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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을 제대로 아는 것이 통일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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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주동포
댓글 0건 조회 5,628회 작성일 11-02-10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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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①

"사실상 남북 총선을 통해 수립된 정부"



북부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어떻게 탄생되었는가? 남녘동포들과 자본주의에 거주하는 해외동포들은
이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남녘의 반공바람 때문에 북을 이해하는데
제한성이 많았다. 게다가 이북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하는 천하의 악법인 ≪국가보안법≫때문에 우리 해 내외
동포들은 그 동안 사실상 '알권리'를 상실해 왔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는 9월9일 북조선 정부수립일
앞두고 이북정부의 수립과정과 그 역사적 배경을 통해 이북의 정체성을 알아보는 기획연재를 싣기로 했다.
그 첫번째 글을 여기에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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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은 1948년 9월9일 남한이 통일정부를 거부하고 단독정부를 강행하자 불가피하게 남북 총선거를 실시(자료는 기획연재에서 취급)한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①

"사실상 남북 총선을 통해 수립된 정부"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 이북사회와 이북 문화를 제대로 알려면 이북의 지도자와 정치운영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면 그 의문이 풀린다. 일반적으로 남녘 동포들이나 자본주의 나라에서 살아 온 해외 동포들은 이북을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왜냐하면 남녘 언론들이나 서방 언론들이 이북의 실상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이북을 폄하하고 왜곡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북의 실상을 말하는 것도 죄가 되는 어처구니 없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할말도 제대로 못하고, 가고 싶어도 못가고, 연락하고 싶어도 못해 왔던 것이 우리 남녘사회의 현주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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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6월30일 가륜회의에서 <조선혁명의 진로>를 밝힌 김일성 주석
오는 9월9일은 이북,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된 날이다. 북조선 정부가 수립된 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북이 남녘의 정부수립된 날보다 늦어졌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승만 정부는 단독선거로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미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기관으로 전락하여 8.15해방정국을 맞아 국내 정치에 관여하려던 세력들을 모두 제거 또는 가로 막았다. 그래서 백범 김구도, 몽양 여운형도 반민족 세력에게 죽어야만 했다.

북조선은 사실상 남과 북 총선을 통하여 수립된 정부라고 말할 수 있다.(후에 자세해 설명) 이승만 정부는 북조선 정부를 가리켜 불법정부, 괴뢰정부라고 선전해 왔지만 실제적인 괴뢰정부와 불법정부는 이승만 정부 자체라고 말해야 그것이 역사를 왜곡하지 않고 정직하게 지적하는 말이 된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 미국이 정당한 이유없이 이라크를 대량살상무기(WMD)가 있다고 허위보고를 내세워 하루 아침에 침략하고서 자기 하수인을 내세워 남의 나라 정치권력을 장악한 다음에 그들로 하여금 사담 후세인 이라크의 대통령을 포함하여 그의 주요 각료들을 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시킨 사건을 기억하면 이른바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 미군정이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우리 남한을 강점하고 자기 세력을 앞세워 지금까지 틀어쥐고 있는지 생각하면 그 과정을 다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8.15해방이후 일제시대에 반일투쟁을 벌여 왔던 민족주의자들을 어떻게 대우하였고, 그리고 소위 친일분자들을 어떻게 처리하였는지 그 과정의 기초지식이라도 갖는 사람이라면 한국정부가 어떻게 하여 탄생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이승만 대통령이 군통수권을 미군에 넘겨준 과정과 그 이후 지금까지의 남한 군사주권을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를 곰곰하게 반추하여 보면 미군과 이승만 정부와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입은 삐둘어도 말은 바로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이승만 정부는 미군정의 하수인 정권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괴뢰정부라고 불리워야 할 대상은 북조선 정부가 아니라 한국정부가 된다는 말이다. 이승만 정권이 일제 때 임시정부에 관여했던 지도자들을 어떻게 했는가에 대한 기초지식만 있어도 이승만 정권의 성격이 어떤 정치권력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1]북조선 정부수립의 역사적 배경


북조선의 역사는 요약하면 이 사회를 이끌어 온 지도자들의 민족철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진행되어 왔다. 그 철학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민족대단결 사상≫이다. 항일투쟁 시기 전반에 걸쳐 강조되어 왔던 민족사상이다. 이 시기에 계기마다 강조되었던 것은 ≪반일민족통일전선≫ 노선이었다.

일제 40년을 돌이켜 보면 역사의 구석 구석에는 파벌과 분파로 복잡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3인 1당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동족끼리 치고 받고 싸우는 통에 항일투쟁 역량이 제대로 묶어 질 수 없었다. 임시정부의 내부도 4분5열되었다. 임정은 1920년대 중엽에는 참의부도 있었지만 여기에 화요파, 서울파, 북풍파, 엠엘파, 서상파 등으로 나뉘어 파벌싸움으로 골치를 섞혔다. 장준하 선생이 쓴 회고록 ‘돌베게’를 보아도 그가 일제 때에 임정에 들려서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파벌싸움으로 날을 세우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준하 선생은 그것이 하도 딱하여 종파, 파벌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목적으로 “등불”이라는 잡지를 만든 일화에서도 임정 내부의 갈등과 파벌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가늠하게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임정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조직으로는 일제를 타승하기 도저히 힘들다는 평가들이 민족주의 계열 내부를 비롯하여 사회주의 지향 청년들 사이에 심각하게 거론되었다. 바로 이런 정세에서 10대의 어린 김일성 청년이 이끄는 진보계 젊은이들의 움직임이 내외의 관심을 모았다. 특히 1926년 10월17일 이른바 ㅌ ㄷ(타도제국주의 동맹)조직이 결성되면서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이 청년들의 동향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이들 청년들의 움직임에 대해 위협을 느끼면서 적대시하는 현상도 일어났다.

1929년 가을에 일어한 소위, “왕청문 참사” 사건은 이념갈등과 종파투쟁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국민부(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통합체) 우두머리들이 소집한 남만총청대회에 공산주의 청년들 6명이 이들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끌려가 공산주의 선전을 한다는 이유로 이들 청년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국민부 한 우두머리는 공산주의자들과는 손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만큼 당시에도 이념갈등이 심화되었던 시기였다.

그 이후 진보계 청년들은 1930년 6월30일부터 7월2일까지 카륜에서 회의를 갖고 역사적인≪조선혁명의 진로≫를 발표한다. 이 내용도 반일민족통일전선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 노선은 우리 민족사에서 ≪민족대단결 사상≫의 효시라고 말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이 당시 발표한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원래 혁명은 인민대중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인 것 만큼 광범한 인민대중이 참가하지 않고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더우기 우리가 조선사람 자체의 힘으로 일제를 타승하고 전민족을 해방하려고 하는 것 만큼 일제를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하나로 굳게 결속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노동자, 농민은 물론 종교인, 양심적인 민족자본가에 이르기까지 반일적인 사상을 가진 모든 세력을 반일의 기치하에 굳게 결속하여야 합니다.≫(김일성 저작집, 제1권 9~10쪽)

김일성 주석은 이듬해인 1931년 12월 명월구에서 열린 당 및 공청간부회의(겨울 명월구회의)에서 구체화했다. 그는 여기에서도 빈부와 귀천, 당파와 종교를 가리지 말고 일제를 반대하는 모든 애국역량을 무장투쟁에 총동원하자고 호소하면서 “총있는 사람은 총을 내고,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며,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여 전민족이 반일무장투쟁에 총궐기하도록 하여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분은 이듬해인 1932년 4월25일 “별동대”를 내오고 이것을 확대재편성하여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하고 전민항전을 선포했다. 이 해 6월에는 통화지방에 있던 독립군 부대의 량세봉 부대와의 합작실현에 성공하였으나 워낙 반공의식에 사로잡혀 있는데다가 첩자들의 방해책동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량세봉은 일제의 간교한 음모에 의해 임종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유언은 항일유격대와 합작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로부터 4년후에 3백여명의 독립군 부대원들이 최윤구 사령의 인솔로 인민유격대에 편입하였다. 이 같은 사건은 류하에서도 일어났다. 그 당시 김일성 주석의 동지로 활동했던 최창걸이 국민부에 의해 살해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주석은 동지를 잃은 분노를 삭이고 ≪반일민족통일전선≫정신을 고수했고, 그 결과 성공적인 합작이 이뤄졌다.

한편 김일성 항일유격대는 1932년 좌경분자들의 극좌적인 반 ‘민생단’ 투쟁으로 심각한 국면을 맞게 되었다. ‘민생단’이란 1932년 일제가 간도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반일의식을 마비시키며 조중 인민들 사이에 쐐기를 박기 위한 목적으로 조작한 간첩 모략단체였는데 이것을 반대한다고 나선 좌경분자들이 반민생단 극좌운동을 벌이면서 멀쩡한 사람들을 첩자라고 몰아 분열현상을 일으켰던 사건이 당시로서는 아주 심각한 현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일성 주석은 20대 초반에 들어온 시기인 1936년 2월27일부터 3월3일까지 남호두 소자지하에서 군정간부회의를 열고 조선혁명에서 주체확립을 위한 사업이 절실하다고 강조하면서 반일민족해방 투쟁의 새로운 단계에로의 발전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이 해 5월1일부터 보름동안 무송현 동강의 수림속에서 각계각층이 참석한 대표들을 묶어 전국적인 규모의 반일민족통일전선을 조직했다. 그것이 바로 역사적인 ≪조국광복회≫조직이다.(다음에 계속…)

***건국 55주년기념 행진--2003년 9월9일






***[기획]입은 삐둘어도 말은 바로하자⑩---<남북 각 분야별 현주소들>...여기를 짤각해 열람!
***[특집연재]일본과 미국에 희생당한 코리아⑦...여기를 짤각해 열람!

[출처 : 민족통신 편집진 공동 201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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