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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7]일본방문 5일동안에 느낀 놀람, 감동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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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재미청년
댓글 1건 조회 9,817회 작성일 10-12-26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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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7]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

일본방문 5일 동안에 느낀 놀람과 감동감격



[도꾜=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조국분단은 잔인하다. 민족분단 때문에 해외동포들이 겪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혹독하다. 특히 재일동포들, 그 중에도 혹심한 민족차별을 받아 온 총련동포들의 경우는
지구촌 그 어느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로 밝혀지고 있다. 민족통신은 특집기획으로 <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에 대해 연재로 다루기로 하고 그 마지막 7번째 글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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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총련은 일본정부의 탄압이 있을 때 마다 수천명이 모여 시위를 한다. 사진은 히비야공원

[기획-7]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

일본방문 5일 동안에 느낀 놀람과 감동감격



[도꾜=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조국분단은 잔인하다. 민족분단 때문에 해외동포들이 겪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혹독하다. 특히 재일동포들, 그 중에도 혹심한 민족차별을 받아 온 총련동포들의 경우는 지구촌 그 어느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로 밝혀지고 있다. 민족통신은 특집기획으로 <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에 대해 연재로 다루기로 하고 그 마지막 7번째 글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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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사회는 해외동포 통일운동의 중심지 역할로 자래매김해 왔다.
이번 방문을 통해 재일동포들의 이모저모를 알아보는 기회들을 가졌지만 무엇보다 재일동포들 가운데 민단에서 탈퇴하여 민단과 재일총련 중간지대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조국의 평화통일운동에 기여 해온 인맥들과의 교제를 통해 이들이 얼마나 애국운동에 헌신하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관찰할 수 있었고, 그리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관계자들과 재일본대한민국민단(약칭 민단)계 인사들도 만났다. 또한 자신들은 무국적자라고 주장하는 조선적 동포들도 만났다.이들은 남한이나 북한 그 어디에도 소속되기를 거부하면서 통일조국만이 자신의 국적을 부여할 수 있다는 철학을 가진 인사들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해방을 맞고 곧이어 조국이 분단되자 남.북한 어느 쪽 국적도 선택하기를 거부하며 살고 있는 일본 내 `조선적'(朝鮮籍) 동포가 아직도 6만여 명이나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는 연합뉴스의 보도(2010년12월12일)는 이와 관련하여 "이들은 일본에서 사실상 무국적자로 분류돼 아무런 법적 지위를 보장받지 못한 채 `난민'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으며, 일부는 `친북적 성향' 또는 `북한에 이적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한국으로의 입국도 매우 어려운 실정"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이같은 사실은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 확연하게 달라졌다는 것이 재일동포 각계인사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다시 말하면 이명박 정권은 남북화해와 협력 분위기를 파괴하는데 앞장 섰을 뿐만 아니라 재일동포들을 비롯하여 해외동포 사회에도 민족분열 분위기와 보수의 바람을 불러 일으켜 왔다는 사실도 구체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무국적자로 분류되었던 조선적 동포들의 한국방문 신청건수가 부쩍 줄어들었는가 하면 이들의 신청을 주일한국총영사관에서 입국을 거부하는 건수도 대폭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6.15시대로 규정되던 2006년 조선적 재일동포들에 대한 한국입국 거부건수는 8건, 2007년에 0건이던 것이 이명박 정부 시대인 2009년에 무려 279건으로 폭증했다. 또한 조선적 재일동포들의 한국방문 신청건수도 6.15시대에 해당된 2006년에 2,947건, 2007년에 2,229건, 2008년에 2,037건으로 하강하다가 2009년에 고작 1,497건으로 대폭 줄어든 것으로 한국 외교통상부 자료에 의해 집계되었다. 재일동포들에 의하면 이른바 <천안함 사건>이후에는 조선적 재일동포들이 아예 신청도 하지 않는 경향이지만 신청 한사람들도 사실상 불허로 되어 왔다는 지적이다. 이것은 재일동포사회도 남북관계 경색국면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재일동포들은 한국에 방문을 못하는 것이 걱정이 아니라 남북관계의 갈등이 심화되어 큰 일이 날것을 크게 염려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리고 남북관계가 나빠지면 일본 정부당국과 일본언론들은 그 누구보다 남북의 갈등을 크게 환영하듯이 시도 때도 없이 남북갈등을 부추겨 왔다고 상기하며 남북관계가 반드시 화해협력으로 나가야 한다고 간절하게 소망하는 마음들이었다.

재일동포들은 일제강점기에는 강제로 끌려왔거나 스스로 왔거나 그 당시에는 2백30만명으로 집계되었다. 1947년 5월,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이 이끄는 연합군사령부(GHQ)의 통제를 받던 일본 과도정부는 조선인들에게 일본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 `히로히토(裕仁) 천황'의 마지막 칙령으로 외국인등록령을 발포, 재일 조선인들의 국적란에 `조선'이라고 적어넣었다. 이때 `조선적'으로 분류된 이들은 53만여 명으로 나타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돼 한국 국적 취득의 길이 열렸지만, 이중 상당수는 이 협정을 부정하면서 그대로 조선적으로 남아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연합뉴스는 "재일 조선적 동포들은 10년 전 약 10만 명이었지만 현재의 정확한 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한국의 외교통상부는 현재 재일동포 59만2천여명 가운데 약 6만명이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할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재일동포사회에서 재일총련과 민단에서 탈퇴하여 독자적인 길을 걸어 온 한통련 계열의 조직은 이곳 동포대중들의 지지를 받아 왔으나 민단 조직은 동포대중들로부터 호의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단지 민단간부들이 남한정부의 보수노선에만 추종하고 있는 것으로 진단되었다. 이와는 달리 총련 회원들이나 민단 회원들은 서로 특별한 갈등없이 상부상조하는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

필자는 이번 일본 방문에서도 재일동포들의 값높은 삶과 그 속에 간직된 아름다운 마음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특히 한통련 계열 인사들과 총련계열 인사들, 그리고 일반동포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애국자들이며 조국통일을 가장 열망하고 있는 해외동포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발견하는 계기를 가졌다.


재일총련은 세계 최강의 해외거류민 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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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총련은 세계제1의 강한 조직으로 평가받아 왔다.
이번 방문에서도 재일총련은 역시 세계에서 가장 단결단합이 잘된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첫째로 지구촌 곳곳에 수많은 나라들의 인종들과 민족들이 다른나라에서 사는 이른바 해외거류민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에 재일총련처럼 단결단합이 잘된 해외민족집단은 없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재일총련 조직은 세계에서 제1의 단결된 민족집단으로 꼽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단결단합이 강한 해외조직은 국제사회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둘째로 해외거류민족 집단가운데 그 거주지역 나라로부터 가장 혹독한 탄압을 받아 온 해외조직도 오로지 재일총련이 유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정부당국으로부터 받는 각종 탄압들은 그 유형이나 형태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혹심한 것으로 진단되었다.

셋째로 재일총련은 분단조국, 그 중에도 대부분 남녘출신들인데 남녘을 조국이라고 보지 않고 북녘을 조국이라고 부르며 북녘의 지도자들을 그 어느 나라 지도자들보다 가장 떠받들고 존경하는 해외조직이다. 이런 조직도 지구촌 그 어느 사회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민족집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넷째로 재일총련 소속 성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있는 거주국에 살면서도 그 나라의 시민되기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사회주의 북부조국의 공민으로서 그 지위와 역할을 하겠다는 강한 결의에 찬 구성원들이다. 이들은 그렇게 모진 탄압과 압박 속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민족존엄성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그 문화와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각종 교양사업과 대중사업을 통하여 재일총련이 된 것을 그 누구보다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다섯째로 재일총련 구성원들은 해외동포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도 그 삶의 목적과 이상을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바친다는 애국적인 인생관을 가장 값높은 가치관으로 가슴에 안고 산다. 이러한 삶을 생의 목표로 사는 해외조직은 지구촌 그 어느 나라에도 찾아보기 힘들다.

남한 정부당국과 민단간부로부터도 시달림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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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치자는데 이명박 정권과 민단은 엇박자로 간다
그런데 이러한 애국적인 해외조직이 일본 정부 당국과 일본우익깡패들로부터 탄압과 시달림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이들의 고향이 있는 남녘의 보수정치세력으로부터 그리고 남녘의 극우세력으로부터도 부단한 탄압과 시달림을 받아 왔다.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이 선포되어 남북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조성되기 전에는 남녘 당국자들은 재일총련을 마치도 뿔달린 사람들이라고 중상하고 모략하면서 일본으로 여행하는 남한 국민들에게 “절대로 재일총련 사람들 만나서는 안된다.”고 설교해 왔다. 특히 해외여행을 위한 이른바 소양교육시간에는 이들을 마치도 간첩취급하듯이 무서운 존재로 선전해 온 것이 남한 당국 관계자들이 보여준 민족분열적 자세였다.

이러한 남한 당국의 반민족 자세는 이명박 정권에 들어와서 또다시 반복되고 있다. 6.15선언과 10.4선언으로 남북화해협력을 통해 평화통일로 가자던 김대중정부의 국민의 정부시대와 노무현 정부의 참여정부 시대에 이룩된 화해협력 분위기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그래서 지난 3년간 이명박 정권은 취임시작부터 전례없는 대북대결정책을 전개하면서 그 동안 쌓아 놓은 남북화해와 협력을 위한 성과들을 완전히 짓뭉개버리고 사상유례없는 남북관계 경색국면만을 초래했다. 그것이 금년에 들어와서는 끊임없는 한미합동군사훈련, 한미일 합동군사훈련 등을 쉬지 않고 전개해 오면서 미국과 일본까지 끌어들여 조국반도의 정세를 전쟁 일보직전까지 끌고가는 위험천만한 사태를 불러들였다.

재일총련과 재일동포들이 뜨겁게 열망하는 것은 조국평화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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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끼리 손잡는 길만이 평화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
재일동포들은 그러한 무모한 이명박 정권에 대해 가장 분노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재일총련과 재일동포들이 가장 열망하는 것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이었다. 이들은 남북이 갈등을 빚을 때 가장 가슴아파 했고, 북과 미국이 부딪칠때 그 어느 때 보다 탄압의 바람을 맞아야 했고, 북과 일본이 대결국면으로 들어가면 재일동포들은 즉각 일본정부와 극우세력의 탄압과 함께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분단65년 동안 줄곧 이어져 온 고난의 행군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재일총련과 재일동포들은 조국의 평화통일을 가장 뜨겁게 염원해 온 해외동포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통일열망과는 달리 일본 정부당국은 그 어느나라 보다 우리 민족의 통일을 가로막는데 가장 앞장서 오기도 했다. 그것은 일본 정부의 대북적대시 정책에서도 여실히 드러났고, 북미문제를 풀기위한 6자회담 과정에서도 자신들의 할당부분을 방기하면서 구체적으로 방해책동을 일삼아 왔다. 일본 정부 당국과 이들과 보조를 맞춰 온 일본의 보수언론들은 걸핏하면 북조선의 영상을 흐리게 하면서 있지도 않은 정보들을 조작하고 왜곡하여 북을 헐뜯는 일에 앞장서 왔다.

이러한 일본 보수세력의 횡포에 못지 않게 민족분열 정책을 전개하면서 친일매국정책, 친미매국정책을 펼쳐 온 세력이 바로 이명박 정권의 사대매국정책이다. 이것 때문에 일본에 있는 어용보수조직인 민단의 간부들은 재일동포들을 탄압하는 일본정부 당국과 일본인 극우세력에 편승하여 동족을 탄압하는 대열에 끼어 반민족 행위를 자행해 왔다. 이것이야 말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감동과 감격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분노와는 달리 감동과 감격에 찬 이야기들도 많았다. 범민련 결성 20돌기념 서울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남녘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재일한국청년동맹의 결성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도꾜에 도착하여 4박5일 동안 일본에 머무르면서 재일동포 각계각층을 만나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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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공연에 다녀간 재일동포가 또다시 평양 순안공항에서 만나게 되어 짤각한 기념사진을 이번 방문 기간 조선학교에 방문하였다가 선물로 받았다. 이화숙 교원과 또 기념촬영.
민단에서 갈려나와 총련과 민단의 중간지대에서 수십년 동안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조국통일운동을 하여 온 한통련과 그 산하조직인 재일한청동맹 성원들, 그리고 민주여성회 성원들을 만나면서 이들의 민족민주운동에 대한 뜨거운 열성과 이들의 애국심에 크게 감동했다.

특히 한통련과 한청조직은 제3의 위치에서 독자적 지위와 역할을 통해 전반적인 운영기반을 자신의 힘으로 닦아 온 숱한 어려움을 겪어 오면서도 중앙본부 간부들과 지역본부 간부들, 그리고 지역조직들의 임원간부들이 그 난관들을 극복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들을 보면서 가슴이 찡했다.

그렇게 숱한 어려움을 겪어 오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역경을 순경으로 생각하고 낙천적인 입장과 자세로 투쟁하는 모습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수 있었다. 그리고 한청 조직성원들과 선배조직인 한통련 조직과의 밀접한 유기적 관계가 반세기 이상의 기나긴 세월을 드팀없이 유지되어 온 그 노력과 노고에 대하여서도 머리가 숙여졌다. 더우기 한청의 젊은 일꾼들이 보여준 패기에 찬 모습은 이곳 재일동포사회의 제3의 지대에서 노력하는 이들의 밝은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였다.

필자는 이어서 이번 방문을 통해 재일총련계 인사들도 많이 접촉해 보았다. 조선학교 관계자들과 교육계 인사들, 학부모들, 언론계 인사들 및 재일동포들을 접하면서 많은 분야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들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들, 삶의 애로와 보람에 관한 이야기들, 그리고 지구촌 돌아가는 흐름 등을 나누면서 그럴때 마다 감동, 감격했다. 이들의 일상생활 자체가 투쟁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당국이 총련에 자행한 탄압은 세계 역사상에 그 유례가 없을 것이다. 그 탄압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조국의 분단 때문에 이남 정부당국으로부터 받아 온 탄압도 말할 수 없다. 특히 6.15시대, 10.4선언 시대를 거부해 온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재일동포 사회분위기는 완연하게 달라졌다. 과거 남한 정부 당국자들이 재일총련 구성원들을 향해 뿔 달린 사람으로 선전했던 그 시대가 다시 찾아 온 것이다. 이것은 재일총련에게는 고통이며 고난의 행군이기도 하다.

그런데 재일총련이 어떻게 그 어려운 난관을 뚫고서 신심을 가지고 조금도 흔들림 없이 온갖 탄압들을 극복하고 모두가 단결단합하여 당당하게 살 수 있을까. 필자는 그 비결이 무척 알고 싶었다.

재일총련의 단결단합은 우연히 이루어 진 것이 아니었다. 세계 역사상 해외동포들이 재일총련처럼 끈질기게 투쟁해 온 조직도 없다. 북일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닥쳐오는 탄압을 투쟁으로 맞서야 했다. 남북관계가 대결구도로 전환될 때마다 직면하는 음모와 방해책동에도 투쟁으로 대처해야 했다. 북미관계가 악화될 때도 같은 상황에 직면하여 투쟁의 길에 나서야 했다.

이들은 민족차별을 받으면서 조선국적 포기를 강요당해 왔고 조선학교 탄압에 대처해 왔고 민족기업 유지를 위해 투쟁해 왔고, 조국방문을 가로막는 내외 세력들과 투쟁으로 맞서왔다. 재일총련은 반세기 이상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로 점철해 온 강철같은 조직이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장군의 지도와 사랑으로 고난을 극복"했다는 총련일꾼들


총련 구성원들은 그 숱한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오면서도 신심과 승리의 낙관으로 극복해 낼 수 있었다. 그 힘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에 대해 질문했다. 총련 간부들은 "김일성 주석님과 김정일 장군님의 지도와 사랑을 떠나서는 총련의 역사도 말할 수 없다"면서 그 가시밭길을 헤치며 오늘까지 투쟁할 수 있었던 그 힘의 원천은 바로 북조선 지도자들의 민족철학과 그 위대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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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 초상화를 모신 조선학교
이들은 난관이 조성될 때마다 실천으로 극복해 냈다. 1968년 프에블로 사건이 터지자 총련에도 탄압의 공세가 휘몰아 쳤다. 이때 100일간 혁신운동, 120일간 혁신운동(70년 7.1~10월 말)이 전개되었다.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를 100번 읽으면서 어려움을 극복했던 총련회원들은 '김일성 저작선집'도 학습하면서 학습을 생활화하는 운동을 벌였다. 70년대 초에는 150일간 혁신운동(71년 11.1~72년 4.15)을 펼치면서 새로운 발전을 위한 투쟁에 집중했다. 1975년 7월과 8월에는 핵전쟁 반대운동, 주한미군철수투쟁, 통일촉진 대행진을 전개하면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5백만 서명운동을 벌인 결과 515만 명의 서명을 받는 성과를 기록하기도 했다. 총련은 이어 75년 11월18일 유엔 제30차 총회를 통해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하기 위해 각종 투쟁을 벌인 결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시키자는 43개국의 공동결의안을 제출시키는 투쟁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80년대 들어서는 300일간 애국혁신운동(1981년 6.15~1982년 4.15)을 통해 2만1천5백명 회원증가 사업에 성공했고 100일간 집중행동 기간을 이용하여 6만9,364 가정을 방문하는 한편 6,038명과 담화를 통해 의식화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운동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지속되었다.

다시 말하면 재일총련 조직이 걸어 온 길은 북부조국이 걸어 온 길과 궤를 함께 해 왔다. 그것도 민족차별이 심한 일본 땅에서, 그리고 개인주의가 극도로 심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누구보다도 민족의 존엄성을 생명같이 여기며 60여 년의 세월을 꿋꿋이 견디어 온 것이다.

재일조선학교가 말할 수 없는 민족차별속에서도 성장하여 올 수 있었던 것은 이를 뒷받침해 준 강철같은 조직, 재일총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일총련 조직이 올곧게 서서 흔들림 없이 오늘날까지 지탱해 올 수 있었던 근거는 총련을 이끌어 온 지도자들과 이들을 한 식솔로 생각하고 지원해 준 북조선이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되었다.

이에 대해 재일총련 간부들과 구성원들은 "이 강한 조직의 지도자인 한덕수 선생님과 그를 이어 온 서만술 선생님과 같은 지도자가 있었고 이 지도자들이 조직운영의 향도로 모셨던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가르침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필자는 이러한 기적같은 사실에 대하여 놀람과 함께 지금 이 순간도 그 감동과 감격을 느끼고 있다.(끝)


*알자지라 방송이 취재한 재일동포들에 대한 탄압 보도-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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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보도자료 보기


아래 자료들은 한국 정부가 자칭 <자유민주주의>라고 선전하면서도 알권리를 차단하고 있어 열람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거주하는 독자들이 아래 자료들을 보려면 twitter 와 facebook을 통하여 열람할 수 있습니다. 그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www.facebook.com/kilnam.roh

혹은
www.twitter.com/#!/minjoktong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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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6]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
일본에서 민족교육을 위한 재일동포들의 투쟁

*[기획-5]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
일본에서 민족교육을 위한 재일동포들의 투쟁

*[기획-4]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
일본 당국과 극우세력의 각종 횡포유형 분석

*[기획-3]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
교장,교원들:민족애,조국애등 보람갖고 생활

*[기획-2]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
일 당국:반인륜적 탄압,감시와 배제,동화정책

*[기획-1]민족차별 속에 성장한 재일조선학교
도꾜조선중고급학교 신길웅 교장(61)과 대담

*[대담]재일평통협 리한수 상임고문(70):"회장 직 그만두고 대중사업 더 바쁘다"

*[대담]재일한청 박명철 부위원장:“한통련 선배들 통해 역사 눈떠”

* 재일한국청년동맹 50주년 기념식 진행
*[기획]재일한국청년동맹 50년 발자취③
*[기획]재일한국청년동맹 50년 발자취②
*[기획]재일한국청년동맹 50년 발자취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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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획보도자료 참조


*[특집기회]일본과 미국에 희생당한 코리아

*[특집]이북사회,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⑨









[관련 참조자료 보기]


<조선중앙통신사> 일제의 조선민족말살 죄행록


조선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강점과 통치는 천추만대

용납못할 특대형의 국가조직적 범죄이다


조선인민의 철천지원쑤 일제가 우리 나라를 군사적으로 강점하고 식민지통치를 강행한 때로부터 105년의 세월이 흘렀다.

조선강점기간 일제는 제국주의식민지통치력사상 일찌기 있어본적이 없는 가장 야만적이고 반인륜적인 만행을 감행하였으며 우리 인민에게 온갖 불행과 고통을 들씌웠다.

조선사람 100여만명을 학살하였으며 1938년이후에만도 840만여명을 랍치, 련행하였다.
우리 말과 글, 지어 조선사람의 성까지 없애기 위해 비렬하게 책동하였으며 반만년의 오랜 력사를 자랑하는 민족의 귀중한 문화재부들을 닥치는대로 파괴략탈하였다.

조선중앙통신사는 일제가 조선에 대한 군사적강점기간 감행한 만행을 조선민족말살을 노린 전대미문의 특대형범죄로 락인하고 그것을 폭로단죄하는 죄행록을 발표한다.

조선민족말살을 노린 대학살만행


일제가 우리 나라에 대한 군사적강점기간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은 조선사람들을 잔인무도하게 학살한 것이다.
일제는 극악한 무단통치,《문화통치》, 파쑈테로통치를 실시하면서 수많은 조선사람을 죽이는 천추에 용납못할 반인륜적 범죄를 감행하였다.

《조선인은 일본법률에 복종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조선사람들은 혹가이도 아이누족처럼 멸족시키면 족하다.》는 것이 조선사람들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살인통치의 기본방식이였다.

일제는 이에 기초하여 민족자주정신, 반일의식을 지닌 조선의 애국자들과 군중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학살하였다.
일제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떠선 조선인민의 반일의병투쟁을 압살하기 위해 방대한 침략무력을 투입하고 《토벌》작전을 벌리였다.

일제가 줄여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1906년 여름부터 1911년까지 2 800여회에 걸쳐 의병《토벌》을 감행하였으며 그 과정에 15만명이상의 조선애국자들을 학살하였다.
《토벌》지역을 초토화하고 일반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야수적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의병들의 근거지로 지목된 부락들에 대한 초토화작전과 의병참가자들의 가문, 가족을 모조리 없애기 위한 멸종멸족정책에 의하여 헤아릴수 없이 많은 무고한 조선인 남녀로소들이 목숨을 잃었다.
1919년 3.1인민봉기 때에는 전국적 범위에서 10여만명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봉기진압을 위해《조선총독》과 조선강점군 사령관은 룡산과 라남의 2개 사단무력과 헌병, 경찰을 총동원하였으며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일본본토에서 6개 대대병력과 헌병 400명을 더 끌어들이였다.
시위대렬에 총포사격을 가하여 시민들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도처에 싸다니면서《조선사람사냥》에 미쳐날뛰였다.

일제는 1920년에 조선강점군, 함경남북도경찰, 만철수비대 등을 동원하여 간도조선인들에 대한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간도대《토벌》로 세상에 알려진 이 참극사건에서 일제는 가장 가혹하고 악착한 방법으로 3만여명의 조선사람을 죽였으며 온 간도땅을 피바다에 잠그었다.
이러한 살인만행을 감행하고서도 일제는 그것을《토벌》작전의《승리》로 떠들면서 라남19사단을《표창》하는 추태를 부리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과 원산부두로동자들의 총파업, 광주학생사건 등 우리 인민의 반일투쟁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면서 로동자, 농민, 학생들을 닥치는대로 체포 투옥하였다.

일제는 1930년대에 들어와 《조선사람 100명을 죽이면 그가운데 적어도 공산주의자가 한명은 있을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죽이라.》는 폭언과《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빼앗으라.》는 《3광정책》을 떠들면서 조선인《토벌》에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1931년 가을과 1932년 봄에 동만《토벌》을 벌려놓고 조선사람에 대한 살륙만행을 감행하여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일제는 또한 각종 폭압기구들을 내오고 악법들을 조작공포하여 조선인민의 초보적인 인권과 자유의 마지막흔적까지 짓밟았으며 죄없는 사람들에게 생트집을 걸어 체포투옥, 고문학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1911년부터 제국주의 침략사에서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극악무도한 악법인《범죄즉결령》을 시행하였으며 경찰서장이나 헌병분견대장에게 일정한 법적수속이나 재판도 없이 조선사람들을 마음대로 처형할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1912년 3월에는《조선감옥령》을 발포함으로써 가장 야수적인 감옥제도를 조선에 세웠다.
1925년에《치안유지법》, 1928년에 《신치안유지법》, 1936년에《사상범보호관찰령》을 조작발포한 일제는 1940년대에 들어와서도《사상범예방구금법》, 《국가보안법》, 《조선림시보안법》등 수많은 파쑈살인악법들을 만들어냈다.

일제는 조선민족대학살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식민지통치의 직접적담당자이며 현지집행자인 《조선총독》들을 일본에서도 가장 악명높은 파쑈분자들로 골라보냈다.
일제의 침략군과 헌병, 경찰 등 폭압기구들 그리고 모든 악법들이 례외 없이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체포투옥, 고문 학살하는데 동원되였음은 더 말할것도 없다.

일제는《치안유지법》을 휘둘러 조선애국자들을 닥치는대로 잡아가두는 일대 검거선풍을 일으켰다. 1922년 검거건수가 13만 8 539건이였다면 1925년에는 그것이 19만 1 203건으로, 1926년에는 26만 1 558건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일제가 줄여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1924년부터 1929년까지 검거건수는 87만 5 522건, 검거된 조선사람은 수백만명에 달하였다.

1934년에는 《사상범》의 혐의를 들씌워 6만 655명, 1938년에는 16만 5 300명의 조선사람들을 검거투옥하였다.

일제가 조선민족의 자주정신과 반일의식을 거세말살하기 위해 감행한 만행들은 그 야수성과 악랄성에 있어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반인륜적범죄이며 극악한 민족배타주의에 기초한 인간살륙전, 민족말살행위이다.

조선민족에 대한 일제의 대학살만행은 1938년이후 더욱 로골화되였다.
일제는 이 시기에 무려 840만여명의 조선사람들을 랍치, 련행하였으며 그중 41만 7 000여명을 전쟁대포밥으로, 778만 4 800여명을 죽음의 고역장으로, 20만명의 녀성들을 일본군위안부로 내몰아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게 하였다.

일제는 《지하대본영》과 비밀군사기지건설에 동원되였던 수만명의 조선사람을 《비밀보장》의 구실로 집단학살하거나 세균무기생체실험대상으로 삼는 극악한 살인범죄를 저질렀다.
일제에 의해 랍치, 련행되여 끌려갔던 징병자들과 징용자들중 70여만명, 일본군위안부중 14만 3 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강점군 헌병사령부에서 발행한 도서 《폭도토벌지》, 공안조사청의 비밀자료 《재일조선인의 개황》,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발행한 도서 《조선경찰개요》 등에 의하면 일제는 조선에 대한 군사적강점기간 도합 100여만명의 조선사람을 학살하였다. 이것은 당시 우리 나라 인구 20명당 1명이 일제에 의해 학살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일제가 감행한 전대미문의 대탄압, 대학살은 아시아와 세계제패를 위해 한 민족, 한 나라를 희생시킬것을 획책한 일본당국의 조선민족말살정책과 침략야망에 기인된것이다.
《조선총독》이였던 사이또는《조선통치방침》에서 조선의 독립과 자치를 허용하지 않을것이라고 공공연히 선포하였으며 해외조선인들을 다루는 문제에 대해 《한편으로는 그들에 대한 단속을 하고 그 소굴을 소탕할 필요가 있으며 다른편으로는 … 황국신민화할 필요가 있다.》고 떠벌였다.

1942년에《조선총독》으로 군림한 고이소는 《시정방침은 변함이 없다.》, 《믿을수 없는 무리들에 대하여서는 … 관리나 민간인을 막론하고 단호히 탄압하겠다.》고 공공연히 줴치면서 파쑈적폭압을 강화하는데로 나아갔다.

이러한 망발들은 조선사람들속에서 나타나는 반일감정이나 애국적운동이 그 어떤 형태로 발현되든지 무자비하게 탄압할것이라는 강권정치, 폭압정치를 선포한것으로서 사실상에 있어서 조선민족전멸론이였다.
참으로 일제가 감행한 조선인대학살만행은 그 규모와 잔인성에 있어서 동서고금의 침략사와 전쟁사에서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가장 악독하고 야만적인 인권유린행위이다.

조선민족의 얼을 유린말살


일제의 조선민족말살죄행에서 엄중한것은 우리 민족을《야마도민족화》하기 위해 가장 교활하고 집요한 방법으로 민족동화정책을 강행 실시한 것이다.
일제는 조선통치의 궁극적 목적을《첫째도 동화, 둘째도 동화》로 규정하였으며 조선의 력사와 문화전통을 없애고 민족성을 거세하는것을 그 실현방도로 내놓았다.

일제의 군경들은《먼저 조선사람들이 자기의 것, 력사전통에 대해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의 혼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자기 선조들을 경시하고 멸시》하게 한 다음 《일본의 서적과 일본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것이다.》고 떠벌였으며 어용학자들도 《…조선력사를 진멸하여버림으로써 그 흔적을 아예 없애버리는것이 좋다.》는 강도적론리를 들고나왔다.

일제는 조선강점초시기부터 조선인민을 철저히 노예화하며 민족성을 말살하는것을 국가시책으로 삼고 통치기구들을 총동원하였다.

《고적 및 유물보존규칙》과《조선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령》 등 허울 좋은 간판 밑에 각종 악법과 략탈기구들을 만들어냈다.

헌병, 경찰 등을 동원하여 우리 나라의 곳곳에 있는 문화유적들을 닥치는대로 파괴, 소각하였으며 귀중한 문화유물들을 훔쳐가는 강도행위를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24대왕 원종의 소릉과 비를 비롯한 고려시기의 고분들이 전부 도굴략탈당하였으며 지어 조선왕궁에까지 일제의 마수가 뻗쳤다.

일본에서 발간된 《고적조사보고》가 조선의 시조릉인 단군릉 그리고 고려태조릉 등 고려의 력대 왕릉들이 1910년대에 이르러 일제에 의해 단 1기도 남지 않고 모조리 도굴되였다고 서술한것은 결코 우연치 않다.

일제는 강점후 10년간에 대동강류역과 룡연일대에서 무려 1 400여기에 달하는 고분을 파헤치고 유물들을 수탈하였다.

략탈해간 문화유물은 도꾜국립박물관에 진렬된 4만여점을 비롯하여 수십만점에 달한다.
초대《통감》이였던 이또 히로부미를 비롯한 력대《통감》과 《총독》들, 권력을 등에 업은 단체들과 깡패들이 략탈에 뛰여들었다. 데라우찌는 조선의 고서적만 해도 무려 2만 3 000여권이나 략탈사취하였으며 조선왕궁건물까지 헐어다 야마구찌현에 《조선관》을 설치하였다.

지금까지 력사유적유물에 대한 외래침략자들의 파괴략탈행위와 관련한 적지 않은 비화들이 전해지고있지만 조선문화유적유물을 파괴략탈한 일제의 만행과 같은 날강도적인 범죄행위는 일찌기 없었다.

일제는 자기 나라보다 3 000년이상 앞선 조선민족의 유구한 력사를 없애버리기 위해 단군조선을 비롯한 고조선의 력사를 잘라버린 《조선사》를 조작하였다.

조선력사와 관련한 서적들을 《불온도서》라고 하면서 20만부이상 불태워 버림으로써 히틀러의 분서란동을 초월한 희세의 만행을 감행하였다.

우리나라의 모든 사고들을 손에 넣고 세계적인 문화재보인 오대산본 《리조실록》 1 800여권과 규장각에 소장되여있던 수많은 귀중한 도서들을 일본으로 빼돌렸으며 강화도사고를 백주에 도끼로 까고 고서적들을 무더기로 훔쳐냈다.

강점기간 무려 5차례에 걸쳐 우리의 민족고전에 대한 수색작전을 벌리고 수백명의 《학자》들을 방방곡곡에 들이밀어 수많은 고서적들을 략탈하였다.

일제는《리조실록》을 비롯한 우리의 민족고전들과 력사를 기록한 귀중한 국보들을 외국에 팔아버렸으며 일본땅에서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와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일제는 또한 조선사람에게서 민족성과 얼을 뿌리뽑기 위해 사상문화분야에서의 악랄한 파쑈화책동의 일환인 《황국신민화》정책을 로골적으로 실시하였다.

《황국신민화》책동은 1937년 중일전쟁도발을 계기로 하여 더욱 발광적으로 벌어졌으며 1941년 태평양전쟁도발이후에는 최절정에 이르렀다.
일제가 조선민족을《황국신민화》하는데서 중요하게 노린것은 조선사람들속에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와 《일본족과 조선민족은 하나의 조상을 이룬다.》는 《동조동근》사상을 강제로 불어넣어 우리 인민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는것이였다.

일제는《내선일체》를 들고 나오면서 일본과 조선이 지리적으로 가깝고 예로부터 《하나의 나라》, 《하나의 령토》를 이루었으며 《일본사람과 조선사람은 하나의 령토안에서 산 한 민족》이라고 떠들어댔다.

일제는 《내선일체》와 함께《동조동근》론을 동시에 강요하였다.
《동조동근》론을 합리화하기 위해 력사적사실까지 날조하였으며 저들의 어용사가들을 동원하여 그것을 《론증》하는 자료를 《리론》적으로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고 책동하였다.

일제는 반만년의 력사를 가진 조선민족을 몇십년동안에 《일본화》하기 위해 《황국신민의 무사도정신》을 강제주입시키려고 집요하게 책동하였다.
국민학교 입학생들에게 선참으로 일장기에 대한 노래를 배워주었으며 노기와 같은 광신적인 군국주의두목을 《충군충효》의 표본으로 내세우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교재에 포함시키였다.

《황국신민의 서사》나 《황국신민체조》,《정오묵도》 역시 조선사람을 일본사람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내리먹이였다.
특히 일제는 조선민족을 이 세상에서 영영 없애기 위해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일본말을 쓰도록 강요하였다.
《내선일체는 국어상용으로부터》라는 구호를 내걸고 관청, 회사, 학교, 공장에서는 물론 가정과 교회, 목욕탕안에서까지 일본말을 사용하라고 하였다.

일본어를《국어》로 책정하고 일본말을 쓰지 않으면 벌금을 받아내거나 육체적제재를 가하였다.
지어 일본말을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기차표도 팔아주지 않았다.
조선작가들에게 일본말로 작품을 쓸것을 강요하였으며 일본말로 된 《국민문학》잡지까지 발간하였다.

일제는 1940년부터는《창씨개명》의 미명하에 조선사람의 성과 이름을 강제로 빼앗는 천추에 용납못할 죄행을 범하였다.
민족의 넋과 정신이 반영되고 유구한 력사가 깃들어있는 조선의 지명들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짓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일제의 민족동화정책에 의하여 조선민족은 1940년대 전반기에 이르러 민족으로서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못하는가, 유린당한 민족성을 부활시키는가 부활시키지 못하는가 하는 운명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였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수 없고《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살아갈수 없으며 조선말대신 일본말을 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 민족에게 강요된 운명이였다.

이 모든것은 일제의 조선에 대한 군사적강점이 조선사람의 민족성과 얼을 여지없이 짓밟아버리고 철저히 《일본화》, 식민지 노예화함으로써 조선민족 자체를 말살하기 위해 감행된 천추에 용납못할 전대미문의 범죄이라는것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조선민족의 삶의 터전을 파괴략탈


일제의 조선민족말살죄행에서 용납될수 없는 것은 우리 인민을 질식시키기 위해 무자비한 물적자원 략탈행위를 감행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인구의 80%이상이 농민이였으며 그들의 기본생산수단과 생존수단은 토지였다.일제는 우리나라에 대한 식민지 지배초시기 벌써 토지강탈에 매여달렸으며《한일합병》후 보다 로골화하였다.

《토지소유권의 조사확인》이라는 명목으로 《토지조사령》을 선포하고《수속위반》, 《증거불명》 등의 구실을 붙여 100여만정보에 달하는 막대한 토지를 비법적으로 강탈하였다.

한편《산미증식계획》, 《공출》 등의 간판으로 3 900만t의 쌀을 략탈해갔다.
이에 대해 도서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력사적조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2,600만명의 조선사람들에게 가장 나쁜 감정을 품게 한것은 쌀의 공출과 사람의 공출이다. …1937년 지나사변을 일으켰을 때 관민들은 다같이 쌀은 문제없다고 말하고있었다. 왜냐하면 … 이 일본내지의 4개 섬과 조선과 대만을 합치면 가장 적을 때에는 800만석, 많을 때에는 1 500만석을 가져왔다. 이것을 조선은행권, 대만은행권이라는 종이장으로 샀다. 특히 금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일본의 수탈자들이 지불담보가 없는 관리화페인 《조선은행권》으로 쌀을 샀다는것은 그들자신이 말한바와 같이 조선의 쌀을 공짜로 빼앗았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쌀수탈의 강도적성격은 쌀《공출》제도를 실시하던 시기에 더욱 집중적으로 드러났다. 그 시기 일본수탈자들은 조선농민들에게서 생산비의 9%도 안되는 헐값으로 쌀을 앗아갔다. 그 관리화페마저도 《전시저금》,《애국공채》의 명목으로 걷어들이였다.

조선농민들이 자기 살붙이처럼 중히 여기던 소를 194만 3 000여마리나 끌고가 도살해버렸다.

일제의 농촌략탈행위로 말미암아 조선의 농촌들은 만성적인 기아지대로 되였으며 춘궁기는 《년례행사》처럼 들이닥쳤다.이렇게 되여 우리 나라에서 《보리고개》라는 말이 생겨났으며 조선사람들은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다 못해 정든 고향을 버리고 살곳을 찾아 이국땅에로 류랑의 길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는 1918년 5월 1일 《림야조사령》을 조작공포하고 우리 나라의 림야면적 1 600만정보가운데서 1 300만정보를 《국유림》의 명목으로 빼앗았으며 나머지는 일본지주들과 친일주구들의 소유로 넘겼다.

1902년부터 1945년 7월까지의 기간에 7억 6 940만 2 347㎥에 달하는 막대한 량의 목재를 략탈하였다.
《조선총독부》에 직속된 4개의 영림창과 26개의 벌목사업소, 100여개의 벌목작업장을 통해 압록강과 두만강연안에 울창하였던 200여만정보의 대원시림을 파괴하였으며 13개 도청산하에 조직된 영림서와 미쯔이물산, 스미또모재벌 등 일본의 대재벌들과 기업체들을 내세워 조선의 방방곡곡에서 산림자원을 략탈해갔다.

《조선광업령》, 《어업령》을 비롯한 식민지략탈법들을 조작공포하여 우리 나라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수산자원들을 가장 악착한 방법으로 긁어갔다.

일제가 우리나라에서 강탈해간 물적자원은 액상으로 볼 때 천문학적수자이다.
금, 은, 동, 아연, 철광석 등 략탈하여간 58종에 달하는 각종 광물의 금액은 1945년 8월 우리 나라에서의 각종 광물시세에 기초하여 볼 때 20억¥에 달하였다.

1910년부터 1942년사이에 빼앗아간 수산물 1 432만t(양식생산물은 제외)의 금액도 당시 액상으로 11억 260여만¥이였다.

재정 및 금융을 통한 수탈액도 막대하다.
그중 일부 지표별 액상만 보아도 세금 153억 1 152만 5 000¥, 군사비(1937-1945년) 16억 1 090만 9 896¥, 사업공채(1911-1944년) 139억 610만¥, 전시강제저금(1938-1944년) 54억 9 616만 8 000¥, 국채, 저축채권, 보국채권, 특별보국채권 2억 6 023만¥, 조선내의 금융기관들의 유가증권을 통한 총액 72억 3 362만 1 000¥이다.

이것만 보아도 일제가 감행한 각종 자원의 략탈규모가 얼마나 방대한것이였는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조선인민이 일본의 식민지통치로 하여 당한 정신적, 인적, 물적피해는 그 형태와 내용, 규모에 있어서 참으로 인류력사에 전무후무한 최대최악의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과거를 청산할 대신 패망후 시종일관 또다시 우리 나라를 타고앉으려는 야망을 추구하고있다.

일본의 대조선정책은 예나 지금이나 조선민족을 저들에게 순종하는 노예로, 우리 나라를 일본령토의 일부로 만들려는것이다.

지난 세기 중엽 일본은 미제가 우리 공화국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하자 곧 공업의 전반적인 생산체계를 전시체제로 개편하고 미국에 군수품들을 전적으로 생산보장하였다. 뿐만아니라 군사기지들과 군사시설들을 설치하도록 전령토를 미국에 맡기였다.

조선전쟁에 침략무력을 들이밀어 무고한 조선인민을 살해하고 삼천리강토를 페허로 만드는데 직접 가담하였다.

1950년 7월 27일 영국의 로이터통신은 《7월에 벌써 일본군의 조선전쟁참가자수는 2만 5 000여명에 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일본의 조선침략전쟁가담은 철두철미 저들의 대조선정책인 조선민족말살을 노린 극악한 범죄행위이다.

일본은 패망이후 65년간 우리 나라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정치군사적위협공갈과 경제적제재를 끊임없이 감행하였을뿐아니라 일제의 식민지통치후과로 일본에서 살고있는 조선사람들과 그 후대들에 대해 가혹한 민족적차별과 탄압을 계속하여왔다.
일본의 이러한 행위는 명백히 구일본제국이 감행한 조선민족말살책동의 연장이다.

제반 사실은 일본이야말로 조선민족에게 천추만대를 두고도 씻을수 없는 범죄를 감행한 백년숙적임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지금 우리 군대와 인민은 일본의 죄악을 총결산할 의지에 차있다.
일본은 우리 군대와 인민을 똑똑히 알고 분별있게 처신하여야 하며 과거죄행에 대해 조선민족앞에 성근하게 사죄, 배상하여야 할것이다.


조선중앙통신사
주체99(2010)년 11월 16일
평 양







[출처 : 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2010-12-27]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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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해외동포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도 그 삶의 목적과 이상을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바친다는 애국적인 인생관을 가장 값높은 가치관으로 가슴에 안고 산다. 이러한 삶을 생의 목표로 사는 해외조직은 지구촌 그 어느 나라에도 찾아보기 힘들다./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삶의 목적과 이상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재일동포들은 정말 대단한 분들입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지만 그런 숭고한 삶의 목표를 지니고 사는 그분들의
민족애에 고개숙이지 않을 수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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