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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미독재 무바라크 사임이후 이집트가 한국 꼴 될 수 있는 가능성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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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재미청년
댓글 3건 조회 3,417회 작성일 11-02-11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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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민중들은 지금 무바라크 사임으로 흥문의 도가니에 젖어 있다. 미국이 지지해 오던 무바라크가 오늘 사임한다고 부통령이 발표했다. 그리고 군부가 잠정적으로 정권을 인수받는다는 것이다. 이집트는 역사적으로 큰나라였지만 외세들에게 시달려 왔다. 

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인 유태영 박사는 작년 가을 이집트에 대한 연재기고를 통해서 " "이집트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이 나라도 3000년의 왕조시대가 끝난 후에 로마, 그리스, 아랍, 터키, 프랑스 그리고 영국 등 열강들의 지배를 오래 동안 받았다. 그 후 부상한 새로운 제국주의 나라 미국에 의해 또 다시 어려움을 겪어 왔다. 이집트가 겪은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우리 민족의 비운과 유사하였던 과거사들도 접할 수 있었다. 이집트 연구 또한 우리 민족민주운동사에서 참고할 영역들고 생각된다."고 설명한다.


[특별기획]이집트를 핥고 간 제국주의 발자취



유태영 박사(재미통일운동 원로, 은퇴목사)는 중동지역의 이집트를 고찰하면서도 남미의 나라들과 아프리카
나라들을 고찰하며 발견한 제국주의자들의 횡포를 공통적으로 찾아냈다."고 지적하면서 "이집트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이 나라도 3000년의 왕조시대가 끝난 후에 로마, 그리스, 아랍, 터키, 프랑스 그리고 영국 등
열강들의 지배를 오래 동안 받았다. 그 후 부상한 새로운 제국주의 나라 미국에 의해 또 다시 어려움을 겪어 왔다.
이집트가 겪은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우리 민족의 비운과 유사하였던 과거사들도 접할 수 있었다. 이집트 연구 또한
우리 민족민주운동사에서 참고할 영역들고 생각된다."고 설명한다. 그의 특별기획을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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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년 역사의 피라미드의 나라 이집트의 발자취도 순탄하지 않았다.

[특별기획]

이집트를 핥고 간 제국주의 발자취

나일강에 뒤얽힌 5천년역사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이집트




나는 <<민족통신>>의 요청으로 중동지역의 이집트를 고찰하면서도 남미의 나라들과 아프리카 나라들을 고찰하며 발견한 제국주의자들의 횡포를 공통적으로 찾아냈다. 이집트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이 나라도 3000년의 왕조시대가 끝난 후에 로마, 그리스, 아랍, 터키, 프랑스 그리고 영국등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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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유태영 박사
강들의 지배를 오래 동안 받았다. 그 후 부상한 새로운 제국주의 나라 미국에 의해 또 다시 어려움을 겪어 왔다. 이집트가 겪은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우리 민족의 비운과 유사하였던 과거사들도 접할 수 있었다. 이집트 연구 또한 우리 민족민주운동사에서 참고할 영역들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미국 제국주의 침략에 시달리고 역사의 절망적 종착점에 이르게 된것을 뼈저리게 느끼게된 이집트의 지도자들은 어두운 곤경에서 출구를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산 복합체가 핵과 미사일을 독점하고 횡포하고 있는 아랍세계의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그래도 절망하지 않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멀고 먼 동방의 샛별을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집트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많은 교훈을 얻게 되었다. 5천년을 자랑하는 피라미드의 나라, 이집트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나일강에 뒤얽힌 5천년역사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이집트
<부시 이집트에 오지마> 웨치는 민중 <신발 투사> 영웅의 나라


서구문명 보다 훨씬 이전에 발생한 <나일강의 선물> 이라고 불리움을 받는 이집트의 찬란한 문화적 유산인 <피리미드>와 <스핑크스>, 그리고 차고 넘치는 예술적 조각품들은 고대 이집트 인들의 두각을 유감없이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세계 10대 명소중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의 수는 110개 이상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 모래밑 20m에서 4300년전 피라미드를 또 하나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이번 발굴이 118번째라고 말하고 있다.

제일 큰 피라미드는 일면 길이가 230m 이고 높이는 147m 인데 이것은 서기전(BC) 2575년경의 것으로 제일 오래된 <피라미드>라고 고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집트 기자지방에 있는 거대한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과 사람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신화적 동물의 형상을 과시하고 있다. 이 스핑크스는 우리 인간에게 묻는수수께끼를 그 옛날에 던져 주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보자.

<목소리는 같지만 발이 4개가 되기도 하고, 발이 2개가 되기도 하며 또 발이 3개가 되기도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정답을 못하는 사람을 스핑크스는 잡아먹기 때문에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하지만 만일 이 질문에 정답을 말 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만 한다 면 스핑크스는 그 자리에서 자결해 죽는다고 한다.

사람들이 스핑크스에게 잡혀먹히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필자는 속히 정답을 제시 해야 할 것 같다. 정답은 뭘까?

<사람이 유아기에는 4발로 기고, 자라서는 2발로 걷고 노년기에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3발의 소유자가 된다>는 것이 정답이다.

이 옛날의 스핑크스의 속담은 바로 고대 이집트인들의 삶의 지혜를 말해 준다.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비록 왕과 지배세력을 위주로한 무덤 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삶과 죽음을 하나로 묶는, 즉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내세에서 실체 로 회생함을 신봉하고 있다. 그럼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그리고 예술적 조각품 들은 모두가 다 고대 이집트 문화의 신비성을 보여주고 있다.

1.이집트의 간추린 고대 역사


이집트의 고대역사는 나일강 주변을 중심하여 사람들이 처음 정착하기 시작 했는데 사회, 경제, 정치와 종교 생활이 활발하였고 그후 점차 독립을 추구하는 공동체들이 생겨났다.

BC 5000년 경에 나일강 삼각주 내에 결집한 한개의 나라와, 나일강 계곡에 형성한 또 하나의 다른 나라가 창건되여 제각기 왕국을 이루었다. 아마도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여러 왕국들이 그 지역에 생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BC 2925년경에 메네스(Menes) 왕의 치세로 인하여 이집트의 모든 잡다한 왕국들이 하나로 통일되여 최초로 이집트의 안정된 제1왕조를 창건했다.

메네스왕이 창건한 제1왕조 이후부터 이집트의 왕조는 약 3000년 동안 계속 되었는데 BC 332년에 이르러서 제30왕조를 마지막으로 3000년 동안의 이집트의 길고 긴 왕조의 역사는 모두 다 끝났다. 이집트의 역사적 기술에는 이 마지막 제30왕조의 끝을 <파라오왕 시대의 마지막 왕조의 끝>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파라오왕> 이라는 명칭은 이집트 왕조시대에 있어서 모든 왕들에게 공동으로 통용되는 대명사로써 유일한 고유명사 이었기 때문이다.

위의 3000년 <파라오 왕조> 를 역사가들은 1. 고왕조 시대. 2. 중왕조 시대. 3. 신왕조 시대로 구분한다.

<파라오 왕조>가 모두 다 끝난 후에 BC 332년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침공하여 약 30년동안 통치 하다가 죽었다.

BC 305년에 침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후에 이집트의 톨레마이오스가 봉기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또 다시 새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창건 했다. 새로 창건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약 250년동안 이집트의 또 하나의 왕조 국가를 존속 시켰다. 새로 시작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행정과 농업의 관개사업 등 큰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 때는 벌서 실질적으로 로마제국이 이집트를 손안에 넣고 지배하고 있 는 암담한 형편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오래 가지 못 하고 끝 날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BC 48년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아울레테스왕이 죽으면서 그의 아들과 딸인 킅레오파트리아 에게 정권을 공유하도록 넘겨 주고 죽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리아는 오빠를 제치고 적극적이고 보기 드문 절세 미인으로써 야심을 품고 <이집트의 여왕> 으로 등장 했다.

BC 47년에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가 이집트에 와서 잠시 머물러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클레오파트리아 여왕은 꺼저가는 등잔불 같은 이집트의 운명을 개선할 야망을 품고 카이사르 황제에게 접근하여 <미인게 전술>로 나일강을 동반 유람하면서 로마황제를 유인 했다.

그리하여 카이사르 황제는 절세 미인 킅레오파트리아 여왕의 유혹에 빠져 달콤한 연애를 즐기고 있었다. 카이사르 황제가 얼마 후에 이집트를 떠나 로마로 돌아갈 때 놀랍게도 클레오파트리아 여왕은 이미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녀의 배속에는 카이사르 황제의 아들이 자라고 있었지만 BC 41년에 카이사르 황제는 정적에 의해 암살로 쓰러지고 말았다. 카이사르 황제가 죽은 후에 클레오파트리아는 또 다시 로마의 총독 안토니우스와 뜨거운 연정을 맺고 이집트 여왕의 왕위를 보존하려고 온갖 힘을 기울였다는 비사가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 총독은 그의 경쟁자 이며 정적인 오타비누스에게 쫒기는 비운의 신세가 되었다. 안토니우스 총독과 클레오파트리아 여왕은 오타비누스에게 붙잡혀서 비참하게 죽는것 보다는 차라리 용감하게 스스로 총과 독사에 물려 동반 자살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들은 드디어 BC 30 년 8월에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클레오파트리아 여왕의 죽음은 이집트 역사에 있어서 모든 왕조의 마지막 왕의 죽음이 되었다. 클레오파트리아 여왕의 죽음으로 인하여 고대 이집트의 길고 긴 <고대역사>는 사실상 완전히 끝났고 이집트 <왕조역사> 의 마지막을 기록 했다.

체코 뮤지컬 <클레오파트리아> 는 2002년 체코에서 초연 당시 55만명의 관객을동원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클레오파트리아 영화 <반지의 제왕> 3편은 상영시간 3시간 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클레오파트리아의 역을 맡고, 리처드 버튼이 안토니우스의 역을 맡았다. <반지의 제왕> 이라는 이 영화는 옛 날 그 당시 호화로운 이집트 클레오파트리아 여왕의 왕궁생활의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잘 보여 주고 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로마제국의 총독임을 완전히 잊고 막무가내로 클레오파트리아와 사랑에 빠졌으나 인간의 삶에 있어서 사랑의 중요성을 유감 없이 발휘했 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리아는 자신의 미적 매력을 십분 발휘하여 이집트 역사에 있어서 길이 남을 여왕 으로 기억 되고 있다.

3000년 동안 계속된 이집트의 역사가운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흥미로운 이야기는 클레오파트리아 이외에 또 하나 있다. 그것은 기독교 성서 중 <구약성경>에 있는 유대인들의 출애굽 역사 이야기 이다.

구약성경 출애급기 <이집트 탈출기 5장-14장) 에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출애굽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역사와 시대적 배경은 이집트 왕조 제20왕조 람세스 2세가 통치하던 때 BC 1279-1213년 경에 있었던 사건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학자들간에 정확한 년대에 대하여 약간 차이가 있다. 구약성경 학자들은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 간 때는 BC 1854년경이며, 야곱의 식구 70명이 기근으로 이집트로 이민을 간 때는 1834년 이라고 한다. 그럼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은 BC 1444-1404년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애굽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구약성경에는 신화적 표현으로 가득차 있다. 홍해를 육지처럼 걸어서 건넜다는 기적 이야기, 10가지 재앙이 탈출을 가능하게 했다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또 하늘에서 만나가 떨어저서 그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았다는 기적 같은 이야기들이 있다. 신화적 표현 방법이 아니고서는 고대역사를 후대인에게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신화의 형식을 통한 문학적 서술방법을 사용 했는지 모른다. 이것은 하나의 이상적이며 또는 신화를 통한 신학적 해석 벙법을 후기에 역사적으로 발전시킨 뜻 깊은 산물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럼으로 성경에 있는 모든 기적에 관한 기록들은 역사적인 기록이라기 보다는 구전을 통하여 오래 동안 전해 내려 온 이야기들을 후대에 사람들이 문학적이며 상징적 서술방법으로 기록한 <신화화한 이야기> 들로 풀이되기도 한다.

이런류의 이야기들은 오늘 날 남한사회에도 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권력을 <모세의지팡이>와 같은 위력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이런 보수주의적이고 맹신주의적인 무지한 기독교인들이 남한에도 많이 있다는 소식에 놀람을 금치 못한다.이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를 기적의 지팡이로 맹신하고 있다. 미국이 강요하는 IMF 가 우리 민족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것을 민족의 양심으로 <뜻으로 이해> 해야 한다. 강자에게는 강요와 착취와 위선이 있을뿐 기적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2. 이집트 침략에 활보하는 서구문명 제국주의 발자취


이집트는 인구 6천 700만 (2000년 현재) 이며 나라의 크기는 한반도의 약 5배의 넓은 땅을 가지고 있으나 광대한 사막지대로 유명하다. 종교는 이슬람교가 93%이고 기독교는 7%이다.

이집트는 3000년의 왕조시대가 끝난 후에 로마, 그리스, 아랍, 터키, 프랑스 그리고 영국등 열강들의 지배를 오래 동안 받았다. 서구 강대국들 침략 발자취, 이슬람문명의 흔적, 그리고 오늘 날 미국의 지배세력이 이집트를 괴롭히고 있다.

빈곤과 정치적 혼란으로 뒤얽킨 나라의 모습이 바로 오늘 이집트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 모습 이다.

(1)


클레오파트라 여왕 이후 로마제국이 BC 30년에 이집트를 침공하여 AD 395년 까지 430여년 동안 침략 통치를 했다. AD 313년은 세계 역사의 대변혁의 해였다.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함으로 세계역사는 급변 했다.

기독교에 대한 관용정책이 발표됨으로 인하여 이집트에서 기독교의 발전이 공식
화되여 초기 기독교의 유명한 교부들의 적극적인 활동무대가 전개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가 330년에 로마의 수도를 그리스의 비잔티움으로 이동함으로 인하여 로마제국은 쇠퇴해 지고 그리스의 비잔틴 제국이 왕성해졌다. 비진틴 제국이 이집트를 지배하는 동안 모든 이집트인들이 본의 아니게 기독교로 개종해야 만 했다.

395년에 로마제국이 분열되여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 으로 갈라졌다. 이집트는 처음에 갈라지기 전에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갈라진 이후부터는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 제국> 의 지배를 받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지배도 640년에 끝났다. 비잔틴 제국의 군대는 아라비아의 침략군과 3년 동안의 치열한 전쟁을 하다가 패배하였다. 비잔틴 제국 (동방 희랍 정교회) 은 246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다가 통치권을 이슬람에게 빼앗기고 642년에 이집트에서 떠나갔다.

(2)


드디어 이집트에 아랍화 시대가 도래했다. 이집트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집트 인들은 콥트계 기독교 (동방 희랍 정교회) 를 버리고 이슬람교로 모두 개종했으며 아랍인들이 대거 이집트 농촌으로 정착 했다. 8세기부터 이집트의 공용어는 아라비아어가 되었다. 이 과정에 한 때 이집트의 콥트게 기독교인들이 아랍 종교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이것은 곧 진압 되었다.

969년에 아랍계 파티마 왕조가 이집틀 통치하면서 수니파를 강화하여 아즈하르 사원을 건설했다. 1169년에는 살라웃단 왕조가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십자군을 막기위하여 군대를 재편성하고 시리아와 연합하여 수니파의 위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1250년 이후 이집트를 통치하는 아랍 통치세력은 바리 맘루크 세력 (1250-1390)과 부르지 맘루크 세력 (1382-1517)으로 분열되어 2원화된 세력구조가 형성되었다. 분렬되기 이전의 이슬람 세력은 십자군과 몽골인들의 침입을 물리치는데 있어서 강력 했지만 군벌의 세력 다툼과 왕조의 말기 현상이 노출되고 경제적 혼란이 극심해 지면서 이슬람의 통치기능이 점차 쇠퇴 하였다. 이스람은 1517년에 이집트 통치 를 마감하게 되었다.

(3)


1517년에 이집트는 터키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어 오스만 총독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집트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는 터키의 이스탄불로 바뀌게 되었다.오스만 총독은 초기에는 중앙 집권체제를 활용했으나 17세기 후반 부터는 징세청부제도를 도입하여 암루크층을 내세워 농촌의 지배세력으로 만들었다. 오스만 제국의 총독은 뒤로 물러 서서 명목상 총독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암루크층은 토착세력화가 되여 오스만 제국으로 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세력으로 까지 발전하고 있었다.

(4)


1798년에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하여 3년동안 통치했다. 나포레옹은 이집트에 근대화한 국가를 건설할 것을 원하면서 알바니아인 용병대를 이집트에 끌어 들였다. 1805년에 나포레옹은 이집트에서 퇴각하면서 그의 뒤를 이어 이집트 통치권 알바니아인 메메트 알리에게 위임 했다.

메메트 알리는 터키의 오스만 제국에 뿌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터키의 암루크층의 오래 된 통치 형태의 잔재를 일소하고 토지조사와 전매제도 도입 그리고 근대공장설립, 징병제 실시, 기술학교 설립등 신흥사업 정책을 실시했다.

1840년에 메메트 알리는 런던 4개국조약을 체결하여 이집트 국내시장을 유럽에 개방함으로 그 대가로 메메트 알리는 이집트의 공식 총독의 위치를 굳치고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데 성공 했다.

프랑스와 메메트 알리는 이집트를 침략통치하는 기간에 이집트를 유럽의 정치 무대에 끌어 올리는데 공을 세웠다. 이집트의 총리가 된 메메트 알리는 팽창주의와 치부를 마음 껏 즐겼으며 이로 인하여 이집트는 영국에 막대한 빚을 지게 됐다.

1848년에 메메트 알리 총독이 죽은 후에 그의 손자 사이드 파샤와 이스마일 파샤가 후계자들이 되어 이집트를 통치했다. 이들은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원칙으로 하여 수에즈운하의 개설과 개통을 하여 새로운 정책을 실시했다.1869년에 수에즈운하가 개통되었다. 이때 영국은 수에즈운하 건설이권때문에 극구 반대 했지만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의 지지후원으로 파샤총독 시대에 개통되었다.

(5)


메메트 알리 총독의 후광을 받은 파샤 정권은 또 다시 흥청 망청 정치를 행하여 1876년에 이집트는 재정적으로 파탄에 이르렀다. 이집트는 재정 파탄으로 국제관리하에 놓여 졌다. 유럽 열강들은 이집트의 불실정권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1879년 이집트는 국가채무와 내전으로 인하여 시달리게 되자 영국은 파샤총독의 권한을 종결시키고 1882년에 이집트의 내란을 틈타 빚을 탐감해 준다는 명목상 이유와 핑게로 영국은 이집트를 점령 했다. 1914년에 영국은 이집트를 영국 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1800년대 초부터 길고 긴 오랜 세월 동안 터키 오스만 제국과 프랑스와 영국 세나라들은 이집트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서로 치열한 경쟁을 했는데 결국 영국이 이집트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영국의 보호령이된 이집트의 민중은 역사이래 처음으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대하여 항쟁을 일으켰다. 이집트 민중의 항쟁에 부딪친 영국은 할 수 없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독립을 허락 했다. 1922년에 영국은 이집트의 독립을 형식상 승인했다.

하지만 영국은 절대로 이집트 통치권을 포기하지 않고 1936년에 독립의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영국-이집트군사동맹조약>을 런던에서 강제로 서명하게 했다.

ㄱ. 영국은 수에즈 운하에 계속 주둔하며 치외법권을 갖는다.
ㄴ. 20년의 기한부로 영국군은 스에즈운하를 관리하고 그 지역에 주둔 한다.
ㄷ.영국군은 이집트 영내에서 유사시 자유로히 군사작전을 전개할 수 있다.
ㄹ.수단과 이집트 사이에 자유로운 이주와 왕래를 보장한다.

영국은 이와 같은 부당한 조건하에서 진정한 독립이 아닌 명목상으로 이집트의 독립을 허락했던 것이다.영국이 부당하게 이집트와 맺은 <영국-이집트군사동맹조약> 은 오늘 미국이 한반도 남쪽에 60년 동안 주둔하고 있으면서 남한과 맺은 이른바 <한미군사방위조약>의 내용과 흡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3.이집트의 혁명가로 등장한 나세르 대통령


부당한 조약을 맺고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는 영국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그 조약의 폐지를 요구하는 국민운동과 대지주 외국자본에 항거하여 싸우는 농민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집트에서 점점 격화되고 있었다.

1956년 1월에 나세르는 일당정치체제 하에서 이슬람교를 공식 종교로 삼는 사회주의 이랍 국가를 표방한 이집트 헌법을 선포 했다. 그리고 6월에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99%의 득표를 얻어 헌법이 승인하는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1958년에 아랍세계에 대한 원대한 포부를 품고 시리아와 이집트 두 나라의 합병에 성공하여 <아랍연합공화국> 을 창건하여 새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1961년에 시리아 내부에서 발생한 쿠테타로 <아랍연합공화국> 에 대한 나세르 대통령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나세르 대통령은 이집트 혁명의 최고 기수가 되여 옛 헌법의 폐지와 농지개혁 등을 통하여 친영국적 지배세력을 배제하고 이집트의 민족적자립과 민주주의 국가 창건을 위하여 사회개혁사업을 전개하여 완수 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영국의 지배세력의 완전한 철수목표를 달성했으며 또 유럽과 미국의 군사적 압력을 대항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여러 나라들과 긴밀한 연대를 맺고 <비동맹국창설> 을 추진 했다.

1956년 7월에 나세르 대통령은 외국자본의 최대의 소유인 수에즈운하의 운영권을 취하하고 이집트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그리하여 나세르 대통령은 이집트의 완전한 자주독립국으로서의 주권을 아랍 세계를 향해서 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향하여 명확히 선포 했다.

이와 같은 나세르 대통령의 혁명운동으로 인하여 아랍세계에서 민족운동이 점점 격화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영국-프랑스-이스라엘 세 나라는 1956년 10월에 이집트에 대한 군사적 침공을 감행 했다. 이것이 <제2차 중동전쟁> 이었다.

하지만 이집트 국민의 굳게 결속된 저항과 온 아랍과 아프리카-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이집트에대한 지원을 제공했다. 이로 인하여 3국의 침공은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미국의 침략의도 부상>


그 후 곧장 미국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1957년 미국은 아랍세계에 대한 침략의 속심을 숨김 없이 드러내 보였다.미국은 이른바 <아이젠하워 독트린> 이라는 것을 들고 나와 미국의 아랍세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노골적으로 제시 했다.

하지만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대한 아랍 나라들의 반응은 대단 했다. 1958년에 이집트와 시리아 합병은 실태했지만 유사시 동조와 결합의 의지는 튼튼 했다. 이라크에서 혁명이 발생 했다.

요르단-레바논 민중들의 반영반미봉기가 발생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예멘에서 혁명운동이 잇따라 일어 났으며 온 아랍 나라들의 자주화 민족동맹 운동이 서로 결부되여 광범이하게 확산되기 시작 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아랍계 구성원들의 일체성을 중요시 하여 <아랍민족주의> 를 꿈꾸었다. 나세르 대통령은 이집트의 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온 아랍민족을 향해 해방운동의 중요성을 상기시킴으로서 앞으로의 혁명을 구상하고 있었다.

나세르 대통령은 이집트 남부시골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아나 8살 때 어머니가 운명했다. 어린 나세르는 카이로 삼촌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음으로 어머니가 죽은 것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자랐다. 어린 나세르는 영국 정부 감옥에서 막 풀려난 삼촌 집에서 유대인 9가구가 사는 건물에서 삼촌과 함께 방을 얻고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중학시절부터 민족운동에 참가 하면서 언제나 <반영국 가두시위> 에 동참했다. 그러던 중 어느 시위에서 일격을 맞아 이마에 흉터가 생겼다. 그 때 생긴 그 흉터는 일생동안 나세르의 얼굴에 남아 있었다.

나세르는 사관학교 졸업 후에 수단에서 근무했으며 사관학교 교관이 되기도 했다.1948년의 <제1차중동전쟁>을 계기로하여 나세르 청년장교는 사명감을 깨닫고 <장교단비밀조직> 을 결성 하는데 가담 했다. 1952년에 쿠테타에 성공하여 이집트의 낡은 왕조의 봉건주의 친영국적 잔재를 제거 했으며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독립을 쟁취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나세르 대통령의 업적은 실로 대단 했다. 소련의 원조로 건설한 아스완 댐이 1968년에 가동되여 20세기의 현대적 생활방식을 도입했고 산업화도 촉진했다. 토지개혁, 부패척결, 여성들에게 권리부여 정책 주장, 외국 세력이 차지하고 있던 정치 경제적 이권을 모두 되돌려 받았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을 국외로 추방 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첫째, 이집트혁명을 주도하여 독립을 쟁취 했다. 둘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설립했다. 셋째, 세계적인 비동맹국 기구를 설립 했다. 네째, 반식민동맹과 범아랍주의를 평생동안 제창했다. 다섯째, 비록 시리아의 쿠테타로 실패 하기는 했지만 <이집트-시리아 공화국>을 창건하여 놀라운 역사를 남겼다.

나세르 대통령을 괴롭히는 반대세력도 역시 대단 했다. 기독교 콥트교도들, 유대인, 기존 기득권 세력, 군부의 파벌, 땅을 빼앗긴 지주들 그리고 끊임없는 영국의 분렬공작과 미국의 정치적 압력등이 평생 나세르 대통령을 괴롭히고 협박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세르 대통령은 18년동안 이집트의 자주화를 생명으로 하는 혁명적 지도력을 발휘 했다. 이집트에서 뿐만 아니라 아랍세계 전역에서 나세르 대통령은 카리스마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나세르 대통령의 마지막 활동>


1967년 10월29일에 돌발한 <제3차 중동 6일전쟁> 은 전아랍세계에 분노를 일으켰으며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나세르 대통령이 29일 밤 한 자녀의 생일 파티에 참석해 있을 때 나세르 대통령은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반도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틀 뒤 프랑스와 영국군의 비행기가 이집트 비행장을 일제히 공격 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군은 선제 기습공격을 강화하여 시나이 반도의 샤름앗사이호까지 점령하여 이집트 공군은 사실상 전멸을 당하는 위급한 처지에 놓여 졌다.

정세는 급격히 악화되여 이집트 육군이 수에즈 운하에서 퇴각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비밀로 미리 준비한 기습작전에 의하여 개전 6일만에 이집트군은 손을 쓸 사이도 없이 허무히게 패전의 쓴잔을 마셔야만 했다.

패전의 운명에 처한 나세르 대통령은 책임을 통감하여 국회에 사표를 제출 했다.하지만 나사르 대통령을 지지하는 민중들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국회는 투표에서 대통령의 사표에 반대하여 대통령직을 계속하게 했다.

한편 소련은 파괴된 이집트의 모든 전쟁장비들을 즉각 교체하기 시작했고 이집트군의 포대를 엄호하여 수에즈운하를 따라 지대공 미사일을 설치하도록 지원 했다.1970년에 미국은 자신의 본질을 또 다시 나타내는 정치적 쑈를 연출 하면서 이집트에게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상> 을 하도록 제안 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이집트 문제 뿐 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문제도 동시에 군사적 으로가 아니라 정치적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방향을 설정하고 팔레스타인 게릴라간의 총돌사건을 우선 수습하려고 심혈을 기우려 동분서주하다가 과로로 인하여 갑자기 심장 마비를 일으켜서 1970년 9월에 사망 했다.

니세르 대통령은 아랍인들의 영웅이었다. 그는 이집트와 아랍 <자주권> 의 상징적 의미를 한몸에 지니고 아랍인들의 가슴속에 <아랍의 꿈> 을 심어 놓고 떠나 갔다. 나세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민중들 속에서 그의 죽움의 뒤를 이어 자살자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과연 아랍인들의 영웅적 지도자이었으며 그의 카리스마적 지도력은 아랍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나세르는 이집트 민중이 수 천년 동안 외세에 짓밟혔던 민족의 비운을 끝장내고 민족의 존엄성을 되찾아 준 이집트 역사에 처음 나타난 지도자였다.

4. 친미 굴종의 변절자 <사다트>


나세르 대통령이 사망한 후에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사다트>는 1950년대에 청년장교들이 혁명운동을 일으킬 때 나세르와 함께 가담하여 두 사람은 혈맹의 동지였다. 하지만 혈맹의 동지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된 사다트는 동지를 배반할 뿐만 아니라 민족과 민중을 배반하는 친미 추종자로 변절했다.

사다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미국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변질되다가 끝내는 매국적 어용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1970년 10월에 대통령이 된 사다트는 전임 동지 나세르 대통령이 창건한 <아랍사회주의연합>을 전격 불법화 하고, 소련군사고문단을 추방하여 사다트는
민족보다 자기자신의 지도체제를 강화하고 우파지도자로 변신하여 권력자로서 행세 했다.

친미추종자 사다트는 1973년에 사실상 미국의 묵인하에 이른바 <제4차 중동전쟁>을 일으켜 이스라엘에게 배앗긴 시나이반도의 아주 적은 일부분을 되 찾는 연극을 연출하여 잠시 영웅으로 행세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다트 대통령은 1977년에 11월에 아랍세계의 원수의 나라 이스라엘을 친선 방문하여 이스라엘과의 평화정책을 위한 비밀 토의를 하고 있었다.

1978년 9월에 사다트 대통령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대통령의 휴양지인 캠프데이비드에 가서 이스라엘 의 총리 베긴과 만나 굴욕적인 평화협정인 <캠프데이비트 조약> 을 맺었다.

사다트 대통령의 이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행동에 대하여 전체 아랍세계는 물론 소련등 동구권 나라들의 반대와 비판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다트는 자기의 친미 행각을 계속 했다. 그 결과 사다트는 1978년에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과 함께 <노벨 평화상> 을 받았다. 사다트는 1979년 3월 26일에 아랍역사 최초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 을 맺었다.

미국을 추종하는 서방세계에서는 사다트 대통령의 인기가 하늘 높이 떠 올랐지만 이집트와 아랍세계에서는 굴욕적 이며 매국적인 평화협정을 반대하면서 사다트 대통령을 규탄하는 분노의 함성이 하늘을 찌르는 대조적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뿐만 아니라 국내의 경제위기와 민심의 악화등으로 인하여 사다트 대통령의 인기는 급격히 땅에 떨어져 이집트는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드디어 사다트 대통령의 최후의 운명의 날은 도래 했다. 1981년 10월 6일에 <이집트-이스라엘 전쟁> 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가하여 사다트 대통령은 의장대의 사열을 하던중 회교극단주의자에 의해 피살 당해 현장에서 쓸어졌다.

사다트 대통령을 향하여 이슬람이 총탄을 던진 그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1978년에 켐프데이비드에서 맺은 협정 때문 이었다.<이집트가 시나이반도를 되찾는 대신에 이스라엘이 불법적으로 점령한 팔레스타인 땅을 이스라엘의 땅으로 인정 한다>

사다트는 팟죽 한 그릇에 <팔레스타인 민족> 을 미국과 이스라엘 에게 팔아 넘기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기 때문에 아랍 국가들의 공분에 의하여 죄값을 치루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5.우유부단한 <무바라크>대통령의 30년 집권


사다트 정권에서 부통령 이었던 무바라크는 사다트가 암살 당한 후 즉시 무임승차로 대통령이 되었다. 무바라크는 5선 대통령으로 2011년까지 30년 동안 집권하게 될 것이다. 그는 친미독재 정권을 유지해 온 인물로 임기가 끝나면 그의 아들 <가말 부바라크(Gamal Mubarak)> 에게 정권을 인계할 것이라는 여론이 정론처럼 전해 지고 있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30년 장기집권의 비결이 무엇인가?

중동 뉴스를 종합해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첫째,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도움을 받아 팔레스타인 공격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뉴스. 둘째, 이집트는 정치적 안전을 위하여 이스라엘과 좋은 동반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뉴스. 셋째, 부쉬와 무바라크의 관계는 중동평화 정책에 있어서 항상 서로 믿을만한 협력자의 관계라는 뉴스. 네째, 미국은 이집트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든 인권탄압 문제에 대하여 언제나 무통사통으로 눈감고 있다는 뉴스등 이다.

부쉬가 만나는 세계의 많은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높은 존대어 < Yes, Sir> 를 사용하여 대접을 받는 대통령은 오직 무바라크 대통령 이다. 부쉬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골프장에서 기껏해야 < My friend> 라는 농담적 낮은 말을 사용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 말의 뜻도 모르고 <친구>라는 말에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1981년에 무바라크 대통령이 취임한 후 무바라크에 의하여 이집트의 감옥에 수감된 반정부 수감자는 1,850명 이었다. 하지만 2003년 현재 일반 범죄자가 아니라 순전히 정치범으로 수감된 사랍의 수는 1만 8천명으로 발표 되었다. 그 때 감옥은 11개 이었는데 지금은 44개로 증가 했다.

오늘 이집트에서 높아지고 있는 것은 실업자의 수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데모 인구의 수뿐이다.

지난번 대선 때 대통령 후보로 출마 했다 낙선된 야당 지도자 아이만 누르는 5년형으로 감옥에 같혀 있다. 워싱톤 포스트 등 미국의 언론들은 누르의 석방을 주장했고 백악관도 우려를 표명해 석방을 촉구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30년 독재를 지원하고 묵인으로 일관해 온 미국이 지금에 와서 다음과 같이 모순된 말을 하고 있다.

<무바락을 대체할 수 있는 마땅힌 세력이 아직은 없다> 라는 핑게로 무바라크를 두둔해 주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집트가 중동의 대표적 친미국가로써 아랍권에서 미국의 입장을 대변해 왔다는 이유대문에 미국은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 하지만 눈치작전에도 한계가 있다. 미국은 무바라크의 독선과 무법적 통치형태에 대하여 국제사회의 비판에 대하여 예민한 반응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쩍 한다던가? 무바락 대통령은 자신의 30년 장기집권에 대하여 미국이 간섭 하는데 대하여 몹시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그래서인지 무바라크 대통령은 세계경제포럼 회의에 참가하여 지금까지 들어 볼 수 없었던 놀라운 발언을 했다.

<나는 미국이 핵 정책에 있어서 이중기준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봤다. 미국이 이스라엘의 핵 보유를 묵인하면서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문제 삼는것은 옳치 않다고 생각 한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에 그치지 않고 미국이 듣기 거북한 발언을 계속 서슴 없이했다.

<미국은 앞으로 다자주의와 국제법을 존중하여 일방주의를 끝내는 세계를 만들
어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후 얼마 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집트를 방문한 라이스 국무장관과 만난 장소에서 이집트는 미국의 중동정책에 대하여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한다라고 말 했다.무바라크 대통령의 갈지자 외교는 이스라엘의 샤론 총리를 카이로를 방문하도록 초청한데서 양국 역사상 또 하나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와같은 무바라크 대통령의 발언과 행동의 변화는 이집트 내부의 정치상황의 변동에 따라서 이랬다저랬다 한다는 비판의 소라가 있다. 하지만 2008년 1월26일에 보도한 미디어에 따르면 미국 의회가 가자지구 쪽 국경 통제를 이집트가 제대로 완전히 개선할 때까지 미국이 약속한 1억 달러 군사원조를 보류한다 라고 발표 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즉각 다음과 같이 미국을 비난 했다.


<이집트의 존엄성은 이 세상의 모든 재화를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하다. 원조를 미끼로 하여 이집트의 내정에 간섭을 하는것은 용납할 수 없다> 무바라크 대통령 은 미국을 향하여 전에 볼 수 없었던 완곡한 비난을 했다.

그런데 무바라크 대통령의 30년간 통치에 있어서 줄곧 계엄령 상태와 고질적 반정부 데모로 길거리의 골목마다 경찰과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 있는 모양들이 계속 되고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또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

문제는 무바라크 대통령이 민주화를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들이 원하는 민주화는 도대체 무엇인가?

필자가 찾아낸 대답은 극히 간단하며 극히 실질적 대답이다. 이집트의 민중들 원하는 민주화는 이런 것이다.

첫째, 미국이 이락을 점령하고 지배하는것을 반대 한다. 둘째,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탄압하고 공격하는것 반대한다. 셋째, 미국이 아프칸에서 불의한 전쟁을 일으키는것을 반대 한다. 끝으로 무바라크 대통령이 미국에 무조건 동조하고 추종하는 정책을 반대 하다.

이것이 이집트의 민중들이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민주화의 요구 조건들이다.만일 무바라크 대통령이 미국에 동조하는 정책을 오늘 끝내고 손을 뗀다면 이집트의 민주화는 성취되고 민중들은 곧 무바라크 대통령의 지지세력으로 돌변 할 것이다. 나는 이와같은 이집트 민중들의 요구에 동조하고 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글을 쓰면서 이집트의 민중들이 승리하는 날을 기대하게 된다.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이집트의 이모저모를 살펴 보면 희망적인 부분들도 엿보인다. 그 징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카이로-연합뉴스에 의하면 무바라크 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조만간 추진할것을 방송을 통해 발표했다. 또 동시에 지역 비핵화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스라엘의 핵무기 해체를 요구 했다.그리고 후계자로 부상하고 있는 무바라크 대통령의 아들도 이집트의 핵 발전을 적극 주장하고 있다고 미국의 언론은 보도 했다.

둘째, 부쉬를 향한 <신발투척>으로 아랍의 영웅이 된 문탄다르 알자이디는 이집트 카이로에 본사를 두고 있는 텔레비전 방송사의 기자이다. 이 사건은 이집트는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 아랍인들의 자랑스러은 사건이 되었다. 무바라크 대통령에게도 향후 큰 전향과 변화가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들도 나오고 있다. 신발을 던진 행동은 개를 향한 <ㄱ새끼> 를 뜻한다. 그런데 <ㄱ새끼> 에게 머리 숙이고 따라 다니고 있는 무바라크 대통령은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면 그의 국민들이 바라는 지도자가 될것이다. 신발 투석 사건이 발생하기 바로 몇 일전에 이집트 민중들은 반미 데모를 하면서 <부시 오지마> 라는 구호를 목청 높이 웨쳤다. 그러니 앞으로 부시는 영영 이집트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

세째,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과 이집트와의 관계는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평양 시외에 상원에 있는 시멘트 생산공장에 이집트가 기술과 자본을 투자 하여 기존의 공장을 비약적으로 개선하며 도움을 주고 있다.

최근에 유경호텔 재건사업에 이집트의 투자가 활발하게 진행되여 완공을 향하여 80%의 진전이 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그리고 조선과 이집트의 합작으로 <고려링크> 3세대이동통신봉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집트의 싸워리쓰 총장은 인사말에서 조선과 이집트는 오래 전부터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이집트가 어려울 때 조선이 협조 해준데 대하여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고 말 했다. 이말은 1973년 중동전쟁 때 조선의 비행 조종사들이 참전하여 이집트를 도와 준 옛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싸워리쓰 총장은 김정일 국방의원장에게 선물을 드리었다.얼마전 감영남 위원장 일행은 이집트를 방문하여 무바라크 대통령과 만찬을 가지면서 상원 시멘트에 1억1천5백만 달러의 투자에대하여 감사의 말을 전했다.

미국 제국주의 침략에 시달리고 역사의 절망적 종착점에 이르게 된것을 뼈저리게 느끼게된 이집트의 지도자들은 어두운 곤경에서 출구를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산 복합체가 핵과 미사일을 독점하고 횡포하고 있는 아랍세계의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그래도 절망하지 않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멀고 먼 동방의 샛별을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끝)



[특별기획]유태영 박사의 아프리카 나라들 고찰

[특별기획]유태영 박사의 남미 나라들 고찰

[출처 : 유태영 박사 2009-01-05]

민족통신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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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님의 댓글

공부 작성일

요즘 정세로 많이 궁금했는데 덕분에
이집트에 대하여 자세하게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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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수님의 댓글

꼼수 작성일

그런데 친이스라엘/미국/사다트 쫄따구 짓하던 넘이 물러가는데.. 이넘 퇴임스케쥴과 과정을 미국이 진행하고있는 양상인데. 그러다가 그밥에 그나물 같은넘이 또 차고 들어온다... 이집트는 외부영향 완전 배제하고 강경하게 해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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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님의 댓글

고슴도치 작성일

미국이 또 간섭음모 한창인거 같네요...친미로 무바락을 지원하더니 이젠 또 걷어 차고 이집트 군부를 움직여서 전두환꼴 만들 가능서도 크게 보이네요.ㅉㅉㅉ
이집트 민중들이 정신차려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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