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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별의 세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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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568회 작성일 22-10-04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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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6

도당학교는 구례군 마산면 문숙동에 위치를 정했다. 지리산자락에 붙어있는 구례군은 6. 25이전부터 빨찌산활동의 거점중 하나였다. 동으로는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에 걸쳐 웅장하게 솟아있는 지리산이 있었고 남으로는 역시 험준한 백운산이 있었다. 도당학교는 백운산에 있는 도당과 밀접한 련계를 가지기에 편리한 곳을 택하였던것이다.

일명 군정대학으로도 불리운 학교에서는 《사회발전사》, 《당건설과 당활동》, 《광복후 조선》 《조국전쟁》과 함께 레닌의 《1보전진 2보퇴각》, 《무엇을 할것인가》도 가르쳤다. 군사과목으로서는 《군사원리》와 《유격전술》을 기본으로 사격, 대렬훈련과 더불어 군사교관 정대천이 직접 한개 소대씩 인솔하여 경찰지서습격, 교량파괴, 매복과 습격을 실지 전투로 교습시켰다.

김진서가 맡은 과목은 《사회발전사》와 《당건설과 당활동》이였다. 정주군태생인 최재윤이 《조국전쟁》과 레닌의 로작들을 맡았는데 책임강사밑에는 보조강사들이 있었다. 교장은 라주출신의 55살난 박일섭이였다. (그는 6개월후에 있은 대《토벌》때 체포되여 총살당하였다.)

1기에 100명내외의 학생들이 공부하였는데 3기를 채 끝내지 못하고 적들의 대《토벌》로 흩어져버렸다. 그렇지만 수많은 청장년들이 지리산에 들어가 학교에서 배운대로 사람들을 고무하고 분산된 대원들을 규합하여 끝까지 목숨바쳐 싸웠다.

학교를 내올 당시만 하여도 승리의 날이 멀지 않았다고 확신하고있던 도당위원장 박영발은 몇차례나 강의에 참가해 들어보고 매우 만족하여 《여기서 배운 동무들은 이제 다 면당위원장급이상 간부로 될것이요!》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학생들속에는 녀자들도 적지 않았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처녀,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한 처녀가 있는가 하면 국민학교나 겨우 다닌 녀인들도 있었다.

출신과 경력에 관계없이 그들모두가 새 사회건설의 꿈을 안고 산죽으로 대충 이영을 얹고 억새풀을 깔아놓은 가막사(림시막집)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2기생들이 졸업할 무렵인 8월 어느날엔 7살난 처녀애가 학교에 왔다. 이름은 아라, 성은 누구에게도 대주지 않았다. 부모들에 대해 물어도 손톱눈만 한 입을 꼭 다물고있을뿐이였다. 아라를 데리고온 사람은 최동환이라는 인민군 하사관(상사)이였는데 미군중위복장에 엠원소총을 메고있었다. 수천리 싸움길을 헤쳐온 로병이 분명했다. 왼쪽볼에 칼자욱 비슷한 흉터가 나있어 험상궂게 보였다. 그가 진서에게 아라를 맡기면서 성이 난듯 말했다.

《난 상급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군인입니다. 이애한테 글을 배워주시오. 교장선생이 책임강사선생한테 직접 말하라고 했습니다.》

북방말씨였다. 함경도억양과 강원도투가 섞인 몰풍스러운 어조였다. 진서는 기분이 언짢았다.

《상급이란 누굽니까?》

《그건 묻지 말아주십시오.》

그럴수도 있다. 빨찌산에서는 자기와 관계없는것은 일체 묻지 않기로 되여있는것이다.

《그럼 이애한테 사회발전사나 당건설리론을 배워주라는겁니까?》

《그런건 난 모릅니다.》

진서가 골을 내려하자 그가 덧붙였다.

《난 시키는대로 말했습니다. 당학교에 데리고가서 글을 배워주라고 하시오!… 이게 답니다.》

왼쪽볼의 흉터가 실룩거리는것을 보고 진서는 보총소제대같은 그와는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잠을 못잔탓인지 빛을 잃은 최동환의 침울한 두눈과 입술모서리가 찡기는것을 더 이상 마주보고싶지 않았다. 마침 그가 큰 소리로 물었다.

《그럼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진서는 그의 침울한 눈빛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뭐 좋을대루…》하여 그는 갔다. 어데인지 알수 없으나 멀리로, 자기를 부르는 싸움터로 급히 가버렸다. 그런데 그가 사라지자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혹시 저 사람은 재진격해나오는 인민군대정찰병은 아닐가?… 아라를 데리고 교장에게로 갔다. 그러나 교장도 그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 여하튼 무슨 사연이 있을것이라고, 책임강사가 바쁘면 보조강사한테 맡기자고했다. 그밖의 일은 녀학생들이 다 돌봐줄것이고… 교장이 한 말이였다.

아라는 귀여웠다. 서울말씨로 보나 7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바느질을 하는 솜씨는 물론 그 무슨 노래이든 막히는것이 없는것으로 미루어 교양있는 부모의 손에 자란것이 분명했다. 아버지, 어머니의 이름은 대지 않았어도 아버지가 《조직부장》이라는것만은 은연중에 토설했다.

너 이담 크면 무얼할래? 하고 물으니 《나도 아버지처럼 조직부장할래요.》라고 말했던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애를 《조직부장》이라고 불렀다.

아라는 매 강의시간마다 뒤자리에 턱을 고이고앉아 열심히 듣군 하였다.

미래의 《조직부장》이 제일 좋아한 강의는 북반부에서의 민주주의시책 그리고 《사회발전사》였지만 맑스주의고전강의에도 빠지지 않았다.

벼짚이나 마른 풀을 깔고앉아있는 학생들 맨 뒤쪽에서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있다가 학생들이 강사의 질문에 뒤더수기를 긁적거릴 때면 《레닌동지, 레닌동지라고 해요.》 하고 엉터리대답을 대주지 못해 속상해하군 했다.

휴식시간이면 그애가 떠들썩한 화제의 중심이였다.

《아라, 사람의 조상이 누구지라?》

《원숭이.》

《저런! 그럼 넌 원숭이딸인디?》

《아녜요. 난 조직부장딸이예요!》

적정이 있을 때면 제일 먼저 달려나오기도 했다.

《동지들! 덤비지마세요. 군사교관동지가 솔골로 피하라고 했어요. 애고, 속상해. 제발 내 말 좀 들어주세요. 동지들!》

누가 그애를 7살난 어린애로 보았겠는가. 군사교관 정대천의 련락병이기도 했고 의무요원 김신옥의 보조원이기도 했다.

《아프지요? 그래도 참으세요, 동지!》

그애를 볼 때마다 진서는 아릿한 향수가 가슴노리를 적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애의 모습은 곧 정든 고향과 처자들과 이어진 한가닥 애달픈 회오의 샘줄기였다.

그의 고향인 평남도 덕천군 덕천면 무릉리, 그곳에서 태여났지만 소년시절은 맹산군 옥천면 북창리에서 보내였다. 광복전엔 3번씩이나 집을 옮기며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아버지, 어머니와 형님인 학서, 동생인 길서, 누이동생들인 봉선이와 봉숙이 모두가 삼벌에 나가 땅을 뚜지고 김을 매면서도 범벅한덩이로 굶주린 배를 달래야 했다. 온 집안이 진서만은 공부를 시키려고 애썼지만 15살때 소학교를 1등으로 나온후엔 더 이상 진학하는것을 단념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소년 진서는 가창역으로 나갔다.

곡괭이며 궤간자를 메고 매일같이 철길을 따라가며 선로반일을 해야 했다.

그 시절 진서는 무엇을 생각했던가. 눈앞으로 멀리 뻗어간 두 줄기 은빛레루에 꿈을 실어보았지만 기차가 지나가면 레루우에 뿌려진 오물과 매캐한 먼지만이 남군 했었다. 했어도 그 고향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리워한다. 광복의 첫 소식에 정신없이 철길을 따라 달리던 진서, 마을에 뛰여들며 《광복이예요. 나라가 광복됐어요!》 하고 목터지게 소리치던 그 달구지길을 그리워한다. 집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누이동생 봉선이를 붙안고 미친것처럼 웃어댔다.

《얘 봉선아, 너 인젠 숨지 않아두 돼. 정신대(위안부) 근심 안해두 돼!》

《오빠, 그게 정말이가?》 봉선이도 소리쳤다. 《오빠, 실성하지 않았어. 신발한짝은 어쨌어?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릴 하는거예요, 예?!》

실로 꿈같은 일이였다. 아버지가 리농촌위원장으로 토지개혁의 앞장에 나선것도, 진서가 면민청위원장, 또 맹산군민청위원장으로 뽑힌것도, 평남도공산당책인 항일투사 안길동지가 토지개혁사업을 지도하러 내려왔다가 그의 집에서 류숙하며 영명하신 장군님께서 펴시는 정책에 대하여 밤늦도록 이야기하던것 등 모든것이 꿈같이 흘러갔다. 집도 새로 지었다. 수정천기슭의 큰 길가에 룡마루를 높이 세운 큰 집을. 널마루와 미닫이유리문, 그 문을 열고 진서는 도민청부부장사업을 맡고나갔다.

그가 활개치며 동구밖을 나설 때마다 동리늙은이들이 대통을 탁탁 두드리며 쑤왈거렸다.

《저 진서를 따라댕기는 젊은이들이 인젠 전기줄에 앉은 참새만큼이나 많다오. 참 세상은 좋은 세상이다. 두억시니같던 진서가 진사님이 됐구려.》

《아따, 진사님은 또 뭐요. 도민청부부장님 보구.》

《허허… 그래 도민청에 가서 뭐한다구?》

《요샌 문맹퇴칠 한다구 뛰여다닙죠.》

《어쨌든 큰 변을 낼 젊은일세. 옛날엔 동네장독이나 깨뜨리던 녀석이 요샌 도안의 점쟁이들의 대가리를 다 깨뜨린다니… 좌우간 용킨 용해!》

그 《용한》 진서가 얌전한 색시를 맞아 잔치를 할 때엔 온 동네가 법석이였다. 이름처럼 곱고 착실한 새색시 정인화를 보려고 군안의 청년들이 다 모인것 같았다. 술잔들마다 찰랑찰랑 차고넘치여 베적삼우에 술방울을 튕겼고 조무래기들은 울바자를 타고넘으며 왁작거렸다. 노래인들 얼마나 많이 목쉬게 불렀으랴. 《노들강변》, 《새타령》, 《밭갈이노래》… 밤이 깊어 술취한 늙은이들이 서로 붙안고 비칠거리며 돌아갈무렵 흉측한 젊은이들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신방의 문창호지에 구멍을 내였다.

그것이 집이였고 고향이였다. 그러니 어찌 그립지 않으랴. 새 살림을 편 그 집에서 얼마후엔 저 아라처럼 예쁜 딸들이 태여나기 시작했고… 지금도 진서는 지난 50년 7월 고향을 떠날 때 안해가 맏딸 화순이의 손을 잡고 옹알대는 갓난애 정순이를 둘쳐업은채 동구밖까지 따라나서며 오래도록 손을 흔들어주던 모습을 잊을수 없다.…

그해 진서는 스물다섯살이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총각으로 보았지만 구태여 두 딸을 가진 아버지라는것을 밝히려하지 않았다. 사랑과 인생의 식탁에서 더 많은것을 골라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멀리 있지 않는 자신의 지난 날조차 돌이켜볼새가 없었던것이다.

그러나 아라를 통하여, 귀엽고 천진하고 순결한 그애의 모습을 통하여 자기의 어린 시절과 사랑스러운 딸들을 그려보게 된것이였다. 그리하여 김진서와 아라는 친구가 되였다. 진서는 어버이다운 애정으로 아라를 보살폈고 아라는 그림자처럼 그를 따르며 어린애의 사심없이 깨끗한 이슬비같은 애정으로 그의 마음을 적셔주었다.

어느날 정대천이 그를 따로 불렀다.

《전번에 아라를 데려왔던 최동환이 생각나나?… 오늘 반내골에 갔다가 그를 만났네. 그와 꼭 같은 미군복차림을 한 사람들이 다섯이나 따라다니더군.》

《…》

진서는 잠자코 있었다.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수 없어 한눈을 쪼프리며 기다렸다.

《아무래도 수상해서 따지고들었지. 동무넨 어느 부대요? 왜 소속을 밝히지 않는가?… 했더니 그 친구가 〈나도 모르오.〉하질 않겠나. 이때다 하구 다불러댔지. 〈이봐, 동문 근위부대 상사였다구 했지? 난 보병중대장 정대천이요. 그래 동무에겐 상급도 없는가. 빨찌산이 됐다구 군인선서도 다 잊었는가?!〉… 아 이랬더니 그 친구 거수경례를 붙이면서 〈상위동지, 고치겠습니다!〉라고 하질 않겠나. 그러면서도 그것만은 불지 않습데. 소속말이네.》

《그래서 어떻다는거요?》

《내 생각엔… 지리산에 리현상부대가 온것 같네. 남부군말일세. 부대전체가 아니라 일부… 간부들이 왔을수 있어. 박영발도당위원장이 지리산에 들어가 있지?… 전북도당 방준표위원장과 남경우경남도당위원장도 왔네.》

진서는 머리를 기웃거렸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거요?》

《그렇게도 모르겠소?… 첫째는 전선형편이 달라진것 같다는거구 둘째는 … 아라말일세. 내 추측이 맞다면 남부군 어느 간부의 딸이 아닐가?》

진서는 손가락마디를 뚝뚝 꺾고있다가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존경하는 군사교관동지, 아라는 서울태생이요. 내 알기에 남부군의 중요 지휘관들은 다 이곳 출신이고 리현상 그분만이 서울서 살았는데 그분의 딸은 하정례동무와 동갑일세. 이건 확실해… 전선형편이요 뭐요 하는 추측도 락제야.》

얼굴이 상기된 정대천이 넙적한 머리를 내밀며 자기의 주장을 증명하려들었지만 진서는 팔을 내젓고말았다.

《학생들에게 전투조법이나 잘 가르치게!》

×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앉고말았다. 성냥을 더듬어 찾아 불을 켰다. 북슬개 《도라》는 그의 발치에 엎드려 가릉가릉하며 자고있었다. 그 미물같은것도 범에게 쫓기는 꿈을 꾸고있는듯 했다.

담배를 피워물었다. 더는 잠들지 못하리라는것이 명백했다. 지금은 새벽 4시, 비전향장기수들은 특이한 감각으로 시간을 알아내는데 습관되여있다. 계절, 기온의 차이, 풀벌레의 울음소리, 별들의 움직임, 습도, 각자가 가지고있는 병세의 차이 그리고 무어라고 딱히 찍어 말할수 없는 육체적감각으로 시간을 어김없이 맞히군 했다.

가슴을 우벼내는듯 기침소리가 터졌다. 북슬개가 놀라서 재빛털속에 우엉하게 들여다보이는 작은 눈으로 그를 살폈다. 그는 담배불을 꺼버렸다.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밤사이 개인 하늘이 푸릿해지고있었다. 별들이 사물거렸다. 우중충한 숲속에서 비에 맞아 떨어진 나무잎들이 우수수 바람에 불려 굴러다니는 소리가 났다. 골개물소리는 여전히 변함없는 곡조로 고달픈 려행길을 주절거리고… 그는 채석장 한끝까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날 정대천이 한 말, 그의 추측이 전적으로 옳았다는것이 곧 증명되였다. 전선이 고착되면서 유격대《토벌》에 수많은 군경이 투입되였고 지리산에는 리현상사령관과 정치위원 여운철 등이 먼저 와서 전라남북도, 경상남도당위원장들과 유격대사령관들을 불러 긴급회의를 가졌던것이다. 최동환은 리현상의 호위임무를 받고 남부군 서응석지대에서 선발되여왔다고 한다. 그를 직접 파견한 사람은 남부군(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으로 명명되던 첫 시기 사령관 리현상, 총참모장 박종하와 더불어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였던 리재명이였다. 물론 이 모든것을 알게 된것은 정대천의 추측을 웃음으로 넘긴지 한달도 채 못되였을 때였다.…

김진서는 비에 젖은 숲의 씁쓰레한 냄새를 마시며 가만히 서있었다. 누가 쪽지를 끼워놓았을가. 정대천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추리하였을가?… 하정례와 아라ㅡ 그들에 대하여 알고있는 사람들은 거의나 죽었다. 그런데 누가 무엇때문에 이끼덮인 력사의 갈피에 묻혀버린 그들에 대하여 알고싶어하는가. 그리도 간절히 부탁하는가?…

40년전 그날에 벌써 정대천은 말했다.

《…남부군 어느 간부의 딸이 아닐가?…》

하여 그는 남부군의 간부들을 아는껏 기억을 더듬어보기 시작했다. 사령관 리현상동지를 제외하면 박종하, 김흥복(14련대출신)은 총각이였다. 박종하는 25살, 김흥복은 23살… 그밖에 류주목, 여운철, 차일평, 충북유격대에서 합류된 문춘도 제외대상이다. 그밖에 김선우, 리진범, 김갑재, 임만평, 손관일, 서응석… 별안간 그는 매를 맞은것처럼 머리를 잔뜩 수그리고 비틀걸음을 했다. 그 자신이 직접 상대해본 사람이라야 김선우, 류주목, 리진범(14련대출신)… 몇사람뿐이다.

채석장너머에서 새벽의 미명이 검푸른 하늘에 아지랑이처럼 피여나기 시작했다. 물러가는 밤의 어렴풋한 자취, 싱그러운 숲의 냄새까지도 날카롭게 자극하는듯 싶었다.

가설막으로 돌아온 그는 난로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아침식사준비였다. 북슬개가 꼬리를 치며 끙끙거렸다. 말라버린 빵쪼각을 먼저 개에게 던져주었다. 그다음 난로우에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그 주전자가 문득 하나의 기억을 불러내였다. 지리산의 달궁골에서 최동환을 따라갔던 릉선우의 통신대, 주전자가 끓던 동굴과 정치위원 리재명… 그도 역시 정치위원으로 불리웠지만 세상엔 거의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였다. 지리산빨찌산의 초기 정치위원이였던 류주목이나 남부군조직후에야 편입된 차일평은 진서가 출소후에 읽어본 《빨찌산의 딸》을 비롯한 여러 책들에서 과다할 정도로 언급되였으나 리현상부대의 락동강도하와 적후투쟁, 후퇴, 남부군으로의 체제개편, 남하로정에서 정치위원으로, 후엔 여운철다음의 제1부정치위원, 중앙당파견남부지도부 부책임자 겸 지리산유격부대 정치위원으로 활동한 리재명은 소외되여있었다.

그 책의 필자들이 취재한 지리산빨찌산 출신들의 기억이 흐려있었기때문일수도 있다. 아니면 그 회상자들이 그와 접촉한 일이 없을 정도로 남부군과는 별도의 지구사부대에서 보통대원으로 싸웠기때문일수도 있다. 숲속에서는 숲전체를 볼수 없는것이다. 그리하여 그 책들에 자신있게 써놓은 여러 부대명칭, 지휘관, 정치일군들이 자주 틀리거나 뒤바뀌게 되였다.

그 리재명이 아닐가, 리현상, 박종하와 더불어 남부군초창기부터 중책을 맡아싸웠던 리재명, 그는 죽은 사람들의 명단에도 비전향장기수 및 전향자들의 명단에도 없다. 더우기 아라를 데려온 최동환을 남부군에서 먼저 지리산으로, 리현상의 호위대원으로 선발해보낸 사람이 바로 그 리재명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지금껏 단 한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던 그가 40여년세월이 흐른 뒤 출소한 비전향장기수를 몰래 찾아와 하정례와 아라의 소식을 묻는다고 과연 상상이나 할수 있을가?…

머리가 지끈거리고 손이 떨렸다. 주전자에서 물이 끓으며 하얀 거품을 토했다. 마지막 한줌의 우유가루가 그 거품으로 다 쏟아져버리는듯 했다.

까짓거, 무에 아까우랴. 위가 굶주려 고통을 겪을것은 다 겪어보았다.

그는 까딱 움직이지 않고 소란스럽게 끓어번지는 주전자를 보고있었다.

뚜껑을 밀어젖히기에 안깐힘을 쓰며 부글부글 넘어나는 진액, 마치도 생의 끝까지 피를 토하며 싸워온 사람들의 피어린 삶을 읊조리는듯… 노래는 어디에나 있다. 삶이 끓는 곳이면 사랑의 노래가 있고 사랑이 있는 곳이면 아름다운 인간들이 있다.

이렇게 그는 생각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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