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19.《아프리카의 꾸바》로 알려졌던 베닌, 사회주의해도 사대주의하면 망한다 > 통일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통일게시판

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2-19.《아프리카의 꾸바》로 알려졌던 베닌, 사회주의해도 사대주의하면 망한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7,263회 작성일 22-05-16 01:30

본문


《아프리카의 꾸바》로 알려졌던 베닌,

사회주의해도 사대주의하면 망한다

 

man.jpg

고 류태영 박사


서아프리카 기네만에 면하여 남북으로 뻗어있는 베닌공화국의 고대력사는 아직 제대로 정리되여있지 않다. 다만 12~13세기에 풍족이 최초의 강력한 왕국을 건설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을뿐이다.

베닌의 원래이름은 다오메였는데 1975년 11월에 마티어 께레꾸 전 베닌대통령이 베닌인민공화국창건을 선포함으로써 옛 국가의 명칭은 영원히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말았다.

베닌은 부르끼나파쏘, 니제르, 나이제리아 그리고 또고 등 여러 나라들과 린접하고있으며 면적은 11만 2 622㎢이다.

유럽의 침략자들이 처음 베닌에 상륙하기 시작한 때는 15세기무렵이며 침략자들은 그후 수백년동안 이곳을 노예무역과 자유무역의 거점으로 리용하여왔다.

17세기 60년대부터 이 나라에 대한 침략의 길에 나선 프랑스식민주의자들은 1804년에 북부지역을 강점하였으며 1904년에는 저들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었다.

프랑스는 그후 1960년까지 56년동안 베닌에 대한 식민지통치를 단독으로 계속해왔다.

 

다오메의 독립

 

제2차 세계대전후 베닌민중들의 독립투쟁은 더욱더 고조되였다. 이 투쟁과정에 베닌은 1958년 12월 프랑스공동체내의 자치공화국으로 되였으며 마침내 1960년 8월 1일 독립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독립후 베닌에서는 정치, 경제적불안정이 계속되였으며 여러차례의 정변과 정권교체가 있었다.

독립후 초대대통령으로 된 인물은 유베르 마가(Hubert Maga)였다.

그는 친프랑스적인 지식인으로서 집권기간 그의 배후에는 언제나 실질적인 지배세력인 프랑스가 존재하고있었다.

1960년 12월 신임내각을 발표한 마가대통령은 수도를 뽀르또노보로부터 꼬또누로 옮기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것은 꼬또누일대가 대통령의 출신지로서 이 지역을 권력의 근거지로 삼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하지만 마가정권은 집권초기부터 풍랑에 요동치는 쪽배모양으로 위태로운 정치적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마가정권은 언론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로동조합을 해산하였으며 학생들의 반정부운동을 봉쇄하기 위한 방법으로 기존의 두개의 대학조직들을 단일조직으로 강제로 통합시켜 정부가 학생들을 통제하는 어용단체를 조직하였다. 이 과정에 반정부기운은 날로 높아갔으며 대통령에 대한 암살기도도 발생하였다.

이러한 정치적혼란속에서도 마가대통령은 막대한 자금을 지출하여 대통령궁전을 건설하였다.

대통령궁전은 비록 금과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였으나 이미 대통령은 민중의 적으로 인식되였고 이로부터 마가정권의 붕괴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마가대통령은 자기의 정치적적수인 쏘글로를 암살할 음모를 꾸미고있었는데 그것이 실패함으로써 오히려 쏘글로의 역습을 받는 신세가 되였다. 결국 그는 1965년에 대통령직에서 퇴임당하고 가택연금되였으며 나중에는 외국으로 망명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마가대통령의 퇴임후에 쏘글로가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이 정권도 평온치 못하였다.

다오메의 정치적현실은 쿠데타로 정권이 해마다 바뀌는 혼란에 빠져있었다. 뿐만아니라 프랑스에 망명중인 마가 전 대통령이 또다시 재기의 기회를 노린 활동을 벌리고있어 베닌은 더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쿠데타가 계속 발생하고있는 극히 혼란된 정세속에서 쏘글로의 정권은 붕괴되고 민간인 에밀 진수가 시민대통령으로 임명되여 정국을 수습하려 하였다. 1968년 7월 28일 베닌에서는 림시대통령선거가 진행되였으며 에밀 진수가 투표인의 76%에 해당하는 표를 획득함으로써 다오메의 민간인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 남짓한 뒤인 1969년 12월 10일에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여 민간인 진수대통령은 퇴진당하고말았다. 또다시 불안전한 군정이 시작되였다. 그동안에 베닌에서는 5차례의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였으며 다오메의 정권은 11차례나 교체되였다.

이렇듯 베닌은 1960년에 독립은 했지만 종주국의 리권과 랭전체제를 계속 유지하려는 외세의 간섭에 의하여 정치적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행한 나라로 전락되였던것이다.

 

《아프리카의 꾸바》로 알려졌던 베닌

 

베닌의 이 암흑의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진보의 수레바퀴를 새 사회건설의 레루우에 올려놓은 민중혁명가는 1972년에 등장한 마티어 께레꾸이다.

그는 《아프리카의 꾸바》로 알려졌던 베닌인민공화국 건국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져있다.

1972년 10월 외세의존적인 마가정권을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한 마티어 께레꾸는 1974년 11월에 자주자립의 사회주의국가건설을 선언하였다.

그 이듬해 마티어 께레꾸는 유일한 합법정당으로서 맑스주의를 표방한 베닌인민혁명당(PRPB)을 결성하고 국가명칭을 새로 베닌인민공화국(PRB)으로 제정했다. 다오메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영원히 사라졌다.

1979년 11월에 베닌인민공화국 의회는 마티어 께레꾸의장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며 베닌인민공화국은 1989년 8월에 마티어 께레꾸대통령을 제3선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1990년까지 집권하게 하였다.

그런데 1991년 3월에 실시한 대통령선거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압력에 못이겨 베닌의회는 다당제를 도입하여 대통령선거를 치르었다. 선거결과 외세를 등에 업고 반사회주의로선을 추구해온 쏘글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쏘글로는 친미친서방적인 정치로선을 채택하여 장기집권을 시도하고있었다.

하지만 맑스-레닌주의로선을 반대하고 극우정책으로 집권을 시작한 쏘글로정권은 5년임기로 끝나고말았다. 1996년에 있은 대통령선거에서 쏘글로가 패하고 마티어 께레꾸가 지지률 52. 49%를 획득하여 정권을 다시 되찾는데 성공했던것이다.

마티어 께레꾸대통령은 사회주의적정권을 되찾았을뿐아니라 5년후에 있은 2001년 3월의 대통령선거에서도 재선되여 2006년까지 집권하였다.

마티어 께레꾸대통령은 2006년 3월에 실시한 대통령선거에 다시 출마하지 않고 후임자 보니 야이에게 정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하고 정계를 완전히 떠나갔다. 그가 퇴임한것은 대통령나이를 70살로 제한한 헌법을 지키기 위한 준법정신때문이였다.

마티어 께레꾸는 사회주의에 대한 굳센 신념을 가지고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품이 넓은 아버지와 같은 정치가였다. 그래서 마티어 께레꾸의 집권기간 베닌의 민중들속에서는 독재자라는 소리를 전혀 들어볼수 없었다고 한다.

마티어 께레꾸는 사회주의리념을 시종 변함없이 초지일관하게 드높이 휘날리며 베닌공화국을 이끌었으며 2006년에 조용히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쏘글로대통령의 집권 5년에 대하여

 

1972년의 사회주의혁명정부 창설이후부터 2006년에 마티어 께레꾸가 정권을 후임자에게 평화적으로 이양하고 은퇴할 때까지 34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하지만 이 기간에 쏘글로대통령이 정권을 탈취하여 1991년-1996년까지 5년동안 친미친서방정치로선을 추구하였다.

쏘글로대통령의 집권은 사회주의베닌인민공화국에 일시적으로 큰 타격과 손실을 초래했다.

베닌은 프랑스로부터 독립했을 당시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지만 마티어 께레꾸대통령의 사회주의정치로 하여 민중은 모두 평등하게 잘살만 한 때에 이르게 되였다.

그런데 시대적변화로 인하여 동유럽에서 사회주의국가들이 일제히 붕괴되는 세찬 바람이 불어닥쳐 베닌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였다. 이때 서방의 지원을 받는 쏘글로가 등장하여 사회주의를 고수하고있는 마티어 께레꾸대통령을 물리치고 정권을 탈취했던것이다.

정권의 자리에 앉은 쏘글로는 친미행각을 자행하면서 무작정 인권과 자유경제를 전매특허모양으로 선전하였다. 그동안에 민중속에서 확장되고있는 빈곤과 사회적불안이 곰팽이처럼 베닌에 침투하여 어둠속으로 인도하고있었다.

쏘글로대통령의 무분별한 외세의존경제정책은 불만을 야기시켜 1993년의 의회선거에서는 반대파가 형성되였으며 쏘글로대통령에 대한 쿠데타시도가 발생하였다. 이 쿠데타는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이를 계기로 정권에 대한 불신이 더욱 커갔다.

쏘글로대통령의 치명적실패는 대통령 친인척중심의 통치형태에 있었다.

대통령의 처가 정당을 창당하고 국회의원이 되기도 하였고 대통령의 아들이 비서실장과 공보담당관으로, 대통령 처남들이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대통령의 형을 외국의 대사로 임명하였고 그외에도 많은 친인척들이 정부의 요직을 독차지하고있었다.

이러한 쏘글로대통령의 친인척중심정권에 대한 민중의 불만은 극도에 이르렀다.

베닌의회는 해마다 대통령이 제출하는 예산안을 거부했지만 쏘글로대통령은 IMF의 실행강요를 핑게삼아 강제로 통과시키군 하였는데 이를 반대하는 로동자, 학생들의 반정부시위가 계속 일어났다.

Yale대학의 아프리카전문연구원 Paul Ngomo는 《왜 어찌하여 쏘글로대통령은 5년임기를 끝내고 재선에 실패하였는가》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있다.

첫째, 쏘글로대통령의 정치적지도력부족이다. 사회주의《독재자》를 물리치고 자유민주주의정권을 창출한다는 슬로건으로 선거에서 승리한 쏘글로는 정치적지도력에 있어서 앞뒤가 일치하지 않음이 그대로 폭로되였다. 서방을 모방한 피상적민주주의가 민중을 속여 외세의존적인 사대세력의 등장을 위한 수단과 방법이라는것이 폭로되였기때문이였다.

둘째, 그가 주장하는 피상적자유민주주의속에는 개인리기주의와 부유한 집단의 리기주의가 작용하여 나라와 민족전체, 집단적리익을 손상시키는 독소가 들어있음이 밝혀졌기때문이다. 특히 민중들은 쏘글로대통령의 친인척의 대거등용을 민주주의에 빙자하여 사대매국세력들로 지배세력을 구축하려는 음흉한 기도로 인식하였다. 아무리 권력으로 위장해도 민중을 속일수 없었다.

셋째, 민중은 본능적으로 사회주의적지도자를 갈망하고있었기때문이다.

물론 마티어 께레꾸대통령에 대한 베닌민중들의 그리움도 작용했을것이다.

또한 외세의존적이며 경망스러운 쏘글로대통령에 대한 민중의 숨김없는 심판의 칼이 작용했다고 볼수 있다.

이러한 Yale대학연구원의 직설적인 해석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동감할 사실은 수세기동안 외세의 식민지통치에 시달려오다가 겨우 해방의 기쁨을 맞이한 베닌민중들이 마티어 께레꾸대통령을 통하여 희망의 등대를 발견하였다는것이다.

마티어 께레꾸대통령은 온갖 서방의 경제봉쇄와 IMF 그리고 개혁개방의 협박속에서 베닌사회주의국가를 이끌어왔으며 비록 풍족하지는 못하지만 평등하게 먹고살수 있는 나라를 건설하여 통치하고있었다.

마티어 께레꾸의 정치에 대한 향수심에 젖은 베닌민중은 1996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사회주의자 마티어 께레꾸를 또다시 그들의 대통령으로 내세웠다. 마티어 께레꾸대통령의 재선에 대하여 세계는 깜짝 놀랐다.

5년만에 정권을 회복한 마티어 께레꾸대통령은 결코 순탄한 통치를 할수 없었다. 그 주되는 리유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마티어 께레꾸대통령의 정권복귀를 무너뜨리려고 지독한 경제봉쇄를 하였기때문이다. 특히 서방식민주주의회복이라는 미명아래 온갖 압력을 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속에서도 마티어 께레꾸대통령은 2001년에 또다시 재선되여 놀랍게도 2006년 3월까지 29년동안 베닌인민공화국을 통치할수 있었다.

이미 사회주의가 어떤것인지 경험한 베닌민중들을 미국도 IMF도 그 어떤 세력도 현혹시킬수 없었던것이다.

 

오늘 베닌은 어디로 가고있는가?

 

마티어 께레꾸대통령이 2006년 대선에 불출마를 선언함으로써 베닌의 대통령선거전은 치렬한 경쟁없이 비교적 평온하게 진행되여 야이후보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서아프리카개발은행의 수장으로 오랜 기간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있는 보니 야이대통령은 미국과 두터운 관련을 가지고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보니 야이대통령의 통치과정은 순탄치 않다.

2007년 3월 15일에 보니 야이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차량공격이 발생했는데 대통령의 생명은 무사했지만 경호원들이 중상을 당하였다.

보니 야이대통령이 친미적로선을 선택했으나 서아프리카의 여러 이웃나라들의 행보를 무시하고 독자적인 친미행각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특히 베닌민중들의 가슴속에 사회주의지도자 마티어 께레꾸 전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생생히 살아있는 정치풍토에서 보수주의그리스도교인임을 자처하는 친미주의자 보니 야이대통령은 선택의 폭이 그리 넉넉하지 못하다.

2010년 11월에 베닌에서는 홍수피해로 인하여 리재민 68만명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은 대통령재선을 바라보는 보니 야이대통령에게 큰부담으로 작용했다.

베닌에서는 원래 2011년 2월 27일에 대통령선거를 하기로 되여있었는데 수십만명의 유권자들이 루락되는 사고가 발견되여 2011년 3월 13일에야 선거를 진행하게 되였다.

14명의 후보자가 출마하는 혼란속에서 진행된 선거에서는 당선자를 선출할수 없어 다시 결선투표를 해야 할 사태가 조성되였다.

이전의 사회주의정치하에서는 있어본적이 없는 일이다.

한때 《아프리카의 꾸바》로 불리웠던 베닌의 정치적현주소는 오늘 사람들에게 무엇을 시사해주는것일가.

2011년초 북의 여러곳을 돌아보면서 느꼈던 감정에서 이 대답을 피력해본다.

그때 조선혁명박물관과 당창건사적관을 참관하면서 들은 김일성주석의 타도제국주의동맹의 결성 그리고 인상적인 카룬회의에서 《조선혁명의 진로》발표 등 력사적이야기들은 저 아프리카 베닌의 혁명이야기에서는 물론 세계 어느 나라 민중들의 혁명투쟁사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이야기였다. 또한 혁명사적관안에서 듣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항상 듣고있고 북에서 주장하는 총대위주, 선군정치 그리고 고난의 행군, 우리 민족끼리라는 표현들 역시 그 어느 나라 반제투쟁이야기에서도 들어볼수 없는 희귀한 표현들이다.

이를테면 자주와 자력정신을 제일생명으로 내세우는 북에서만 나올수 있는 표현들이다.

여기에 베닌이 보유하고있는 군사력(2009년)을 참조한 자료가 있다.

총병력은 4 800명으로 1개 기갑대대, 3개 보병대대, 1개 공수부대 그리고 1개 포병중대가 있을뿐이다. 이들이 보유하고있는 무기들은 일일이 살펴볼 필요도 없이 약할뿐만아니라 전투기는 한대도 없는것이 베닌의 군사력이다.

29년간이나 사회주의를 지향해온 베닌이 어째서 서방의 간섭과 압력에 주저앉았는가를 가히 리해하게 하는 자료이다.

사회주의를 하여도 자위력이 없으면 그리고 사대주의로 나간다면 나라가 망할수밖에 없다는것을 베닌의 현실이 말해주고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