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64]<아프리카 벗겨먹기>통해 알려진 <카메룬>의 현실 > 통일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통일게시판

[연재 64]<아프리카 벗겨먹기>통해 알려진 <카메룬>의 현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재미청년
댓글 1건 조회 5,266회 작성일 11-04-13 12:06

본문

[연재 64]<아프리카 벗겨먹기>통해 알려진 <카메룬>의 현실

50년동안 끄덕 없는 카메룬 친영친프랑스 그리고 친미 독재정권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64번째 연재글로 "카메룬의 역사적 개관을 말하자면 여러세기동안의 노예무역 시대가 지난 후에 유럽 제국주의 침략으로 특징 지워진 포루투갈 상인들의 왕래,독일과 프랑스의 식민통치 그리고 독립후에 미국의 지원으로 이여지는 독재정권의 등장과 장기집권으로 인한 내부적 부패와 폭력에 대한 역사가 어느 정도 알려저 있는것 뿐이다."며 되새기게 되었다고 강조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64]

<아프리카 벗겨먹기>영화 통해 알려진 카메룬의 현실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50년동안 끄덕 없는 카메룬 친영친프랑스 그리고 친미 독재정권


news_36182-1.jpg blank.gif *필자:유태영 박사 카메룬의 역사적 개관을 말하자면 여러 세기동안의 노예무역 시대가 지난 후에 유럽 제국주의 침략으로 특징 지워진 포루투갈 상인들의 왕래, 독일과 프랑스의 식민통치 그리고 독립후에 미국의 지원으로 이여지는 독재정권의 등장과 장기집권으로 인한 내부적 부패와 폭력에 대한 역사가 어느 정도 알려저 있는것 뿐이다.

하지만 <2005년 인디 다큐페스티발> 영화제에 출품한 카메룬의 4개 다큐멘터리 영화의 걸작품을 통하여 카메룬의 역사적 웨침을 생생하게 듣게 됬다.

<과거를 잃으면 현재와 미래를 제대로 볼 수 없다>라고 웨치는 카메룬 다큐멘터리의 깊은 깨달음의 비판적 목소리는 카메룬의 비극적인 현실에 대한 우리들의 어두은 눈을 밝히 뜨게해 준다.

<2005년 인디 다큐페스티발>에 출품한 4개의 카메룬 다큐멘터리 영화는 어떤 영화들 인가?

1) 아프리카 벗겨 먹기 2) 식민지에 대한 오해 3) 구름위의 머리 4) 알렉스의 결혼 등 4개의 카메룬의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카메룬의 역사적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4개의 다큐멘터리 영화의 관점은 식민지 역사의 과거사를 그대로 말해 줄뿐만 아니라 1960년대에 식민지 상태에서 겨우 벗어난 후에 아직까지도 카메룬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식민지 착취의 흔적들이 여전히 상존하고 있음을 잘 이야기 해 주고 있다.

4개의 카메룬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자와 감독이며 또 영화평론가인 쟝 마리 뜨노는 어떤 사람, 누구인가?

뜨노는 1954년 3월 14일생으로 프랑스에 유학하여 컴무니케이션을 전공하고 영화평론가로 활약했다. 뜨노가 프랑스로 유학한 이유는 그의 아버지의 뜻을따라 <백인이 되기 위하여> 이였다고 뜨노는 회상한다.

하지만 뜨노는 <백인이 되기 위하여>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아프리카와 카메룬의 현실을 파헤치고 폭로하기 위하여 다큐멘터리와 에세이 영화를 전문적으로 제작 했다.

뜨노가 프랑스에 유학하고 있을 당시 아버지의 부음을 접했다. 하지만 뜨노는 카메룬에 갈 비행기표를 구입할 돈이 없어 아버지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가족들은 장남인 쟝 마리 뜨노 없이 장례식을 치룰 수없다 하여 1년을 연기 했다. 1년 동안 뫃은 돈으로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루기 위해 뜨노는 카메룬 고향집에 갔다.

1년 후에 치룬 아버지의 장례식은 뜨노와 뜨노의 가족들에게 아주 특별한 장례식 이였다. 뜨노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소재로 하여 그의 첯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 했다.

1983년에 영화 다큐멘터리인 Schbbah를 만든 이래로 부터 뜨노는 픽션등 자유롭게 영화 감독이자 배우 또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여 카메룬에서는 물론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으로 유명해 졌다.

뜨노는 그의 여러가지 작품들을 통해 조국 카메룬이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하여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오가면서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뜨노는 카메룬 민중들의 일상적인 삶과 그것을 규정하는 뿌리 깊은 고난의 근원을 밝혀내기 위해서 개인적인 시선과 역사적인 맥락을 절묘하에 서로 조합한다.

뜨노의 작품들은 관습적이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카메룬의 역사를 파헤치고 있으며 희극과 비극, 이미지와 나레이션을 통하여 민중의 고뇌의 역사를 추구해 나가고 있다.

뜨노의 작품들은 카메룬이 처한 경제상황과 제3세계에서의 서구문화의 침투작용,서구문화권의 선교사들의 아프리카에서 나쁜 역활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 문제등 다양한 주제들을 광범위 하게 다루고 있다.

하지만 뜨노는 궁극적으로 카메룬의 역사적인 비극을 규명하고 있으며 또한 현재에도 진행중인 그 상처의 흔적과 결과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1. 뜨노가 창작한 카메룬 다큐멘터리영화 작품들


제 5회 세계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출품한 뜨노의 4개 작품에 대하여 고찰해 본다. 뜨노의 4개 작품의 소재들은 주로 독일과 프랑스의 식민통치 그리고 1960년대 이후 미국에 의하여 계속되고 있는 카메룬 민중들이 죽어가는 잔인한 현실을 명확히 보여주기 위함이다.


ㄱ. 아프리카 벗겨 먹기 (Africa I will fleece you: 상영시간 88분)

카메룬은 1400년대 부터 유럽 열강들의 침략을 받아 오다가 1884년에 독일의 식민지가 됬다. 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에 독일이 패함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쫓아내고 카메룬을 둘로 갈라놓고 동서로 나누어 두 나라가 통치를 했다.

1960년에 카메룬은 독립을 하기는 했지만 아히조 대통령의 친미독재정권 22년동안 집권했으며 그리고 제 2대 비야 대통령도 역시 친미 군부독재정권을 2011년 4월 현재까지 29년동안 끄떡 없이 집권을 하고 있다.

50여년동안 친미독재하에서 사람들은 계속 죽어 갔으며 “영원한 문화학살”을 감요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뜨노 감독은 그의 작품의 시선을 계속 집중하고 있다.

그러면서 뜨노 감독은 그의 어린시절을 회상하면서 길거리 에서 행상하는 어느 아버지와 자기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들아, 너는 공부해서 백인이 되라. 성공은 횐색이다. 검정색은 아직 절망의 색이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 알파벳을 가르쳤다. 뜨노 감독의 비판적인 목소리는 작품영화 속에서 계속된다. 보석같이 아름다운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와 종달새 처럼 평화롭게 살던 카메룬의 옛 부족들의 마을들은 백인들의 습격을 당해 노예가 됬다.

백인들은 기독교로 교화시켜 문화적 노예로 만들어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했다.

뜨노는 이것을 가리켜서 카메룬의 <인간학적 재난>이라고 말 했다. 백인들에게 아첨하는 지식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날마다 늘어 나고 있었다.

<아프리카 벗겨 먹기>는 카메룬 독립운동 초기의 숨은 역사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기술한다.

<1945-60년 사이에 카메룬 독립운동은 공산당, PCU과 미국 점령군과 치열한 전투로 이어졌다.하지만 첨령군의 폭력적 대응에 굴복하여 점령군에 아첨하는 군부독재가 세력을 잡았다>

카메룬의 역사는 독일,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 역사이며 독립은 말 뿐이고 미국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는 현 독재정권이 서구문명의 문화적 식민지와 미국의 경제와 군사적 침략 그리고 정치적 식민지로 50여년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카메룬의 오늘의 모습이라고 <아프리카 벗겨 먹기>는 분개하여 폭로하고 있다.

이 어찌 카메룬의 비극과 뜨노의 <아프리카 벗겨 먹기>가 말 하는 분개뿐 이겠는가? Korea 반도의 비극과 우리의 분개는 카메룬의 비극과 분개에 공감대를 공유하고 있다.


ㄴ. 식민지에 대한 오해,The Colonial Misunderstanding: 상영 시간 75분

뜨노는 이 작품을 통하여 아프리카와 카메룬에 진출침투한 서구의 특히 유럽의 기독교와 선교사들에 대하여 복잡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뜨노는 1800년대에 아프리카에 진출한 유럽의 기독교는 아프리카에 대한 냉소주의에 입각한 이기주의적이며 서구의 <식민주의>와 <문명화 전도>가 혼합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의 소재는 어느 한 독일 선교 단체의 선교정책에 대한 비평에 집중하고 있는데 그 선교 단체는 기독교를 전파하는 소명에 머물러 있지 않고 더 나아가 아프리카의 이방인들에게 유렵의 문화와 삶의 규율을 강압적으로 전파하려는데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뜨노의 작품은 결국 식민지 정책에 대한 무지와 오해를 밝혀주는데 큰 뜻이 있다.


ㄷ. 구름 위의 머리, Heads in the Clouds: 상영 시간 34분

뜨노는 이 작품에 3인을 등장시킨다. 첫째는 재키라는 법학을 전공한 대학 졸업생이지만 졸업장에 걸맞는 직업을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부모님의 직업을 이어 받아 초라한 소매상점에서 점원이 되는 비참한 생활을 묘사고 있다.

두번째 등장한 사람은 페손카라는 여성인데 그녀는 정부기관에 취직한 공무원인데도 불구하고 빈곤한 생활고에 시달려 할 수 없이 길거리에서 도넛을 파는 부업을 해야만 가정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난처한 사정 이야기를 통하여 카메룬의 도시인들의 빈곤한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 주고 있다.

세번째로 등장한 사람은 타보우라는 조각가이며 시인의 이야기로 흥미롭다. 그는 조각의 재료를 구하기 위하여 카메룬의 수도인 야요운데의 거리마다에 쌓여 있는 쓰레기더미를 뒤진다. 그는 그 과정에서 가난한 민중의 이념을 중요시하고 있는 “슬럼 아트”에 눈뜨게되여 카메룬 역사와 사회의 비극적 상태를 예술적으로 표현 하고 있다.

뜨노는 위의 3 사람의 이야기들을 통하여 오늘 카메룬의 민중들이 살아가고 있는 비참한 현실과 그 현실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삶의 불행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ㄹ. 알렉스의 결혼, Alex’s Wedding: 상영 시간 45분

1960년에 카메룬이 독립한지 50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 세계는 눈부시게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카메룬은 여전히 구세대적 일당 독재와 외세의존적 족벌재벌체제를 요지부동하게 변함 없이 그대로 유지하면서 민중을 착취하고 있다.

뜨노는 카메룬의 부패한 체제와 사회적 부조리가 변함 없이 고정되여 있는데 대하여 반항한다. 그는 그의 반항하는 뜻으로 매우 역설적으로 한 젊은이 Alex의 로맨틱하고 비현실적인 이중 결혼의 이야기를 극구 미화시킴으로서 새로운 삶의 변화와 사회적 굴레를 과감히 깨칠것을 촉구하고 있다. Alex의 로맨스는 카메룬의 어둡고 캄캄한 사회를 비꼬아 역설적으로 공격하면서 상징적으로 고발하고 정치와 사회적 변화를 예술을 통하여 웨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쟝 마리 뜨노와의 일문일답중에서 그가 말한 몇가지를 요약하여 소개한다.

가) 과거를 잃으면 현재를 볼 수 없다. 유럽인들은 과거 식민지 지배를 그대로 고착시켜 오늘의 삶을 규정시키려 하고 있다.

나) 나의 작품영화가 나를 많이 변화시켰는데, 내 작품영화가 카메룬을 얼마나 변화 시켰는지 알 수 없다. 카메룬 군부 독재정권이 나의 작품영화를 반대하고 있기 대문에 잘 알 수 없다.

다) 나의 다음 작품 계획은 <어둠속의 백인 여자>이다. 아직은 목적을 성취하지 못했다. 아직 나의 갈길이 멀다고 생각 한다.

라) 카메룬은 계속 인종차별을 당하고 있고 없어지고 있지 않다. 이런 강대국의 지배세력에 계속 도전하고 민중이 깨어나게 하려는 작업을 할 것이다.


2. 카메룬의 간추린 역사


카메룬에서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이곳저곳에서 발견됨으로 기원전 6세기 경에 이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은 것으로 추측한다. 카메룬의 부족시대가 8세기경에 건설됬는데 카메룬의 부족수는 약 100개 이상으로 각각 상이한 종족집단들이 모여 살았으며 그들의 풍습은 서로 상이하지만 함깨 어울려 살았다.

11세기경 호우메 황제시대에 교역이 활발했으며 이슬람교가 전파됬다. 그 후에 아드리스 왕국이 건설됬는대 이 때 이슬람교 사원이 카메룬에 처음으로 건설되여 이슬람교의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다.

1472년에 포루투갈 인이 카메룬에 처음 오기 시작했는데 포루투갈인들은 수많은 새우를 보고 깜작 놀라 포루투갈 어로 “카메루네스” 를 웨첬는데 그후에 나라이름을 “카메룬” 이라고 부르는 기원이 됬다고 한다.

포루투갈인이 카메룬 땅에 온 이후부터 400년동안의 역사는 노예무역과 관련된 역사가 전부이다. 주로 영국 프랑스 독일등 여러 유럽국가들이 경쟁적으로 노예 무역과 야자유, 상아등 농산물의 착취와 무역을 거래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카메룬 본래의 원주민 부족들의 왕국들간에는 치열한 전쟁터가 되고 있었다. 유럽의 침략자들과의 관계설정에 있어서 부족 왕국들간에 이해가 서로엇갈리고 또 유럽인들은 부족 왕국들간의 전쟁을 뒤에서 부추기고 있었기 때문에 부족 왕국들 사이에 싸움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1884년에 독일은 부족 왕국들의 상호 반목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카메룬을 독일의 단독 식민지로 설정하는데 성공했다. 카메룬은 통채로 모든 주권과 사법권을 독일에게 빼았겼다. 1891년에 독일은 카메룬 내륙 깊숙이 진출하여 천연 고무, 카카오, 야자유, 목재등 무역을 위한 거대한 농장을 개설하여 원주민들을 농노로 삼고 무진장 착취를 했다.

한편 독일은 선교사를 대량 파송하여 기독교인 양성에 주력하고 서구식 교육을 전수하게 하여 카메룬에서 아프리카의 인재배출를 기여하도록 했다. 카메룬에 기독교인이 64% 이상되는 이유를 여기서 가히 알 수 있다.

1884년 부터 카메룬에서 식민통치를 하고 있던 독일이 1914년에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기다렸던것처럼 카메룬에 진출하여 새로운 점령군이 되여 독일을 몰아내고 카메룬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 했다.

카메룬의 민중들은 독일이 물러났으면 자연히 독립을 할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프랑스가 선두에 나서 카메룬을 영국과 나누어 먹기식으로 분활하여 동서로 갈라진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고 있었다.

프랑스는 카메룬의 80%를 독차지하였고 영국은 20%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단일국가인 카메룬은 두 나라의 식민지 세력의 지배를 또 다시 받게 됬다. 프랑스는 카메룬에 철도를 개설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착취를 위한 최대한의 통치기반을 닦아 놓고 이 지역을 <적도 아프리카 프랑스령>이라고 부르면서 40년간 식민지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1946년에 프랑스의 새로운 침략행위에 분노한 카메룬 바사족의 지도자 레벤 뇨베는 궐기하여 <카메룬 공산당,PCU>을 발족하여 카메룬의 완전한 독립을 부르짖으며 프랑스에 대항하여 싸웠다. 레벤 뇨베의 공산당 독립운동에 카메룬의 노동자와 민중들이 대대적으로 지지하여 독립운동에 대거 가담 했다.

1946-60년 까지 카메룬 공산당, PCU과 프랑스 점령군 간의 치열한 전쟁이 이어 졌다. 1955년에 특히 반프랑스 게릴라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됬는데 특별히 두알라, 바사등지에서 <카메룬 국제연합>을 결성하여 카메룬 독립운동의 최고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1956년에 프랑스는 카메룬 공산당의 진출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방법을 고안하여 <카메룬입법회의>의 구성을 조건부로 허락하고 초대 수상으로 안드레 미다 를 선출했다. <카메룬입법회의>는 프랑스의 속임수 조직에 불과했다. 하지만 카메룬 으로서는 독립을 향한 초보적 발전으로 여길 수 밖에 없었음으로 하나의 <동상 이몽>의 <카메룬입법회의>가 되고 있었다.

안드레 미다는 유명한 추장의 아들로 1917년에 태여 났으며 또 다른 부족의 추장의 딸과 결혼하여 프랑스에게 만만치 않은 카메룬의 지도자상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안드레 미다 초대 수상은 신학과 법학을 전공한 지식인으로 카메룬의 엘리트층에 속하는 지도자상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드레 미다 초대 수상과 프랑스 점령군 사이에 자연히 경계와 불화가 발생하여 결국은 1년 후에 해임될 뿐만 아니라 국외로 추방당했으며 또 다시 3년동안 투옥되였다가 1980년에 63세로 감옥에서 비참하게 사망 했다.

1957년에 프랑스는 안드레 미다의 후임으로 아마도우 아히조를 수상으로 선출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아히조 신임 수상은 프랑스의 “예스맨”으로서 카메룬을 위한 수상이 아니라 프랑스를 위한 어용 정치인으로서 수상 자리에 올랐다.


3. 카메룬의 독립과 독재정권 51년


카메룬의 제 2대 수상 자리에 올라 앉은 아히조 수상은 <카메룬 연합,UC> 을 조직하였다. <카메룬 연합>은 국가연합이라는 미명하에 프랑스와 합하여 카메룬공산당 게릴라를 소탕하는 작전을 제일 큰 과제로 여기고 전개했다.

아히조 수상은 반프랑스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면서 지휘한 움 뇨베를 1958년에 살해 했다. 하지만 반프랑스 공산주의 게릴라 활동은 카메룬에서 와해되지 아니하고 1982년에 아히조 대통령 정권이 끝날 때까지 줄기차게 지속되고 있었다.

1960년 1월 1일에 카메룬을 프랑스 식민통치에서 독립하여 아히조 수상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1961년 10월 1일에는 카메룬의 20%를 영국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까지 모두 통합하여 동서가 하나된 연합공화국이 창설되였으며 아히조는 연합공화국의 대통령이 됬다.

아히조 대통령은 1924년 생으로 무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선전신 기사로 오래 동안 일하다가 지방정부에서 부터 중앙정부의 고위직을 두루 거쳐 대통령이 됬다.

아히조 대통령은 어린시절 부터 독일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의 식민통치하에서 유럽인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문화적 노예로 살아온 카메룬의 역사에 대하여는 아예 눈과 귀를 막고 노예근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오직 정권욕에만 불타 오르고 있었다.

1966-70년에 아히조 정권을 반대하는 카메룬 공상당 게릴라 공격에 시달렸으며 지하활동으로 인하여 정치상황이 매우 불안 했다. 1972년에 아히조 대통령은 서방의 도움으로 힘을 얻어 카메룬의 고질적인 동서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한 신헌법을 제정통과 시킴으로서 정치적 안정을 얻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폭동과 반정부 시위를 막기위한 언론의 통제를 줄곳 강화 했으며 그리고 각료급 인사들의 계속적인 파면으로 인하여 아히조 대통령은 정권의 위기와 시련을 계속 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히조 대통령은 이러한 정치적 불안속에서도 서방이 지켜주는 절대권력을 유지하여 1960년 부터 1982년 까지 5선 대통령으로 22년 동안 집권 했으며 1982년 11월 6일에 아히조 대통령은 건강상의 이유로 갑자기 대통령 직을 스스로 사임했다.

헌법 조항에 의거하여 폴 비야 총리가 대통령직을 승계 했다. 아히조 대통령의 갑짝스러운 스스로 사임에 대하여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에는 프랑스 의사의 <허위 진찰 보고설>이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히조 대통령의 스스로 사임에 대하여 역시 프랑스의 음모설이 유력하게 전해지고 있다.

아히조 대통령은 카메룬 북쪽의 이슬람교 지역의 출신이다 . 그런데 아히조 대통령의 후임자로 등장한 당시 총리였던 폴 비야 신임 대통령은 남부의 기독교 지역의 출신이며 자기 자신이 진실한 기도교인이라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었다.

아히조 전임 대통령과 폴 비야 신임 대통령과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분명히 어떤 정치적 음모가 숨겨져 있음이 확실하다.

1982년 11뤌 6일에 대통령직을 사임한 아히조는 1983년 7월에 프랑스로 망명의 길을 떠나야만 했다. 아히조 대통령 정권하에서 요직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 숙청을 당했다. 그리고 아히조의 초상화를 제거하고 아히조를 상징하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카메룬 땅에서 없이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뿐만 아니라 1984년에는 프랑스에 망명중에 있는 아히조 에게 국가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내리기 까지 했다. 그 후로 부터 아히조는 조국에 귀국하지 못하고 프랑스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9년 11월 30일에 그의 나이 60세에 객지에서 외롭게 사망했다.

의문 투성이로 카메룬의 제 2대 대통령으로 등장한 폴 비야는 누구?

폴 비야 대통령은 1933년 생으로 프랑스에서 정치학 학위를 받고 1961년에 카메룬에 귀국하여 전임 대통령 아히조 대통령의 정권하에서 문화부 차관을 비롯하여 여러 고위직에서 활약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높이 쌓고 있었다.

1975년에 케메룬의 초대 총리가된 폴 비야는 아히조 대통령과 8년동안 동거하면서 친프랑스 정권을 잘 유지해 왔다. 그런데 어느날 갑짜기 폴 비야 총리는 아히조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고 아히조 대통령을 몰아내는 정적으로 돌변하였다.

아히즈 대통령의 건강문제를 이유삼아 대통직 퇴임을 스스로 하도록한 후에 당시 폴 비야 총리는 헌법에 의거하여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1982년에 대통령직을 승계 받은 폴 비야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제를 5년에서 7년제로 개정하여 장기집권을 위한 길을 열어 놓았다.

폴 비야 대통령의 대외정책은 말 할 필요도 없이 종주국 프랑스를 비롯하여 미국과 친서방 정책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국가 기본 주요산업인 고무, 바나나, 코코아등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비야 대통령의 집권 10년후인 1990년대초에 들어서서 카메룬의 상환불능의 외채가 늘어나 87억 달러에 이르고 있었다. 경제적 실리 측면에서 지나친 외세의존에도 불구하고 경제난은 더 심화되고 있었다.

폴 비야 대통령의 정치 형태는 종주국 종속이론의 모델이 되고 있다. 카메룬의 언어는 프랑스어와 영어가 공용어이다. 모국어가 없으니 국민들의 의식을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부족하다. 2인 대통령이 51년 동안 장기독재정권을 이끌어 온 그 원인을 가히 알 수 있겠다.

카메룬의 면적은 475,422km2로 미국의 캘리포니아보다 약간 크며 아프리카 대륙의 중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로 인구는 약 1천 9백만이다. 카메룬는 해안,사막, 산악 우림과 평야등 골고루 가지고 있음으로 아프리카의 특질을 경험할 수 있는 나라이다. 카메룬의 주요 종교는 기독교 64% 이고 이슬람교 24%이다.

하지만 카메룬의 범죄율은 세계 2위로 여행에 극히 조심해야 하는 위험한 나라들 중의 하나이다.

폴 비야 대통령은 남부의 기독교 출신 대통령으로 집권 초기인 1984년에 북쪽 이슬람계의 반정부 쿠테타를 당했다. 하지만 비야 대통령은 프랑스의 도움으로 재빠르게 정권을 다시 장악하였으며 1988년에 무사히 첫번 재선되였다.

그후 비야 대통령은 대통령의 임기를 7년제로 개정하였으며 2004년에 4선에 또 당선되여 현재 28년째 장기집권을 하고 있다. 하지만 폴 비야 대통령의 28년의 장기집권은 무조건 순풍에 돗단 배 처럼 평온하지는 않았다.

1990년대 초에 비야 대통령의 독재에 분개한 민중들은 비야 대통령 정권의 부패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 했고 새로운 정당인 <사회 민주주의전선>이 결성 되였다. 비야 대통령은 강력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야당의 출현을 방지하려 했지만 오히려 1-2년 기간에 30여개 야당들이 출현하여 정치사회에 혼란이 게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10여개의 야당들이 독자적으로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야당들이 감행한 파업항의도 비야 대통령에게 정권의 답보상태로 몰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폴비야 대통령은 외세의 힘을 끝까지 끌어 들임으로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수 없이 많은 야당들이 준비가 덜된 상태에서 뿔뿔이 흐터지는 기회를 교모하게 이용하여 선거 때 마다 승리하여 재선에 성공하고 있었다.

폴 비야 대통령의 선거승리는 국민의 선거 불참으로 3분의 1도 안되는 유권자들의 투표율과 그리고 세계의 선거관측자들로 부터 선거사기 부정선거라는 비난속에 치려진 선거임에도 불구하고 폴 비야 대통령은 항상 재선의 영광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면서 27년 동안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다.


세상에 이런 대통령도 있다.

폴 비야 대통령은 어느 해 여름에 프랑스 서부에 있는 해변 휴양지에서 여름 휴가를 대통령 부인 찬탈라 여사와 즐기고 있었다. 비야 대통령은 수행원들과 함께 3주동안이나 지내고 있었는데 투숙한 고급 방이 43개 이며 호텔비용이 80만 유로이였다고 한다. 특히 프랑스 언론과 세계 여론들은 비야 대통령이 부정으로 얻은돈으로 휴가를 즐기고 있다라고 일제히 보도 했다.

카메룬 인구 1천 900만이 1인당 1년 국민 소득이 $1,500 이며 전체 인구 절반이절대빈곤 선상에서 굶주리고 있다.

그럽에도 불구하고 비야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카메룬 공보장관은 말 하기를 <폴 비야 대통령은 국가가 자신에게 배정된 돈을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사용할 권리가 있다>라고 강조하면서 언론들의 보도는 카메룬의 불안을 유발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라고 비난했다.

이글을 끝 맺으며,


카메룬의 역사적 현실을 고찰하면서 당장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코리아 남녁땅에서 역시 일본의 식민지와 분단, 군부독재와 미국에 의한 경제적 지배 그리고 미국의 퇴패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과 카메룬과의 공감대를 강하게 불러 이르키고 있다.

초대 아히조 대통령과 제 2대 폴 비야 대통령과의 정권 교체는 프랑스와 미국이 사전에 뒤에서 치밀하게 짜고 조정한 51년 동안의 친외세 독재정권인 것이 확연히 들어 나고 있다.

이것이 어찌 남의 일인가?

리비아의 사태를 보고 북반부의 핵보유가 다행이라고 웨치고만 있지말자.

우리는 오늘 카메룬의 정치적 현실을 똑바로 보고 남반부의 불행에 대하여 깊이 생각헤 보아야 하겠다.

2012년 대선을 위하여 전략을 올바로 세워서 야권의 선거승리를 반드시 이끌어 냄으로서 카메룬의 전철을 또 다시 따르지 말아야 하겠다.(끝)




[출처 : 유 태영 박사 2011-04-11]

민족통신

댓글목록

profile_image

차카게산다님의 댓글

차카게산다 작성일

한국인들이 읽고 참고할만한 좋은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배부른 사람들에게는 밑도끝도 없는 얼빠진 소리로 들리겠지만...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