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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래일에 사는 사람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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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358회 작성일 22-05-19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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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제 3 편 오늘의 의미

3

리남웅은 회사에 와서 건강히 잘 지내고있었다.

그는 한달전에 서관범사장의 딸 진주와 처음으로 만나 류다른 인연을 맺게 되였다. 사장네 집에 초청되여 갔다온 저녁에 남웅은 회사건물에 꾸린 자기 하숙방에서 자그마한 그림종이를 꺼내들었다.

그는 서진주가 그린 이 속사를 화첩에서 빼내가지고 왔었다.

그것은 초췌하고 가긍해보이는 선비― 틀림없는 남웅이 자기의 화상이였다. 턱밑에 갓끈까지 옭매고 후렁후렁한 도포를 걸쳤는데 아주 중늙은이처럼 그려놓았다. 이 솜씨를 보아도 그 처녀가 회화분야에서 재능이 바이 없지는 않다고 남웅이는 쓰겁게 생각하였다. 정말 무례하고 경박한 처녀였다. 《리생원》?! 제목 또한 얼마나 풍자적인가!

모욕감에 못이겨 그 그림을 찢어버리려던 남웅은 무슨 생각에선지 그것을 책꽂이의 서류철속에 끼워넣었다. 이 무의식적인 동작은 그 자신도 제대로 설명할수 없는것이였다.

이튿날 서관범사장은 무슨 까닭인지 별로 남웅이를 어색하게 대하며 눈치를 보는것 같았다.

남웅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날 퇴근시간이 지나 합숙에서 기술잡지를 읽던 리남웅은 정문 경비원이 전화로 사장의 따님이 찾아왔다고 알려주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가 이제 무슨 낯으로 나를 찾아온단 말인가? 어째서 왔을가, 변명하려고? 아니면 사죄하려고?…

《내가 없다고 말해주십시오.》

《저, 방에 있다고 미리 알려주었는데요.》

고지식한 경비원아바이가 말했다.

《그럼 그에게 내가 지금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다고 말해주십시오.》

《예, 전하지요.》

잠시후에 또 전화가 왔다. 역시 경비원이였다.

《이 동무가 자기는 남웅선생이 나올 때까지 정문에서 기다리겠답니다.》

《그럴 필요는 없을겁니다.》

《예, 전하지요.》

본시 너그럽지 못한 리남웅은 인차 송수화기를 놓고 이번에는 소설책을 펴들었다. 글줄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정문을 내다보았다.

외등이 환히 켜진 곳에서 연회색반소매양복차림에 깜찍한 멜가방의 끈을 한쪽 어깨에 걸친 늘씬한 처녀가 눈길을 떨구어 발치를 보면서 천천히 거닐고있었다. 어쩐지 풀이 죽은 기색이였다.

경비원이 또 전화를 걸어왔다.

《저렇게 온밤을 새울 잡도리같은데…》

《내가 내려가겠습니다.》

남웅은 더 버티여내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성과 처녀의 얄궂은 고집을 저주하며 문제의 그림이 있는 서류철을 피끗 돌아보고나서 정문으로 나갔다.

처녀는 그가 나타날줄 알았다는듯 흔연히 《보통강변쪽으로 잠간 걷지 않겠어요?》 하고 먼저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여간 당돌한 처녀가 아니였다.

강변에 이르러 그들은 마주섰다.

처녀가 먼저 노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좀 늦게 나오셨군요. 그편에선 기다리는 녀자의 립장을 봐주실 생각이 인차 떠오르지 않았던 모양이지요?》

《그럴 여유가 없었지요.》 남웅이 마지못해 대답하였다.

《어째서요?》 처녀가 떠보듯 물었다.

《내가 즐거워하지 못하는 까닭을 대체로 짐작하시겠는데요?》

비난기가 섞인 남웅의 말에 움츠러들줄 알았던 처녀가 뜻밖에도 모르쇠를 했다.

《말씀의 뜻을 잘 모르겠군요?》

남웅은 아연해졌다.

《그럼 무슨 일로 이렇게 왔습니까?》

《저요? 전 그림을 찾아가려고 왔어요.》

《예?!…》

《혹시 어제 저녁에 저의 화첩을 번지다가 속사 한장을 건사하시지 않았어요?》

처녀가 흔연히 물었다.

《아니라면 실례했어요.》

《…내가 가져왔습니다.》 남웅은 억이 막혀 대답하였다. 세상에 이렇게 뻔뻔스런 처녀도 있는가?!

그런데 그 처녀는 저녁 어스름속에서 떠오르던 웃음을 감추며 도리여 공세를 취했다.

《무슨 리유로 저의 그림을 가져왔는가요? 알수 없군요.》

《…》

그 순간 리남웅은 이 처녀가 사죄가 아니라 변명하러 왔다는것을 깨달았다. 변명이라기보다도 아예 딴전을 부리고있는것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초상을 그린것이 어느 사람의 용모와 비슷해보인다는것은 바로 그 사람을 그렸다는 완전한 증거로는 될수가 없는것이였다. 화가편에서 우연일치라고, 다른 사람을 그렸노라고 말해도 딱히 반박할 도리가 없는노릇이였다. 화가가 우길탓이였다!

한편 그런 변명이 일종의 례의로, 리남웅의 체면을 생각해주는것으로도 될수 있었다. 만일 남웅이 지금 그 《리생원》그림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라고 자꾸 고집하면서 성을 내다가는 도리여 웃음거리가 될것이였다.

처녀는 바로 이 미묘한 점을 포착하고 자기와 동시에 남웅을 난처한 처지에서 구원하려고 찾아온것 같았다. 그래선지 그쪽으로 남웅을 유도해가는것이였다.

《모를 일이예요. 그편에서 그림을 건사하신 리유를 저는 알수 없군요.》

《그건…》 남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갑자르다가 어떤 충동에 떠밀려 말했다.

《그건… 나를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되였기때문이지요.》

《아니예요, 잘못 보셨어요!》 처녀가 다급히 우겼다.

《그건 납니다.》 리남웅이 곧이곧대로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줄은 몰랐다.

《정말 그렇게 생각되는가요?》

처녀가 최후의 질문이라는듯 짐짓 엄숙하게 물었다.

리남웅은 침착하게 그를 마주보았다.

《그건 화가자신이 잘 알겁니다.》

《아이참!…》 이번에는 처녀편에서 난처해하더니 이어 정색해서 말했다.

《그럼 어쩌는수가 없군요! 저는 처음으로 그래요, 나서 처음으로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심한 잘못을 저지른셈이예요. 그리고 처음으로 이렇게 사죄합니다. 본의아닌 잘못이지만… 그때문에 제가 한심한 녀자로 되였군요. 저는 또 이것이 안타깝고 슬프답니다.》

《…》

리남웅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처녀의 경박하면서도 순진한 면을 보니 노여움이 절반은 풀리는것 같았다.

《이젠 저를 용서해주시겠지요, 네?》

처녀의 응석기가 섞인 천진한 질문은 이상하게도 남웅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역시 나서 처음으로 남아다운 대범한 소리를 하였다.

《뭐 용서고 말고 할게 있습니까!》

《고맙군요.… 그럼 이젠 그 그림을 저에게 돌려주시지 않겠어요? 그건 어디까지나 저의 소유이니까요.》

남웅은 이번에도 타내지 않고 자기 방의 서류철을 내다가 그속에 끼웠던 작은 그림을 처녀에게 돌려주었다.

《이것 말이지요? 자, 받으시오.》

《네.…》

처녀는 약간 두려운듯 그 종이를 받아 얼른 가방안에 넣었다. 그리고 가방걸쇠를 딱 소리가 나게 채운 다음 이젠 주도권이 자기에게 돌아온듯 오연하게 고개를 쳐드는것이였다.

《마감으로 한마디 묻고싶은데 대답해주시겠어요? 어제 이 그림을 건사하신 속심은 뭔가요?》

《그걸 알 필요가 있을가요?》 남웅은 이젠 너그럽게 웃어보였다.

《저는 짐작하고있어요. 이 그림으로 저를 좀 혼내주려고 생각하셨댔지요? 응당한거겠지만…》

《난 동무의 아버지가 그 그림을 보는걸 원치 않았지요.》

《어마, 그러니 제가 곤경을 당할것 같아서…》

《내 체모가 손상되는것도 고려한셈이지요.》

《정말 부끄럽군요!…》 처녀는 그제야 자기를 뉘우치는것 같았다.

《앞으로 그걸 보상해드릴 기회를 저에게 좀 주시지 않겠어요?》

그후 그들은 퇴근시간에 만나군 하였다. 보통강변과 시내의 거리를 거닐기도 하고 처녀의 집에서 만나기도 하였다.

어려서부터 자연과학에만 몰두하면서 소설책 몇권 못 읽어본 남웅은 처녀의 향취와 그가 안내하는 세계에 황홀해지고말았다. 그것은 마치도 기하학적인 선들로 이루어진 피라미드나 신전들만을 돌아보던 려행가가 진한 꽃들이 다투어 피고 록음이 우거진 오아시스에 들어선 기분이랄가!

그는 처녀와 사귈수록 자기가 이전과는 비할바없이 도량이 넓어지고 열정에 넘치며 담이 커지는 까닭을 두고 생각해보았다. 이게 바로 사랑이라는걸가?!

어느날 처녀는 남웅의 달라진 모습을 소묘하였다. 그림속의 총각은 영특하고 름름해보이는 의젓한 미남자였다.

그들은 한달만에 둘만이 사는 세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남웅이가 회사에 정식 입직한 다음에 인차 약혼식을 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남웅에게로 전화가 걸려왔다. 연구소에서 진수현실장이 건 전화였다.

《회사에 입직수속을?!…》

진수현은 송수화기에 댔던 자기 귀를 의심하였다.

리남웅은 당황하여 전화로 중언부언하였다.

《저의 이동사항을 미처 알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소장, 부소장선생님들한테는 미리 동의를 구했는데…》

《남웅동무가 원해서 회사에 남기로 했다는거요?》

《예.…》

《…》

자꾸 물어볼것도 없었다. 역시 리남웅이란 청년은 최일이 비난하듯 과학을 할 재목이 못되는 그런 미미한 존재였는가? 내 눈에도 어쩐지 그가 변변치 않게 보였지.… 그런 청년을 지형원교수가 수재로 잘못 보았을가?

리윤덕은 또 뭔가? 그는 남웅이 회사에 아예 눌러앉게 된다는걸 알면서도 나한테는 왜 한마디도 안했는가?

진수현은 속에서 불만이 괴여올라 3층에 있는 리윤덕부소장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 친군 여전히 구름을 타고 나는 꿈을 꾸고있지요.》

송춘도는 부소장방에서 리윤덕이 따라주는 찬 레몬수를 마시면서 최일의 뒤소리를 하고있었다.

《만사에 한계가 있다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첫 계단을 딛고 올랐으니 두세번째 계단도 그렇게 오를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터놓고 말해서 세계 최첨단수준이라는게 그렇게 간단한겁니까.

거 수현실장은 나이도 어지간하고 세상물정도 좀 알겠는데 최일이한테 자꾸 바람을 불어넣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젊은 나이에 뜰수밖에요. 현실은 현실대로 엄정하지요. 요즘 프로그람작업에서 진통을 겪는데 최일이는 그 화풀이를 애꿎은 학준이하구 나한테 해댄단 말입니다. 챠, 점점 실에 정나미가 떨어져서 못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되나.》 리윤덕이 따뜻이 핀잔을 주었다.

《어째서 자꾸 안된다구 피동에 서면서그래. 된다, 되도록 힘써야 한다고 다른 사람들을 선도하면서 나갈수는 없을가?》

《아니, 안될걸 뻔히 알면서 된다고 하란 말입니까? 적어도 과학을 한다는 이 송춘도가…》

《단순하구만. 생활은 수학보다 더 복잡한 련립방정식이야. 분위기를 고려해야지. 사람들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을 필요야 있나? 현실에서는 주동의 위치에 서는게 중요하다구. 이보라우, 송동무는 언제까지 한켠 구석에 앉아서 연구사만 하겠나?》

《난 원래 무슨 지도일군 같은 높은 자리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송춘도는 이러면서 찾아온 용건을 슬그머니 내비쳤다.

《소문을 듣자니까 회사에 간 남웅이가 호박 잡았다던데요?》

《허, 이 사람 두번 장가가고싶나?》

《비행기꼬리 잡게 된다니 하는 말이지요. 하긴 이 송춘도 같은게 부소장 안중에야 있겠습니까. 궂은일시킬 때는 생각나겠지만 좋은 일이 있을 때에야…》

송춘도는 말꼬리를 흐리며 사뭇 서글픈 여운을 남겼다.

리윤덕은 진중한 자세로 돌아갔다.

《송동무, 개체발전문제야 다 조직적으로 해결되는거지, 안 그렇소? 자꾸 불평만 부리지 말구 수현실장을 잘 도와주라구. 피동에 서는건 고달픈 일이야. 송동무가 대중의 눈밖에 나면 나로서도 도울 길이 없소. 송동무가 좀 더 채심하고 착실히 일하느라면 도약할 기회는 생기게 될거요. 내 말의 뜻을 알겠나?》

《아, 알지 않구요.》

《좀 참구 기다리라구.》

《고맙습니다. 한데 우리 실장에겐 남웅이 조동문제가 마깝지 않을텐데… 이번에 시끄럽게 굴지 않을가요?》

《그 사람이 이제야 어떡하겠나. 늦었어.》

《그렇다면 별문제지만…》

송춘도는 진수현이 방에 들어서는 바람에 닁큼 놀랐지만 잔밑굽에 남은 레몬수를 보란듯이 마저 마시고 유유히 나가버렸다.

《부소장동무, 남웅동무가 회사에 입직한다는게 사실이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이요?》 진수현이 따지듯 물었다.

리윤덕이 느릿느릿 대답하였다.

《어떻게 되긴… 그쯤 알고있으라구. 남웅이한텐 거기가 적재적소야. 본인의 요구도 그렇구 해서 소장선생이랑 다 동의했네.》

《동원이라고 해놓고 슬그머니 빼돌리긴가?》 진수현은 불쾌한 감정을 누를수가 없었다.

《뭘 또 새삼스레 까박을 붙이면서 그러나. 터놓고 말해서 자네도 남웅일 동원시키는데 동의를 한건 그를 별로 시답지 않게 봤기때문이 아니겠나.》

진수현은 그 말을 반박할수가 없었다. 사실이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만스러운가? 실장인 나를 제쳐놓고 간부들끼리 남웅의 문제를 처리했다고 자존심이 상해 그러는가?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우선 나자신에게 불만이 있다. 내가 뭔가 잘못한것 같다.…

《어쨌든 남웅이로서는 일이 잘된셈이지.》 리윤덕이 그루를 박듯 말했다.

진수현은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럴가?…》

그럴상싶기도 하였다. 이전에 남웅은 한낮에도 가끔 졸지 않으면 무슨 딴 생각을 하는것처럼 보였었다. 과학사업을 떠나 다른 알맞춤한 직업을 고르는게 그를 위해서는 다행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수현은 어쩐지 마음이 허전했다. 이젠 어쩔수 없다고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자기가 더욱 역겨워지기도 하였다.

그는 한동안 묵묵히 앉아있다가 나가려고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여보게, 래일 무슨 딴 계획이 있나?》 리윤덕이 묻는 소리였다.

진수현은 흥심없이 되물었다.

《래일이야 일요일이 아닌가.》

《그래 하는 소리네. 래일 우리 집에 좀 놀러 오지 않겠나? 점심때…》

《집에 무슨 일이 있나?》

《일은 무슨 일, 오래간만에 한번 놀러 오라는거지.》

리윤덕이 범상하게 하는 소리였다.

《고맙네, 가지.》

진수현은 푸접없는 자신을 새삼스레 느끼며 대답하였다. 2호동과 5호동에 이웃하여 사는 두 집안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친척처럼 가까이 지냈었다.

그런데 어느새 서로 발길이 뜸해졌다.

어쨌든 멀어지는 둘사이의 간격을 자기보다 안타까이 여기는것은 리윤덕이 같았고 먼저 웃음을 짓고 손을 내미는것도 역시 리윤덕이인것 같았다. 그래 초청에 응하면서 가책을 느끼는 수현이였다.

진수현은 이번 일요일 점심때 최일을 자기 집에 청하려고 생각했었다. 최일은 일요일에도 북새거리에 있는 집에 가지 않고 프로그람작업을 하였다. 요즘은 쉬는 날에 연구실에서 일하지 못하게 하니 합숙방에 콤퓨터를 갖다놓고 붙박혀 일하군 하였다. 그를 진수현이 자기 집에 데려다 점심이나 같이하고 오후에는 휴식을 좀 시킨다는노릇이 이렇게 윤덕의 집에 가게 되였다.

일요일 정각 12시에 5호동 리윤덕의 집 초인종을 누르니 문을 열어준 주인은 제잡담 손님을 부엌으로 안내하였다. 그는 안해에게 식사준비가 다 되였으면 이젠 그만 부엌을 내고 제 볼일이나 보라면서 쫓아냈다.

안해가 난처해하였다.

《손님대접을 여기서 하겠어요?》

《이 사람이 어디 손님이요? 자, 이젠 부엌은 우리 차지요.》

부엌으로 따라들어간 진수현은 커다란 물버치에 드러누워 아가미를 펄럭거리는 누런 잉어를 보았다. 낚시군의 심리가 되살아났다.

《이건 어디서 건졌나?》

《사왔지. 어디 가서 낚아올새가 있나?》

《한 서너키로는 잘 나가겠구만!》

《이걸루 회를 쳐보자는거네. 둘이서 천렵나간 기분으로 말이지. 자네야 한때 유명짜한 낚시군이 아니였나. 한번은 지형원선생님한테 조력까지 청했댔다면서?…》

《그랬지.…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가 막히네.…》

《칼은 미리 갈아놨지. 자, 잘 붙들어야 하네. 아니아니, 아가미를! 그렇지, 에이키!…》

물버치에서 미처 꺼내기도 전에 잉어가 물을 차며 자반뒤집기를 했다. 서툴기 짝이 없는 두《료리사》는 요동치는 잉어를 붙잡느라고 물벼락을 맞으며 덤벼쳤다.

어느덧 그들은 대학때 해칠보에 견학을 가서 방어회를 치던 일을 돌이켜보며 오손도손 이마를 맞대고 꼬리쪽으로부터 고기살점을 저며냈다.

이어 진수현은 아래방으로 안내되여 정식 상을 받았다.

방에는 두사람뿐이였다.

리윤덕이 그을음이 낀것처럼 뿌연 배불뚝이 술병마개를 땄다. 그는 미식가처럼 XO술의 유래를 한참 구수하게 늘어놓았다. 기분좋게 둬잔씩 마셨다.

리윤덕은 얼굴이 불깃하니 달아올라 속에 있던 소리를 터놓았다.

《내가 동창생 하나는 잘 두었지. 자네, 수현이 자네 말일세!…》

《원, 별소릴 다…》

《자넨 늘 날 돕자고 왼심을 써오지 않았나. 그 맘을 내가 알지, 다 알아! 전번에도 날 보구 따끔히 충고를 했지. 아무리 부소장일이 바빠두 자습시간을 내라구 말이야. 옳아! 자네 아니면 누가 나한테 맞대놓고 그런 소리를 하겠나. 응, 하하하…》

《!…》

진수현은 가슴이 찡해났다. 저 사람이 자주 과장된 소리를 하고 일에서 빈틈이 많은것 같아도 속으로는 늘 고민하고 모색하며 동창생의 의리를 중히 여길줄 알고 진정을 토로하기도 하는 사나이라고 생각하니 그를 못마땅하게 보아온 자기가 못내 옹졸해보이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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