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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을 제대로 아는 것이 통일이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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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주동포
댓글 0건 조회 2,842회 작성일 11-02-10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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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⑦

90년대는 범민련 시대로 3자연대 운동개막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편집위원 공동]이북 당국은 당국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차원에서의
통일정책도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남북 당국간 사이에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시기에는 해외동포들과의
연대활동에 관심을 갖고 실천해 왔다. 이번에는 일곱번째 연재글로 "90년대 범민련시대와 3자연대운동
개막"에 대해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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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 당국은 범민족대회를 환영하는데 남한 당국은 거부해 1990년 8.15평양행사를 지원하는 남녘행사가 수천여명이 모인가운데 연세대 노천강당에서 진행하는 모습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⑦

90년대는 범민련 시대로 3자연대 운동개막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편집위원 공동]이북 당국은 당국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차원에서의 통일정책도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남북 당국간 사이에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시기에는 해외동포들과의 연대활동에 관심을 갖고 실천해 왔다. 이런 경우에도 이북 당국은 항상 민족자주의 원칙, 평화통일의 원칙,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해외동포들과의 통일운동 사업도 적극성을 보여왔다.

남북 해외 3자모임(1990년 7월) 노태우 정부가 막바지에 파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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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8월14일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제1차범민족대회 행사중 전야제 모습
1990년대는 조국통일과 관련한 측면에서 보면 남과 북, 해외 민간단체 동포들이 3자연대를 선언하고 실천한 시대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남과 북, 해외 애국동포들은 3자연대를 간절하게 갈망하였으나 당시의 남녘 노태우 정부는 이러한 애국적인 움직임을 동조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1990년 7월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남,북,해외 동포 대표들이 제1차범민족대회 준비회의를 하기로 하고 남녘동포 대표들(신창균, 박순경, 이해학, 이창복, 이희선, 조성우)과 해외동포 대표들(일본에서 양동민, 신기성, 미주에서 노길남, 이행우, 은호기, 유럽에서 이종현)이 이미 도착하여 북녘 동포들을 기다렸으나 판문점을 가로 지르는 길은 열리지 않았다. 노태우 정부는 처음에는 허용해 놓고 마지막 순간에 말을 바꾸며 이를 거부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3자회의가 성사되지 못하고 남측 대표들과 해외측 대표들이 2자회의로 합의 한 사항들을 해외 측 대표들이 북측에 가서 마무리 합의를 통하여 3자 합의로 범민족대회를 치르기로 했다.

해외대표들 서울서 회의갖고 평양가서 3자합의로 범민족대회개최 결정



해외 측 대표들은 귀가하여 돌아가자 말자 즉시 준비하여 평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미주에서는 이행우와 노길남 2명이 대표로 가기로 했으나 이행우의 수속미비로 노길남 대표 1명만 평양으로 향했다. 평양에는 준비회의를 위해 유럽에서 임민식 이종현, 일본에서 양동민, 신기성, 그리고 재일총련 대표들, 재중대표들, 재소대표들이 1990년 8월6일과 7일 양일 동안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범민족대회 제3차예비접촉>을 갖고 남측에서 합의한 내용들을 가지고 토의한 후 제1차범민족대회를 개최하기로 고려호텔 별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내외에 선포했다. 이에 앞서 이를 위한 제1차 준비회담은 1990년 4월 일본 도꾜에서, 그리고 2개월 후인 1990년 6월2일과 3일 양일 동안 베를린에서 범민족대회 준비를 위한 실무회담, 7월3일에 일본 도꾜에서 범민족대회 촉진대회 등이 개최된 바 있었다.

이렇게 준비회담과 실무회담을 거쳐 평양에서는 1990년 8월14일 김일성 경기장에서 제1차범민족대회 전야제가 열렸고, 이곳에 참석하지 못했던 남녘에서는 연세대학에서 범민족대회를 지지하는 대회가 대규모로 열렸다.

김일성 주석 90년 8월18일 함북 경성서 해외대표들 접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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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8.15 판문각에서 범민족회의를 마친 해내외 대표들이 판문점 행사에 참가하여 단합대회를 진행하는 모습
평양에서 열린 ▲제1차범민족대회에는 미주, 유럽, 일본, 중국, 소련 등 각 지역 동포대표들이 참가하였다. 이 대회가 평양, 판문점에서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나서 지역대표 임원들은 8월18일 함경북도 경성(옛 이름은 주을)의 김일성 주석 전용 별장에서 열리는 축하오찬에 초대되어 김일성 주석과 함께 오찬을 나누는 기회도 가졌다. 이 자리에는 일본 대표들 곽동의, 최만술, 김지영, 신기성, 김정부, 재미동포 대표들 선우학원, 최정열, 양은식, 은호기, 노길남, 유태영, 이행우, 전순태, 유상준 등 9명이, 유럽대표들, 임민식, 정규명, 이종현, 어수갑 등, 카나다 대표로 강원진, 그리고 재중동포들, 재소동포들 등 수명이 참석했다. 남측 대표들로는 황석영 부부가, 북측 대표들로는 전금철, 려연구 등도 함께 자리를 같이해 김일성 주석과 오찬시간을 가졌다.

이 행사를 통해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을 결성하자는 제의가 합의되어 그 후에 해 내외 각 지역에 범민련 조직이 결성되어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 해외 3자연대 조직이 건설되었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은 조국통일을 향한 남, 북 해외 온 겨레의 의지를 모아 지난 90년 11월20일 결성을 선포하였다. 90년 12월16일에는 해외본부(초대 의장 윤이상), 91년 1월25일에는 북측 본부(초대의장 윤기복)가, 91년 1월23일에는 남측본부 준비위원회(초대 위원장 문익환), 95년 2월25일 남측본부가 결성(초대 의장 강희남)되어 조국통일을 향한 남, 북, 해외의 목소리가 온전히 하나로 담기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범민족대회와 범민련 조직은 1991년 ▲제2차범민족대회를 서울서 개최하기 위해 그 준비회의를 독일 베를린에서 1991년 6월29일~30일 양일 동안 <의장단 회의>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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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 동포들이 1990년 8.15 범민족대회 성공을 위해 판문점서 연대지원의 뜻을 표시하는 모습
참가자들의 명단은 해외측 본부에서 임민식, 황석영, 중국본부에서 이철재, 최영희, 일본본부에서 곽동의, 양동민, 강종현, 재일조선인본부에서 황병태, 김정수, 박문국, 유럽본부에서 이민자, 최기환, 최영숙, 카나다 본부에서 한장환, 한옥선, 호주에서 김승일, 미주본부에서 양은식, 배강웅, 이행우, 한호석, 북측본부에서 전금철, 최철웅, 남측본부에서는 강희남, 배다지, 문정현, 한철수 등(참석치 못함)으로 기록되었고, 그리고 참관인들은 전대협 대표들 성용성, 박성희, 유럽본부 성원들 이희세, 이준식, 김대천, 한계일, 신옥자, 이영빈, 김순환, 조명훈, 이영준, 이종현, 송수율, 정정희, 하양희, 심재화, 김진향, 장일중, 클라우스 등이었다. (제2차 범민족대회 자료집, 33쪽, 범민련 해외본부 사무국, 1991년 10월31일 발행)

1992년 ▲제3차 8.15범민족대회도 남한 당국의 반통일 정책으로 평양과 서울서 분산 개최되었다. 미주동포들을 포함한 해외동포들은 모두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대회에 참석했다.

1993년 ▲제4차 범민족대회도 서울서는 한양대 교정에서 열렸고, 해외동포들은 평양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했다.

김영삼 정권도 제5차범민족대회 체루탄으로 가로막아


1994년 ▲제5차범민족대회도 서울에서는 김영삼 정권의 악질적인 탄압책동으로 2만여 명이 참가한 통일축제 행사를 페퍼포그와 체루탄으로 가로 막았으나 끈질긴 투쟁으로 폐막식을 가졌다. 이 행사기간 김영삼 정권은 2천4백여 명의 참석자들을 연행했다.1995년 제6차범민족대회는 남측본부(전창일, 이종린, 신정길)와 남측준비위(박순경, 함세웅, 이수갑, 황인성)간에 이견들을 교환하는 과정을 통하여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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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6월2~3일 베를린서 범민족대회 남북 해외 실무위 대표들
1996년 ▲제7차범민족대회는 서울, 평양, 심양에서 3자 측이 각각 분산개최하기로 합의하고, 남측은 연세대 입구에서 개막식하고 진행,

1997년 ▲제8차범민족대회도 분산개최되었다. 남측은 남측본부 신창균과 민족회의 이창복간에 회동이 있었으나 합의가 이뤄지지 못한 채 광주 조선대에서 대회가 진행되었고,

1998년 ▲제9차범민족대회는 범민련과 한총련을 중심으로 1천7백여 명이 서울대에 집결하여 범청학련 제8차통일대축전과 함께 범민족대회 행사가 진행되었고,

제10차범민족대회 평양행사에
남측서 나창순, 서원철, 이성우, 강형구, 박기수, 황혜로 대표 참가


1999년 ▲제10차범민족대회도 서울과 평양에서 분산개최되었지만 평양에서 열리는 대회에 남측 대표들(나창순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서원철 청년대표, 이성우 전국연합 부산연합의장, 강형구 전국연합 부대변인, 박기수 전북노동자통일대녹두 집행위원장, 범청학련 황혜로 대표 등 6명)이 남한정부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참석했다. 평양대회는 이들의 참석으로 뜨거운 분위기 속에 범민족대회 행사가 진행되었다. 해외동포들도 각 지역에서 대거 참석하여 이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민족통신》특파원이 1999년 5월 인터네트 일간언론으로 창간하여 평양행사를 직접 취재하여 현지 보도한 것은 이 통일대축전 행사(제10차 범민족대회)가 처음이었다. 이 보도를 통해 《민족통신》이 창간된 지 얼마 안된 기간에 남녘과 해외동포 사회에 빠른 속도로 알려지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한편 1990년대는 북녘동포들로서는 가장 가슴아픈 일들이 많이 일어난 시대였다. 이북 당국자들과 동포들은 1994년 7월8일 이북의 최고지도자인 김일성 주석이 서거하자 슬픔에 잠겼고, 그 아픔이 채 사라지기도 전인 그 이듬해인 1995년 여름에는 한 세기에 한번 정도 오는 대홍수(큰 물난리)를 만났다. 북녘 땅에 농사 지을 수 있는 경작지의 75% 가량이 파괴되었다. 이북동포들은 이 같이 엄청난 자연피해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시대를 겪어야 했다. 게다가 이른바 ‘동서냉전 시대’는 종말을 고했으나 소련과 그 위성국들이 제대로 진보사회를 건설하지 못하고 붕괴하는 바람에 이북 당국은 다른 진보나라들과의 교역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한층 더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이북 당국은 또 설상가상으로 미국 제국주의 세력과 맞서 대결해야만 했다. 미제는 동서냉전이 끝난 시기를 악용하여 1극체제에서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본격적으로 대북압살고립 정책을 전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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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8월6일 제1차범민족대회 준비위원들 평양 고려호텔서 기자회견 모습
이러한 시기에도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는 남북화해와 협력을 외면했고, 이른바 한, 미,일 3각동맹에 편승하여 동족을 적으로 몰면서 외세들과 함께 이북 당국을 괴롭혀 왔다. 노태우 정부는 동서냉전체제가 해체되는 시기에 이른바 공산국가들과 외교수교를 맺는 등 이른바 ‘북방정책’을 추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1990년 남북한 고위급회담을 갖고 그 이듬해인 1991년 9월에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2월에 남북한간의 기본합의서를 채택하였으나 이렇게 해 놓고 이남 당국이 ‘한미군사합동훈련’을 벌인 문제와 소위 ‘북핵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이 합의서는 체결 8개월 만에 사실상 휴지조각으로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남북관계 합의사항들은 언제나 남녘 당국에 의해 중단되는 사태가 빚어져 왔다.

특히 이남 당국이 미국에 의해 자유롭지 못한 구조적 모순관계, 즉 군사주권까지 미국에 의해 장악된 상황 때문에 남북관계가 원만히 이뤄졌어도 미국에 의해 제동이 걸리면 이남 정부 당국은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하는 제한성을 갖고 있다. 이 문제가 가장 장애물이 되어 왔다는 것은 만인이 주지해 온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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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4월16일 해외동포 대표들이 범민족대회를 추진하기 위해 일본도꾜에 모여 준비회의 마치고 기자회견
이에 비해 이북 정부는 남북관계 정책에서 그 어떤 장애도 받지 않았다. 이북 당국이 언제나 주장해 왔던 것처럼 ‘민족자주의 원칙’, ‘평화통일의 원칙’, ‘민족대단결의 원칙’만 보장된다면 남북관계에서 그 어떤 장애물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 이북당국의 일관된 자세였다. 미국이나 서방국가들이 남한 당국이 미국에 의해 영향 받는 것을 관찰하면서 북조선 당국도 중국이나 러시아의 영향을 받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데 이북 정부는 전혀 외풍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북이 생명처럼 여겨온 것이 바로 주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 당국자들이 중국이나 러시아를 향해 북조선에 영향력을 발휘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이북 당국의 실체를 너무나 모른다는 무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북 정부 당국의 통일정책은 언제나 원칙들에 의거하여 반영되어 왔다. 그런고로 이북정부의 정책은 곧 조선 로동당의 정책이며 동시에 최고 지도자의 정책이기도 하다. 이북의 누구와 대화를 나누어도 “수령, 당, 인민대중은 일심동체”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원리는 곧 이북 당국의 지도이념인 ‘주체사상’에서 비롯된다. (다음에 계속…)

[VIDEO CLIP]

SONG: KOREA IS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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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민족통신 편집위원 공동 201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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