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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대지의 딸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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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7,268회 작성일 22-02-03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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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각이한 운명들


37


가을걷이가 끝난 후 시작했던 토지정리작업은 추위가 닥쳐오고 땅이 얼면서 중지했다. 얼핏 보기에는 땅을 헤집어놓은것처럼 보여 농장원들이 별로 신통해하지 않았지만 허명숙은 토지정리와 새땅찾기가 시작된것만으로도 기뻐했다. 시작이 절반이라고 이제 새봄이 와 땅이 녹으면 그 작업은 계속될것이고 그러면 인구의 장성에 비례한 경작지의 확보가 진행되고 알곡생산은 늘어날것이다.

새해에 접어들어 추운 어느날 밤, 사업일지를 들여다보며 토지정리작업에 대해 이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차성재리당비서가 찾아들어왔다. 차성재는 대체로 관리위원장을 부르지 않았으며 자기쪽에서 관리위원장을 찾아오군 했다. 그는 행정일군들, 특히 관리위원장을 존중했으며 사업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였다.

두사람이 앉아서 새해 영농준비와 관련한 이야기를 한동안 하는데 관리위원회앞마당에 승용차가 들어와 멈추어서는 소리가 났다. 이어 누군가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방문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대답소리를 듣고 문을 여는데 군경영위원장 한광훈이였다.

인사를 하며 그는 리당비서 차성재에게 《마침 비서동무도 있군.》 하는데 무슨 요긴한 용건을 가지고 내려온듯싶었다.

《이번 총화에서는 잠정리관리위원장이 주석단에 앉게 됐소.》

자리에 앉기 바쁘게 한광훈이 말했다. 그는 군소리를 적게 하는 사람이였다. 그런데도 명숙을 한동안 칭찬했다.

《명숙동무가 잠정리에 온지 두해밖에 안되는데 계획을 수행했고 올해 세번째해부터는 온 농장이 자체로 농사를 짓겠다고 결의해나섰으니 대단하오. 도당책임비서동지도 여간 만족해하지 않소. 그래서…》

하다가 그는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만일 여기 기사장을 데려가면 대신할 사람이 있소?》

《있습니다.》

마장석이에게서 들은 소리도 있기에 로정만기사장을 정말 군에 소환해가려 하는가 하고 생각하며 명숙이가 대답했다.

《누구요?》

《농산지도원을 하는 강현동뭅니다. 그 동무는 현대농업과학기술에 정통하고 조직사업과 전개력이 있는 젊고 전망성있는 일군입니다.》

한광훈이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좋소, 그래서 말이요. 군적인 범위에서 사업하도록 잠정리기사장 로정만동무를 군경영위원회에 소환하자는 나의 의견인데, 물론 군당위원회와도 토론이 있었소. 동무들의 의견을 들읍시다.》

명숙은 로정만이 작년도에 농장이 계획을 수행하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것과 그를 내놓는것이 아깝지만 군적인 범위의 농사일을 위해서는 어차피 내놓아야 할것이라고, 그러한 발전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구 새 사람도 키워야지.》

한광훈이는 로정만을 대신할 강현을 념두에 두고 말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침묵을 지키고있는 차성재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비서동무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차성재는 눈길을 떨구고있었다. 반대인가? 불시에 방안에 불안하고 답답한 기운이 돌았다.

《왜, 의견이 좀 다르오?》

《아니, 나는 로정만동무가 군에 올라가 사업하는것을 좋게 생각합니다. 일을 제끼는 사람입니다. 작년에 공로가 컸습니다.》 차성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 솔직히 말하는데 작년초 년간사업을 총화하는 농장원총회에서 마장석이 로정만동무에 대해 비판하면서 느껴지는바를 말했는데 내가 근거없이 말한다고 눌러놓긴 했지만 사실상 나는 마장석동무가 근거가 있건없건, 또 막연한 느낌에서였건 옳게 말했다고 생각하고있었습니다. 대중의 눈은 속이지 못합니다.》

차성재가 입을 다물자 침묵은 더 무거워졌다. 작년 농장원총회에서 있은 일을 알고있는 한광훈이여서 리당비서의 의견을 심중히 대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내가 너무 직선적으로 대비하는것 같은데.》 하고 차성재가 계속했다. 《허명숙관리위원장은 연백에서 군경영위원장으로 소환하겠다고 도당책임비서가 직접 만나 제기했지만 정든 농장을 뜨지 못하겠다며 반대했고 나이들고 병을 앓는 관리위원장을 대신하여 잠정리에 와서도 이곳에 정을 붙이고 진심의 땀을 땅에 쏟았습니다. 그러나 로정만동무는 언제부터인지는 딱히 알수 없으나 이 잠정리에서 정이 멀어져가고있습니다. 그가 진심의 땀을 흘렸는가? …얼마나 대조가 됩니까. 허명숙관리위원장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동무들은 땅의 주인이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하고 어떻게 일하는것이 땅의 주인이 된 일군의 자세인가 하는데 대해서 깊이 생각했고 아버지가 되여 훌륭한 일군으로 키워주시겠다고 하신 수령님의 은정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참된 딸이 되기 위해 일해오고있습니다. 내가 본인앞에서 이런 말을 하니 본인은 몹시 옹색하겠지만 군경영위원장동무의 제기에 정확한 대답을 주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말이 많지 않은 차성재였으나 오늘 밤에는 별로 이야기가 길었다. 그는 노래를 잘 부르긴 하지만 늘 도에 뽑혀올라갈 생각만 하면서 농사일을 건성건성 대했던 금옥이에게 향토의 넋을 심어주기 위해 애쓰던 일을 돌이켜보면서 로정만기사장의 소환문제는 좀더 두고보자는 자기의 의견을 내놓았다.

역시 당일군이 보는 눈이 다르구나 하고 명숙은 저으기 놀라는 표정이였고 한광훈이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차성재가 속깊은 당일군이라는것을 명숙이나 한광훈은 새삼스럽게 느꼈다. 그가 로정만이를 진정으로 참다운 농업일군으로 키우기 위해 그런 의견을 냈다는것이 납득이 되였다.

훈훈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비가 내린 뒤 합토가 되자 모판만들기와 논밭갈이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포전정리작업도 다시 시작되였다.

불도젤은 밤낮 교대로 일했다. 모두 잠이 든 깊은 밤이면 불도젤이 흙을 밀어내느라 용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명숙은 그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군 했으며 간혹 밤중에 잠을 깨는 때에도 그 소리를 들으면 마음에 안정이 깃드는것이였다. 그런데 어느날 밤 막내딸 보은이가 끙끙거리며 잠꼬대를 하는 바람에 깨여난 명숙은 다시 잠을 청하며 불도젤소리에 귀를 기울이였지만 웬일인지 조용했다. 어찌된 일일가.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있었다. 피곤해서 잠시 눈을 붙이는것일가. 운전수가 피곤할수 있었다.

두루 궁리하던 명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솜옷을 입고 머리수건을 썼다. 그리고 식구들이 깰세라 조심하며 부엌으로 나가 늄그릇에 먹을것들과 우유가 든 병을 담았다. 그 우유는 불도젤운전수들에게 주려고 축산반에서 가져온것이였다. 불도젤운전수들은 명숙의 관심속에서 특별대우를 받으며 일하고있었다.

명숙은 집을 나섰다. 새벽날씨는 쌀쌀했다. 초봄의 검푸른 밤하늘에는 구름장들이 떠가고있었으며 구름들사이로 아름답게 반짝이는 별들이 보이였다.

선잠을 깬 명숙은 하품을 하며 걸었으나 점차 정신이 또릿또릿해졌다. 저기 마을과 논벌이 접한 포전정리작업장에서 한가닥의 모닥불이 타고있는것이 바라보였다.

명숙은 모닥불을 향해 다그쳐갔다. 무슨 일인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불도젤은 숨을 죽이고 서있는데 쇠붙이로 된 차체가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였으며 기름냄새가 풍기였다.

《운전수동무, 어디 있어요?》

명숙이 소리쳤다. 그 소리가 캄캄한 들판으로 울려갔다.

《관리위원장동지십니까?》

불도젤기관부의 반대쪽에서 아래우가 맞붙은 퍼런 작업복을 입은 체격이 우람찬 철수가 손에 공구를 들고 나타났다. 삐딱하게 쓴 기름묻은 모자밑으로 고수머리가 한줌 삐여져나와있었다.

《왜 불도젤이 섰어요?》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철색의 얼굴을 바라보며 명숙이 물었다.

《고장났습니다. 그래 수리하느라고…》

《그래서 발동소리가 멎었댔구만요.》

《발동소리가 들리지 않아 나왔습니까?》 철수는 저으기 놀라는 표정이다. 《위원장동지두 참!》

《다른 한대는 어디 갔어요? 토지건설사업소 불도젤 말이예요.》

《저 과수원너머에서 일합니다. 들리지 않습니까?》

명숙은 귀를 강구었다.

《들리는구만요.》

《여기는 좁아져서 그쪽으로 먼저 옮겨갔습니다. 우리 불도젤도 며칠후에는 거기에 가야 합니다.》

《빨리 해제꼈군요. 자, 여기 우등불곁에 앉아서 좀 쉽시다.》 명숙이는 들고온 꾸레미를 놓아둔 우등불곁으로 갔다. 《어서 오라니까.》

철수는 모자채양을 올리고 숱많은 고수머리를 긁었다.

《지금껏 쉬였는데요. 빨리 발동을 걸고 일을 해야지요.》

《글쎄 좀 앉으라니까.》

철수가 앉자 명숙은 보자기를 풀었다.

《허, 이거 관리위원장동지가 자꾸 이렇게 지원을 하니 사실 송구스럽습니다. 고장이 나서 일을 못하는것만 해두 그런데…》

《다 고쳤어요?》

《예, 큰 고장은 아닙니다.》

《우리 불도젤이 낡았지. 그래두 기계화반동무들이 용케 살려냈어요. 확실히 기계화반이 내가 처음 와서 보았을 때와는 몰라보게 달라졌어요. 곽철수동무를 비롯해서 모두 애를 써요.》

《저야 뭐…》

《자, 들어요.》 명숙은 우유를 고뿌에 부어주고 떡도 내밀었다.

《여기 닭고기두 있어요.》

철수는 선뜻 받아들었다.

《예, 먹겠습니다.》

명숙은 우유고뿌가 밑창이 나자 또 부어주었다. 그리고 닭다리를 쥐여주었다.

《밤이 되면 출출하지요?》

철수는 괜찮다고 겸손하게 대답하였다.

명숙은 닭고기를 뜯는 철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해가 바뀌도록 철수와 경애의 관계는 해결을 짓지 못하고있다. 명숙이가 알건대 양옥실의 입원을 계기로 두 청춘남녀는 주춤해졌다. 양옥실의 입원기간은 물론 퇴원한 후에도 서로 찾아다니기를 삼가했고 그러한 어정쩡한 상태가 지금도 지속되고있는것 같다. 지금 철수를 보면서 명숙은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상태에 지내 무관심했다는 가책이 들었다.

남의 가정일에 끼여들어 복잡하게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그만 물러난것이 옳았을가, 어떻게 단순히 남의 가정일이라고만 보겠는가, 우리에게서는 가정일도 사회적성격을 띠게 되는것이 아닐가? 향토를 가꾸려는 경애의 아름다운 지향이 꺾이고 그러한 처녀를 사랑하는 청년이 그로 하여 고민에 빠진다면 잘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관리위원장으로서 외면하고 무관심한것이 옳지 않은것이다.

명숙은 금옥이를 음악무용대학에 공부보냈고 로정만의 소환을 잠시 보류하자고 한 차성재의 노력과 제기가 상기되였다. 바로 그렇게 사람문제는 신중하게, 중도반단함이 없이 정확하게 뜨거운 인간애를 지니고 해결해야 할것이다. 대학에 간 금옥은 잠정리를 못 잊고 고향사람들이 그리워 벌써 몇번이나 편지를 보내왔다. 금옥은 쓰기를 자기는 대학에서 노래를 숙련하고있지만 잠정의 딸이고 대지의 딸이라고 하였다.

금옥이의 일은 잘되였는데 그것이 양옥실이에게 더 감정을 사는 일로 된것 같고 따라서 경애와 철수는 서로 사랑하면서도 그것이 열매를 맺지 못한것 같아 명숙은 안타까왔다.

(철수와 경애를 도와주자. 리당비서동무와 진지하게 토론해보자.)

명숙은 이렇게 마음다졌으나 그러자면 양옥실의 마음의 변화를 알아야 하는데 그를 만난다는것부터가 우선 난감한 과제였다.

《철수동무, 내 좀 묻겠는데 솔직히 대답해줘요. 경애를 변함없이 마음에 두고있겠지요?》

철수는 눈을 내리깔고 우유를 한모금 마시였다.

《솔직히 대답하겠습니다. 그런들 무슨 소용있습니까? 나는 어떤 날은 경애가 마음을 돌렸으면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불쌍해서 못 보겠습니다. 어머니의 생각은 여전한지. 지금도 신경이 쇠약해진 상태지, 경애는 어머니를 더 괴롭힐수 있습니까. 나와 결혼하자고까지 열렬하게 호소한 처녀가 다른 선택을 할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난 차라리 괴롭더라도 경애가 생각을 돌렸으면 하는 모진 마음까지 먹었드랬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을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겠는지는 나도 모르겠습니다. 가슴속에는 경애에 대한 애정이 끓고있을뿐입니다. 나자신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습니다. 일이나 꽝꽝 하면 되는거지요.》

(경애를 깊이 사랑하고있구나.)

명숙은 철수의 진심을 들여다볼수 있었다. 이제 경애 어머니의 마음이 돌아서서 이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관리위원장동지, 저희들 일에 너무 마음쓰지 마십시오. 강물은 제 곬으로 흘러갈것입니다.》

철수가 오히려 명숙이를 위안하였다. 명숙은 그의 인간됨이 기특했고 신심이 굳은것이 좋았다.

모닥불이 꺼져가고있었다. 철수가 불을 쑤셔놓자 불찌들이 사방으로 튀여나며 마지막불길이 타올랐다.

철수가 일어섰다.

《위원장동지, 들어가보십시오.》

모닥불이 꺼지자 사위는 더욱 어둠이 짙어진듯 하였다. 어디를 둘러보나 캄캄하다. 하늘에서는 은하수가 기울었다.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얼마나 청청하고 아름다우냐.

철수가 발동을 걸자 불도젤이 몸체를 부들부들 떨었다. 기관소리에 귀가 멍멍해졌다.

《철수동무, 내가 좀 해볼가요?》 하며 명숙은 운전칸으로 따라올라갔다.

《운전할줄 압니까?》

《알지 않구. 처녀로 관리위원장을 하던 옛날에 벌써 뜨락또르운전법을 배웠구 논갈이도 해봤어요.》

《대단한데요. 그렇지만 불도젤은 뜨락또르와 좀 다릅니다.》

《그러기 배우겠다니까요.》

《웃사람이 우기니 어쩔수 없군요. 그럼 우선 옆에 앉아서 내가 하는 동작을 눈에 익히십시오. 자, 전진합니다.》

얼마후 명숙은 벌써 불도젤로 흙을 밀기 시작했다. 불도젤이 용을 쓰면 자기도 몸을 앞으로 숙이며 힘을 썼다.

어느덧 동녘하늘이 희붐히 밝아오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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