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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라남의 열풍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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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608회 작성일 22-08-25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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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편

14

주혁민은 도당회의실에서 강습총화를 한 다음 곧장 라남구역당 책임비서의 승용차에 묻어 기업소로 돌아왔다. 그는 당위원회 사무실에 들리기전에 먼저 박준의 아들(박순진)이 강습을 떠날 때 부탁한 혁명가극 《당의 참된 딸》의 총보를 가져다주려고 단조직장으로 향하였다. 박순진의 이 부탁은 자기를 조선로동당에 받아달라는 능청스러운 암시인지도 몰랐다.

(순진아, 일을 잘해라. 내가 너의 입당보증인이 돼주마.)

순진을 생각하며 단조직장으로 총총히 걸어가던 주혁민은 주강직장마당으로 지나가는 설태섭의 뒤모습을 먼발치에서 띠여보고 무춤 멎어섰다. ㄹ공장에 가게 된 사람이 아직 기업소에서 돌아가고 있기때문이였다.

의아한 생각에 주혁민은 그의 뒤모습이 주강직장 담모퉁이로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있었다.

(모를 일이군.)

주혁민은 고개를 기웃거리며 다시 단조직장을 바라고 걸음을 옮기였다.

그 어느직장보다도 붐비고 소란스러운 직장인 단조가 이날은 웬일인지 쇠판을 두드리는 함마소리, 장수발을 구르는 프레스소리 하나 없이 조용하였다. 주혁민은 3톤함마곁에서 스파나를 들고 흥얼흥얼 코노래를 부르며 돌아가는 박순진을 띠여보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순진동무, 수고합니다.》

《아니?… 언제 오셨습니까, 책임비서동지.》

뜻밖에 나타난 주혁민을 보고 일순 놀란 기색을 지었던 박순진이 반가와하며 마주 걸어왔다.

《지금 오는 길이요. 한데 사람이 왜 이렇게 보이지 않나?》

《책임비서동지 강습가신 사이 출근률이 팍 떨어졌습니다. 오늘도 75프로밖에 안된다구 직장장동지랑 몹시 걱정하였습니다.》

《뭐, 75프로?》

주혁민은 저도 모르게 놀란 소리를 질렀다. 여태 기업소 어느 직장에서도 출근률이 그렇게까지 떨어져본적은 없었던것이다.

《왜 그렇게 출근률이 떨어져?》

《식량사정때문인것 같습니다. 기계정비기간엔 식량이랑 두루 구하며 집일을 보고 집중단조를 할 때 모두 나와 와닥닥 일을 해제끼자는…》

박순진은 주혁민의 낯색이 달라지는것을 보고 뒤말을 삼켜버렸다.

《문제로군.…》

주혁민은 기가 막혀 입을 떫게 다시며 망연히 서있었다. 사흘동안 진행한 이번 도당강습에서 바로 김정일동지의 가르치심을 받들고 《고난의 행군》의 돌파구를 열어제끼기 위한 첫 포성을 울린 자강도인민들의 투쟁소식을 전하고 당사업을 혁명과업수행과 밀접히 련결시킬데 대한 문제를 강조했었다.

자강도사람들은 식량이 떨어져도 쌀을 달라고 하지 않고 일감을 달라고 한다는데 우리 기업소에선 일을 전페하고 쌀을 구하러 다닌단 말인가.

주혁민은 화가 치밀어 옆구리에 끼고있던 서류가방을 3톤함마 모루우에 던지고 다시금 작업장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박순진이 부탁한 물건이 생각나서 서류가방을 도로 집어들고 그안에서 겉가위에 흰 종이를 씌운 책을 꺼냈다.

《박순진이 부탁한 혁명가극 총보야.》

《고맙습니다. 책임비서동지, 우리 기업소 도서실엔 별책이 다 있는데 이런 총보는 없습니다.》

박순진은 벙싯거리면서 책장을 번져보았다. 주혁민이 보기에 박순진은 로동에 성실할뿐아니라 음악에 대한 조예가 보통 깊은것 같지 않았다.

《당원이란 어떤 사람인가? 거기 다 적혀있소. 순진이, 그 주인공처럼 살라구.》

《알겠습니다, 책임비서동지.》

박순진은 책을 가슴에 그러안으며 흥분을 띤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이윽고 주혁민은 단조직장 출근상태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려고 직장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직장장은 어디에 갔는지 없고 난데없이 곽경두가 긴 나무걸상에 드러누워 정신없이 잠을 자고있었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누워있는가?)

주혁민은 코를 골면서 곤하게 자고있는 곽경두의 허여멀쑥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날이 월요일이라는것을 생각하였다. 이상하게도 월요일이면 류달리 피곤해하는 곽경두였다. 그에 대하여 요즘 두가지 말이 떠돌았다. 하나는 일요일이면 그가 밀렸던 직맹문건을 정리하는 일로 밤샘을 하여 월요일 아침엔 꼼짝을 못한다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요일 밤마다 외도질을 하러 다니기때문에 월요일에는 병든 닭처럼 졸기만 하면서 꼴기를 못차린다는것이였다.

주혁민은 물론 사람들이 반롱조로 하는 두번째 말을 믿지 않았다. 훨씬 젊은 시절인 회령에 있을 때에도 곽경두가 녀자들에게 치근거린다는 말은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었다. 그는 녀성관계에서 깨끗하고 건전한 사람이였다.

주혁민은 회령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곽경두를 좋은 사람으로 보고있기때문에 결원중에 있는 직맹위원장사업도 그에게 맡기도록 하였던것이다. 결국 그는 직맹, 업무, 《HM기》제작단 등 세가지 일을 겸임하여 몹시 지친듯 했다.

주혁민은 그를 깨우지 않고 직장장실을 나와 다시 정문쪽으로 걸음을 되짚어 지배인실로 찾아갔다. 마침 지배인실에 기사장도 와있었다.

《아니, 언제 왔습니까?》

지배인이 뜻밖인듯 눈을 치뜨며 일어서고 그 옆에 서있던 기사장도 말없이 고개인사를 하였다.

《조금전에 와서 단조직장에 들려보고 오는 길입니다.》

주혁민은 창가에 놓인 쏘파에 서류가방을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담배곽을 꺼내였다. 그는 담배를 별로 즐기지 않지만 기분이 나쁠 때면 한대씩 피우군 하였다.

《무슨 차를 타고 왔는가요? 차를 부르지 않고…》

오성오는 책임비서가 담배를 입에 무는것을 보고 그의 기분상태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청진에서 여기 오는걸 뭐 차를 부르겠습니까. 구역당 책임비서차에 묻어서 왔습니다. 한데 단조직장 출근률이 75프로라면서요? 다른 생산직장도 모두 그 형편인가요?》

주혁민은 담배불을 붙이고 한모금 깊이 빨아들였다가 한숨처럼 연기를 내뿜었다.

《책임비서동지가 강습간 사이에 나도 수봉작업장에 붙어있다보니 출근규률이 좀 문란해진것 같습니다.》

《책임일군이 없으면 규률이 문란해지는 이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결국 지배인, 책임비서의 눈이 무서워 규률을 지켰다는 소리가 아닙니까. 이래서야 되겠는가? 기사장은 그새 여기 있었는가요?》

주혁민은 침울한 얼굴을 하고 서있는 기사장에게 눈길을 돌리였다.

《예, 여기 있었습니다.》

최강철은 고개를 수굿하고 낮고 맥빠진 소리로 중얼거리였다.

《직장장들이 기사장은 무서워하지 않는가?》

《내 지금 그래서 기사장에게 싫은 소릴 좀 하던중입니다.》

오성오가 얼핏 기사장의 얼굴을 스쳐보고 책상앞으로 걸어나오며 입을 열었다.

《기사장이 호인이니 지배인혼자서 밤낮 게사니고길 먹은 사람처럼 소리친다고요.》

순간 주혁민은 설계사업소 행정총화모임때 기사장이 꿔온 보리자루처럼 앉아있어 독고소장이 독판을 치던 일이 생각났다. 독고소장이 제작단설계조원들을 부진설계원이라고 몰아줄 때에도 기사장은 말한마디 하지 않고 가만히 함구무언하고있었다. 주혁민은 이날 비로소 기사장이 기술실력은 대단히 높지만 통제력, 장악력에서는 거의 령이라고 생각하게 되였다.

《기사장동무, 그래선 안됩니다. 부정을 보고도 싫은 소릴 하지 않으면 되오?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있소. 1990년 11월 9일, 종업원궐기대회 뒤끝에 기사장동무한테 남의 눈치를 보고살아선 안된다고 충고를 주었지요. 그런데 그때부터 6년이 된 오늘까지도 크게 변화된것이 없는것 같습니다. 까놓고 말하면 기사장이 너무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니 〈HM기〉개발에서도 일정한 지장을 받고있습니다. 〈HM기〉에서는 유압계통의 설계가 가장 어렵다고 하는데 유압에서 권위자인 기사장은 거기에도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놓지 않고있소. 인간관계가 나빠질가봐 그러오?》

빠르고 격렬하게 내뿜듯이 말하던 주혁민은 주강직장마당으로 지나가던 설태섭의 얼굴이 불쑥 떠올라 《참, ㄹ기계에 가게 된 설태섭이 왜 아직 기업소에서 돌아가고있소?》하고 말머리를 돌리였다.

《몸이 아프다고 해서 대신 강충현소장을 보냈습니다.》

기사장이 책임비서를 외면하고 서서 대답하였다.

《고뿔 한번 앓지 않던 사람이 어디가 아프다는거요? 아프면 제 녀편네가 의사인데 약을 한주머니 차고서라도 가야지 그런 일에 몸을 빼면 되는가. 이런 때에도 기사장은 응당 다리가 부러지지 않은 이상 가라, 〈고난의 행군〉의 정신으로 억세게 살라! 하고 강하게 요구했어야 했소. 사실은 그게 진짜 인간성이요.》

《책임비서동지, 전 아무래도 기사장재목은 못되는것 같습니다. 다시 유압직장 책임기사로 돌려주었으면 합니다. 이건 어떤 도전도 아니고 저의 진심입니다. 우리 기업소를 위해서 제발 그렇게 해주십시오.》

최강철은 고개를 쳐들고 애원에 타는 눈으로 주혁민을 바라보았다. 기사장의 애절한 목소리가 혁민의 가슴을 허비는듯 했다. 아니 갑자기 옆구리로 날카로운 비수가 날아드는것 같기도 하였다.

주혁민은 참을수 없는 아픔에 이마를 찌프리였다.

《동무! 그런 말을 감히 어떻게 하는가. 이 책임비서가 기사장을 붙이고 말고 하는가. 동무를 기사장의 후임으로 추천한건 전기사장의 유언이였소. 그것을 헤아리시고 위대한 장군님께서 동무에게 기사장의 중책을 맡기셨소.

나는 최강철의 실력과 충실성을 믿는다, 그는 능히 할수 있다 하시며 직접 임명하셨소. 이 믿음을 저버리고 동무가 어찌 그런 배은망덕한 말을 할수 있소.》

최강철은 몇발자국 비칠거리더니 지배인의 책상에 손을 짚고 멍하니 땅을 내려다보았다.

이때 전화종소리가 울리였다. 오성오가 급히 몸을 돌려 사무탁우에 주런이 놓여있는 네개의 전화기중 맨 옆에 있는 흰 전화기의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는 송화기에 입을 대고 몇번 《예, 예.》하더니 《그렇소. 여기 와있소.》하며 송수화기를 주혁민에게 내밀었다.

《당위원회 부원동무가 찾습니다.》

주혁민이 송수화기를 바꿔들었다.

《책임비서동지, 강충현소장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쪽으로 돌리겠습니다.》

부원의 말이 끝나자 수화기의 진동판이 찌르륵거리더니 인차 강충현의 목소리가 들리였다.

《책임비서동집니까. 강충현입니다. 야, 책임비서동지, 제 큰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걸 어쩌면 좋겠습니까.》

수화기에서 울려오는 강충현의 목소리는 울음에 가까왔다. 밑도 끝도 없이 일을 저질렀다는 말에 주혁민의 눈이 둥그래졌다.

《무슨 일을 저질렀다는거요? 자동차사곤가? 거기가 어디요?》

주혁민의 놀라는 소리에 방안의 사람들도 일제히 긴장해졌다.

《여긴 양덕입니다. 오늘 새벽 두시께 산길에서 경애하는 장군님을 만나뵈웠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을 만나뵈웠단 말이요?》

주혁민은 한층 더 놀랐다.

《캄캄한 산길에서 장군님을 뵈웠는데 글쎄 처음엔 장군님이신줄 모르구 별 허튼소릴 다 했습니다. 담배질까지 하면서 버릇없이 굴었지요. 장군님께서 담배를 끊는게 좋지 않겠는가고 하실 때에도 그 좋은걸 뭣때문에 끊겠는가고 했습니다.》

주혁민은 억이 막혔다. 세상 익살군인 강충현이 무슨 버릇없는 말을 했을지 알수 없었다.

《소장동무, 좀 차근차근 이야기하시오.》

《일인즉은 이렇게 됐습니다.》

강충현은 양덕고개를 넘어선 산길에서 김정일동지를 만나뵈온 이야기만도 15분 좋이 길게 하였다.

《장군님께서는 이렇게 쓸말, 몹쓸말을 가리지 않구 다 하는 이놈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어주시고 형석광과 주물용모래를 라남주변에서 찾아보라는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셨습니다. 저는 장군님의 승용차를 타고 양덕읍에까지 갔다왔습니다. 그이께서는 양덕으로 가시면서도 우리 기업소의 실태를 구체적으로 료해하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습니다. 지금 전기난, 자재난, 원료난, 식량난 등 〈난〉자가 잔뜩 붙어 돌아가는데 그 〈난〉을 즐거운 〈락〉으로 전환시키자고 하셨습니다.

지금 자강땅에서는 〈고난의 행군〉의 돌파구를 열어제끼는 포성을 울리고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구 장군님께서는 지방인민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료해하시기 위해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을 각 지방에 파견하시였는데 우리 함경북도에는 리명국비서동지가 갔다고 합니다.

장군님께선 자동차부속도 해결해주시고… 책임비서, 지배인, 기사장의 안부도 하나하나 물으시면서… 흐윽…》

토막토막 끊기면서 간신히 울려나오던 강충현의 목소리가 아예 잦아들고말았다. 수화기에선 흐느낌같은 떨리는 숨소리와 전류의 흐름소리가 혼탁된 잡음이 들릴뿐이였다.

주혁민은 오래도록 강충현의 목소리를 들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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