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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래일에 사는 사람들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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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7,124회 작성일 22-05-28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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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제 3 편 오늘의 의미

11

유연체계시험공장에서는 열흘째 시험이 계속되고있었다. 시험을 거듭할수록 리눅스체계가 실시간을 담보하는것 같더니 지금에 와서는 실시간을 완전하게는 담보할수 없다는 결론을 짓게 되였다.

연구사들이 CNC장치 《조종7호》와 결합한 종합가공반두리에 모여서 새치기니 계수값이니 몇미리초니 하고 떠들다가 기계를 멈추고 깎던 신발형타를 들여다보았다. 나무년륜처럼 주기적으로 거친 공구자리들이 나타났다.

《한번 더 해볼가요?》 최일이 진수현에게 물었다.

《아니, 이젠 결론을 지읍시다. 정철동무가 주장하던것도 옳았고 최일동무의 주장도 아주 틀리지는 않았소.》

《결국은 중간파인 남웅동무의 절충적인 주장이 제일 옳았다는게 아닙니까.》 최일의 말이였다.

《그렇소.》

진수현은 누구보다도 기뻐할 대신 우울해있는 리남웅을 쳐다보고 그의 애인 서진주를 생각하였다. 그 처녀는 지금도 남웅을 제 주장을 못 가지고 우왕좌왕하는 인물로 오해하고있을것이다.

그게 바로 반식자우환이라는것이였다. 이제는 그 처녀의 오해도 풀리게 될것이였다.

《그럼 새치기를 써봅시다.》하고 최일이 말했다. 《이제는 드라이버(장치구동프로그람)가 필요합니다.》

이번에 그는 자기의 주장을 대체로 부정하는 시험을 책임지고 그것을 공정하고 신속하게 치르면서 실시간성보장을 위한 대책까지 모색한것이였다. 참으로 전개력이 있고 예지가 번뜩이는 최일이였다.

그는 실장에게 이 장치구동프로그람을 리남웅이 짜게 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진수현은 송춘도에게 맡기고싶었다. 백호화학공장에 다녀온 뒤로 송춘도는 아주 멍청해지고말았다. 자기 실력이 남들보다 퍽 뒤떨어졌다는것을 깨닫고 채심하는것이 아니라 아예 실망한것이였다.

진수현이 그에게 말했다. 《드라이버는 송동무가 짜보는게 어떻소?》

《난 자신이 없습니다. 저리 다른 사람한테 맡기는게 더 빠를겁니다.》

《여, 송동무.》 최일이 부추겼다. 《한번 맡아보지 뭐? 도와줄테니…》

《됐소, 이젠 더 념려하지 않아두 되오.》

《또 무슨 딴 꿈을 꾸는게 아니요?》최일이 물었다.

《제발 내 일엔 상관 말라니까.》

송춘도는 시뚝해서 돌아섰다.

진수현은 그를 보고 의혹에 잠겼다. 그의 실력이 뒤떨어진건 사실이지만 아직 절망할 정도는 아니였다.

정말 다른데로 뛸 궁리를 하는게 아닐가?!

요즘 춘도가 리윤덕부소장방에 더 자주 드나든다 했더니…

진수현은 아직까지 그것을 춘도의 탈선과 련관시켜 생각해보지는 못했었다.

그는 오히려 리윤덕이 사표를 내려 한다는 뛰뛰한 소리들이 돌아가는데만 신경을 쓰고있었다.

진수현은 자기가 윤덕에게 너무도 무관심했다는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전번에 리윤덕을 비판한 후에 그와 따로 마주앉지를 못했었다. 복도나 회의장에서 만나도 못 본듯이 서로 외면하는 사이가 되고말았다. 원래 진수현은 누구를 비판하거나 누구와 다툰 뒤에 그와 조용히 만나 따뜻이 화해하는노릇을 어색하게 여기는 사람이였다. 그런 화해는 말보다도 실천속에서 자연히 이루어지는것이라고 생각해오던터였다.

돌이켜보니 후회되는게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그는 윤덕이 부소장사업에 열성을 보이지 않는것을 보면서도 비판을 받고 일시 위축된것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표 운운하는 소리들이 떠도는게 아닌가.… 돌이켜볼수록 자기는 너무도 그를 몰랐고 그만큼 무심했었다.

진수현은 무거운 걸음으로 연구소로 돌아왔다.

어디 조용한 구석에 가서 한참 누워있고싶었다. 온갖 피로는 눈으로부터 온다더니 요즘에는 두눈이 쿡쿡 쏘고 안개가 낀것처럼 뿌옇게 보이면서 온몸이 쑤시고 무력감이 왔다. 스스로도 너무 무리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조종7호》를 완성한 다음에는 안해의 말대로 병원입원실로 가서 이틀이고 사흘이고 잘 생각이였다. 그러면 눈도 좀 나을것 같았다.

지금은 소장방으로 가야 했다.

김응일소장은 전화를 받으며 손짓으로 진수현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는 치료기일이 끝나기도 전에 병원에서 퇴원하여 며칠째 자기 사무실을 지키고있었는데 수현에게서 《조종7호》개발정형과 젊은 연구사들에 대해 료해하더니 년말에 가서 최일을 공동연구차로 스위스에 보내는게 어떤가고 묻는것이였다.

진수현은 기꺼이 동의하였다.

소장은 지금부터 그 준비를 해야 한다고, 이제 6개월후에 본인이 영어로 쓴 론문과 장차 연구하려는 내용 그리고 본인자료를 스위스의 연구소측에 통지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말끝마다 줄기침을 하면서 괴로와하였다. 그는 지금 연구소일을 다시 주관하고있었다.

진수현은 그를 보고 다시 병원에 입원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념려의 말을 하였다.

소장은 지금 어디 그럴 형편이 됐느냐면서 난감한 기색을 지었다.

진수현은 속에 짚이는것이 있었다. 리윤덕이 정말 요즘 일을 태공하는게 아닐가?

《윤덕동무가 사표를 냈으니 별수가 있소.》 소장이 지친듯 말했다.

《그게 정말입니까?》진수현은 인차 믿어지지 않았다. 《대체 그 사람이… 어쩌자는겁니까?》

《그 속심이야 낸들 알겠소. 어쨌든 이제 송화기계무역회사로 갈것 같소. 부사장으로 말이요.》

《그럴수 없습니다!》 진수현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믿는 나무에 곰이 핀다더니, 헛참…》 소장도 랑패한 기색이였다.

《그동안 내가 지내 방임한탓이요. 아니, 두둔했다고 할가…》

《그는 떠나면 안될 사람입니다. K방식풀이를 시도하던 재사가 회사로 가면 어떻게 합니까?》

《여기에 붙잡아두긴 틀렸소. 너무 늦었거던.》

소장의 탄식에 진수현은 가슴이 답답해났다.

그는 부소장실로 찾아갔다.

리윤덕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

그는 책장과 서류함, 금고들을 활짝 열어젖히고 책이며 서류며 잡동사니들을 꺼내여 책상과 탁자, 쏘파우에 무둑무둑 쌓아놓기도 하고 노끈으로 묶기도 하였다. 이 방을 장식하던 대항해시대의 에스빠냐범선모형도 높은 서가우에서 내려와 진수된것처럼 물결무늬 긴책상우에 놓였다.

《자네 어떻게 된 일인가? 이럴수가 있나?!》

진수현이 거듭 물었다.

리윤덕은 대답대신 그를 흘끔 쳐다보더니 손에 들었던 서류로 회전의자의 먼지를 툭툭 털어 앞에 내놓았다. 《앉게…》

그는 마주앉아 수현에게 담배를 권하고 자기도 한대 피워물었다.

《내가 떠나는 까닭을 몰라서 묻나?》

《?》 진수현은 도무지 영문을 알수가 없었다.

푸른 담배연기오리들이 그들사이에서 꼬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사실 리윤덕이 떠나게 된것은 그자신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수 있었다.

그는 부소장으로 임명되자 자부심도 부풀고 머지 않아 병약한 소장의 뒤를 잇게 될것 같아 일욕심도 생겼었다. 그런데 사업범위가 이전보다 커지면서 그에 대한 연구소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해졌다. 날이 갈수록 그는 실장들을 학적으로 지도하기도 힘에 부쳤다.

회의에서 진수현이 윤덕의 결함을 날카롭게 찌르게 되자 비서뿐아니라 윤덕을 자기 오른팔로 여기던 소장까지도 그를 달리보기 시작하였다.

형세는 점점 윤덕에게 불리해졌다.

리윤덕은 진수현과 같은 연구소 중진들이 장차 자기의 지위를 용납하지 않으리라는것을 예감하였다. 수학에서 취급하는 곡선들이 어떤 모양으로 어디까지 뻗어나가겠는지를 미리 가늠할수 있는것처럼… 자기에 대한 주위사람들의 불신임도 로그함수곡선과 같이 초기에는 완만한것 같지만 나중에는 급상승하여 돌이킬수 없을 정도로 커질수 있었다. 그는 아직 체면을 세울수 있을 때 전망은 보이지 않고 부산하게만 느껴지는 부소장자리를 내놓고 대외기술교류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요즘 추이에 편승하여 연구소를 뜨기로 작정하였다. 외국바람도 쏘이고 나라의 과학기술발전에도 크게 기여할수 있는 그런 일자리가 송화기계무역회사에 있었다. 그 회사에서는 조종기계분야의 실력가가 온다고 그에게 적지 않은 기대를 걸고있었다.

리윤덕이 사표를 내고 조용히 떠나려는 참에 바로 그를 떠나게 했다고도 할수 있는 진수현이 찾아와 새삼스레 어찌된 일인가고 묻는게 아닌가. 윤덕은 담배맛이 쓰거웠다.

《그래 송화기계무역회사에 가선 뭘한다는건가?》

진수현이 자꾸 끈덕지게 묻는다.

《그야 물론 기술무역에 주로 종사하게 될테지.》

《자네가 꼭 가야 하나?》 진수현은 진정으로 의문스러운 모양이였다.

《거기에도 전문가들이 필요하지.》 리윤덕이 그를 깨우쳐주듯이 말했다.

《아마 여기서보다 더 유익한 일을 하게 될거네.》

《더 유익한 일을? 난 믿어지질 않네.》 진수현이 고집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덕이 말했다.

《사람이 왜 그리 편벽한가? 공업이 발전된 나라들일수록 기술수입을 중시하고있질 않나. 그곳 전문가들도 다른 나라의 기술을 사들이면 자체로 연구할 때보다 비용을 5분의 1이나 6분의 1로 줄일수도 있다고 내놓고 말하고있네. 이건 일반적으로 공인된 견해이기도 하지.》 윤덕이 열에 떠서 말했다.

진수현은 그를 면바로 쳐다보았다.

《그게 떠나려는 주되는 리유는 아닌것 같은데?》

《그럼 자네 좋을대루 생각하라구.》 비뚤어진 소리였다.

《자넨 떠날수 없어. 못 가네. 천직을 버리구 어디로 간다는건가? 이거야 국가적으로도 손실이 아닌가.》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어. 이젠 결정이 됐네.》

《쓰던 론문은 어떻게 하겠나?》 진수현은 어떻게 하든 그를 붙잡고싶었다. 《마저 완성해야 할게 아닌가.》

《념려말게. 가서 완성하지. 아무렴 내가 과학계에서 발을 뺄것 같은가.》

《…》

진수현은 이 자리에서 그를 돌려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설복도 호소도 너무 늦었다.

《떠나면서 자네한테 한가지 부탁할게 있네.》 리윤덕이 하는 소리였다. 《뭐 대수로운건 아니야. 송춘도를 어느 기관에서 콤퓨터기술자로 받겠다는데 놔주라구. 아무래도 거기가 적재적소인것 같애.》

《?!…》

《정작 여길 떠나자니 춘도 일이 제일 마음에 걸리누만. 몇해동안 내가 끼고있었는데…》

《그를 보내면 안되네.》 진수현이 매정하게 잘랐다.

《마지막부탁두 거절하긴가? 자넨 요즘 송춘도가 자기 실력때문에 고민하는걸 알면서두 그래?》

《물론 지금 동요하고있지. 이럴 때일수록 그를 잘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송춘도는 나라에서 품들여키웠네. 소학교시절부터 계통적으로 수재교육을 받지 않았나. 전공기초가 좋아서 이제라도 채심만 하면 과학자로서 한몫을 할수 있네. 그 나이에 포기하긴 일러.》

《본인의 생각은 좀 다르더군. 점점 따라가기가 힘들다는거야. 이제보니 송춘도는 착상력보다 판단력이 더 우세한것 같애. 어떤 리론적측면보다도 실제적인 장치계통이 더 그에게 알맞는것 같단 말일세.》

《무슨 소릴 하는지 알만 하네. 이젠 알겠어.》 진수현은 그를 새삼스레 쳐다보았다. 《자네 젊은 사람들을 어디로 끌고가자는건가? 나라의 과학은 안중에도 없는 무맥한 인간으로 만들자는건가?… 자넨 정말 부소장자격이 없어.…》

《그래서 내스스로 물러나지 않았나. 이젠 떠나는 리유를 알만 한가? 하…》 리윤덕이 이죽거리다가 돌연 주먹을 들어 제 가슴을 두드리며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그래, 나한테 자격이 없다고 치세. 설사 그렇다 하더라두 자네한테서 정작 그런 말을 들으니 안 들은것만 못하구만. 꼭 그렇게 찍어말해야 속이 시원한가?… 자넨 고지식한것 같으면서도 너무 랭랭하고 몰인정한 사람이야.》

리윤덕의 말소리에 다소 신파적인 어감도 울리는것 같았지만 진수현은 가슴에 모진 충격을 받았다. 반박할 소리가 없었다. 그랬다, 자기는 너무도 무정한 인간이였다. 동창생이 저렇게 떠나도록 지금도 속수무책이 아닌가!…

《난 그래도 부소장으로서 자네를 념려해서 이모저모 왼심을 써왔지. 동창생이라고 말일세.

자넨 이걸 무엇으로 갚았나?》

《그러니… 내가?!…》 진수현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러구두 제편에서 내가 왜 떠나는가구 묻나? 이보라구, 자넨 과학밖에 모르는 실무적인 인간이 되고말았어. 인간의 정이나 생활에 대한 리해는 다 고갈되고말았단 말이네!… 여보게, 내 반생에서 제일 큰 불행이 뭔지 아나? 동창생 하나 잘못 둔거야, 나처럼 믿은거지. 하지만 슬퍼하지 않네. 일단 정을 뗀 이상…》

리윤덕의 격한 소리를 듣던 진수현은 가슴이 뜨끔하고 눈앞이 새까매지는 바람에 얼결에 자리에서 일어서며 한손으로 허공을 더듬었다. 그는 비칠거리다가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눈앞은 좀 밝아진듯 했지만 아직 뿌옇게 보였다. 이것은 빈혈증이 아니였다.

《이 사람, 왜 그러나, 엉?》

리윤덕이 그를 부축하며 놀라서 물었다.

《일없네.… 윤덕이, 자네의 행동은 일종의 도피에 지나지 않아. 다시 생각해보게. 그리고 춘도의 장래를 그르쳐서는 안되네.… 그렇겐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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