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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싸움의 역사(8)//세이버와 미그, 한반도 하늘에서 제트시대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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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그네
댓글 3건 조회 16,189회 작성일 10-09-05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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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싸움의 역사(8)

                    -세이버와 미그, 한반도 하늘에서 제트시대를 열다-

 

   히틀러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피네문데 로켓 연구소에서 만들어 낸 비밀 신병기들이

전세를 기적처럼 바꿔주길 기대했지만 이들 신기술들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줬을 뿐,

실용화를 위한 보완과 추가적인 연구, 그리고 무엇보다 충분한 시간이 더 요구되었기에

패배가 목전에 다다른 나치 독일에게 거의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이 연구하던 신기술은 항공기술에서 많은 혁신과 새롭고 대담한 미래의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로켓엔진기술과 제트엔진입니다.

피네문데 로켓연구소에서 독일의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이 개발해낸 V-1, V-2로켓은

이후 항공의 영역을 우주로까지 확장했고 더 직접적으로는 핵탄두를 탑재한 공포의 대륙

간 탄도미사일로 진화합니다. 2차대전이 끝나자, 미국과 소련은 피네문데의 과학자들을

양분하다시피 하여 자국으로 끌고 가 로켓연구와 미사일 개발에 적극 활용 했습니다.

결국 이들 독일출신 과학자들은 이후 동서냉전 기간 중 미소의 핵미사일 개발과 우주

계획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제까지는 없던 미사일 시대가 도래한겁니다.

2차대전의 하늘을 주도했던 피스톤 엔진식 항공기는 분명 놀라운 항공기술상의 발전을

가져왔지만, 프로펠러로 양력을 얻는 피스톤 엔진식 항공기는 일정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없는 물리적 한계가 있었고 공기와 연료를 혼합하여 연소하는 내연기관의 특성상 공기가

희박한 고공으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기존 항공엔진의 한계를 극복하

고자 시도된 것이 바로 제트 엔진인데, 뉴튼의 역학법칙 중 세 번째인 작용과 반작용을

이용한 것으로 공기를 압축흡입해 연료와 동시에 분사점화하면 여기서 힘을 얻어 양력과

추진력을 발생시키는 원리였습니다. 그러나 이 제트 엔진은 엔진을 이루는 금속재질이 무

겁고 약해 초기만 해도 출력과 효율이 떨어졌지만 지속적인 연구개발로 점점 나아져 이

미 대전말 독일이 제트기를 실전에 선보이며 제트시대가 시작되고 전후 미국과 소련은

당연하게 제트기 개발에 열을 올립니다.

 

   독일이 제트전투기를 처음 실전에 투입했다고는 하지만 제트 엔진기술은 연합국인 미국

과 영국도 꾸준하게 추진하던 과제였습니다. 다만 신기술인 탓에 충분히 실전에 투입할

만큼의 안정성을 얻지 못했고 굳이 제트기를 쓰지 않더라도 승전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

니다. 당시 독일의 Me 262전투기가 제트엔진을 사용해 머스탱이나 기타 프롭전투기들보

다 거의 150킬로 이상 빨랐음에도 불구하고 실전에서 머스탱에게 격추당했던 사례를 봐

도 45년 무렵 제트기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본격적

인 냉전이 시작되고 핵무기의 미국독점이 깨지면서 미국과 소련은 치열한 군비경쟁을

지속했고 항공분야에서는 제트엔진을 탑재한 실전 가능한 전투기개발에 골몰합니다.

2차대전이 끝난지 5년도 채 되지 않아 동서간의 냉전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해 열전으

로 비화되었고 한반도의 하늘은 역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제트전투기의 각축장이 됩니다.

북한군은 장비와 훈련이 빈약했고 특히나 지휘관의 역량이 부족했던 남한군을 초반부터

맹렬히 밀어부쳐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전쟁 개시 두달도 채 되지 않아 한반도의 85%

를 점령했으나 제공권과 제해권이 없는 상황에서 이내 한계를 드러냅니다. 47년 육군에

서 독립한 미 공군은 유엔의 공식개입이 선언되기 전부터 한반도로 즉시 출격을 개시했고

해군의 함재기들 역시 6월 30일에는 서해상까지 진출한 항모에서 출격해 평양에 대한 첫

공습을 감행합니다. 당시 이러한 미해공군의 항공력 투사는 홍명희와 김두봉 등 상당수

북한정권 핵심요인들에게 커다란 불안감을 심어주기에 족했습니다. 애초에 예상했던 것

보다 더 일찍 그리고 더 조직적으로 미국이 개입했었으니까요. 이후에도 순조롭게 진격

하기는 했지만 인민군은 미군의 공습으로 보급과 병력이동에서 적지 않은 피해와 제약을

받습니다. 특히 전선이 낙동강으로 고착화된 이후 피해는 더욱더 증가했습니다.

 

  사실 유엔군과 남한군은 미군의 막강한 항공지원이 없었다면 낙동강에서 오래 버텨내

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한국전쟁 내내 미국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틀어쥐고 강력한

화력을 투사했고 이 바탕에는 2차 대전때와 마찬가지로 전투기의 제공권 우위를 전제했

습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소련이 투입한 미그 15전투기는 적지 않은 충격을 미국에게

줍니다. 한국전쟁의 성격이 본격적인 국제전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11월 무렵 북한상공

에 출현한 소련제 미그 15전투기들은 여태까지 거의 요격다운 요격을 받지 않았던 B-29

폭격기와 F-51(P-51머스탱의 공군식 명칭)을 연이어 격추했습니다. 이 때문에 2차 대전

최고의 폭격기로 평가받던 B-29도 51년 중후반부터는 미그의 등쌀을 못견뎌내 주간폭격

을 포기하고 야간에만 출동하는 신세가 됩니다. 프로펠러 추진식 항공기가 제트기를 이겨

낼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 것입니다.

 

  무엇보다 미그 15와 처음 교전했던 미 공군의 F-80,84 전투기는 속도와 선회력 등등에서

모두 미그 15의 성능에 뒤진다는 사실이 미 공군을 경악케 했습니다. 항공력으로 2차대전

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자부심이 강했던 미국에게 소련제 미그 15의 천 킬로를 넘어서는

빠른 속도와 1만5천 미터까지 상승이 가능하며 만만치 않은 화력(23밀리 기관포 2문, 37

밀리 기관포 1문)을 갖춘 미그 15는 절대로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미 공군은 부랴

부랴 신형 F-86 세이버 전투기를 투입하고서야 미그 15에 대한 공포에서 어느 만큼 벗어

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공군이 처음 투입했던 F-86A조차도 미그 15와의 공중전에서

성능이 뒤진다는 것이 입증되면서 미 공군은 다시 개량된 최신형 F-86F를 투입하면서야

비로써 미그 15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전쟁 후반기에 가면서 압도적인 전과를 낸 것을 보

면, 미그 15가 적잖이 미 공군을 괴롭힌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세이버가 비록 화력(미

공군은 2차대전 때처럼 여전히 50구경 기관총 6문을 탑재했는데, 미그의 대구경 기관포에

비해서 위력이 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에서는 뒤졌지만, 속도와 급강하 그리고 사격통제

장치에서 우세를 보여 그나마 체면을 유지했지요.

 

   이른바 1세대 제트전투기로 불리우는 이들 미그 15와 F-86 세이버의 공중전 대결은 치열

했습니다. 비록 2차대전 시 개싸움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는 가시권하에서의 공중

전이었으나, 프로펠러 전투기들보다 월등히 빠른 스피드와 가속도를 이용한 에너지 파이

팅이 주를 이룬 한반도의 공중전은 속도와 고도가 훨씬 향상된 전쟁이었고 이로 인해 파

일럿들은 2차대전시보다 훨씬 더 무거운 중력가속도(G)의 압박을 받으면서 전투를 치렀

고 중력가속도로 인한 실신을 막아주는 공기압력복인 G수트와 산소마스크 착용이 일상화

됩니다. 이미 2차대전 당시 고공폭격이 이뤄지면서 사용된 산소마스크가 만미터가 넘는

고공에서의 공중전이 활성화되면서 필수아이템이 된 것이지요. 이 전투에 참가했던 파일

럿들 중 미국과 소련의 경우, 상당수가 2차대전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던 베테랑들이 다

시 소집되어 참전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럽 전선에서 미 육군항공대 최고의 격추기록

(28대)을 세웠던 프랜시스 가브래스키 중령은 재소집 된 한국전쟁에서 다시 7대의 미그

를 격추해 두개의 전쟁에서 에이스가 됨과 동시에 프로펠러 전투기(가브래스키는 P-47

썬더볼트를 조종했음)와 제트전투기를 몰고 각각의 기종에서 모두 에이스(혹여 노파심 삼

아 미리 말씀드리지만, 가브래스키같은 탁월한 에이스도 한국전쟁에서 모두 148회를 출

격해서 모두 7대를 격추한 것에 불과합니다. 평균 20여회 출격해서 1대 격추한 셈이지요.

이런 사실로도 알 수 있듯이 공중전에서 적기를 격추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도 드문 기회

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다못해 1대라도 격추기록을 가진 파일럿들이 전체 파

일럿 중 10분의 1정도 수준이고 에이스가 된다는 것은 20분의 1의 확률에 불과하다는 점

을 부언해둡니다)가 된 흔치 않은 7명중 한명이 됩니다.

 

   이렇듯 미소가 모두 2차대전의 베테랑들을 재소집하면서 공중전을 치른 결과 한반도의

하늘은 미소의 직접 맞대결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 중국

등 주요 개입 당사자들이 혹여나 전면전확대으로 인한 핵전쟁을 우려하여 상호간에 확

전을 극히 자제했던 탓에 미국과 소련의 공중대결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직접 개입하고픈 의사가 전무했었지만 중국과 북한의 거듭된 요청

으로 절대적인 열세에 놓인 중국군과 인민군의 항공지원에 나서게 되고 전쟁 중후반에

는 미그 15 기체와 중국,북한 파일럿의 교육과 훈련을 제공하는 쪽으로 점차 전환합니다.

심지어 소련의 경우 명백히 소련 파일럿이 미군에게 생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나고 소련이 붕괴 되고난 후에야 한국전쟁 참전사실을 인정했을 정도로 몸을 사렸습

니다. 물론 미군 역시 통신 감청을 통해서, 소련의 직접 개입사실을 위장하고자 최대한

중국어와 한국어를 사용하도록 교육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급한 순간에 터져나오는 소

련파일럿들의 러시아어를 분명히 청취했지만 이를 사실상 묵인했습니다. 이러한 양측의

암묵적인 묵계로 한반도의 공중전은 주로 만주에서 북한으로 수송되는 군수물자와 병력의

통로가 되었던 압록강 주변의 이른바 '미그 가도(Mig Alley)'를 중심으로 벌어졌습니다.

소련의 입장에서 그 이상의 개입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부른다고 판단했고 미그 15 자체

가 단거리 요격을 목적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압록강 일대 평안북도 상공 이상 너머로

비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결과 미그가 출몰하지 않았던 대부분의 북한 지역은 미공군과 해군을 비롯한 유엔군

의 집중공습과 함포사격으로 거의 초토화가 됩니다. 이른바 공화국의 수도인 평양은 6월

30일 미 함재기의 첫 공습을 받은 이래 전쟁이 끝나는 마지막 날(53년 7월 27일)까지 폭

탄세례를 받았고 한국전쟁 3년 1개월 2일 동안 미국이 북한지역에 투하한 폭탄과 포탄량

은 44개월 동안 태평양전선에서 일본을 상대로 투하한 폭탄량보다 월등히 많았을 정도였

으니, 당시 비좁은 북한지역이 얼마나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지는 짐작이 갑니다. 이미

51년 1월에 벌써 미공군 극동사령관인 에멋 오도넬장군은 한반도에 더 이상 파괴될 지상

목표물이 없다고 의회청문회에서 증언했을 정도였고 그 이후에도 미공군과 해군은 폭격

과 포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평양시의 지하철이 그토록 깊숙한 땅밑에 건설된

이유도 전후 북한이 소련과 중국에 대해 등거리 자주외교노선을 견지하고 있지만 소련

보다는 중국에 더 밀착하게 된 것도 한국전쟁의 뼈아픈 경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직까지 한국전쟁 전과 기록의 대조비교가 이뤄지지 않은 관계로 미소간 공중전의

정확한 승부결과는 적지 않은 논란이 있습니다. 우선 미국과 소련의 기록이 너무도 판이

하게 다릅니다. 미공군의 추산에 따르면 세이버 한 대당 미그 15 열대의 교환비율로 압승

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기록은 미 랜드 연구소의 분석에서도 신빙성이 떨어진다

는 평을 들을 정도고 소련 공군과 중국공군의 기록 역시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하지

만 이 역시도 정확하진 않습니다. 다만 51년 이후 중국과 북한 출신 파일럿들도 소련

군사고문단의 교육지원으로 미그 15로 공중전을 벌여왔고 이들의 기량이 다소간 미공군

이나 해군 파일럿들에 비해 떨어졌던 관계로 전쟁 후반기 미 항공력의 우세는 사실로 인

정됩니다.

  

   한국전쟁으로 제트전투기시대가 도래했고 2차대전 중 명성을 날렸던 대부분의 프로펠러

전투기들은 이제 공중전 대신 지상공격 및 근접지원임무에 주로 투입되었습니다. 다만

이들 지상공격기들이 과거와는 달리 레이더포드를 장착하면서 야간공격에 적극활용되었

고 점차로 전투기들에는 레이다 장착이 일반화됩니다. 그만큼 공격력 못지않게 탐지와

수색능력이 항공기에게 중요해진 것이지요.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항공력은 승부를 결정짓는 역할을 하진 못했습니다. 3년여의 전

쟁은 승패 없이 무승부로 끝났습니다. 제트시대의 첫 공중전은 전면전을 원하지 않았던

열강의 암묵적인 상호 동의하에 치열한 소모전으로 일관 했을 뿐, 그 어느 쪽도 이를

통해서 승부를 낼 의사가 없었습니다. 소련이나 중국은 미그가도 이외의 지역으로 전투

기를 내보내려 하지 않았고 미국 역시 미그기의 활주로가 있었던 만주에 대해서는 직접적

인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제한전이자, 냉전의 대리전 성격이 짙었던 한국전쟁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보였던 셈입니다. 다만 미국이 한국전쟁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된

소련제 미그 15를 몹시도 탐냈던 모양입니다. 한국전쟁 내내 미국은 당시로써는 거액인

10만불의 포상금을 내걸면서까지 미그 15의 파일럿들을 유혹했으니까요. 그리고 53년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9월 21일 북한공군의 노금석 소위가 미그 15를 몰고 김포

공항에 착륙해 미국은 그토록 원하던 미그 15의 실물을 얻게 됩니다. 이후 노소위는 10만

불의 돈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델라웨어에서 대학을 마치고 미국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

50년 당시 미국으로 국비유학을 보냈던 50명의 남한유학생중 귀국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던 사실과 함께 당시 한반도가 얼마나 가혹했던 곳이었는지를 재삼 절감케 합니다.

소련 역시도 세이버나 기타 미공군의 불시착, 혹은 추락한 기체들을 통해서 많은 것

을 얻었지요. 전후 소련이 개발한 투폴레프 95 사발 중폭격기가 사실상 B-29를 그대로

카피한 것을 봐도 그러합니다.

 

    냉전이 격화되면서 항공기술은 더욱더 진보를 거듭했고 47년 처음 음속을 돌파한 이래,

비록 2차대전 식 공중전을 재현한 것이라지만 훨씬 더 빠르고 높은 고공에서 벌어진

미그 15와 F-86 세이버의 공중전은 제트전투기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습니다.

이후 전투기들은 더 빠른 초음속의 시대로 진화했고 로켓무기의 진화로 인해 점차 기

관총 혹은 기관포에서 미사일을 주무기로 하는 시대로 접어듭니다. 점차 가시권에서의

공중전투가 수평선너머의 비가시권 전투로 진화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제 2세대, 3세대 전투기들에 의해 베트남과 중동의 하늘에서 또 다른 치열한 개싸움을

예고합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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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최초의 제트 전투기의 공중전이 한국전이었다는 글을 예전에 읽은 적이 있는데
나그네님의 자세한 설명을 읽게 되었습니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저 전쟁에서 2차대전때 일본군에게 퍼부은 것보다도 더 많은
폭탄을 투하했다하니 전쟁이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땅 위에 남아있는 건물이란 단 한 채도 없을 정도의 저 무지막지한 공격..
같은 인간으로서 정말 할 짓이 아니건만 전쟁이란 인간을 저렇게
미치광이로 만들어버리는 것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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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님의 댓글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

그게 바로 60여년전 우리땅에서 일어났다는 것이고 더 이상 이와 같은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여전히 상처로 남은 이 비극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에 대해서 늘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한반도의 문제는 전쟁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걸 가르쳐 준게 한국전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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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ks님의 댓글

thanks 작성일

Thank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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