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대지의 딸 33 > 통일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통일게시판

[장편소설] 대지의 딸 33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890회 작성일 22-01-28 02:28

본문

20211226105043_dbe9fb380a435b79b32ecd7692e28320_v9j3.jpg

제 4 장

생활은 앞으로


32


그날 밤.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소설을 읽고있던 경애는 와뜰 놀랐다.

리합숙의 이 자그마한 4호실로 태평농장의 젊은이들이 자주 찾아왔다. 처녀들도 있었고 나이지긋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경애에게서 책을 빌리기도 했고 농업과학지식을 배우기도 했으며 그저 이야기나 하자고 찾아오기도 했다. 인정이 있고 사람들을 잘 따르며 따뜻이 대해주는 경애에게는 동무들이 많았다. 경애는 이야기를 재미나게 잘했다. 그래서 특별한 리유없이 경애를 찾아와 한담이나 하자고 찾아오는축들이 적지 않았다. 4호실에서는 자주 웃음소리가 터지군 했다.

하지만 경애의 어머니가 찾아와 딸과 언쟁을 하고 요새는 목소리는 높지 않지만 늦도록 앉아서 무슨 얘기인지 끝없이 해대군 했고 그것이 무슨 일때문인지를 모두가 알게 되면서 젊은이들의 발걸음은 차차 떠졌다. 경애자신도 그전같이 명랑하고 사근사근하지 못했으며 늘 수심에 잠겨있었고 누구와 이야기를 하다가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숨을 쉬군 했다. 왕청같은 대답을 하군 해서 상대방을 당황케 하고 옹색하게도 하여 4호실은 차츰 고적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경애는 외롭고 쓸쓸해지는 심정을 이겨내려고 소설책들을 닥치는대로 빌려다가 읽었다.

이제는 조용하고 고적한 분위기에 습관되여갔다. 어머니가 때없이 찾아오군 하여 그러한 날이면 몹시 괴로왔다. 어머니는 경애가 마음을 돌리도록 끊임없이 설복하였다. 네가 마음만 돌려세우면 당장이라도 읍이 아니라 해주나 평양에 가서 살수 있다, 이러루한 소리를 지칠줄 모르고 반복했다. 경애는 눈을 반쯤 감고 앉아서 한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동정이 갔다. 어머니의 끈덕진 설복은 오히려 경애로 하여금 정의감으로 가슴을 끓게 하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경애가 와뜰 놀란것은 어머니가 오지 않았는가 해서였다. 어머니가 올가봐 늘 신경이 팽팽해있는 경애였다. 어머니가 왔다간 날 밤이면 한잠도 못 자고 뜬눈으로 밝히군 했다.

《있나요?》

뜻밖에도 사내아이의 목소리였다. 사내아이가 문을 두드렸다.

경애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문께로 가서 걸쇠를 벗기고 문을 열었다. 경애가 아는 3반장의 아들이였다.

《너 용인이구나. 어떻게 왔니?》

《누가 찾아요.》

《나를?》

《예.》

《누군데?》

《모르겠어요, 처음 봐요. 키가 크구 눈이 번쩍거려요.》

키가 크구 눈이 번쩍거린다… 밤이니까 소년이 얼굴을 잘 보지 못했을것이다.

《그런데 나를 만나겠으면 여기로 올게지 밤에 밖으로 왜 불러낸다던?》

《꼭 나와서 만나야 한대요. 나보구 데려다달랬어요. 어떻게 할가요? 같이 갈래요?》

《너 가서 싫다구 한다구 전해라, 어서.》

《예, 그러지요.》

소년이 자박자박 걸어갔다.

경애는 문을 닫아걸고 대체 어떤 사람이 자기를 은밀하게 만나자고 하는지 알수 없어 방안을 서성거리였다.

도대체 누굴가, 어머니가 보냈을가, 그렇다면 왜 밖으로 불러낸담? 남이 볼가봐? 혹시 철수?… 갑자기 심장이 활랑거리였다. 큰 소동이 일어났댔으니까 호실에서 만나면 다시 소문이 퍼지면서 소요가 일어날가봐 불러낼수 있다.

(아니, 그 동무가 아니야. 그 동무가 올탁이 없어.)

경애는 서글퍼지면서 심장이 쑤셔났다.

(아니야… 만일 그 동무라면 더욱 만나면 안돼, 안돼…)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설음이 북받쳐올랐다. 만나면 안된다는것이 바로 비극이 아닌가.

(그 동무일수 있어. 오전에 순절이를 만났댔지. 순절이가 내 얘기를 했겠지. 내가 고맙다고 하자 그리도 기뻐하며 달려간 순절이가 철수동무한테 말을 안할수 없어. 그러니까…)

경애는 벽에 붙어서서 눈을 감고 머리뒤통수가 딱딱한 벽에 닿도록 얼굴을 쳐들었다.

(내가 실수했구나. 고맙다는 말을 왜 했을가.… 정말 순절이가 고마웠어. 그래 고맙다고 한거야. 그게 실수였어.)

소년은 다시 오지 않았다.

(다행이구나. 만약 그 동무라면 다행이야, 다행이야.…)

그러자 다리맥이 탁 풀려 경애는 벽을 따라 미끄러져내려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갔구나, 영영… 다시는 못 보겠구나.)

서글픔이 온몸을 휩쌌다.

바로 그 순간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 경애는 눈을 번쩍 떴다.

눈에서 불이 황황 일었다.

《누나, 나야요. 또 왔어요.》

경애는 뛰쳐일어나 헛손질을 해가며 걸쇠를 벗기고 문을 열었다.

《꼭 만나야 한대요. 좋은 사람이예요. 이름까지 대줬어요, 철수라구.》

경애는 문설주에 부딪쳤다. 눈을 감았다. 쿵쿵 심장이 울리였다. 그다음은 모든 행동이 리성을 떠나 진행되였다.

처녀는 솜옷을 찾아입고 머리수건을 두른 다음 신장에서 신발을 꺼내여신고 사내아이를 따라나섰다.

밖은 달이 밝았다. 해가 저물면서 날씨는 추워졌으나 달빛이 비단필처럼 흘러내리고있어 아늑한감을 주는 밤이였다. 길이 하얗게 보였고 마치 꿈속을 걷는듯 했다.

돌부리에 걸치여 비칠거리자 소년이 그의 손을 잡았다. 경애는 소년의 손을 꽉 잡고 그 자그마한 애에게 의탁하여 흘러내리는 달빛속에 걸었다. 마을을 벗어나자 과수원이 펼쳐졌다. 잎사귀가 떨어진 앙상한 가지들이 달빛을 받아 번들거리는것이 마치 눈물에 젖어있는것 같았다. 과수원안과 마른 풀덤불속은 컴컴했다. 그 어둠은 엄숙한 침묵속에 잠긴듯 하였다.

마른 풀덤불 저쪽, 과수원에서 무엇이 얼씬하더니 체격이 큰 사람이 나왔다.

《저 사람이예요. 나는 가겠어요, 일없지요? 좋은 사람이예요. 무서워말아요.》

소년은 이렇게 말하며 뒤에 떨어졌다. 그러나 경애는 소년의 말을 듣고있을새가 없었다. 그는 소년을 떨구어두고 급히 마른 풀덤불을 헤가르며 철수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먼발치에서도 철수를 눈으로가 아니라 륙감으로 알아보았던것이다.

경애는 철수에게 가기 바쁘게 그의 품에 안길듯이 바싹 다가섰다.

처녀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들은 그런 상태로 몽롱한 달빛속에 한동안 서있었다. 너무도 숨이 차서 헐떡이면서도 떨어지고싶지 않아 마치 녹아붙은듯 그렇게 서있었다.

《경애.》

마침내 철수가 입을 열었다.

《예.》

경애는 공손히 대답했다.

《여기 좀 앉자구.》

《녜.》

둘은 컴컴한 과수원기슭의 마른 풀우에 어깨를 붙이고앉았다. 행길도 보이지 않았고 달빛속에 희미한 들판도 불빛이 반짝이는 마을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 세상에 둘만이 존재하는것 같이 느껴졌다. 몽롱한 달빛속에서 꿈을 꾸는것만 같았다.

철수는 달빛을 받아 별로 창백해진 경애의 갸름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고민의 시련을 겪으며 여윈 얼굴에서 눈만이 커지였다. 눈물에 젖은 그 눈에 달빛이 어려 마치 등불처럼 황황 불타는듯 했다. 철수는 심장이 터질것만 같았다. 그는 처녀의 눈길을 피하며 속을 터치였다.

《경애동무, 나는 내가 찾아온것이 잘한것인지 잘못한것인지 모르겠소. 어쨌든 심장이 가리키기에 찾아왔소. 이렇게 찾아온것이 경애동무의 아픈 가슴을 더 아프게 할런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나는 오지 않을수 없었소. 순절이가 나에게 말했소, 경애언니는 철수동무를 생각하며 고민속에서 얼굴이 훌쭉해져가는데 남자가 뭐예요 하지 않겠소. 성이 나서 나를 몰아댔소. 나를 용서하우. 나는 이제 다시 소동이 일어나면 경애가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될가, 차라리 나를 잊어버리도록 내버려두자,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겠지, 이렇게 생각했더랬소.》

활활 불타는 눈으로 철수를 지꿎게 쳐다보며 듣고있던 경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은요?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요?》

철수는 머리카락을 움켜쥐였다.

《난 순절이한테서 경애의 정상을 듣고 내가 나쁜 놈이라고 인정했소. 그리고 어서 끝을 보아야 한다고 결심했소.》

《어떻게요? 어떻게 끝을 봐요?》

경애가 초조하게 다우쳐물었다.

《…》

《어서 말해요.》

《경애, 모든것이 내탓이요. 나때문에 경애도 이 모양이 됐고 경애의 어머니가 군병원에 입원한것도 마치 나때문인것처럼 느껴지오.》

《언제요?!》

경애가 소스라치듯 놀랬다.

《그제.》

경애는 심장이 띠끔했다. 또 한번 띠끔했다. 침묵이 흘렀다. 들바람에 마른 새초들이 설렁이였다.

불시에 경애는 철수의 가슴에 얼굴을 콱 묻었다. 그리고 흐느껴울기 시작했다.

철수는 흐느낌에 떠는 처녀의 가냘픈 어깨를 잡고 어찌할바를 몰라했다. 그는 괴로움에 미칠것만 같았다. 그래, 이 소동과 비극의 장본인은 나다, 경애와 그의 가정에 평온이 깃들게 하자면 내가 아무리 괴롭더라도 물러서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하게 되였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단순하게 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불시에 경애가 얼굴을 들고 말했다.

《철수동무, 우리 결혼하자요.》

뜨겁게 열렬히, 애타게 간절히 말했다.

철수는 흠칫했다. 자기가 품고온 결심을 내비친 상태에서 그와는 정반대되는 호소를 하는것이 아닌가. 그는 얼결에 대답했다.

《부모들의 승인이 없이?…》

《부모들이 승인할거예요. 어머니도 병이 나을거예요. 어머니도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더 노력하지 않게 될거예요, 예? 철수동무.》

처녀가 불같이 뜨겁게 달아올라 열렬히 호소하는 바람에 철수는 미궁에 빠진듯 했다.

《왜 가만있어요? 왜 시원하게 대답 못해요?》

《…》

철수는 대답을 할수 없어 경애가 흔들어대는데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기만 했다.

《철수동무는 내가 싫어요?》

《무슨 소릴 하오? 내가 왜 이렇게…》

그의 말을 경애가 막았다.

《그럼 됐어요. 나를 버리지는 않겠지요? 나를 배반하지는 않겠지요? 싫으면 싫다고 말하세요. 나는 각오가 되여있어요. 깨끗이 갈라지면 되는거 안예요?》

철수는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졌다. 자기를 잊어달라는 말을 꺼내려했지만 정작 경애가 이렇게 말하니 손에 잡은 황금새를 잃어버릴것 같은 아쉬움이 치밀었다. 그는 이 섬찍해지는 순간을 이겨내야 했다.

《갈라지면 되는거지.》 하고 그는 뚝해서 대답했다.

《그렇지만 철수동무, 나는 동무가 농촌에서 일하고있다는 한가지 리유때문에 어머니가 그토록 반대하는것이 가슴아파요. 그래서 나는 더욱 어머니와 엇서는거예요. 나에게는 다른 남자가 필요없어요. 나와 함께 이 향촌에서 일생을 꽃피울 사람이 필요해요. …이제는 동무가 대답할 차례예요.》

철수는 뜨거운것이 목구멍으로 치밀어올랐다.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을 간직한 처녀인가! 처녀야, 너의 깨끗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처녀의 사랑을 받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구나! 나는 너를 다 몰랐었다, 너는 높이 서있구나.

불처럼 뜨거운것이 그들을 하나로 융합시켰다.…

휴식일에 경애는 군병원으로 가서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한호실에 다른 환자가 있기때문인지 경애의 혼사문제를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경애는 다행으로 여겼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