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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금선사에 안치된 신념의 강자 동지들을 찾아서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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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451회 작성일 22-09-11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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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글에서 계속하여)




그리운 문상봉선생을 그리면서

문상봉 선생은 1925년 평북 용천에서 중농의 가정에서 3형제 중 3남으로 출생했다.

1939년 용청 동학공립심상소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1941년에 일제의 폭압을 피해 가족과 함께 중국 동북지방 흑룡강성 용안현 해림촌으로 이주하였다.

1942년-1945년 사이에 일제의 징병영장을 거부하여 피해 다니다가 8월에 붙잡혀 징용으로 끌려가다 탈출에 성공하여 11일만에 조국광복을 맞이했다.

1946년에 중국 팔로군에 자원 입대하여 조선인민들로 인민해방군 166사에 배치되어 장개석 국민당과 격전을 전개했다. 1948년 화북지구 대회전에도 참가하였다.

1949년에 김창덕부사단장의 인솔로 조국으로 돌아와 조선인민군 제5사단에 편입되어 정찰병으로 활동했다.

1950년 전쟁시기에 동부전선 강원도 고성 경북영덕 영일 포항비행장까지 진군했다.

1955년에 제대하여 남포의 8.15조선소에 배치되어 전후 복구 사업에 전력을 다했다.

1956년에 장용복님과 결혼하여 딸 정애와 정옥을 낳았다.

1958년부터 조국통일사업인 해상 공작임무에 투신했다

1960년 7월 경북 영일만에서 체포되어 소위 국가보안법으로 무기형을 받고 서울 대전 전주에서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비전향 말살책에 의하여 인간이하의 처우속에 각종 고문구타를 수없이 당하기도 했다.

1987년 4/11일에 형집행정지로 출옥 하게 되었다.(27년복역했다)

출소후 전주 미선꽃집에서 일하다가 2001년 2/6일에 제2차송환을 신청하고 3월에 서울 만남의 집으로 와서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었다.

2010년 7/29일에 옥중 후유증으로 봉천동 청운복지센터에서 요양하다가 2012년 1/31일 강서구 신사 노인 요양원으로 옮기었으나 2013년 2/15일에 오랜옥고의 후유증을 극복 못하고 우리 모두의 맘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언제나 말 수가 적고 외유내강의 아름다운 도덕적 품성을 갖춘 선생이셨다.

그리운 문상봉 선생이시여!

선생의 일생을 회고해 볼 때에 살아 생존하다가 먼저가신 팔로군 출신은 몇동지 뿐인데 문상봉선생도 팔로군 출신임을 처음 알았습니다. 출생 후 일제 폭압을 반대하여 동북지방에 이동하여 사시다가 조국해방을 맞아 팔로군출신으로 인민군으로 편입되어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에서의 혁혁한 공훈을 우리 후대들에게 기리기리 새길 것입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2년 8/28일 전국묘소답사반 일동 올림.



(제 7신)

그리운 유병호동지를 그리면서

유병호동지는 1933년1/27일에 조선에서 출생했다

1954년에 대남공작원으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1959년에 체포되었다.

1985년 8.15일에 특사로 27년을 복역하고 출옥했다.

출옥 후 경기도 광주에서 서예학원을 운영했다.

그후 경기도 이천에서 13년간 도자기 그림 작업을 했다.

1999년에 수원에서 창작 문인회 작가로 활동했다.

이 모든 것은 북에 있을 때 1947에 평양 국립 미술학교 교원을 했기 때문이다.

본 미술학교는 1962년에 평양미술대학으로 개칭되었다.

1952부터 1954년까지 두 번이나 내려왔었다.

그리하여 1959년에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1985년 8.15특사로 27년복역하고 출옥했다.

출옥 후 경인범 고문, 6.15 수원본부문인회 동우회 지도 강사를 했다. 1910년 6.15 10주년에 서화전 등에 활동했다.

그리하여 2010년 3월에 간암 판정을 받고 활동하다가 12/17일에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마는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그리운 유병호 동지시여!

동지의 일생은 우리 반제 반미 자주전선의 예술가인 동시에 전선의 투사로서 기능과 역할을 다한다는 성의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고 마지막 생을 올곧게 바쳤다고 생각합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후대에게 맞기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모님은 항상 동지를 생각하며 마지막 생을 다할 때까지 동지를 생각하는 마음 변치 않을 것입니다.

2022년 8/28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올림,



그리운 김선분동지를 그리면서

김선분동지는1925년 2/14일에 서울 중구에서 출생했다.

김선분동지는 1945년 광복을 맞아 서울중구필동 여성동맹위원장을 했다

1950년 9.28후퇴를 맞아 북상하여 중등교육까지 받고 남으로 내려왔으나 체포당하여 군법에 의하여 10년형을 치루었다..

.

1962년에 출옥하여 감옥에서 인연을 맺은 박정숙동지를 찾아 같이 살며 투쟁도 같이 했다.

1975년에 반공법위반으로 2년형을 살았다.

출옥 후 양심수후원회에 가입헸으며 범민련 활동중 박정숙동지와 같이 범지도부 탄압으로 감옥에 다 들어가 있을 때 누구못지 않게 범민련 사수를 위해 매일 동대문 사무실을 지키는 공로를 세웠다.

박정숙동지와 같이 통일광장회원이며 범민련 고문으로서 범민족 로선에 입각한 반미 자주 만족통일 전선에서 일생을 바치었다

김선분동지는 감옥의 후유증으로 투병생활 긑에 2015년 8/4일에 90세를 일기로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마는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그리운 김선분동지이시여! .

김선분동지의 일생은 여성 지도자로서 전선의 투사로서 혁혁한 공로를 세우며 일생을 헌신했다고 민중의 투쟁역사는 평가할 것이다.

감옥 투쟁에서 맺은 동지적 의리 관계를 조금도 저버리지 않고 이세상 다할 때까지 한마음 한뜻으로 지킨 동지는 김선분동지와 박정숙동지들이라는 것으로 기록되게 될 것이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비랍니다.

유분은 서울 금선사에 안치 되어 있습니다.

2022년 8/28일 전국묘소답사반 일동 올림.



(제8신)

그리운 강담동지를 그리면서

강담동지는 1933년에 출생했다.1954년에 인민군에 입대하여 당원이 된 다음에 금강산과 해금강에서 8년동안 근무했다.

1964년 8월에 중앙당 학교를 졸업하고 당중앙에 소환되어 1965년 3/5일부터 통일사업에 참가하여 남하하다 울룽도 앞바다에서 체포당하고 말았다.

미합동 수사본부로 끌려가 대공분실에서 6-7개월간 갖은 고문구타를 당했다.

결국 선장과 부선장은 사형집행되고 항해사 겸 당책임자였던 강담선생은 일심에서 사형을 받았으나 상고심에서 무기로 확정되었다.

이 때 고문구타로 한쪽 귀 청력을 잃었다.

그리하여 1988년 11/20일에 특사로 24년을 살고 출옥하게 되었다. (당시58세였다)

2001년 2/6일 제2차 신념의 고향으로 송환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2020년 1월에 폐암 4기진단을 받고 투병생활하다가 2020년 8/21일에 그리운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마는 마음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그리운 강담동지시여!

강담동지의 일생은 조국과 민족의 숙원인 미제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전선에서 헌신한생애입니다.

출옥 후 양심수 후원회 회원이며 동시에 비전향 장기수들의 모임인 통일 광장 회원으로서 범민련 활동과 6.15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기자회견이나 각종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가하였으며 특히 매주 1회의 민가협 집회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등 맹렬한 투쟁을 한 동지이다.

항상 쾌활하고 인성이 착하여 인간관계에 있어서 따를 수 없는 독특한 도덕적인 모범을 보임으로서 후대들의 존경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몹쓸 병마에 걸렸어도 아랑하지 않고 그렇게도 그리운 신념의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되었으니 이 원한은 우리 후대들이 이어 받게 되었습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유분은 우리 동지들이 모셔 있는 금산사에 안치되어 있다.

2022년 8/28일 1주기를 맞아 양심수 후원회에서 추모의 날을 맞아 강담선생의 고귀한 생애를 기리며 미제를 몰아내는 가열찬 투쟁의 의지를 다짐했다.

출옥 후 결혼하여 사모님이 항상 강담선생을 생각하고 있다.

2022년 8/28일 전국묘소답사반 일동 올림.



그리운 이성근 동지를 그리면서

이성근 동지는 1931년 9/17일 전북 쌍치에서 출생했다

1950년 7월에 강제 학도병 출정 반대로 정읍농업학교 5년 중퇴했다.

1950년 9.28후퇴를 맞아 쌍치 유격대에 참여하였다.

그후 노령학원에서 정치군사교육을 수료하고 1951년 7월에 순창군 유격대로 재편되어 산내면 해방작전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1951년 12월에 전북 장안산에서 적들에게 생포 당하였다.

전주감옥에서 살다가 대전감옥으로 집결하는 바람에 대전 감옥 6사에서 필자와 한 감방에서 생활도 했다.

이때에 박정희가 군사팟쇼 구테타를 일이켜 정권을 쥔 후 소위 반공을 국시로 삼고 감옥의 비전향자들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했다.

그 때에 구테타 이인자였던 이주일 부의장 일행이 군복을 입고 각방을 순찰 과정에 우리방을 보고 왜 소년수가 있느냐고 간수에게 물어 보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 후 재건체조 반대 건으로 4가 먹방에 들어갈 때 까지 같이 살았다.

그리하여 1967년에 비전향출옥했다는 것만 알고 있다.

출옥 후 1993년에 평통사 이사로 있었다. 그리하여 세기의 압법인 사회안전법 폐지로 청주보안 감호소에서 39명이 석방될 때에 출옥해 보니까 헤어진 지 30여년이 되었다.

1972년에 비전향 출옥된 임방규 동지와는 알고 지냈던 모양이다.

이성근 동지의 통일광장 가입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우리 동지들 중

몇 동지가 30여년의 사회생활을 누가 어떻게 증명하느냐고 반대하였다.

이때 필자는 임방규 동지가 추천했는데 방규동지를 믿는다면 가입시켜도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결국 가입을 승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평통사 이사로 있을 때 3자연대체이며 범민족 대단결의 구심체인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남측본부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평통사 이사를 접고 범민련에 들어와 고문하다가 사업감사까지 했던 것이다.

이성근 동지는 영리하고 원칙성이 강하며 감옥에서도 영어와 불어 원서를 다 보는 것을 보고 나도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위암에 걸려 수술까지 받았으나 미제보다 악독한 암 병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2017년 87세로 우리 모두의 곁은 떠나고 마는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시신은 한양대병원에 해부용으로 쓰여도 좋다는 각서를 쓰고 죽을 때까지 무료로 수술하고 입원치료도 받았다.

그러기 때문에 시신 없는 장례식을 하고 얼마 후에 시신을 화장해서 금선사에 안치하게 되었다.

그리운 이성근 동지시여!

동지의 일생은 죽은 후에도 남다른 여유를 가지고 해부학을 배우는 학도들에게도 이로움을 주는 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동지들에게 그리고 후대들에게 진실한 경험과 교훈을 남기었습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유분은 금선사에 안치되어 있다.

2022년 8/28일 전국묘소답사반 일동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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