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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3. 김천 소년감옥소에서의 감옥생활 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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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7,604회 작성일 21-12-26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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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3

김천 소년감옥소에서의 감옥생활 실태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대구감옥에서 1954년 9월 10일에 사형에서 무기로 확정된 후 10여명이 모아지면 김천소년 감옥으로 이감 간다. 10여명이 이감와서 한 방에 수용되었다. 이 때는 전향문제가 있지 않았다. 김천 번호는 724번이다.

생활은 원시시대에 사는 것 같았다. 우선 밥을 먹는 취사도구가 전부 포탄 뚜껑이다. 녹이 전부 슬어 있고, 밥을 먹고 씻어놓으면 녹이 노랗게 끼여 있다.

반찬은 개가 보고 하품한다는 머리는 크고 꼬리가 적은 성대이다. 이것을 소금에 저려 짠 것이 그지없다. 그래서 배가 고파 짠 것을 먹으면 물이 킨다.

밥은 3등인데 30볼트 전구만하다 그래서 속된말로 3등은 “전구다마"라고 말한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취사장 3년만 하면 집도, 논전답도 산다고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말하곤 한다. 재소자들에게 가야할 먹을 것을 뒤로 빼돌려 치부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참 막 먹어대도 소화가 가능한 소년들인데 전구만한 밥을 먹고 살아날 길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조건 속에서 배나 한번 부르게 실컷 먹으면 죽어도 원한이 없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밥치기”란 술어가 생겨난 것이다.

그 내용을 말한다면 한 방에 10여명 이상이 생활하는데 그수가 10명이라면 모든 밥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것이다. 그것도 가위바위 보를 해서 순서를 정한다. 그래서 맨 내중에 차례가 오는 재소자는 10끼니를 굶어야 한다.

굶은 배속에 한번에 10덩이를 먹으면 주린 위장이 성할 수 없어 터지고 만다.

이렇게 밥치기한 재소자는 거의 죽었다고 한다. 그것도 전방이 잦아 먹고 타방으로 전방하는 사람은 먹고 가니까 그래도 나은데 몇차례 굶고 떠나는 사람은 이해관계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우리 동지들 가운데 일찍 체포되여 고문구타당하고 먹지 못해 초기 감옥에 들어온 사람은 얼마 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이 많았다.

하루저녁 자고나면 사망자가 속출해서 옥사방 중앙에서 부장이란자가 시체 팻동하면 여기저기 방에서 팻동이 떨젔다고 한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밥이나 받아놓고 죽지”란 언어가 나오기도 했다. 사실 밥을 받아놓고 죽었으면 죽은 사람 밥은 감방에 있는 사람들이 먹게 되어 있었다.

당시 김천소년 감옥은 무기수가 꽤 있었다.

이 무기수는 비상조령법에 의해서 무기징역을 받고 김천 소년감옥에 감금되었는데 전시 절도범이다. 전쟁시기에 먹고 살기 위해서 일선지역에 절도범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에 미군 물품이 많아서 절도행위나 부정행위가 많았다고 한다.

내가 이감갔을 때는 밥치기를 몰래 하는 죄수들은 많지 않았다.

소년수는 모두가 출역을 해서 가마니를 짠다든가 왕골로 방석을 짜고 있었다. 또한 지물 공장, 인쇄 공장, 무명에서 실을 뽑는 일이든가 감옥 외로 출력나가는 일도 있었다.

당시는 간수나 재소자들의 범칙이 만연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족면회 오는 사람과 안 오는 재소자 간에 차별이 엄청 심했다.

나는 왕골로 방석 짜는 작업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55년 봄에 어머님이 면회 왔다. 영치금을 큰조카 딸이 식모살이 해서 번 돈인데 대구에 있는 줄 알고 대구에 왔다가 김천으로 오는 과정에 절도 당해서 한푼도 넣어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 시절에 촌에서 올라오는 노인네들은 쓰리당하는 것이 비일비재하였다.

한편 내가 영양보충하라고 보리 미수가루 소두 한 말쯤이 그후 소포로 왔고 이것을 공장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 때문에 내 인기가 대단했었다.

사실 나는 얼마 먹지 못했다. 나는 원래 남에게 주는 것을 일과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이감 간후 얼마 안 있어 전주에서 전남부대에 같이 있다가 1954년 2월 20일 한날 생포된 구례간전 출신인 조정섭동지와 김이호 동지가 이감 왔다.

이감 온 조정섭동지는 5년 형을 받아 대인 되어 55년도에 안동형무소에서 한번 보았다.

김이호 동지는 광양군 인민위원장 아들이다. 부친은 백운산에서 희생되었다.

이호동지는 산에서 부르는 이름이고 원이름은 김택렬동지다. 이호동지는 51년 동기공세 때 생포되었다가 적들의 허술한 틈을 타서 탈출에 성공했었다.

그렇게 잘 싸운 사람이 자기 살려고 교무과에 기어붙어 편하게 수형생활했다.

사실 이호나 조정섭은 체포되어 남원수용소에 직접 안 오고 적들의 군복을 입고 백운산을 다 토벌한 후에 남원수용소에 왔었다

그러니까 전향해서 이용당한 셈이다. 그후에 들은 말로 김이호는 자기징역을 다 살지 않고 나가서 교무과장 연줄로 미국 유학까지 갔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었다. 이 자는 우리사람이 아니다.


소년재소자들은 배가 고픈 것을 참지 못하고 나무로 짠 배식 상자를 공장 밖에 우물이 있는데 여기서 배식상자를 씻어 취사장 재소자가 가져가면 배가고픈 소년수들이 우루루 쫓아가서 밥풀이 우물가에 떨어진 것을 주어먹는다. 주어먹다가 재소자 잡역이나 간수에게 무지하게 두들겨 맞아도 그짓을 매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김천감옥은 범칙왕국이요 재소자들의 치열한 먹는 싸움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교화는 허울뿐이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나는 자기 정체성을 지키면서 생활하다 대인이 되어 안동감옥으로 이감가게 되었다.


2021년 12월 20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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