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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동정세중 이집트 혁명에 관하여--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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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급좌파
댓글 0건 조회 2,206회 작성일 11-02-22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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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부터도 튀니지와 이집트가 지구상 어디에 존재하는가를 지도를 뒤적여야 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는 관심을 가질 특별한 이유도 없던 중동과 북아프리카 여러나라가 정치적 격변에 휩싸이고 있고 어쩌면 21세기 세계사의 가장 중요한 장의 하나로 기록될지도 모르는 '민주화 운동'의 소용돌이로 들어섰습니다. 특히 이집트의 경우 독재자이자 제국주의의 충실한 대변자였던 무바라크의 퇴진이후에도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그 혁명의 기운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무바라크의 퇴진 이후 이집트에서 들불처럼 번지고있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관심이 갑니다. 부디 이집트가 한 20년후쯤 2011년을 단지 한 독재자를 물러나게 한 해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혁명의 시작의 해로 기억되길 기원합니다. 마치 우리가 87년을 '6월항쟁'으로만 기억하는 편리한(?) 역사인식으로 7,8,9 노동자 대투쟁을 역사속 저편으로 보내버린 우를 이집트 민중들이 답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t.gif



이집트의 민주주의 혁명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정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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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민중들은 지난 1월 25일부터 18일 동안 전 이집트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서 구호를 외치고, 기도하고, 전경들과 싸우며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모습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결국 이집트 민중들의 요구가 관철되었다. 2월 11일 금요일, 무바라크 일가는 카이로를 떠나 홍해 해안에 위치한 별장으로 도망쳤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시위에 대한 회유책으로 불과 12일 전 임명된 오마르 술래이만 부통령은 무바라크 대통령이 모든 권한을 군사최고위원회에 이양했다고 발표했다. 군부는 2일만에 발표된 3번의 성명을 통해 ‘공정한 자유선거’를 실시하고 국민의 ‘정당한 요구들을 지지할 것’을 약속했다.
주류 언론은 이집트 현지에선 1.25 혁명으로 불리는 이 운동을 우발적인 봉기로 묘사하며, 이를 1월 14일에 벤 알리 대통령 체제를 전복한 튀니지 시민항쟁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집트인들의 봉기가 튀니지의 투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1.25 혁명의 근원을 따지고 보면 이집트의 정치제도와 사회경제적 구조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 1.25 혁명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이집트의 민주화 활동가, 청년과 노동자들이 지난 몇 년간의 활동과 조직화를 통해 맺은 결실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이것이 1.25 혁명의 의의를 파악하는 데에 중요한 배경이다. 1.25 혁명의 이집트 내적 원인을 검토하고, 이러한 원인 분석을 바탕으로 혁명을 통해 가능하게 된 구조적인 변화의 전망을 살펴보자.

1.25 혁명의 기원: 30년 동안 이어진 독재와 신자유주의

이집트에서 계급 양극화, 독재정권과 미국과의 동맹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집트의 현재 정치, 사회적 구성의 기원은 가말 압델 나세르 초대 대통령의 죽음(1970) 이후 혼란상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세르의 민족주의적 외교정책과 인민주의적 독재통치가 해체되었고, 1970년대 나세르의 후임자인 무함마드 안와르 사다드 대통령은 나세르의 국가주도 산업화 정책으로 등장한 신도시자본가계급과 동맹을 맺고 이집트를 해외자본에 개방했다. 또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국과 동맹을 맺어, 미국의 중동 패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수십억 달러의 원조를 받았다. 미국, IMF, 세계은행 등이 전파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공기업의 사유화를 시작하고 보건의료, 교육, 공공 부문 임금, 사회복지에 대한 공공 지출을 삭감했다.
1981년 사다드 대통령의 암살 이후 정권을 장악한 무바라크 대통령은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지속했다. 무바라크 치하 30년 동안 시행된 경제개혁은 나세르가 도입한 식량 보조금 삭감, 토지개혁 역전, 농촌지역 부동산시장 자유화, 공공기업 사유화, 국제금융시장과 해외투자에 대한 추가 개방, 세제혜택과 미약한 노동기준이 적용된 경제특구 건설 등을 그 내용으로 한다. 토지개혁의 역전으로 인해 농촌 인구가 도시로 떠났고, 도시는 곧 도시빈민과 실업자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공공기업의 사유화와 함께 정리해고, 실질 임금 축소, 노동조건 악화, 노동유연화 등이 도입되었다. 2002년의 도입된 경제 특구법은 이러한 노동조건 악화를 심화시켰다.
무바라크 정권은 소수 자본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이들에게 공공기업 매각이나 정부조달 관련 특혜를 제공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무바라크의 아들인 가말 무바라크와 아흐메드 나지프 전 총리(2004년~2011년 1월)의 영향 아래 이 밀월관계는 보다 공고화되었다. 이들 재계 엘리트들이야 말로 이집트의 놀라운 경제성장(2005년~2008년 사이 평균 GDP 성장률 7%)의 핵심 수혜자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높은 경제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빈곤과 계급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이집트 국민의 약 40%는 하루 2달러 이하의 생계비로 생활한다. 100여 개 가문이 이집트 부의 90%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실업률은 10%에 달하고, 대졸 청년 실업률은 30%이다. 취업인구 중 60%는 비공식부문에 종사한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민주적 권리에 대한 광범위한 탄압을 통해 소수 엘리트의 부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왔다. 1981년 사다드의 암살로 인해 실시된 비상계엄을 테러위험에 대한 대응으로 정당화하며 30여 년 동안 유지했다. 비상계엄법률은 경찰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하고, 무기한 구금을 허용하며, 헌법에 명시된 권리를 유예한다. 또한 검열을 합법화하고, 집회시위 자유를 제한하며, 승인 받지 않은 정치조직의 형성을 금지한다. 2010년 11월에 시행된 지난 총선의 부패상은 잘 알려져 있다. 2005년 총선에서 크게 선전한 이집트의 최대 야당인 무슬림 형제단은 광범한 탄압을 받았다. 이들은 선거운동을 제한당하고, 당원과 지지자 천여 명이 구속되어 선거권을 박탈했으며, 유권자들의 투표권은 원천 봉쇄되었다.
이렇게 구조화된 경제적 양극화와 광범위한 정치탄압은 이집트 국민으로부터 더욱 결렬한 분노를 불러왔고 결국 1.25 혁명을 촉발했다. 여러 계급의 광범위한 대중들은 이집트 정부가 민중이 아닌 다른 이들, 즉 신자유주의 엘리트, 미국, 이스라엘에 봉사하고 있을 따름임을 깨닫게 되었다. 정부와 이 정부가 대변하는 체제에 대해 다양한 사회경제적, 정치적인 불만을 품은 이집트 시민들은 무바라크 정권을 하야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혁명의 주체: 청년과 자주적 노동자 운동

주류 언론은 고등교육을 받은 이집트 청년들이 시위의 핵심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또 페이스북, 트위터 등 온라인 매체가 집회 동원에서 보여준 역할에도 주목한다. 이렇게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에 대해 강조함에 따라 청년층의 집회 참여는 어떠한 기획도 없이 조직되지 않은 자발적인 행동으로 묘사된다. 물론 타흐리르 광장에서 모인 사람들 중 과거에 집회 참여 경력이 없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활동을 해왔고, 정치적 세력으로 조직화해 왔던 집단도 분명 있었다. 예컨대 1월 25일 첫 집회를 공동주최하고, 이후 18일 동안 주도적 역할을 한 4.6 청년운동(April 6 Youth Movement)이라는 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2008년 4월 나일텔타 주변에 위치한 섬유업 중심지에서 일어난 노동자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또 다른 단체로는 경찰들이 몰수한 마약을 서로 나누어 갖는 사진을 개인 블로그에 올린 후 경찰한테 살해당한 소기업인의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조직도 있다. 이 단체는 결성 직후 광폭한 경찰의 폭력과 부패에 반대하는 전면적인 투쟁으로 확산됐다. 이와 같은 단체들이 유동적인 네트워크의 형태를 가지고, 주로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에게 리더가 없는 것도 아니며, 이들이 지닌 힘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집트 청년들이 온라인 매체를 폭압적 상황과 사이버시대에 적합한 조직화 수단 및 형태로 활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주류 언론에서 많은 관심을 못 받았지만 또 다른 중요한 운동 주체가 있다. 바로 이집트의 노동자들이다. 2월 9~11일에 다양한 업종(섬유, 군용품, 우편, 운송, 병원, 행정 등)에 종사하는 공공, 민간부문 노동자들 수만 명이 파업에 나섰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모인 시민들은 이러한 노동자의 행동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정권을 압박하는 데 파업이 갖는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했다. 국제노동진영은 노동자들의 행동이 형세를 일변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집트 노동자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들은 친정부 성향의 이집트노동조합총연맹(ETUF)의 노동자들이 아니다. 이집트노총은 무바라크정권을 끝까지 지지했다. 법적으로 이집트의 모든 노조는 이집트노총에 가입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2월 9~11일 파업에 들어간 노동자들은 이집트 노총이라는 공식체계를 벗어나 자신들을 대표하고 지도할 파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러한 독자적인 조직화는 선례가 없는 것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이집트 노동자들은 무바라트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서 투쟁해 왔다. 2004년에서 2009년 사이에 17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1,900건이 넘는 파업 등 쟁의 행위에 참여하였고, 이때에도 2월 9~11일 파업과 마찬가지로 자발적인 파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2004년부터 이어진 파업은 4.6 청년운동의 형성으로 이어진 2008년 4월 섬유노동자들의 파업에서 절정에 달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략 반대 대중투쟁과 더불어 이집트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집트사회에 저항의 문화를 심었”고 “시민권과 권리에 대한 인식을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몇 년간에 걸친 노동자들의 행동은 민주노조운동으로 싹트기 시작하였다. 2007년 12월 5만 5천 명의 지방 세무원 파업의 결과, 경제적 요구의 쟁취뿐 아니라 부동산세무원 독립 노조라는 이집트노총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노조가 사상 처음으로 결성되었다. 그리고 1.25혁명이 한창 무르익던 1월 30일 독립 노조들과 노동자위원회가 이집트독자노조연맹(EFTU)의 결성을 발표했다.
투쟁에 참여한 노동자 중에는 자신의 요구를 경제적인 것으로 한정 지은 이들도 있었지만, 노동자 대다수는 무바라크의 사임을 요구했다. 일부는 근본적인 정치, 사회, 경제적 변화를 요구하였다. 예건대 철강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1)무바라크 대통령과 정권과 관계된 모든 인사들의 즉각적인 사임, 2)정권 인사 등 모든 부정부패 인사의 재산 몰수, 3)이집트노총 해산과 민주노조 결성, 4)매각, 폐쇄, 사유화된 공기업의 몰수, 노동자 민중의 통제를 통한 공공부문 국유화, 5)생산, 가격, 분배와 임금을 감시할 수 있는 직장위원회 구성, 6)모든 사회집단들이 참여하는 제헌의회 소집. 새롭게 결정된 EFTU의 요구는 월 최저임금 1,200이집트 파운드(1984년에 규정된 현 최저임금의 약 4배), 최저임금 10배로 최고임금 제한, 사회보장, 보건, 주거, 교육, 연금, 복지, 결사의 자유 등에 대한 권리보장 등이 있다. 이러한 요구는 이집트 민주화운동에 중요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며, 무바라크 정권을 전복하는 데 있어 노동자와 민주노조의 역할이 중요했던 만큼 미래에도 이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함을 보여 준다.

전망: 군부의 반혁명을 저지하고,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 권력을 이양받은 군부는 무바라크 정권 및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고, 이를 통해 많은 특혜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집회 참가자 대부분은 무바라크 퇴진에 군부의 개입을 강력히 요청했고 군부의 역할을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집회가 벌어지는 동안 군이 개입을 자제하였기 때문에 집회참가자들은 군을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이집트 군대는 나세르 시대부터 이스라엘과 서구열강에 맞서온 역사가 있는 만큼, 이미 상당한 사회적 존중을 받았다는 이유도 있다. 더욱이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는 사병과 하급 장교들의 처지가 이집트 청년들이 겪는 현실과 유사한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군사 엘리트는 구체제 아래서 많은 특혜를 받았다. 군은 지난 30년 동안 미국으로부터 받은 400억 달러에 달하는 원조의 수혜자였다. 이 돈은 국가안보와 방위 산업뿐 아니라 시멘트, 건설, 석유, 올리브유, 식수 등 다양한 산업에 투자되었다. 넓은 사막과 해안 토지를 개발하여 내․외국인 소비자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쇼핑몰, 관문도시, 해변 휴양지 등으로 개발했다. 분명히, 군부는 항쟁의 조속한 종결과 현상 유지를 원하였다. 군이 여전히 야당 정치인에게 권력을 이양하지 않은 핵심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집회 참가자들 대다수는 군부나 향후 집권할 정권이 바람직한 행보를 취하도록 자신들이 압박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다. 집회에 참여한 한 활동가는 기자로부터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상관없습니다. 타흐리르 광장에 가는 길은 잘 알고 있으니까요”라고 답했다.
현재 군부는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정당성이 의심되던 국회를 해체시키고 6개월 이내에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한 상태다. 또한 헌법 개정안을 직접 작성하겠다는 입장을 바꿔서 현재 이를 담당할 전문가 위원회를 소집했다. 무슬림 형제단 단원 등 야당 세력들이 위원회에 참여하고, 집회 지도자들이 이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는 점 역시 특기할만하다. 반면에 노조의 회합을 금지함으로써 파업을 사실상 불허했고 비상계엄법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1.25 혁명에 참여한 많은 시민들은 군부가 선거 일정을 명확히 제시한 데 대해 만족하였다. 그러나 파업은 계속되고 있고 시위참여자 중 일부는 자신들의 요구가 전부 관철되기 전까진 타흐리르 광장에서 물러나지 않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집회 외에 군부의 권력을 억제할 다른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시급한 과제는 군부가 약속을 이행토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군부가 약속을 지켜, 민주적으로 치러진 선거에서 선출된 정부에게 권력을 이양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근본적인 변화를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집트의 심각한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선 기업과 군사 엘리트의 권력을 해체하고 이집트 경제에 구조화된 신자유주의 정책을 역전하는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난점에 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이집트 1.25혁명과 유사한 한국의 1987년 6월 항쟁은 군사독재에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계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는 한국 민중들이 투쟁을 통해 얻어낸 중요한 성과이다.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직선제 도입을 독재 종식의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 여기며 이를 넘어서는 요구를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군부가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를 수용하자, 운동세력은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기 보다는 어느 야당 후보를 지지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을 거듭하게 되었다. 결국 야당은 단결에 실패하였고, 이듬해 치러진 직선제 대선은 군 장성 출신의 노태우에게 대통령으로서의 정당성만 부여해 주는 꼴이 되었다. 이 과정과 뒤이은 3당 합당 과정에서 군부는 야당과 타협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상당부분 유지할 수 있었다. 군부의 권력을 유지시켰던 사회경제적 체계는 거의 변함없이 유지되었고, 김대중 정권을 비롯한 이후 집권세력은 노동자 민중의 생존과 권리를 대가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6월 항쟁은 한국 노동자 운동에 있어 중요한 공간을 열었으며, 이는 7,8,9 노동자 대투쟁으로 대변된다. 1987년 7, 8월 노동자들은 임금인상뿐 아니라, 민주노조의 건설을 위해 싸웠다.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은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의 연속선상에 위치하는 것이며, 이집트에서도 응당 그래야만 한다. 다만 한 가지 불행한 점은 당시 한국의 노동자 운동이 견결한 정치적 역량으로 결집할 만큼 단결되어 있지도, 그럴만한 경험도 없었다는 점이다. 또한 1997년과 1998년 IMF 위기에 대해서도 대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점도 아쉬운 측면이다. 만약 이집트의 민주화 운동이 한국의 경험으로부터 무언가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를 이해하고, 혁명에 대한 장기적 관점을 견지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를 정확히 분석하며, 내부의 차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단결을 강화해 나가는 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

이집트 민중들에게 현 시점은 많은 난관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희망과 결의를 새로이 다질 시간이다. 무바라크의 퇴진까지 이어진 투쟁의 물결 속에서 무언가 다른 가능성이 포착되었다.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대는 자신들이 지닌 권력을 실감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학습할 수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 진료소를 세우고, 무대장치를 설치하고, 질서유지단과 집회장 청소를 위한 봉사단을 조직하였다. 무슬림들이 기도를 할 때는 기독교인이 이들을 경호해 주었고, 기독교인의 기도시간에는 무슬림이 그 경비를 맡았다. 수많은 여성들이 거리에 나와 지도적 역할을 행하였다. 노동자들은 파업 위원회를 꾸리고 독립 노조를 결성하면서 민주주의를 실천하였다. 그 무엇보다 이집트 민중들이 단지 정권 교체가 아닌 부패한 엘리트의 제거와 경제적 평등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부의 재분배와 실질적 민주주의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히고, 이 모두를 달성할 수 있는 장기적 안목의 꾸준한 투쟁(혁명적인 투쟁)을 만들어 나가는 것. 이 모두가 이집트 민중의 손에 달려 있다.
국제 노동계와 민중운동의 역할도 중요하다. 지난 3주간 세계 각국의 노조와 좌파 단체들은 이집트 민중을 지원하였다. 연대 집회를 조직하고, 무바라크의 검열을 피해 정보를 공유하며, 자국정부를 통해 무라바크를 압박하였다. 무바라크가 사퇴하였다고 이러한 노력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이집트 민중들이 투쟁하는 한, 이들과의 계속 교류하고 연대하여 국제적 투쟁을 조직해 나가야 한다. 이제 막 시작된 독립노조운동은 실질적인 정치적 실체로 발전되어 나가야 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수호하는 강력한 힘을 갖추어야 한다. 타국의 노조와 교류나 국제 노총의 지원을 통해 이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 세계 좌파들은 이집트 민중들이 보낸 메시지를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중동을 넘어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메시지다. “혁명이 쉽지는 않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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