓였으며 짐승들을 키우고 터밭을 가꾸고있었다.

이 집에서 신호석은 손님격이였다. 사업의 특수성으로 하여 늘 나가있었고 밤늦게 들어오군 했다. 그는 안해의 사업에 일체 참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해를 마음속으로 깊이 사랑하고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십여년간 같이 살아오면서 아직 별로 싸워본적이 없었다. 다툼질을 하려 해도 얼굴을 맞대고 말할 시간이 거의 없었으니 할수 없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안해는 안해대로 하는 사업이 중요하고 늘 시간의 부족을 느끼고있어서 집은 마치도 그들이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자는 려인숙 비슷했다. 신호석이 계속하였다.

《나보고 하던 일을 인계할 준비를 하라고 하더군. 안해를 따라가야 한다면서 말이요.》 그는 빙긋이 웃었다. 《안해가 큰 인물이니까 할수 없지.》

오늘따라 말이 헤퍼진 남편이였다.

《나 혼자 먼저 가니까 하던 일을 깨끗이 마무리지으세요. 그리구 제 없는 동안 몸조리를 잘해요.》

명숙이가 남편을 정답게 쳐다보며 말했다.

《혼자 가서 고생스럽지 않을가. 당분간이긴 하겠지만?》

《달린게 없이 홀몸이면 오히려 편안하지요. 호호…》

《일하기 더 좋다는 소리겠지.》

신호석은 웃지 않고 대꾸했다. 그는 농사일과 관리위원장사업밖에 모르는 안해를 깊이 리해하고있었다.

밖에서는 맵짠 바람이 윙―윙― 불어치고있었다. 굴뚝에서 웅웅 소리가 나고 창문들이 덜커덩거리였다.

새벽녘에 가서는 눈이 소담하게 내렸다. 하지만 허명숙은 그것을 새로운 임명지로 떠나게 되는 자기에게 뿌려주는 축복의 꽃보라로만 맞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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