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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필’과 ‘미필’의 그 확연한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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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돼지
댓글 1건 조회 3,411회 작성일 10-12-05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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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밤, 우리 집 거실, 컴퓨터 앞

“아빠, 이게 무슨 말이야?”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의 바다’를 뒤지던 아들이 묻는다.
(저번에 소개했던, 내 캐리커쳐를 그려준 바로 그 아이 말이다.)

화면을 보니 요즘 곤욕을 치르고 있는, ‘국민에게 웃음 주는’ 한 정치인의 보온병 패러디가 떠 있다.

아들이 궁금한 건 군의 병과였다.
‘안상수 대표가 사실은 군대에 갔다 왔다. 병과는 보온병(兵)’

“아, 군대에는 병과라는 게 있는데, 육군의 경우 보병, 포병, 공병 등이 있고....”

“..........”

나는 열심히 설명하고 있건만, 듣는 대한민국 중학생의 표정은 떨떠름하다.
놈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금새 얼굴이 컴퓨터 쪽으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왜 포탄 껍질이 연평도에 떨어져 있는 거야? 영화에서는 총을 쏘면 탄피는 옆에 떨어지고 총알만 날아가던데.”

“............”

이번에는 내가 답변을 못했다.
(나는 공군을 갔다 와서 포탄을 본 적이 없다.)

그 때 마침 처조카가 귀가했다.
(그는 재수생으로 잠시 우리 집에 와 있다. 올 수능시험을 대전에서 봤고, 논술 학원에 다니기 위해 서울 우리 집에 와 있는 것이다.)

수능의 여운 탓인지, 처조카는 ‘포탄’이란 제목의 시(詩)에 몰입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보온병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포탄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를 패러디한 한 네티즌의 작품이다.

“어, 이모부 여기에 작품해설도 있어요.”

‘이 시가 강조하는 것은 ‘포탄’이라는 사물과 ‘언어’의 관계이다. 시 속의 화자가 말하는 대상은 포탄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포탄은 감각적 실체가 아니라 관념, 말하자면 개념으로서의 포탄이다. 따라서 이 시가 노리는 것은 ‘포탄이란 무엇인가’ 혹은 ‘포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군미필자의 철학적 해명이다.’

뭐, 이런 식의 수준 높은 해설까지 곁들였는데, 네이버 지식백과의 작품해설을 차용했다고 출처까지 밝히고 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뻥’ 터져 버렸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한반도가 직면하고 있는 객관적인 상황을 감안하면 절대로 이러면 안 되는데, 결코 웃으면 안 되는데, 결코 웃어 넘길 수 없는 일인데, 울어도 시원찮은데’라고 생각하면서.)

한참을 그렇게 낄낄 거리다 주변을 둘러보니 터진 건 나 혼자뿐이다.
조카도 아들도 심지어는 아내까지도 ‘무덤덤’하다.

패러디에 대한 반응 보다는 내가 재밌어 하는 걸 더 즐기는 눈치다.

생의 가장 원초적인 웃음에서 조차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가족에 대한 심한 배신감이 졸음처럼 밀려온다.

그들을 뒤로 하고 양치질로 입안을 깨끗이 헹군다.(오늘 하루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말들이 이로부터 쏟아져 나온 것일까?)

냉수 한 컵 벌컥벌컥 들이켠 뒤 침대가 있는 방으로 홀로 들어간다.

# 늦은 밤, 우리 집, 침대 위

어쩌자고 나 혼자만 터진 것일까?
나머지 식구들은 대체 왜 그 흥미진진한 패러디에(어디까지나 내 생각) 미동도 않는 것일까?
애들은 철이 없어 그렇다 치더라도 아내의 그 싸늘한 반응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하루 종일 인터넷 주요 포탈의 검색어 상위에 오르내리면서 우리를 여러 차례 들었다 놨다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모 국장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관련 패러디를 메신저로 보내줬고, 그 때마다 얼마나 ‘즐감’했는데...)

의문과 섭섭함, 자괴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그러다 슬그머니 잠이 든 모양이다.

# 새벽 2시쯤, 베란다

잠들기 전에 마신 냉수 탓일까?
몸 중앙에서 시작된(이거 맞나?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거지만 잘 모르겠다) 묵직한 느낌으로 잠에서 깨어난다.

천천히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볼일보고 집안을 둘러보니 모두 잠들었는지 조용하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베란다로 나가 문을 조금 열고 ‘한밤의 자유’를 만끽한다.

그 때 찬바람이 휙 불어오며 일련의 궁금증이 하나씩 풀려나간다.

‘아까 터지고 안 터진 그 확연한 격차가 혹시 군필과 미필에서 연유한 건 아닐까?’

곰곰 생각해보니 ‘논리적으로’ 그리고 ‘산술적으로’ 확실히 맞다.
왜냐하면 ‘빵’ 터진 한 명은 군필(그것도 5년을 꽉 채워 현역 하사관으로)이고 나머지 셋은 미필이다.
(정확히 말하면 한 명은 확실한 미필이고, 나머지 둘은 아직 미필.)

이처럼 딱 떨어지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어디 있을까?

이렇게 쉬운 문제를 왜 나는 성별(남자 셋에 여자 하나), 이념(보수 둘에 진보 둘), 세대(50대 하나, 40대 하나, 10대 둘), 지역(서울 셋, 대전 하나), 빈부(취업자 하나, 실업자 하나, 비경제활동인구 둘), 혈연(朴 둘, 宋 하나, 李 하나) 등 쓸 데 없는 구분에 집착했을까?

난제를 푼 만족감으로 다시 잠자리에 든다.

# 오전 6시30분, 충무로 아시아미디어타워 10층 아시아경제 편집국

엊저녁 불현듯 덮친 두 가지 의문 가운데 아직 풀리지 않은 하나로 인해 여전히 머리가 무겁다.

편집회의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한 시간여에 걸쳐 인터넷을 검색해본다.

어차피 인터넷에서 촉발된 의문, 인터넷에서 해결하자는 생각이었다. (‘땅에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다 ’는 법어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중학생 아들이 제기한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아빠, 총알의 탄피는 남는데, 왜 포탄의 탄피는 날아가는 걸까?"

# 오전 8시, 편집국

묵직한 머리로 회의를 끝내고 자리에 앉았으나 궁금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일을 시작하려니 오히려 더 증폭된다.

편집국을 돌면서, 혹시 포병 출신이 있는지 묻고 다닌다.
몇 명이 이런저런 답변을 했으나 신통치 않다.

“포탄도 종류가 여럿이라 일반화하기 힘들다”는 답변도 있었고 “포탄에는 껍질(포탄피)이 없다”는 색다른 설명도 있었는데, 글쎄?

외근중인 기자들에게 메신저 동보를 날려 ‘포병 출신이 있느냐?’고 묻지 않나, 국방부 출입기자에게 전화해서 총과 포, 총알과 포탄 사이의 민감한 차이를 꼬치꼬치 묻지 않나, 내밀한 군사기밀을 지나치게 상세히 취재하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아니면 불안했던지 급기야 내 책상 바로 앞에 앉아있는 나모 기자께서 메시지 하나를 보내줬다.

# 오전 9시, 편집국, 상황종료

자유선진당이 이틀 전 내놓은 보도자료였다.
제목은 ‘최고위원회의 주요내용.’

최고위원들 사이에 진행된 회의에서 오고간 말들을 대변인실에서 요약, 정리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내가 찾던 답이 있었다.

“나는 언론보도를 보고 정말 놀랐다. 모르면 가만있지, 예를 들어 탄피가 거기까지 날아 왔다면 문제다.
탄두가 날아오지, 어떻게 탄피가 날아오는가. 고무풍선으로 보냈다는 이야기인가.
탄피는 현장에 떨어지고, 이 탄피를 고철업자들이 가져가는 것이지, 그것이 왜 여기에 날아오는가.
그래서 나는 포탄이라고 2개를 들고 설명하는데 깜짝 놀랐다.
분명한 것은 탄두가 있고 탄피가 있는데 탄두가 날아오는 것이지, 탄피가 날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사람들한테 분명히 인식시켜 줄 것을 부탁드린다.”

제28대 육군참모총장(1990.06~1991.12)을 지낸 이진삼 의원의 발언이다.

체육청소년부 장관(1991.12~1993.02)을 역임한 덕인 듯, 표현이 아주 구체적이다.
‘고무풍선’과 ‘고철업자’라니, 비유가 너무 생생해 눈에 보이는 것 같지 않은가?
(20년 가까이 지난 일이다 보니 당시 체육청소년부가 ‘체육’과 ‘청소년’을 한데 합쳐 국가의 어떤 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청소년이 알기 쉬운 용어를 쓴 점이 눈길을 끈다.)

별 넷 출신 국회의원 다음에는 변웅전 의원의 발언도 눈에 띈다.

“105mm 포병부대 출신으로 한 말씀 드리겠다. 105mm 포를 쏘면 탄피는 포의 뒤로 빠지게 되어있다.
그런데 어떻게 북에서 쏜 탄피가 연평도까지 날아 올 수 있는가.
보온병을 들고 포탄이라고 하면 보온밥통은 핵무기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 그래도 남는 의문

자유선진당의 보도자료 내용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의문이 하나 생겼다.

스스로 “105mm 포병부대 출신”이라고 밝힌 변웅전 의원의 군 경력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생긴 궁금증이다.

먼저 국회 홈페이지와 변웅전 의원의 개인 홈페이지를 찾아봤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군 경력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의원실로 전화를 걸었는데, 변 의원의 군 경력을 알고 있는 직원은 없었다.
(최근 의원실 비서진이 모두 교체됐기 때문에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좀 귀찮지만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이런저런 검색어를 넣어 검색해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한 사이트에 ‘18대 국회의원 병역 현황’이 나왔다.
병무청이 공개한 것으로 보였다.

각 정당별 국회의원의 병역면제 비율이 표로 나오고, 그 밑에는 각 정당별 국회의원의 병역 현황이 ‘이름/생년월일/구분(군필과 미필)/군별/계급/입영일자’의 형태로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예컨대 안상수 의원의 경우 생년월일 란에는 ‘46.02.09’로 적혀 있고 구분 란에는 ‘면제’로 나와 있다.

황진하 의원은 ‘46.08.25/군필/육군/중장/69.03.28’로 돼 있다.

그리고 ‘포병부대 출신’이라는 변웅전 의원은 ‘40.10.15/군필/육군/일병/61.03.29’로 나와 있다.

19세 5개월에 입대한 셈인데 제대 날짜가 없어 병영생활을 얼마나 지속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느 포병부대에서 어떤 임무를 담당했는지도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변 의원의 말이 맞다면, 두 가지 사실과 한 가지 교훈을 추론할 수 있다.

# 두 가지 사실과 교훈 하나

먼저 군대에 8년이나 늦게 간 ‘육군 일병’ 출신 변웅전 의원이 ‘육군 중장’ 출신 황진하 의원 보다 기억력이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둘째 육군 일병도 군 생활을 제대로만 한다면(변웅전 의원이 그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육군 중장 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의정활동에) 유용한 군사 전문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이번 사태에서 얻는 결정적 교훈 하나는 “평소 꾸준히 노력해서 많이 배우거나 경험해야 하고, 잘 모르겠다 싶으면 절대로 아는 척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특히 TV방송 카메라 앞에서는.)

이 교훈만 제대로 지켜져도 대한민국은 한결 더 안정되지 않을까? 물론 기자가 나설 일은 다소 줄겠지만, 그 또한 국민들이 바라는 일 아닐까?

박종인 본부장                            아시아경제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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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종상님의 댓글

권종상 작성일

아니 이런 내공이 깃든 재미있는 글을 지금에사 보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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