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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열정이 넘치던 '축의 시대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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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기호
댓글 0건 조회 2,621회 작성일 11-01-30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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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의 다독다독 (경향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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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홍진 감독의 영화 <황해>를 보셨나요? 정말 사람 쉽게 죽이더군요. 그렇게 엄청난 살인이 자행된 원인은 버스회사 사장 김태원(조성하 분)이 죽어가면서 말해줍니다. “그 놈이 내 여자를 건드렸어.” 내연녀와 동업자가 불륜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살인을 청부한 것이지요. 내친김에 잔혹 영화라는 것을 여러 편 보았습니다. <악마를 보았다> <아저씨> <이끼> <의형제>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등 잔혹한 살인은 끝없이 이어지더군요. 저는 그런 영화를 보고 자객이 크게 활동하던 춘추전국시대를 떠올렸습니다.

 
공원국의 <춘추전국이야기>(역사의아침) 3권은 ‘남방의 웅략가 초 장왕’을 다루고 있습니다. 초 장왕은 ‘필의 싸움’에서 진나라를 물리치고 승리함으로써 패업을 완성합니다. 이 책에서는 그 전투에서 승리한 원인으로 ‘절영지회(絶纓之會)’를 꼽고 있습니다. 그걸 제 식으로 요약해보겠습니다.

장왕이 신하 100여명과 술판을 벌였습니다. 술이 한참 올랐을 때 촛불이 꺼졌습니다. 그때 한 신하가 장왕을 모시던 미인에게 수작을 걸었습니다. 화가 난 미인은 그자의 갓끈을 끊고서는 사실을 왕에게 고했습니다. 왕은 “오늘 과인과 술을 마시는데, 갓끈이 끊어지지 않은 이는 제대로 즐기지 않은 것으로 알겠소”라고 말해 범인을 숨겨줍니다. ‘필의 싸움’에서 용사 하나가 앞장서 싸워 적을 다섯번이나 격퇴시켰습니다. 장왕이 용사를 불러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고 용맹하게 싸운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 용사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제가 갓끈이걸랑요.”

어떻습니까? 소말리아 해적들을 죽여 인질을 구출하고는 ‘9시 뉴스’ 전체를 도배하면서 “제가 다 지시했습니다”라고 직접 출연해 자랑하는 이명박 대통령하고는 격이 다르지요. 사마천의 <사기>를 20년 동안 연구한 제 친구는 춘추전국시대에는 로맨스를 가장한 살인이 이뤄졌다면, 지금은 일단 죽여 놓고 로맨스로 가장한다고 말했습니다. 과거에는 사람을 죽여도 폼 나고 명분 있게 죽이고, 죽는 사람도 죽는 이유를 알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죽는 이유도 모른 채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지만요.

하여튼 춘추전국시대와 지금은 많이 닮았습니다. ‘계명구도(鷄鳴狗盜)’고사처럼 수많은 식객이 ‘닭 울음소리’나 ‘개 흉내’를 내는 재주만으로도 제왕의 마음을 얻으려 ‘유세’하는 것이나 <슈퍼스타 K>에서 인기를 얻어 스타가 되려는 것이나 비슷하지 않습니까? 춘추전국시대에는 남을 죽여야 자신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죽음의 전장으로 기꺼이 나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 시대에 종교가 탄생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유교와 도교가 등장합니다.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교양인)를 읽어보니 중국뿐이 아니었습니다. ‘축의 시대(Axial Age)’는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역사의 기원과 목표>(1949년)에서 제시한 문명사적 개념이 맞습니다. 야스퍼스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가 정신의 기원으로 인정할 수 있는 시대, 인류 공통의 기축(基軸)이 되는 시대를 ‘축의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암스트롱은 대략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의 시기를 ‘축의 시대’로 설정합니다. 이 시기에 세계 네 지역에서 인류의 정신에 자양분이 될 위대한 전통이 탄생했답니다. 유교와 도교뿐만 아니라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 이스라엘의 유일신교, 그리스의 철학적 합리주의 같은 위대한 종교와 철학 말입니다. 그 뜨거운 창조의 시기에 붓다, 소크라테스, 공자, 예레미야, <우파니사드>의 신비주의자들, 맹자, 에우리피데스 같은 영적·철학적 천재들이 일제히 나타났습니다.

지금도 ‘축의 시대’만큼이나 과도한 살육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남을 죽여야 내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겨낼까요? 이태백은 ‘천고문인협객몽(千古文人俠客夢)’, 즉 “자고로 문인은 협객의 꿈을 꾼다”고 노래했습니다. 요즘 문인들의 상상력이 예전만 못합니다. 그래서 영화의 상상력이 더욱 돋보입니다.

로펌에서 월급 1억원을 받았던 사람이 감사원장이 되고자 했습니다. 법보다 권력의 힘에 의해 재판의 결과마저 뒤집을 수 있다는 욕망이 작동되지 않았다면 로펌 경영자들이 막 공직을 떠난 변호사 초보자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안겼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부도덕한 정치·경제·언론 권력의 오만함에 지쳤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누군가를 손봐주고 싶은 마음에 잔혹 영화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려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죽음의 문턱을 넘고 온 옆집아이에게 “미안하다. 그때 모른 척해서 미안해”라고 말하는 영화 <아저씨> 속의 아저씨(원빈 분)의 한마디 말에 눈물을 잔뜩 쏟아내기도 했지요.

맞습니다. 폭력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축의 시대>가 내린 결론은 공감이나 자비 같은 종교적 가르침(‘영성’)이 폭력의 세계에서 자기와 세상을 구원하는 유원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올해에도 ‘영성’에 자신을 의탁하는 일은 늘어날 것입니다. 이미 출판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것이 로맨스인데, 이 로맨스마저 누르고 있는 것이 영성이기도 합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릭 워렌)이나 <긍정의 힘>(조엘 오스틴), <무소유>(법정)나 <화>(틱낫한) 비슷한 책들이 다시 등장한다면 아마도 큰 인기를 끌 것입니다. 고뇌를 공유할 ‘친구’조차 구하기 어려운 시대에 개인은 영적 세계의 독특함에 기대어 불안을 잊으려는 본능적 욕구를 발산할 것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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