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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김일성주석 탄생 100주년과 나의 생애---김현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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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슴도치
댓글 1건 조회 5,751회 작성일 12-03-17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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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시간 2012.03.17 14:53:25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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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김일성주석 탄생 100주년과 나의 생애



김현환 박사는 김일성주석의 탄신100주년을 앞두고 <<김일성주석 탄생100주년과 나의 생애>>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면서 "김일성주석께서 탄생하신 태양절 100주기가 곧 다가 오고 있다. 나는 김일성주석을 직접 3번이나 접견한 사람으로서 나의 마음의 기둥, 신념의 기둥으로 주석을 늘 생각하며 살아 왔다. 주석께서 항일혁명의 투쟁 속에서 창시한 주체사상은 바로 나의 생의 나침반이 되었고 모든 종교와 사상들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었다."고 회고하며 "우리도 그분의 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몸소 보여준 애국애족의 길, 통일단결의 길, 자주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주석님을 회고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도 주석님처럼 영생의 삶인 사회정치적생명을 얻을 것이다."고 강조한다. 전문을 여기에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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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통일을 위한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를 소집했던 김일성 주석


[논단]김일성주석 탄생 100주년과 나의 생애




*글:김현환 박사(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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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김현환 박사
김일성주석께서 탄생하신 태양절 100주기가 곧 다가 오고 있다. 나는 김일성주석을 직접 3번이나 접견한 사람으로서 나의 마음의 기둥, 신념의 기둥으로 주석을 늘 생각하며 살아 왔다. 주석께서 항일혁명의 투쟁 속에서 창시한 주체사상은 바로 나의 생의 나침반이 되었고 모든 종교와 사상들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었다.


주석이 창시한 주체사상은 바로 우리 인류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방향을 제시해준 생명사상으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자주성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 어떤 구속과 예속에서 벗어나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써 자주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사회적 인간의 속성인 자주성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의 목적이며 보람이고 바로 민중의 자주성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 역사라고 주석은 밝혀주었다. 나는 주석을 접견한 후부터 그가 저술한 책들을 독파하기 시작하였고 주석의 사상을 심화발전시켜 김일성주의로 체계화 시킨 김정일위원장의 논문들도 다 읽었다. 그리고 주체사상을 강의하던 이름있는 학자들과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만나 토론하였다.


나는 주석의 글들을 읽을 때마다 넘쳐나는 그의 민중에 대한 사랑, 믿음, 헌신성, 소탈함을 느껴왔으며 그가 늘 내 곁에서 나를 지도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민중을 하늘처럼 여기고 늘 민중 속에 계시며 민중의 행복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셨기에 가장 곁에서 그를 보좌했던 김정일위원장은 주석의 유훈을 어떻게 해서라도 실천하기 위하여 일생 작업복을 입으시고 주석의 동지로서, 제자로서, 일꾼으로서 민중의 행복을 위하여 생의 마지막까지 헌신의 삶을 살다가 작업복차림으로 열차에서 서거하셨다.


두 분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고 두 분의 사상, 성품, 일 본새가 모두 하나였다. 두 분을 잃은 조국의 인민들의 마음이 과연 어떠했을까 나는 감히 상상하기 힘들다. 나는 기독교 신학과 철학을 연구한 학자로서 기독교의 부활신앙을 새롭게 생각해 보곤 한다. 3년간 공생애(공인으로서의 생활, 공적인 생활)에 나선 예수를 따라 다니며 일생을 의탁했던 자신들의 스승이 어이없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자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다시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3년간 함께 지낸 스승과의 생활경험이 살아 있었다. 스승의 말씀, 비유, 결단, 행동, 십자가 사건, 등, 마음속에 새겨진 스승 예수가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다시 모이기 시작하였고 그들 속에 되살아나는 스승의 가르침들을 전파할 필요성을 느꼈다. 제자들 속에 예수가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탄생이었다. 부활사건은 바로 예수의 제자 자신들의 새로운 인간에로의 부활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내 자신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부활보다 더 큰 부활이 어디 있겠는가?


마음의 기둥, 신념의 기둥을 잃은 조국 민중들에게 만약에 후계자가 없었다면 그들이 어떻게 그 상실의 슬픔을 극복할 수 있었겠는가? 당, 대중, 군대의 일심단결체인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중심, 뇌수로서의 수령의 계승이 있어 일찍부터 조국의 인민들 마음속에 김정일위원장과 김정은최고사령관이 신념의 기둥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조국의 인민들은 다시 힘과 용기를 내어 그들의 주체사회주의 혁명, 조국통일, 세계의 자주화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계자에 의해 선대 수령이 부활하였고 민중의 마음속에 선대 수령들이 부활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김일성주석의 탄생 100돌을 맞아 주석의 사상과 인민적 인품, 그의 헌신성, 등의 위대성에 대하여 직접 나의 접견경험을 통하여 조금이나마 여러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주석의 위대성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내가 김일성주석을 만나뵈온 것은 1989년 평양에서 진행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때였다. 재미동포들도 약 70여명이 참석하였고 그때 나는 재미동포 대표들 몇 분들과 함께 주석궁으로 가서 존경하는 김일성주석을 직접 뵙는 기회를 가졌다. 주석께서는 우리 대표들을 보시자 “반갑습니다, 우리 연설은 생략하고 식사나 같이합시다”라고 하시면서 우리를 식탁으로 안내하시였다. 나는 그때 대표들 중에서 나이도 제일 어렸고 콧수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제일 말석자리에 앉다보니 주석님과 바로 마주보며 앉게 되였다. 주석께서는 긴장한 우리들을 의식하시고 여기 까만 감자떡이 있는데 한번 맛을 보라고 하시며 “감자는 얼어도 먹고 썩어도 먹습니다, 감자는 버릴게 없습니다, 나는 감자박사입니다”라고 큰소리로 말씀하시면서 손수 감자떡을 우리에게 권하시었다. 그러시면서 항일무장투쟁시기 인민들이 산에서 감자를 캐는 척 하면서 유격대를 위하여 남겨놓은 것을 알면서도 적과 대치한 상태에서 감자를 캐러 내려가지 못해 감자가 썩는 경우가 있으나 나중에 적들이 후퇴한 후 썩은 감자를 캐서 떡도 해먹고 국수도 해먹던 일을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시였다. 주석님은 국가원수라기보다는 가까운 이웃 할아버지처럼 느껴졌다. 그날 주석께서는 우리 재미동포 대표들에게 많은 동포대중을 묶어 애국사업에 기여하도록 하라고 하시면서 단결해야 힘이 있다고 강조하시였다.


나는 1991년 4월명절과 1992년 주석님 생신 80돌이 되는 4월 명절때 조국통일북미주협회(통협) 대표들과 함께 주석님을 다시 만나 식사를 같이하는 기회를 가졌다. 지금도 기억되는 것은 여러분들은 미국에 사는 동포들이니까 미국실정에 맞게 애국운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주석님을 뵈올 때마다 계속 강조하신 것은 재미동포들의 통일단결이었다.


주석님을 마지막으로 뵈옵고 난지 2년 후 뜻하지 않게 존경하는 주석께서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평양을 향하여 달려갔다. 주석궁에 계신 주석님의 영구앞에 나는 엎디어 엉엉 울었다. 인자하신 주석님의 영상은 내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계신다.


나는 존경하는 주석님을 생각하며 자주 그이의 회고록과 전집 그리고 전기를 읽으며 역사에는 결코 우연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였다.


주석께서 민중의 지도자로서 그렇게 존경을 받으시게 된 것은 우선 그이의 가족의 전통적인 애국심 특히 아버님이신 김형직선생님과 어머님 강반석여사의 애국심의 영향이 컸으며 아버님께서 남겨놓으신 혁명조직인 조선국민회(1917년 3월 23일 결성) 회원들의 도움의 영향이 컸다. 김형직선생님의 지원의 사상은 개인의 출세를 위한 원대한 뜻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참된 보람과 행복을 찾는 혁명적 인생관을 가지고 대를 이어가며 투쟁하여 기어이 나라의 해방을 이룩해야 한다는 백절불굴의 혁명정신을 뜻한다.


언제인가 김형직선생님은 아드님이신 주석님과 주석님의 할아버님, 할머님 앞에서 다음과 같이 지원의 사상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라를 독립시키지 못할 바에야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내 몸이 찢기여 가루가 될지언정 일본 놈들과 싸워 이겨야 하겠습니다. 내가 싸우다 쓰러지면 아들이 하고 아들이 싸우다 못하면 손자가 싸워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김형직선생님의 사상을 주석님 자신이 그대로 이어받아 항일혁명투쟁을 전개하시였고 다음으로 김정일국방위원장께서 대를 이어 민족의 자주위업을 수행해나가셨고 지금은 김정은최고사령관께서 대를 이어 주체혁명위업을 계승하고 있다. 이러한 북부조국의 계승은 조국의 자주적 해방을 위한 혁명전통의 계승이다.


또한 김형직선생님으로부터 주석께서 가장 깊게 받으신 교훈은 혁명동지에 대한 사상이다. 주석께서는 어린시절부터 아버님께서 조선독립을 위한 길에서 동지 한명을 얻기 위하여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다니시는 것을 보시였다.


주석께서는 《나는 어려서부터 이렇게 아버지를 통하여 동지를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도리를 배웠다.》라고 자신의 회고록에 쓰시었다.


또한 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나라와 민중을 위한 진심만 있으면 좋은 동지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문제는 뜻이고 마음이다, 돈은 없어도 뜻만 통하면 서로 동지가 될 수 있다, 동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만이 좋은 동지를 얻을 수 있다고 하신 아버님의 동지애의 사상에 대한 말씀을 회고하시면서 그때 아버님께서 해준 말씀은 지금도 자신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있다고 쓰시었다.


그이께서는 아버님께서 한평생 어느 당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어떤 권력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나라의 해방과 근로민중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한 몸을 서슴없이 바치었다고 회고하시였다. 그리고 아버님은 물욕과 사리사욕도 없었으며 자신을 생각하기에 앞서 민족을 생각하고 자신의 가정을 생각하기에 앞서 조국을 먼저 생각하며 찬바람을 맞받아 일생을 쉬임없이 걸어가심으로써 인간으로서도 청렴하게 살았고 혁명가로서도 결백하게 살았다고 회고하시였다. 그래서 주석께서는 어떻게 하나 아버지의 뜻을 이어 한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겠다는 이념을 갖게 되였다고 쓰시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석께서는 아버님의 혁명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으시었고 아버님이 조직하신 조선국민회 조직원들의 도움을 받으시었다. 한창 혁명활동을 하시던 과정에서 철주동생과 형권삼촌을 잃으시었고 그리고 어머님도 병으로 잃으셨다. 그리고 그이를 지도자로 아끼며 따르던 김혁, 차광수, 최창걸, 등 혁명동지들을 수없이 잃으셨다. 이러한 피바다위에서 주석님의 오늘의 위대성이 형성된 것이다. 그이의 위대성은 결코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요,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라 그이의 희생적 민족해방운동과 항일투쟁이라는 혁명적투쟁 속에 이룩된 것이다. 주석님의 항일혁명활동에 대한 기록을 읽노라면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한 우리 민중의 투쟁의 역사가 소상히 눈에 어리여 온다. 그러면 나는 김혁이 작사, 작곡한 《조선의 별》노래를 조용히 불러본다.


주석님의 일생을 돌이켜보면서 그분에 대한 한없는 존경심을 갖게 되는 점은 또한 그이의 민중에 대한 깊은 사랑의 정신때문이다. 그이의 위대성은 바로 그분이 민중을 하늘같이 여기시고 민중 속에 들어가시어 민중과 더불어 민중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신데 있다. 이러한 민중을 하늘같이 여기는 사상에서 주체사상이 태동하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자신의 민중사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시였다.


《〈이민위천〉, 인민을 하늘같이 여긴다는 이것이 나의 지론이고 좌우명이였다. 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 믿고 그 힘에 의거할데 대한 주체의 원리야말로 내가 가장 숭상하는 정치적 신앙이며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한생을 인민을 위하여 바치게 한 생활의 본령이였다.》


이 이민위천사상이야말로 주석님의 모든 노작의 매 페이지마다 흐르는 근본사상으로서 그이께서 어려서부터 아버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상이다. 그이께서 어리셨을 때 중국으로 이주해서 사시게 되였지만 아버님은 그이를 일부러 고국에 보내어 학교를 다니시게 했다. 그 깊은 뜻은 바로 주석께서 조선의 현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회고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어려서 아버님의 권고로 조국에서 2년간 공부한 후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시었는데 당시의 우리 조선민중에 대한 감상을 다음과 같이 쓰시었다.


《가장 귀중한 체험은 우리 인민이 어떤 인민인가를 깊이 리해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 인민은 소박하고 근면하면서도 용감하고 강의한 인민이었다. 어떤 곤난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억센 인민, 예절이 바르고 인정이 풍부하면서도 불의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인민이었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연정회의 간판을 가지고 반동적인 〈자치〉운동을 벌리고 있었으나 노동자와 농민, 청년학생들을 포함한 광범한 인민대중은 피를 흘리면서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 어떤 힘으로써도 훼손시킬수 없는 민족의 존엄과 강철같은 독립의지를 뜨겁게 감수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 인민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인민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런 인민을 잘 조직동원한다면 얼마든지 나라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신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아버님의 의도대로 조선민족, 조선민중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된 주석님의 혁명사상은 민중을 우매하고 미개한 계몽대상으로만 보아오던 종래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민중이야말로 스승이며 혁명을 추동하는 기본동력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인민들속으로 들어가라!》, 이 구호는 주석님의 전생애를 관통하는 좌우명이 되었다. 주석께서는 실로 인민적 품성과 인민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지도자로서 인민들 속에 들어가 직접 그들의 육성, 숨결, 눈빛, 표정, 말투, 손짓, 몸가짐을 자신의 눈과 귀, 손으로 손수 접촉하여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강조하시었다. 그것은 인민들 속에는 철학도 있고 문학도 있고 정치경제학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중 속에 들어가는 것은 보약을 먹는 것과 같고 들어가지 않는 것은 독약을 먹는 것과 같다고 믿고 계시던 주석께서는 생전에 다음과 같이 생을 총화하시였다.


《나는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혁명활동을 시작하였고 오늘도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혁명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인생을 총화하고 있다.》


주석께서 자신의 생신때마다 생일잔치상을 차려주려는 간부들의 성화를 뿌리치시고 민중 속에 들어가 현지지도하시면서 시간을 보내시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주석께서는 두메산골, 외딴섬, 농장, 도시, 공장 등 이북 어느 곳이나 현지지도하지 않으신 곳이 없을 정도로 사면팔방을 오가시며 인민들과 대화하시고 부탁하시고 인민들에게서 배우시며 한생을 사셨다. 그이께서는 항일혁명당시에도 혁명을 한다는 사람들이 자꾸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당에 승인이나 받으려 하고 윗자리나 차지하려는 것을 비판하시면서 무산대중을 위한 혁명을 한다면서 대중을 떠나 자꾸 위로만 올라가면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자, 아래에 내려가 노동자,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자고 새 세대 청년혁명가들에게 당부하시었다.


그이께서는 위로 올라가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아래 즉 민중 속으로 내려가자고 호소하시면서 《혁명가의 생명은 군중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되며 군중을 떠날 때 끝이 난다고 할 수 있다.》라고 강조하시었다. 주석께서는 선행세대의 운동 전략이나 노선 그리고 소련과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의 운동 전략이나 노선은 결국 혁명의 주인이며 혁명의 추동력인 인민대중을 믿지 않고 외면한 것이었기 때문에 붕괴된 것이라고 진단하시였다. 수백만민중의 조직된 힘에 의거해야 일제를 타도할 수 있겠는데 지난 시기 운동가들은 혁명도 독립운동도 특수한 몇몇 사람들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초기 혁명 운동가들도 기초축성은 하지 않고 몇몇 상층인물들로써 당중앙을 선포하는 방법으로 당을 쉽게 만들었으며 민중 속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3인 1당, 5인 1파식으로 서로 분열되어 헤게모니싸움이나 벌렸다. 소련과 동유럽사회주의의 몰락도 결국 따지고 보면 민중 속에 들어가 민중을 조직사상적으로 통일단결시켜야 했는데 단지 정권차원에서 행정명령식으로 내려 먹이는 방법으로 민중을 통치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혁명의 실패는 혁명의 주체이며 추동력인 민중의 힘을 믿지 않고 민중 속에 들어가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출신이 좋은 몇몇 사람들만으로는 혁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민중을 대담하게 믿고 그들을 조직사상적으로 조직해야 된다고 그이는 믿으시었다.


내가 주석님을 존경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이께서 민중을 통일단결시키셨기 때문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혁명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첫째도 둘째도 운동가들의 통일단결과 조직성원들과 민중의 일심단결을 이룩하여야 한다.


주석께서 초기혁명투쟁을 전개하실 때도 운동권이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민족진영과 혁명운동가들 진영 속에서도 수많은 파들이 서로 싸우고 중상모략하며 역량을 낭비하고 있었다. 새 세대 청년혁명가들도 이 속에서 많은 고민을 하였고 실제로 희생도 많이 되었다.


엠엘파, 화요파 등 종파분자들은 하나같이 공명주의와 소부르죠아영웅주의에 물젖은 행세군 들이었고 고질적인 사대주의자, 교조주의자들로서 운동을 파괴분렬시키는데 광분하였다. 엠엘파들은 노동자와 빈고농만이 혁명의 동력이 될수 있다고 믿고 테로나 일삼고 김일성주석을 중심으로 한 새 세대 청년혁명가들이 애써 꾸려놓은 조직을 다 파괴시키곤 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혁명가들과 민중을 이간시켜 놓곤 했다.


주석께서는 애국심이라는 공통적인 사상감정만 있으면 민족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이 다같이 민족해방을 위한 하나의 궤도에서 서로 화합하고 단결하고 협력할 수 있다고 보시고 부단히 민족주의자들과의 연합전선을 시도하시었다. 물론 그이께서는 민족주의운동의 한계점을 잘 알고 계시었다.


민족주의운동은 민중을 떠나 상층운동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민중들과 이탈하여 상층의 몇몇 사람들끼리만 모여앉아 말공부와 권력다툼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순수한 계급혁명이라면 노동자와 농민대중만이 혁명의 동력으로 되겠지만 조선혁명의 성격자체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인만큼 노동자, 농민은 물론 청년학생, 지식인, 애국적인 종교인, 민족자본가들도 다 혁명의 동력으로 보고 민족해방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모든 반일애국역량을 다 집결하고 다 동원하자는 것이 주석님의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이었다.


그이께서는 민족해방이라는 대전제를 첫자리에 놓는다면 어떤 민족운동진영과 어떤 계급, 계층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고 보시었다. 민족을 첫자리에 놓고 모든 문제를 생각해야 된다, 민족이 있고서야 계급도 있고 주의도 있지 민족이 없이 공산주의, 민족주의는 해서 무엇하며 하느님은 믿어 무엇하겠는가고 주석께서는 물으시였다.


그이께서 생전에 차광수, 김혁, 최창걸을 포함한 무수한 혁명동지들을 잊지 못해하신 것은 그들이 과거운동에서 통일단결의 중심이 없이 각당, 각파가 저마다 영웅호걸행세를 하면서 파쟁으로 혁명운동을 말아먹던 교훈을 찾고 영도의 중심, 통일단결의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뼈에 사무치도록 깨닫고 주석님을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내세워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단결의 새 역사를 피로써 개척했기 때문이었다.


민중의 자랑이고 영광이며 무궁무진한 힘의 원천인 참다운 통일단결의 시원을 열어놓고 우리나라 사회주의운동에서 처음으로 영도자와 민중의 일심동체를 이룩한 통일단결의 새 역사를 이들 새 세대 청년혁명가들이 이룩했기 때문에 주석께서는 항일투쟁에서 그리고 해방 후 새 조국을 건설하는 데서도 혁혁한 업적을 남기실 수 있었다. 새 세대 혁명가들은 자리다툼때문에 조직에 불화를 조성한 적도 없고 의견의 차이로 그들이 생명으로 내세운 통일단결을 파괴해본 적이 없었다고 주석께서는 회고하시였다. 동지들의 역사적공적은 지도자를 내세우고 그 지도자의 두리에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 혁명투쟁을 전개한 바로 그때로부터 조선의 민족해방투쟁은 파쟁과 혼란으로 얼룩진 과거의 분열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통일단결의 장을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주석께서는 지적하시였다.


주석님을 중심으로 철통같이 뭉친 새 세대 청년혁명가들은 국적, 계급, 사상, 신앙, 재산정도, 남녀노소의 차이를 뛰어넘어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반일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전조선민족의 항전으로 나라를 찾겠다고 생각했다. 주석께서는 전한장(진한장), 장워이화(장울화) 같은 부자중국청년들도 공청생활을 잘했다고 회고하시었으며 손정도목사 같은 종교인들, 민족자본가들까지 다 동원하여 거족적인 반일항쟁을 전개하시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애국애족심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위대하고 순결하고 신성한 감정이며 민족단합정신이야말로 그 애국애족심 중에서도 정수를 이루는 최고의 넋이기 때문이다. 지금 북부조국은 김정은최고사령관님을 중심으로 당과 민중이 일심단결하여 그 어떤 제국주의나 지배세력에 대항하여 자주성을 굳게 지켜나가고 있다.


다음으로 내가 주석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이의 사상의 위대함 때문이다. 그이께서 창시하신 주체사상은 사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주석께서는 사상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시었다.


《사상적 결합이 아니고서는 아버지의 친구도 다 소용없다, 지난날의 친분관계나 인정만 가지고서는 혁명투쟁을 함께 해나갈 수 없다는 것이 그때에 얻은 뼈저린 교훈이었다.

사상이 변하고 신념만 변하면 의리나 인정도 동시에 변하는 법이다. 지난날 죽자 살자 하면서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 사이에 틈이 생기고 인간적 결렬이 생기게 되는 것도 다 어느 한쪽의 사상이 변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장담하던 우정이나 동지적 유대도 어느 일방이 사상적으로 변질되면 금이 가기마련이다. 사상을 고수하지 않고서는 의리나 친분관계도 지켜낼 수가 없다는 것이 그후 장구한 혁명투쟁과정을 통하여 내가 얻은 하나의 교훈이다.》


주석님의 위의 고백은 그이 자신이 혁명투쟁과정 속에서 동지적 배신과 그로 인해 많은 동지들의 희생과 살을 에는 것 같은 고통을 맛본 무수한 산 체험의 기록인 것이다. 사람들이 어려운 기로에 처했을 때, 이해관계가 맞부딪쳤을 때 그 진가 즉 그의 사상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주체사상에서는 지식과 사상을 구별해보고 있으며 사상을 인간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의식형태로 정의내리고 있다.


그이께서는 항일혁명투쟁 한가운데서 죽을 고비도 많이 넘기고 많은 동지도 잃었는데 막상 어려운 때 생명까지도 서슴지 않고 의탁할 수 있는 결백하고 견실한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는 역시 근로하는 민중들 속에 있음을 체험으로 깨달으셨던 것이다.


그 어느 누구에게 지배나 착취받지 않고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세계를 창조적으로 개척해나가려는 근로민중의 주인정신이 바로 자주사상이다. 그이를 단결의 중심으로 믿고 따르던 새 세대 청년혁명가들은 바로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의 명성, 경력, 지위를 보기에 앞서 그의 자주사상과 혁명에 대한 입장, 인민에 대한 관점부터 먼저 보는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자주사상을 생명으로 여기고 일심단결한 이들은 조선혁명은 조선사람들 자신이 책임지고 조선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수행하여야 승리할 수 있으며 혁명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투쟁했다. 그들은 과거의 민족주의운동과 공산주의운동진영의 노선과 전략들이 조선의 산 현실에 발을 튼튼히 붙이지 못하고 사대사상에 빠져 남의 것을 모방이나 하는 심중한 약점을 갖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주석님과 그이의 동지들은 모든 문제를 자체의 실정에 맞게 자주적으로 사고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풀어 나갔다. 조선사람이야 조선의 얼을 가지고 제 나라 혁명을 잘하기 위해 힘써야지 젊은이들이 자기 얼도 없이 남들의 명제나 맹목적으로 외우고 다니며 거들먹거리는 종파주의, 사대주의, 교조주의를 주석께서는 시종일관 비판하시었다.


인간은 자기의 사상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스스로 통제하고 조정할 능력을 갖고 있다. 문제는 동요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동요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데 있다. 혁명가를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역경을 순경으로 만들 줄 아는 강의하고 창조적이고 희생적인 인간들이기 때문이라고 주석께서는 결론내리시었다.


소박한 민중의 아들로 태어나 오로지 조선민중을 위하여 민중과 더불어 한평생을 바쳐 오신 주석님의 생애를 회고하며 나는 인간이 참으로 바른 사상을 갖고 올바른 대의를 위해 살아갈 때 얼마나 고상해질 수 있으며 얼마나 위대하고 성스러워질 수 있는지 알게 된 것 같다. 결국 위대하다는 것은 남을 위하여 특히 억압받고 소외되고 착취받는 민중을 위하여 얼마나 자기 자신을 희생시켰는가에 달려있다. 그이의 전생애에 흐르는 넓고 높은 도량과 고매한 덕성, 탁월한 영도력 그리고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의 숭고성은 우리 민족, 민중과 더불어 영생할 것이라 확신한다.


나는 주석님의 생애와 사상을 회고하면서 계속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았다. 만약 주석님과 그이의 혁명동지들이 혁명에 대한 책임감을 내동댕이치고 만주 눈벌판에서 좌절해 버렸다면 과연 조선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의 자주의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아니 조선의 자주의 역사가 과연 제국주의의 맹공격 앞에 생존이나 했을까?


김일성주석께서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쓰시였다.


《나는 그때 우리가 주저앉으면 조선이 다시 소생하지 못한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죽어도 조선을 구원할 사람들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더라면 우리는 라자구등판의 눈사태 속에 파묻혀 더는 일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혁명에 대한 책임감은 결국 우리에게도 지금 무겁게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재미동포들도 이 책임감만 없다면 모두 자본주의물결 속에 매몰되어 물질위주의 삶이나 살아갈 것이다. 주석님의 생애는 과거의 일로, 그저 재미있는 회고거리로 넘겨버릴 수 없는 무서운 채찍을 동반하고있다. 우리도 지금 여기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한 변혁운동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원의 사상이며 계승의 의미이다.


우리도 그분의 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몸소 보여준 애국애족의 길, 통일단결의 길, 자주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주석님을 회고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도 주석님처럼 영생의 삶인 사회정치적생명을 얻을 것이다.


*김일성 장군의 노래--종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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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김현환 박사 2012-03-15]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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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자들 작성일

지상 천국이군요 살아 있던  예수님. 장기 독재 부역자들과 군사 독재를 겸한 장기독재 부역자 공통점이 있고 하나는 혁명과 통일 또다른 독재자는 굶주림 해결
산업화 양쪽 모두 잡사나 먹사들의 기도로 생명유지 했고 정권유지한 파럼치한 야만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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