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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설을 깨고 편견을 깨면서 제대로 세상을 보는 시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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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그네
댓글 0건 조회 2,085회 작성일 11-03-06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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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본 프로야구 타자들은 과연 메이저리그 타자들보다 더 선구안이 좋을까?  

 

 흔히 일본야구를 현미경야구 정교하고 세밀한 플레이를 하는 야구라고 한다.

그래서 메이저리그 타자들에 비해 일본타자들은 훨씬 더 선구안이 좋다고들

하고 맞추는 능력도 우수하다고 말들은 하지만, 정말 그럴까?  

 진실은 그렇다. 일본야구팀은 12개고 그나마 양대리그로 나뉘어 일년내내 몇차례의

인터리그 경기를 제외하면 시즌내내 6개팀이 경기를 벌이고 있다. 그 얘긴 일년내내

익숙한 팀과 계속 경기를 벌인다는 소리다. 같은 팀과 경기를 자주 하다보니 서로간에

상대의 특성이나 습관을 아는 것은 당연하고 그러다보니 웬만한 것에는 잘 넘어가지 않는 것

뿐이지 일본 타자들의 선구안이 더 좋거나 맞추는 능력이 빅리그보다 나은게 아니다.

 

 반면 메이저리그는 아메리칸 리그 14개 내셔널리그 16개팀이 각각 3개의 지구로 나뉘어 경기를

치른다. 경기수가 일본보다 많다고는 하나, 14-16개 팀 선수들과 경기를 치르게 되면 서로를

경험하는 기회는 일본야구와는 비교도 할수가 없게 된다. 이러다 보니 일년내내 같은 리그에

있지만 서로 맞대결조차 못해보는 투수와 타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니 상대에 대해서

잘 모를수밖에 없게된다.

또다른 예로 한국야구나 일본야구는 선수들에겐 홈경기장에 대한 어드밴티지가 거의 없는대신

메이저리그에선 절대적이다. 왜냐하면 81경기는 홈에서 나머지 81경기는 원정나가서 치르는데

당연히 홈구장의 상태나 환경에 대해서 잘 알수밖에 없고 반면 원정나가면 주전선수라도 각 구장

당 뛸 수 있는 게임은 고작해야 5-6경기에 부족하니 원정구장에 대해선 익숙치 않을 밖에.

그래서 한국 프로야구팀들의 성적은 원정경기가 특별히 떨어지지 않는 반면, 메이저리그 팀들은

홈경기에서의 승률이 높은 팀이 월등히 많고 설령 지구의 상위권팀들이라도 원정경기의 성적은

썩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일본타자들이 선구안이 좋다는 속설에 대한 가장 확실한 반증은 일본에서 활약하던 마쓰자카나

노모 같은 투수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일본에서 활약하던 시절보다 베이스온 볼스의 수가

확실히 줄었는지, 또 삼진의 수는 늘었는지를따져보면 알수 있는데, 그들은 빅리그에 와서 획기적인

기록의 변화가 있진 않았다는 것에서도 증명된다.

오히려 둘다 일본야구에서보다 더 많은 안타를 두들겨 맞았고 홈런허용치도 증가했다.

반면 일본에서 날리던 홈런타자였던 마쓰이는 메이저리그에 와서 중장거리 타자로 변신했다.

아니, 일본타자들이 훨씬 더 선구안이 좋은데 왜 빅리그에 진출하는 일본타자들은 왜 볼넷을

더 얻지 못하고 왜 더 좋은 타격기록을 내지 못하는 것일까?

미국 타자들이 훨씬 더 유인구에 방망이가 자주 나간다는데 왜 기록은 별다른 차이가 없을까?  

근본적으로 일본야구는 상대를 자주 접할수 있기에 이에 근거한 야구를 하고 있는 것뿐이고

반면 메이저리그는 상대를 자주 접하기 어려우므로 자신의 기량을 극대화하는 야구를 하는 것이

더 유리한 것이지, 빅리그는 대충하는 야구고 일본야구는 현미경이다라는 식의 단정은 근거가 전혀 없다.

 

  똑같은 룰이 적용되는 같은 야구인데도 환경에 따라서 경기의 질은 판이하게 달라지고

경기를 보는 시각이나 생각 역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위의 속설은 일본야구와

미국야구의 근본적인 차이와 다른 환경을 염두에 두지 않고 표피적인 현상만을 형식논리로

재단해서 나온 대표적인 오류다.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형식논리로만 보면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가출하는 이상한 결론과 논리가 나올 수 있음을 기억하자. 형식논리는 모든 철학적

사유와 사회적 담론에서 절대적으로 조심해야할 오류제조기다. 특히 언론은 형식논리와

이중잣대로 대중을 호도하는데 명수라는 점과 한국언론들은 특급명수라는 걸 잊지말자.

 

   2. 복권 당첨자들은 다 불행하게 살까?

  전세계적으로 매주마다 수십명의 복권횡재 당첨자들이 나오곤 한다.

일년이면 수백명이 넘는다. 여태까지 아마 수만명은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다 불행해진다는 세상의 속설은 과연 맞는 말일까?

정답은 노! 언론의 속성상 개가 사람을 물면 그건 일단기사도 안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톱뉴스가 되는 속성에서 나오는 착시현상일뿐이다.

 

   실제로 일등당첨되어 갑자기 횡재한 사람들중에는 이후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제대로 관리를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심지어는 당첨금 때문에 살해당한 불행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전체 1등당첨자들가운데서 몇%나 차지할지는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아마 보통사람들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비율정도나 될까 모르겠다. 대부분의 복권당첨자들이

돈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진 경우에 대해서 충분히 유의하고 있고  그 때문에 더 주의해서 돈을

쓰게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다. 또한 상당수의 당첨자들이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거나 여전히 뭔가 일하면서 살지 마냥 돈만 써대면서 살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들중 흥청망청 마구 써대는 사람이 과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많을까?

사실이 그렇다면 복권으로 인생망친 사람에 대한 기사는 더 자주 나와야 이치에 맞는다.

얼마전 캐나다의 어느 노부부는 복권 당첨된 거액의 돈을 모두 지역사회를 위해 기부했다.

즉석복권에 당첨된 미국의 어느 할아버지는 골고루 당첨금을 손주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실제로 그런 경우들이 적지 않다. 너무 많은 돈이 도리어 독이 된다는 걸 아는 현명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기사들은 복권당첨금을 모두 탕진하고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에 비해서

언론의 주목을 덜받는다. 요컨대 재미가 없거든! 돈 있어서 기부한건대 뭐...아무 재미가 없는 거다.

(*노파심으로 말씀드립니다만, 복권제도의 근본적인 문제점에 대한 문제제기와는 별도의 얘기이오니,

혜량하시길

언론의 속성에 대한 이해 없이 정보를 무분별하게 수용할 경우, 사람은 교육정도나 지능에 관계 없이

쉽게 바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말씀 드리고자해서 가장 이해하기 편한 예를 들어봤습니다)

 

이건 조앤케이롤링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보다는 과거 그녀가 정부보조금을 지급받으면서

어렵게 어렵게 해리포터시리즈를 써가던 시절의 얘기가 더 언론에 자주 보도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 그녀는 총재산 10억불이 넘는 엄청난 거부가 되었지만 이제 그녀가 잘 산다는 사실에 새삼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뭐 안봐도 뻔한 얘기니깐. 뻔한 사실을 언론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점을 기억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언론보도의 행간을 읽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노무현과 김대중의 상식적인 주장과 담론들이 왜 집권내내 인기가 없었는지 아는가? 

너무 뻔한 얘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뻔한 얘기가 안 지켜질때 세상은 지금 쥐바기정권처럼 개판이 된다는 걸

일관되게 대중에게 전달하는 매체가 매우 드물다는 것 또한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깨어 있는 시민의 결집과 단결이 절실해지는 것이다.

 

  3. 길로틴 박사는 정말 길로틴에서 목이 떨어졌을까?

프랑스 대혁명의 피의 대숙청을 상징했던 처형기구 단두대 일명 길로틴(원어로는 기요땡)은

의사이자 혁명의회 의원이었던 기요땡 박사가 당시의 사형방법이 신분에 따라 다르고 평민 죄인에게는

너무 큰 고통을 주고 잔인하다는 이유로 좀더 평등하고 인도적인 처형방법을 제안하면서 만들어진 도구다.

당시만해도 칼로 사람의 목을 쳐서 사형에 처했는데, 문제는 칼날이 무뎌서 한번에 사람의

목을 자르지 못한다는 것이 현실이었고 실제로 처형장에선 끔찍한 장면이 너무도 많았고

귀족들에 비해 일반 평민들은 너무도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되엇기에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재밌는 것은 기요땡박사는 제안만 했을뿐 실제로 이 도구를 만드는데 거의 간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도구가 프랑스 혁명당시 너무도 유명한 루이 16세와 앙토와네트 왕비의 목을 날려버리면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원래 붙여졌던 이름 루이젯트대신 제안자 기요땡 박사의 이름으로 알려지고 만다.

 

 제안자 기요땡 박사는 자신의 선의(?)와는 다르게 이 새로운 처형도구에 자신의 이름이 붙여지게 된것을

경악해 이후 세상사람들의 눈을 피해 북부 프랑스의 시골로 이주, 은둔하며 거기서 의사로 일하다가

천수를 다하고 조용히 생을 마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잔인한 호기심과 뒷얘기들은 결국 이 도구를 만든 기요땡마저도 기요땡에서

목이 날아갔다는 전설을 만들어냈고 결국 이 얘기는 교과서나 역사서에 사실로 실리기조차 했다.

(먼나라 이웃나라로 돈깨나 버셨다는 이원복 교수는 이 대목을 여전히 안고치고 있으시던데...)

이 기구를 만든 사람도 이 무시무시한 사형도구에 목이 날아갔다! 얼마나 솔깃하고 흥미진진한 얘긴가?

하지만 정작 이기구를 제안했다가 자기의 이름이 거기에 붙었던 기요땡에겐 그게 얼마나 끔찍한 소리였을까?

아마 지난 81년 프랑스가 사형을 폐지했을 때 기요땡박사가 살아 있었다면 가장 기뻐했을 것이다.

더이상 자신의 이름이 붙은 그 기구가 사용되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제발 뭔가를 얘기할땐 당하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해봐야 한다는 걸 가르쳐준 기요땡박사의

슬픈 뒷얘기에서 우리는 어떠한 사건을 접했을때, 그로 인한 소수자 혹은 피해자의 입장을 한번쯤은

생각해봐야할 절대적인 필요성을 발견한다.

   기요땡은 봉건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혁명정신에 입각한 인도주의로 제안하나

했다가 무시무시한 사형도구에 자기 이름이 붙은 것도 부족해 그 자신마저도 그 단두대의

칼날에 역사적(?)으로 목이 날라가버리는 끔찍한 형벌(?)을 감수해야 했다.

기요땡 개인에게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이던가?

세상의 경박한 호기심과 부주의함은 그를 실로 두번이나 죽인 셈이다.

기요땡같은 희생자가 우리사회에는 얼마나 될지 생각해보면 언론이 떠들어대는 것들과

세상의 속설에 대해서 좀 더 냉정하고 차분한 이성의 눈으로 대해야 하며

늘 언론이 생산해대는 속설의 발상을 뒤집어 제대로 현상을 포착하는 역발상의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렇듯 조금 찬찬히 살펴보면 속설과 실제 사실은 다를 때가 많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요즘 우리의 입장에서

지금 이명박세상에서도 우리가 조금 더 찬찬히 보면 손쉽게

깨버릴 수 있는 속설이나 관념은 없는 것일까?

 

많을 것이다. 무척이나.

 

 

속설을 깨고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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