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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와 조용수, 그 후 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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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주
댓글 2건 조회 2,870회 작성일 11-01-2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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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갑(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새 정부 들어서면서 새삼 언론 문제가 사회의 주요 의제로 이슈화되고 있다. ‘조·중·동 OUT’이 전국언론노동조합을 비롯해 시민들과 누리꾼들에 의해 제기되는 반면, KBS와 MBC에 대해서는 ‘국가의 불순한 언론장악음모’로부터 보호하겠다며 시민들이 촛불방패를 만들고 있다. 촛불정국에 나타난 이런 현상은 한편으로 제 4의 권부인 언론이 현대사회에 끼치는 막강한 영향력(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을 보여준다.

정권 쪽 입장에서는 언론이 자신들의 입장을 보다 충실히 대변해주길 바랄 터이지만, 국민들은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아픈 곳은 어루만지며 불안한 미래에 희망찬 대안을 제시해 주는, 국민 편에 선 정론직필을 원한다.권위주의 정권 이래 곡필아세 하는 무리들이 판을 쳤던 이 나라에서 언론민주화운동의 길은 지난했고, 아직도 끝은 요원하다.

1987년 6월항쟁 결과물의 하나가 국민주 <한겨레신문>의 창간이었다면, 4·19혁명으로 봇물처럼 분출했던 진보, 개혁과 평화통일을 원하는 시민들의 요구는 <민족일보>의 탄생으로 담아졌다.

창간되자마자 가판율 1위를 점했다. 그만큼 대다수 국민들의 이해와 요구에 충실했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정권은 쿠데타 발생 이틀 후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 조치를 발표함과 동시에, 진보진영을 대변해 왔던 민족일보사의 주요간부들을 체포하고 그 다음날 지령 92호를 마지막으로 폐간시켰다. 창간한 지 불과 4개월 만의 일이다. 10월 31일 최종공판에서 25살의 혁명재판관 이회창(현 자유선진당 당수)은 조용수 안신규, 송지영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박정희 의장이 12월 20일 형을 확인 재가한 다음날 서대문형무소에서 조용수에대한 전격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세상에, 그것은 한마디로 백주 대낮의 비문명한 야만이었으니, 이후 독재정권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20세기 대한민국을 우롱했던 야만의 서곡이기도 했다. 그런 야만의 시대 앞에 비판적 지식인들은 불우할 수밖에 없었다. 다수는 침묵하거나 야합했고 소수는 저항했으며 극소수는 제단에 자신의 피를 바쳤다. 제단의 이름은 민주주의였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인간으로서 최소한 지켜내야 마땅할 자존감이었을 것이다. 조용수도 그중의 하나였다. 민족일보 사건은 언론을 정권의 품에 장악하고 싶어 하는 독재자의 뒤틀린 꿈의 존재를 보여줬다.

기념사업회 사료관에는 <민족일보>와 조용수에 관련된 문서, 박물류, 영상물, 사진 등 귀중한 사료 60여점이소장되어 있다. 1961년 2월 13일 창간호부터 5월 19일 강제폐간까지의 <민족일보> 영인본과 깃발, 정관, 기자명부, <민족일보> 용 원고지와 조용수 사장의 영치물 차입원표, 재판부 제출자료, 자필 자료묶음과 심지어그의 생전에 사주를 풀어놓은 글 등 희귀사료의 상당수는 『조용수와 민족일보』라는 책을 저술한 원희복 현경향신문 기자가 기증했다.

세상이 변하지 않은 것일까. <민족일보>를 들추다보니 해묵은 기사 내용들이 전혀 낯설지 않다. 창간호엔 한미경협과 관련하여 ‘경제 자립성을 모독 침해 한다’는 기사와 통일사회당의 ‘한국민에 대한 중대모욕’이란 논평이 실려 있다. 창간사 헤드라인이 ‘우리는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라니, 그렇다면 소수의 이익만 대변하는 집권층의 전횡이 전제되는 언설이 아닌가. 4·19가 미완의 혁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미 군사쿠데타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말이다.

신문 1면 상단의 사시(社是)엔 <민족일보>가 민족의 진로를 제시하고,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며 근로대중의 권익을 옹호하고, 조국의 통일을 절규한다고 써있다. 사시는 신문이 지향하는 가치를 요약해 놓은 것이니, 마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하는 헌법 제 1조나 마찬가지다. 너무나 당연한 가치들을 지향하기 위해 지극히 상식적이고 원론적인 기사를 작성하고 활자화했던 그들에게 들씌워진 건 그러나 ‘용공’이고 ‘빨갱이’라는 딱지였다.

필자도 유학시절 독재에 반대하는 한 해외신문의 편집인 노릇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 조금은 안다. 불의한 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언론이란 사실을. 그리고 그것을 억누를 수 있는 나름 유일한 방도가 빨갱이 타령이란 것을.

우리나라 최대의 언론 탄압사건인 <민족일보>와 조용수 사건은 지난 2006년 11월 과거사위원회로부터 명예회복을 받았고, 최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가 재심에서 북한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혐의로 사형이 선고됐던 조용수 사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47년 만의 일이다. 세기를 넘어 그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야만은 여전히 칼날을 거두지 않으니, 그것이 조자룡의 녹슬고 무딘 헌 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고도 우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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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일보> 창간호 1면. 함석헌 선생의 모습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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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종 영수증과 2,3천환만 빌려달라는 조용수 친필 메모. 『민족일보』의 어려운 재정상황을 보여준다. 재정부족으로 <민족일보>가 공개 채용한 기자는 단 한명, 이수병 씨였다. 그는 이른바 인혁당 사건으로 1975년 처형되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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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님의 댓글

역사 작성일

아..역사는 저렇게 진실을 드러내고 밝혀주는데
저 엄청난 죄악을 저지른 자들과 그 후손들은
누가 어떻게 징벌할 것인가?

아직은 저들이 한국이란 나라를 쥐고 흔들지만
저 잔악한 무리들을 청소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심판의 날은 꼭 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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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님의 댓글

등대 작성일

양심인들을 사살한 인간백정 후손들은 피해본 우리들의 혈세를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잘도 먹고있구나 대형 서점에 의원자리 총재자리 미래수상까지 하겠다고 하니 어찌 통탄할일이 않입니가 ? 대한민국 앞날을 걱정 하면서 사형틀에서 사라지신 분들이 지금도 반역자들에게 반기를 들고 정신차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소리를 가슴속으로 듣는 자들은 복이 있고 그들이 하고저 하는 애국심이 대한민국 만세를 부를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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