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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의 정치탐사] 레닌의 염원을 실현하려는 뿌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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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840회 작성일 22-03-25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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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의 정치탐사 제11화

2022년 3월 24일

레닌의 염원을 실현하려는 뿌찐

[민족통신 편집실]



한호석 (정치학 박사, 통일학연구소 소장)


"나라는 멸망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망할 수 없다." 이 명언은 조선민족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반대하여 싸우던 반일항쟁기 초기에 민족사관을 설파했던 독립운동가 박은식(1859~1925)이 남긴 말이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제국주의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겼어도, 자기 역사를 망각하지 않은 민족은 빼앗긴 나라를 반드시 되찾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반대로, 자기 역사를 망각한 민족은 제국주의세력에게 빼앗긴 나라를 영영 되찾을 수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그리하여 역사는 민족의 넋이며, 민족의 삶 그 자체다. 만일 자기 주체적 역사를 모르는 민족, 또는 식민사관이 왜곡한 역사의식을 가진 민족은 넋을 잃어버고 무지몽매에 빠져 자멸하게 될 것이다.

지금 로씨아와 전쟁을 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운명도 그 나라의 역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의 근현대사를 알아야, 오늘 그 나라가 빠진 패전위험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우크라이나는 전쟁에서 패할 것이 분명하고, 패전은 그 나라의 운명을 급속히 쇠락시킬 것이다.

그런 쇠락의 비운이 왜 우크라이나에 닥쳐온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우크라이나의 근현대사에 들어있다. 역사를 모르면, 오늘 우크라이나의 비극적 현실도 알 수 없고, 그 나라의 미래도 알 수 없다.

매우 복잡다단하게 전개된 우크라이나의 근현대사를 명쾌하게 말해주는 것은 그 나라의 옛 강역을 보여주는 옛 지도다. 우크라이나의 옛 지도를 펴놓으면, 오늘과는 전혀 다른 나라들이 우크라이나 영토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4세기 중반부터 16세기 이후, 오늘 우크라이나 영토에는 세 나라가 존재하였다. 오늘 우크라이나 중부지역에는 1648년부터 1764년까지 코싸크군장국(Cossack Hetmanate, 軍將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1686년 로씨야-뽈스까전쟁에서 승리한 로씨야제국은 드네프르(Dnieper)강 동부지역을 차지했다. 드네프르강은 로씨야에서 발원하여 벨로루씨를 지나 우크라이나를 남북으로 종단하여 흑해로 흘러가는, 길이 2,200km의 강이다. 1764년 로씨야제국은 코싸크족의 보호국이었던 자포로지안 씨취(Zaporozhian Sich)를 병합했다. 오늘 우크라이나 남동부지역에 있는 크림반도와 오늘의 도네쯔끄인민공화국 영토와 루한스끄인민공화국 영토에 걸쳐 크리미아한국(Crimea Khanate)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한국(汗國)이라는 나라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크리미아한국은 동유럽을 점령했던 몽골족의 후손이 1441년에 세운 나라다. 1783년 로씨야제국은 크리미아한국을 병합했다.

1917년 3월 로씨야에서 2월혁명이 일어나 로씨야제국이 무너졌고, 로씨야림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로씨야제국의 영토에 로씨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런데 로씨야제국이 무너지고 로씨야공화국이 수립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크라이나를 로씨야공화국에서 분리하시키려는 국가분렬주의세력이 출현했다. 로씨야공화국에 출현한 국가분렬주의세력은 1917년 3월 17일 끼예브에서 우크라이나중앙협의회를 결성했다. 그들은 제멋대로 국가수반을 선출하고, 제헌의회를 구성하였다. 그들이 국가분렬을 추진하고 있었던 1917년 11월 7일 로씨야에서 볼쉐비끼혁명이 일어났다.

볼쉐비끼혁명이 일어난 이튿날 국가분렬주의세력의 소굴인 우크라이나중앙협의회는 볼쉐비끼혁명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1917년 11월 11일 우크라이나중앙협의회 산하 민병대는 끼예브에서 볼쉐비끼혁명을 지지하는 인사들을 체포했고, 11월 21일에는 드네프르강 서부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1918년 1월 16일 우크라이나중앙협의회는 민병대를 기반으로 하여 우크라이나국군을 창설했다. 우크라이나국군은 드네프르강 동부지역(돈바스지역)에서 볼쉐비끼혁명세력을 공격하면서 여러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해나갔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우크라이나중앙협의회가 혁명의 격변기에 발생한 정치사회적 혼란을 틈타 로씨야 영토를 분리시킨 국가반란세력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한 우크라이나국군이 정치사회적 혼란을 틈타 로씨야 영토 일부를 점령한 반란군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생 소비에트정부는 국가분렬주의세력의 반란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2018년 1월 22일 볼쉐비끼혁명의 최고지도자 울라지미르 레닌(Vladimir Ilyich Lenin, 1870~1924)은 울라지미르 안또노브-오브신꼬(Vladimir Antonov-Ovseenko, 1883~1938) 사령관이 지휘하는 원정군을 파견하여 반란군를 진압했다. 이것이 볼쉐비끼혁명의 붉은 군대(Red Army)가 우크라이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시작한 내전이었다. 세계역사에는 이 내전이 소비에트-우크라이나전쟁(Soviet-Ukraine War)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소비에트-우크라이나전쟁에서 레닌이 영도한 붉은 군대의 투쟁대상은 우크라이나 반란군만이 아니었다. 붉은 군대는 무정부주의자 네스또르 막흐노(Nestor I. Makhno, 1888~1934)가 이끄는 10만명의 흑군(Black Army)을 상대로 격전을 벌여야 했다. 붉은 군대는 녹군(Green Army)라고 부르는 농민군 7만명과도 격전을 벌어야 했으며, 크론스탓트반란군(Kronstadt Mutinners) 18,000명도 진압해야 했다. 붉은 군대는 로씨야의 4개 지역에서 백군(White Army)이라는 이름으로 결집한 반혁명세력과도 격전을 벌여야 했으며,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뽈스까, 그리스, 이딸리아, 체스꼬슬로벤스꼬, 로무니아, 쓰르비야가 볼쉐비끼혁명을 좌절시키기 위해 파병한 제국주의침략군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당시 국제침략군으로 출병한 백군의 총병력은 무려 340만명에 이르렀다. 레닌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한 볼쉐비끼혁명세력은 1917년부터 1923년까지 국내 반혁명세력들과 반란군을 진압하고, 제국주의침략군을 격퇴하기 위한 혁명전쟁을 계속했다.

볼쉐비끼혁명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1917년부터 1923년까지 혁명전쟁시기에 레닌의 염원은 내전에서 승리하여 국가분렬을 막고 영토를 보전하는 것이었다. 만일 볼쉐비끼혁명세력이 혁명전쟁에서 패하여 로씨야가 여러 소국들로 분렬되었다면, 강대한 사회주의국가 소련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되었더라면 신생 사회주의약소국은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제국주의침략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자기의 존재를 일찌감치 끝마쳤을 것이다. 혁명의 승리는 강한 군사력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역사는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혁명전쟁에서 승리하여 국가분렬을 막고 영토를 보전하는 것, 바로 이것은 1917년부터 1923년까지 격전의 시기에 볼쉐비끼혁명 앞에 나섰던 중대한 역사적 임무였다. 볼쉐비끼혁명의 탁월한 지도자이며, 인류사에 처음 출현한 사회주의국가 소련의 창건자이며, 소련의 첫 영도자인 레닌은 이 중대한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고 1924년 1월 21일 위대한 생을 마감했다.

혁명역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레닌을 중심으로 단결한 볼쉐비끼혁명세력은 온갖 도전과 시련을 물리치고 혁명전쟁에서 기어이 승리하여 국가분렬을 막고 영토를 보전하여 강대한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했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는 1922년부터 1991년까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련방(소련)의 일부인 우크라이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91년 소련이 해체되는 역사의 대격변기에 우크라이나에서 국가분렬주의세력이 다시 발호하였다. 국가분렬주의세력은 1991년 8월 24일 끼예브에 모여 우크라이나 독립선언서를 채택했다. 그로써 우크라이나는 소련에서 떨어져나가 국가분렬의 길을 걸었다.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사회민주주의자 레오니드 크라브축(Leonid M. Kravchuk)이 우크라이나의 첫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소련의 계승국인 로씨야는 옛 소련에 속했다가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한 여러 공화국들을 결집시켜 독립국가협동체(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를 창설했는데, 우크라이나는 거기에 가입하지 않고 로씨야와 대결하는 제국주의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로씨야말을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사람들은 1990년 8월 우크라이나 오데싸에서 노보로씨야민주련합(Democratic Union of Novorossiya)을 결성하여 자치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고, 1991년 11월에는 노보로씨야(Novorossiya)라는 명칭의 국가를 창설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노보로씨야는 크림반도, 오데싸, 돈바스, 헤르손, 니꼴라예브, 하르꼬브 등을 포괄하는, 우크라이나 남부지역과 동부지역을 지칭하는 지역명칭이다. 1992년 9월 오데싸시민운동, 사회당, 노보로씨야 등 여러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모여 노보로씨야라는 명칭의 국가를 창설하기 위한 대중운동을 시작했다.

위에 기술한 것처럼, 노보로씨야는 1783년 로씨야제국의 영토로 편입된 지역이며, 1917년 볼쉐비끼혁명 이후에는 볼쉐비끼혁명세력이 피흘려 지킨 소련의 영토이다. 우크라이나 국가분렬주의세력이 소련에서 떼어내려고 했던 땅이며, 생의 마지막 시기에 국가분렬을 막고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 전심전력한 레닌의 국가통합념원이 깃든 땅이다. 노보로씨야는 우크라이나 국가분렬주의세력이 불법적으로 점령한 로씨야의 옛 영토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인지하면, 지금 로씨야는 우크라이나 국가분렬세력이 떼어내 점령한 옛 영토를 되찾으려는 영토수복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로씨야-우크라이나전쟁은 로씨야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전쟁이 아니라 로씨야의 옛 영토를 되찾으려는 영토수복전쟁이다. 국가분렬을 막고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 힘쓴 레닌의 염원은 뿌진이 영도하는 영토수복전쟁에 의해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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