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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2]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일본 당국의 탄압 극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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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재미청년
댓글 1건 조회 3,893회 작성일 10-12-21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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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2]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

일 당국:반인륜적 탄압,감시와 배제,동화정책



[도꾜=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조국분단은 잔인하다. 민족분단 때문에 해외동포들이 겪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혹독하다. 특히 재일동포들, 그 중에도 혹심한 민족차별을 받아 온 총련동포들의 경우는
지구촌 그 어느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로 밝혀지고 있다. 민족통신은 특집기획으로 <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에 대해 연재로 다루기로 하고 그 두번 째 글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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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꾜조선중고습학교 재정을 책임지고 있는 김경생 교육회 회장과 대담

[기획-2]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

일 당국:반인륜적 탄압,감시와 배제,동화정책



고급학교반에서는 문익환 목사 시를 해설하는 강의
영어시간에는 교원이 학생들과 영어로 대화하며 강의


[도꾜=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조국분단은 잔인하다. 민족분단 때문에 해외동포들이 겪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혹독하다. 특히 재일동포들, 그 중에도 혹심한 민족차별을 받아 온 총련동포들의 경우는 지구촌 그 어느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로 밝혀지고 있다. 민족통신은 특집기획으로 <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에 대해 연재로 다루기로 하고 그 두번 째 글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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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시≪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열강하는 강명세 교원
재일총련이 경영하는 조선학교에는 총련에 소속한 부모들만 아니라 민단에 소속한 부모들, 그리고 부모중 한분이 동포인 경우의 자녀들도 있다. 도꾜조선중고급학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학교를 운영하자면 예산이 필요한데 이러한 살림살이가 어떻게 유지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이 학교의 재정을 주로 담당하는 책임자를 맡고 있는 김격생 회장(도꾜조선중고급학교 교육회 회장)을 만났다.

김격생 회장(61)은 자신과 14명의 이사들이 학교운영 재정모금에 참여하고 있다고 소개하며 이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준다. 이 학교를 운영하는데 총예산은 연간4억 엔 정도 되는데 도꾜도 지방자치제 정부에서 오는 돈은 6백만 엔, 그리고 그 하급단위의 지방자치제-구청 단위에서 9백만 엔 정도되는데 이것을 다합쳐 보아야 1,500만 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총예산 중 나머지 3억8천5백만 엔을 자체로 염출해 내야 하는 사업이 바로 도꾜조선학원 산하에 있는 도꾜조선중고급학교 교육회의 몫이 된다는 말이다.

그는 이 학교 재정을 설명하면서 이 규모의 일본학교 같으면 총예산이 6억 엔 정도는 되어야 운영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4억 엔의 총예산은 아끼고 또 절약한 최저예산이라는 뜻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가 되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이 학교 학부모들이 훌륭한 애국자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학부모들이 거주하는 근처에 일본학교도 있고, 그 학교에 보내면 수업료도 거의 무료가 되다 시피하는데에도 이 조선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자녀들이 우리 말을 배울 수 있고, 우리 문화와 역사를 추가로 공부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거리가 멀고 수업료를 포함하여 때로는 추가 지원금을 성금으로 내야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조선학교에 자녀들을 보내는 학부모들은 대단한 애국자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고급학교에 대한 무상화 문제를 둘러싸고 이러저러한 움직임들이 진행되고 있지만 수업료 일부를 보조한다는 빌미로 민족교육의 존엄과 가치를 흔드는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부당한 관여가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라고 보는 관점들이 재일동포사회 내부의 지배적인 관점이다. 특히나 적용과정에서 외교문제를 빌미로 한 정치적 성격의 탄압과 간섭도 우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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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숙 교원이 고급학교 1학년 반에서 영어로 강의하는 모습
재일동포 교육계는 무상화 제도 적용이라는 결정이 가사화된다고 할지라도 재일조선인 교육 정책에 대한 일본정부의 태도 변화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하는 분위기로 보인다.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일본정부의 재일조선인 정책은 ‘감시와 배제, 탄압과 차별, 그리고 동화’ 노선을 근간으로 진해하여 왔다. 그래서 재일동포들은 민족적 정체성과 자긍심을 갖고 일본 사회에서 떳떳이 살아가는 것이 대단히 곤란한 상황인 것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번 무상화 제도의 적용 여부를 둘러싼 일본의 정치권과 언론 등의 태도를 통해서도 일본 사회 전체의 과거 역사에 대한 성찰 및 공감대가 어느 수준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과거 일제 식민지 전후 역사의 산증인인 재일조선인의 인권에 대한 일본사회의 인식과 실천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 사회 전반의 과거 가해 역사에 대한 직시와 각성이 세계의 보편적 상식에 이르지 않고서는, 또한 인위적 이념 조장에 의한 일본 사회 내의 조선인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 의식이 극복되지 않고서는, 일본정부의 재일조선인 정책의 근본적 전환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재일동포 지성인들의 일치된 관점이다. 이들은 일본의 현 민주당 정권이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 등을 통한 가해 역사에 대한 직시와 반성을 바탕으로, 입만이 아닌 구체적인 실천에 매진할 것을 요구해 왔다. 이들은 그래서 이번 무상화 제도의 조선학교 적용 문제도 당초 제도의 정신과 의의에 걸맞게 운영되는지 그 추이에 대해서도 향후 면밀히 지켜보고 대응할 것이라는 입장과 자세이다. 재일조선인들의 역사의식과 관점은 특히 재일조선인 교육계 인사들을 통해서도 구체적으로 반영되었다.

조선학교에 재직중인 교원들도 비록 일본인학교 교원들보다 급료는 적게 받지만 학생들을 지도하는 그 열의와 정성은 말할 수 없이 헌신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학교는 1945년 해방이후 국어강습소들까지 합치면 5백개 정도 되었으나 1960년도에 자체적인 통합정책에 의하여 159개로 통합한 학교들을 운영해 왔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아이들을 낳지 않는 풍조와 함께 일본사회에서 생활하기가 어려운 사정들 때문에 학생수들도 줄어들었고, 그리고 과거에 비해 일본인학교로 보내는 숫자도 늘어나는 바람에 지금은 1백개교 정도로 감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학교의 교원들의 실력과 지도방법은 뛰어 난 것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기자는 이 학교 교실 복도를 지나가다 마음이 끌리는 과목 그리고 수업분위기를 살피며 이 교실 저 교실에 들어가 수업시간에 참관해 보았다. 또한 휴식시간에 학생들과도 대화를 나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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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시간 조기천 시인의 <조선은 싸운다>를 설명하는 김훈애 교원
고급학교(고등학교) 1학년 영어반에 들어가 보았다. 강명숙 선생은 학생들과 영어로 대화하고 있었고, 주고 받는 영어 발음은 상당한 수준의 실력을 갖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학습분위기는 진지하면서도 열정적으로 느껴졌다. 그 다음 교실은 우리 말(국어) 시간이었다. 강명세 선생이 30명 가량되는 학급 학생들에게 문익환 목사가 1989년에 쓴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소개하면서 이 시 전체를 놓고 <기>, <승>,<전>,<결>에 대한 부분 부분을 지도하면서 열정적인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 시를 소개하다가 “여러분 력사를 산다”는 말이 무엇을 말하는가라고 학생들에게 묻는다. 지금의 역사가 분단시대이기 때문에 “조국통일을 위해서 한 목숨 바치는 것”이 곧 “력사를 산다”는 뜻이라고 풀이해 준다.

그 다음 교실은 고급학교 2학년 반이었다. 김훈애 선생이 북녘의 유명한 시인으로 알려져 온 조기천(1913~1951)의 작품 “조선은 싸운다”에 대해 강의중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러시아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활동한 시인이다. 어린 시절 시베리아로 이주하여, 소년 시절부터 소련의 지방 신문이나 잡지에 짤막한 시를 발표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앙 아시아에 있는 조선사범대학 교원으로 근무하였고, 해방이 되자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신문사 문예부에서 활동하였다. 코리아전쟁 시기에는 북조선군 종군 작가로 참전한바 있었다. 1951년 평양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작가로서 그가 1947년에 발표한 서사시 《백두산》은 북조선의 혁명 사상을 표현한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어 왔다. 김 선생은 바로 그의 작품을 소개하고 지도하고 있었다.

이 학교 중급부 교원실에서 만난 리화숙 교무부장은 “우리 학생들은 중3때는 오끼나와 견학, 고1, 고2 때는 아씨오동상(군마) 등 과거사와 관련된 곳들을 현지답사하며 공부하고, 고3때에는 조국방문(이북방문)을 하는 일정으로 되어 있다고 설명하면서 “오끼나와에 갔을 때에는 그곳의 자연동굴에 들어가 보았는데 거기에서 과거 우리 조선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를 한 정신대 여성들과 말이 함께 지낸 흔적을 발견했다.”고 말해주면서 일제시대에 우리 민족이 얼마나 혹사당하였는가를 간접적으로 일깨우 주었다.

그는 또 학교 권투연습장으로 안내하면서 월드컵 축구선수로 이름날린 정대세 선수는 아이찌(나고야) 졸업생이지만 안영학 선수는 이 학교 1997년 졸업생이라고 자랑하면서 이름난 프로권투선수 김창수 선수도 이 학교 출신이라고 자랑하기도 한다. 권투장에는 김창수 선수의 과거 시합홍보 포스터도 부착해 놓았고 그리고 벽에는 ‘사상전, 투지전, 속도전, 기술전’이라는 구호가 붙어 있었다.

이 학교 교실들과 복도는 마치도 가정집 내부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모두들 학교에 들어가려면 입구에서 신발을 벗어 신장에 넣고 다닌다. 교실도 깨끗하고 식당, 실내 체육관 등도 모두 청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운동장은 넓었지만 축구경기장, 농구장, 육상경기장 등 모든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도꾜조선중고급학교 안팎 모두 깨끗하게 정리정돈되어 있어 그 누가 보아도 “훌륭하다”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특히 강의실 안에서 벌어지는 교원들의 열정적인 강의와 진지한 모습으로 수업받는 학생들의 자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분위기로 느껴졌다. 특히 학교 안팎에서도 우리 민족의 얼이 새록새록 싻트는 교육의 전장이라는 것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다음 기획-3에서는 중학교, 초급학교, 유치원 선생들과의 만남에 대하여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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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로 들어갈때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넣고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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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꾜조선중고급학교 학생들이 수업받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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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권투선수 김창수를 길러 낸 학교라서 그의 경기 홍보물을 권투장에 부착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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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홍콩의 위성테레비죤 방송사가 이 학교를 취재하기 위해 운동장에서 대담촬영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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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시간이 되자 학생들은 서로의 대화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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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이 되자 교실로 가는 학생들-복도가 집안처럼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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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보도자료 보기



*[기획-1]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
도꾜조선중고급학교 신길웅 교장(61)과 대담

*[대담]재일평통협 리한수 상임고문(70):"회장 직 그만두고 대중사업 더 바쁘다"

*[대담]재일한청 박명철 부위원장:“한통련 선배들 통해 역사 눈떠”

* 재일한국청년동맹 50주년 기념식 진행
*[기획]재일한국청년동맹 50년 발자취③
*[기획]재일한국청년동맹 50년 발자취②
*[기획]재일한국청년동맹 50년 발자취①





[출처 : 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2010-12-21]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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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꾼님의 댓글

통일꾼 작성일

학생들이 배워야 할 것을 제대로 배우는
가르쳐야 할 것을 제대로 가르치는
참 학교로군요.

어려움 속에서도 뜻을 꺾지 않고 밀고 나가는
귀한 분들이 있어 가능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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