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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여성 각계 인재들 10명 여성절 특집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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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슴도치
댓글 0건 조회 4,327회 작성일 12-03-09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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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시간 2012.03.09 01:00:38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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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동신문 3.8부녀절특집: 북녘 각계여성 지도자들 소개



로동신문 2012년 3월8일자는 국제부녀절을 맞아 여성들의 각계 각층의 유능한 인재들 10명을 선정하여 특집으로
소개했다. 이 가운데에는 로력영웅이며 대의원을 비롯하여 태권도의 노력영웅, 여류화가, 명배우, 공장의 직장장,
교수, 과학자, 의사, 가극배우, 여성지휘자 등이 소개되어 관심을 모았다. 인터네트 로동신문에 게재된 이날의
소개인물들을 모두 여기에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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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국제부녀절을 맞아 여성각계 지도자들이 기념촬영한 모습


로동신문 3.8부녀절특집:

북녘 각계여성 지도자들 소개




로동자의 딸이 영웅,대의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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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희 노력영웅이며 대의원
 로력영웅이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 고명희동무를 두고 사람들은 개천에서 룡이 났다고 말한다.그만큼 그가 나서자란 가정환경은 너무도 평범하다.

 그의 부모들은 로동자였다.나라없던 그 세월 아버지는 일제가 경영하던 철도에서 마소처럼 일하였고 어머니는 삯빨래와 삯바느질로 근근히 살아갔다.
 나라의 해방은 어제날의 수난자들에게 재생의 빛을 안겨주었다.근로하는 인민이 나라의 주인으로 된 별세상에서 그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을 낳았다.하지만 그때까지만 하여도 그들은 자기들의 가정에서 나라의 영웅이,대의원이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사회주의혜택아래 중학교를 졸업한 딸 명희가 대학으로 떠나던 날 그들은 평범한 로동자의 자녀들을 돈 한푼 받지 않고 공부시켜주는 나라의 은덕이 고마와 눈물을 흘리였다.
  당의 은정속에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농업부문으로 진출한 고명희동무는 송림시의 어느 한 농장 관리위원장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쌀로써 나라의 은덕에 보답할 일념으로 밤낮이 없이 뛰고 또 뛰였다.
 노력한 보람이 있어 그가 관리위원장으로 일하는 기간 농장의 알곡수확고는 해마다 올라갔다.
  몇해후 그는 강서구역 청산협동농장 관리위원장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위대한 청산리정신,청산리방법이 창조된 력사의 땅에서 일하게 된 30대 관리위원장의 긍지와 자부심은 끝이 없었다.그만큼 일욕심도 대단하였다.
 최고수확년도 돌파!이것이 그가 세운 목표였다.그 실현을 위해 그는 포전에서 살다싶이 하였다.
 마침내 흐뭇한 작황이 마련되였다.그해 청산벌은 말그대로 땅이 꺼질만큼 농사가 잘 되였다.
 4년전부터 그는 평안남도농촌경리위원회 위원장으로 사업하고있다.이악하고 성실한 한 녀성일군에 대한 인민의 크나큰 기대와 신임의 표시이다.
 앞으로 그의 목표는 도안의 모든 포전을 청산벌과 같은 다수확포전으로 만드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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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태권도계의 첫 로력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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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옥 태권도계의 첫 노력영웅
 《어머니,내가 오늘 우리 집 식구수를 세여보았는데 열손가락에 다 꼽지 못하겠어요.》
 《그래, 어디 한번 다시 세여보렴.》
 《할아버지와 할머니,아버지와 어머니,나,여기에 우리 집에 오군 하는 태권도아지미들을 다 합치면…그러니 내 말이 맞지요.》
 《이 말은 우리 대국이가 소학교 2학년때 저에게 한 말입니다.시부모님과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이동훈련을 갔다오면 우리 선수들의 몸상태를 먼저 묻고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어서 가져다주라고 저의 등을 떠밀군 합니다.》

 장경옥감독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였다.

  그의 가정생활 한 토막속에서 선수들과 다정한 한식솔이 되여 서로의 뜻과 마음을 맞추어가는 감독의 모습이 엿보였다.
 가정에서는 알뜰한 주부이고 생활에서는 다정다감하지만 훈련장에서는 엄격한 감독으로 소문이 자자한 그이다.강원도 고성군에서 태여난 그는 태권도세계선수권대회들에서 23개의 금메달과 3개의 최우수기술상을 수여받았다.
  그에게서 우리가 받은 또 하나의 인상은 태권도모국의 존엄을 귀중히 여기는 정신과 남다른 이악성이다.
 민족의 대국상을 당하고 비분에 몸부림치던 1994년 7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리는 제9차 태권도세계선수권대회가 하루하루 다가오고있었다.바로 이러한 때 우리 태권도선수들이 선수권대회에 참가하도록 하여주시고 자신이 겪는 아픔보다 사랑하는 전사들을 더 위해주시며 양복이며 신발,경기용기재 등 필요한 모든것을 다 갖추어주신분이 우리 장군님이시였다.
 그이의 크나큰 사랑과 믿음을 안고 장경옥은 이 선수권대회에서 4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최우수기술상을 획득하여 조선사람의 본때를 다시한번 보여주었다.이러한 그를 두고 세계는 《조선의 장경옥선수는 태권도의 녀왕이다.조선은 태권도모국의 영예를 긍지높이 자랑할수 있다.》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그는 당의 품속에서 태권도기술을 부단히 련마하며 김일성청년영예상 수상자로,인민체육인으로,조선태권도계의 첫 로력영웅으로 자라났다.
 우리 장군님의 친필이 새겨진 편지에서 다진 맹세대로 장경옥감독은 영웅의 삶을 빛나게 이어가고있다.감독으로 사업한지 불과 4년,이 기간 그는 인민체육인 1명,공훈체육인 7명을 키워냈다.또한 지난해 평양에서 성대히 진행된 제17차 태권도세계선수권대회에서 4명의 세계선수권보유자들을 배출하였다.
 영웅의 삶은 선수생활을 할 때에는 물론 그 이후에 더욱 빛나야 한다는것이 그의 지론이다.


본사기자 오철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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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사랑받는 녀류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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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여류화가(인민예술가)
2006년 제9차 베이징국제예술박람회에서 금상을 받은 조선화 《봉산탈춤》은 우리 인민들과 해외동포들속에 재능있는 녀류화가로 알려진 만수대창작사 조선화창작단의 인민예술가 김승희의 작품이다.

 올해 73살인 김승희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날은 제7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재일본조선청년학생 대표단성원으로 참가하였던 그가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긴 날이다.20번째 생일을 맞던 바로 그날 압록강을 건너 조국땅으로 들어서는 그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였다.자본주의일본땅에서 그림을 배우고싶은 희망을 가졌던 탓에 더 큰 설음과 가난을 겪어야 했던 막벌이군의 딸에게 어머니조국은 새 삶을 약속해주고있었던것이다.
 평양미술대학입학 통지서를 받던 날 그는 어버이수령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찍은 기념사진을 우러르며 온밤 잠들지 못했다.
 (수령님께서 당부하신대로 꼭 참다운 인민의 예술가가 되겠습니다!)
졸업후 유화 《전진》으로부터 창작의 첫걸음을 뗀 그에게 있어서 유화 《네거리에서》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지도를 받은 첫 국보작품이다.
  당의 은덕속에 나날이 커만가는 자기의 행복을 그대로 화폭에 담으며 더 큰걸음을 내짚은 그는 수령형상창조사업에 온 넋을 바쳤다.그 나날에 절세위인들의 존귀하신 영상을 모신 작품들을 비롯하여 조국통일과 아름다운 조국강산의 풍경을 주제로 한 많은 작품들을 조선화라는 미술형식에 담아 국보작품으로 완성할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성장을 두고 누구보다 기뻐하신분은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다.김일성상을 안겨주도록 하시고 개인미술전람회까지 열도록 해주신 장군님께서는 소박한 결의를 담아 올린 그의 편지에 친히

《축하합니다.1999년 12월 29일

김정일》

이라는 친필까지 새겨주시였다.
 지난해 1월 만수대창작사에 찾아오신 경애하는 장군님을 한식솔처럼 모셨던 행복의 그날을 눈물속에 되새겨보며 그는 말했다.
 《제일 애착을 가지는 작품이 무엇인가 물었지요? 조선화 <무성하는 해바라기>입니다.따사로운 해빛아래서만 무성할수 있는 해바라기,그속에 한떨기가 바로 제가 아니겠습니까.》


본사기자 조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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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연으로 성공의 관문을 연 명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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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희 명배우
 40년전 체스꼬슬로벤스꼬(당시)에서 열린 제18차 국제영화축전에서는 조선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에 특등상과 특별메달이 수여되였다.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킨 이 영화의 주인공역을 수행한것은 17살의 홍영희였다.그는 첫 출연으로써 단연코 배우로서의 성공의 관문을 열어제꼈던것이다.

 그때를 회상하며 홍영희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은 영화계에 갓 들어선 제가 주인공역을 훌륭히 수행한데 대하여 놀라와하면서 배우로서의 저의 천성적재능을 두고 이야기하였습니다.저에게 무슨 특출한 기질이 있겠습니까.보잘것없는 애어린 처녀에 불과했던 제가 17살에 공훈배우로 될수 있은것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있었기때문입니다.》

 북방의 두메산골중학교를 졸업한 그가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양성반 학생이 된것은 불과 1년전,아직은 영화에 대하여 아는것보다 모르는것이 더 많았던 그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문화예술부문 전반사업을 지도하시는 바쁘신 속에서도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창조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며 홍영희가 순진하고 소박한 꽃분이원형에 가까울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몸소 짚신 신는 법도 가르쳐주시고 때로는 곱게만 입고 나서려는 어린 처녀의 심리를 헤아려보시고 무명옷을 입지 않으면 안되는 꽃분이의 처지를 깊이 인식하도록 일깨워주기도 하신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다.나물 캐러 갈 때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하나하나의 세부들이 손색없이 완성될수 있은것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세심한 지도가 있었기때문이라고 홍영희는 뜨겁게 추억하였다.
 평양영화대학(당시)을 졸업한 후 그의 연기수준은 보다 높아졌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새로 나온 예술영화들에서 품들여 키우신 녀배우의 성장의 모습을 보실 때마다 이제는 관록있는 배우가 되였다고,연기가 더 원숙해졌다고 못내 기뻐하시였다.
  홍영희는 25살에 인민배우가 되였다.
  예술영화 《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열네번째 겨울》,《심장에 남는 사람》,《민족과 운명》을 비롯하여 30여편의 영화들에서 주역을 수행한 그는 지난 2월 우리 나라의 최고상인 김정일상을 수여받았다.
 그는 언제나 소박하고 진실한 연기로 깊은 감명을 주는것으로 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그들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홍영희는 오늘도 새 영화창조사업에 자기의 열정을 깡그리 바쳐가고있다.


본사기자 김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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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을 한 초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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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숙 직장장
함흥모방직공장 직포준비직장 직장장 유경숙은 지난 30년간 한 초소에서 누가 보건말건 자기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해오고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직포준비직장 권사공으로 입직한 그는 전 세대들처럼 조국과 인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것을 결심하고 순간순간을 참되게 살고있다.그 나날에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에 망라되여 함흥화학공업대학을 졸업하고 기사의 자격을 받은 그는 작업반장,부직장장을 거쳐 오늘은 직장장으로 사업하고있다.
 그가 직장장으로 사업하는 직포준비직장은 해마다 인민경제계획을 넘쳐 수행하는 전투력있는 단위로 자랑떨치고있다.
 직장에서는 년간계획을 상반년기간에 끝내는 로력혁신자들과 2년분계획을 한해 앞당겨 끝내는 로력혁신자들이 많이 배출되고있다.
 그 바탕에는 로동자들의 친어머니가 되여 그들의 사업과 생활을 따뜻이 돌봐주며 이신작칙의 모범으로 대중을 당정책관철에로 이끌어나가는 직장장의 불같은 동지적사랑과 헌신적인 노력이 깃들어있다.
 직장은 2004년에 대중적설비관리운동에서 거둔 성과로 하여 26호모범기대영예상을 수여받았으며 다음해에는 집단적혁신으로 사상,기술,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성과를 거둔 결과 3대혁명붉은기를 쟁취하였다.
 유경숙은 지난 30년간 100여명의 고급기능공들을 키우고 수십건의 가치있는 창의고안과 발명을 하여 나라의 방직공업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나라에서는 단발머리처녀시절부터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다녀가신 영광의 일터에서 자신의 모든것을 묵묵히 바쳐온 그의 소행을 평가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높은 국가수훈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36살 나던 해에 나라의 정사를 의논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된 유경숙은 평범한 로동자출신인 자기에게 값높은 영예를 안겨준 어머니조국을 더 높은 생산성과로 충직하게 받들어갈 한마음으로 변함없는 애국의 길을 걷고있다.

특파기자 박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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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교단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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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 교원
 김일성종합대학 수학부 김경희교원은 40대초엽의 박사,부교수이다.

 주체교육의 최고전당이며 모교인 김일성종합대학의 교단에 처음으로 설 때 그의 나이는 26살이였다.그는 그때부터 벌써 전도가 촉망되는 쟁쟁한 교원으로 주목받았다.
 이미 대학을 졸업하면서 학위를 받았던 그는 30대에 박사가 되였고 몇년후에는 부교수의 영예를 지니였다.
 그는 평시에 활달하고 락천적인 성미이지만 일단 교단에 서면 에누리를 모르는 엄격한 스승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의 확률 및 수리통계학강의는 학생들모두가 무척 기다리는 강의이다.
 《선생님의 강의에서 특징적인것은 한마디로 정확성이라고 할수 있습니다.수학은 어느 과학보다도 엄밀성을 요구하는 학문입니다.선생님은 늘 본질적인것을 명백히 가르쳐주시기때문에 우리는 빠른 시간내에 그날 강의내용을 소화하군 합니다.그래서 우리 학생들은 누구나 선생님을 존경합니다.》라고 한 제자는 말하였다.
 탐구심이 강한 학생들의 끈질긴 질문들에 대답을 줄 때면 녀교원의 얼굴은 흥분으로 달아오른다.
 《사실 그런 때가 제일 기쁩니다.학생들의 눈동자에 광명을 실어주는 그 시각이야말로 교육자에게 있어서 가장 보람찬 시간인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교원은 신성한 직업인 동시에 바쁜 직업이기도 하다.특히 녀성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김경희교원은 한 가정의 주부인 자신이 교육사업과 과학연구사업에서 다소나마 성과를 거두게 된데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깃들어있다고 말한다.어느때나 사심없는 방조를 주는 선배교원들이며 같은 학부출신으로서 자기의 사업을 널리 리해해주고 떠밀어주는 남편 그리고 바쁜 대학교원의 생활에 빈구석이 있을세라 마음 쓰는 인민반사람들에 대하여 그는 진정으로 고맙게 생각하고있다.
 그는 공장,기업소들에서 제기되는 과학기술적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생산현장에도 자주 나간다.로동자들은 지성미가 넘치는 김일성종합대학의 녀교원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군 한다.
 《사람들의 존경이 실려있고 조국의 기대가 어려있는 신성한 교단,나라의 전도가 달려있고 내 인생의 지향이 비껴있는 소중한 이 교단을 나는 사랑합니다.》
 이것은 김경희교원의 진심의 고백이다.

본사기자 김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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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부부가 될 꿈을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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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림 실장
 《처녀시절 남편과 첫 사랑을 속삭일 때 우린 서로 박사부부가 될것을 약속하였답니다.》
  자기의 속마음을 솔직히 고백하는 녀성과학자,

 그는 국가과학원 환경공학연구소에서 실장으로 일하는 김혜림이다.

 잊지 못할 고난의 행군시기부터 오늘까지 그는 환경분야에 대한 과학연구사업에 종사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고있다.
 가정부인의 몸이지만 그는 일산화탄소를 정화하는 촉매를 연구할 대담한 목표를 세우고 이악하게 실천하여 국가에 큰 리익을 주었다.그의 연구성과는 원산청년발전소 물길굴건설장에서 큰 은을 냈고 여러 단위들에 확대도입되여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온실효과가스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피타는 탐구와 창조적인 사색으로 새로운 석탄연소기술을 연구개발하여 전국에 일반화함으로써 《우리 연구사》로 정답게 불리우고있다.
 이것은 그가 이룩한 연구성과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보람찬 과학연구의 나날 김혜림이 이끄는 연구집단은 위대한 장군님의 감사를 받는 크나큰 영광을 지니게 되였으며 그는 어버이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진 시계표창을 수여받았다.
 이러한 그에게 사람들은 남편도 어느 한 연구소의 박사인데 이제는 박사부부가 될 때가 되지 않았는가고 하며 론문을 쓸것을 권고하였다.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당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에 비해볼 때 내가 한 일은 보잘것 없는것이다. 강성국가건설에 실질적으로 이바지하는 일들을 더 많이 해놓은 다음 박사부부의 꿈을 실현하려고 한다.
 세계적추세에 맞게 그는 금속도금 및 산세공정에서 나오는 여러가지 산성가스 또는 페수를 가지고 농업생산에 절실히 필요한 비료를 비롯한 유용물질들을 만들어 재자원화하는데서 큰 전진을 이룩하고있다.

본사기자 오철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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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산원과 더불어 한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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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원장
 어느때나 두팔 벌려 사랑하는 딸들을 품에 안아주는 《친정집》-평양산원,바로 이곳에서 원장으로 사업하고있는 김성희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다.

 평양산원의 개원과 더불어 사회생활의 첫걸음을 떼였을 때 그는 금방 평양의학대학(당시)을 졸업한 25살의 처녀였다.
 《우리 집에 성희와 같은 며느리가 들어오면 한이 없겠다.》
 이것은 김성희가 처음으로 맡은 중환자였던 강원도에서 사는 한 녀성이 자기 아들들에게 하군 하던 말이다.그가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잊지 못해한것은 무엇인가.그것은 김성희의 불같은 인간애와 정성이였다.그날의 정성을 안고 그는 오늘도 세쌍둥이들을 위한 수천리 왕진길에 스스로 앞장서군 한다.
  하늘과 맞닿은 령을 넘으며 한밤에도 구급차를 달릴 때 그의 마음속에 늘 등불이 되여준것은 우리 장군님의 야전차의 불빛이였다.
 닭공장에 가시면 산모들의 밥그릇에 놓아줄 닭알부터 먼저 생각하시고 화초연구소에 가시면 퇴원하는 녀성들에게 안겨줄 향기그윽한 꽃다발을 먼저 그려보시는 어버이장군님!
 어머니들이 건강해야 애기들이 건강하고 조국의 미래가 담보된다고 하시며 의료설비들과 보약재들도 제일 좋은것으로 아낌없이 보내주신 우리 장군님의 사랑은 진정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어머니의 사랑이였다.
 한해전 이맘때 평양산원앞에 꽃방을 건설하도록 하신 어버이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일떠세운 꽃방이 문을 열 날을 기다리고있다.그날이 오면 온 나라 녀성들의 마음을 담아 가장 아름다운 꽃다발을 엮어 올리고싶었던것이 김성희원장의 소원이였다.그 소원을 충정으로 불태우며 자기 일터를 사회주의초소로 지켜가는 그에게는 거울과 같이 자신을 비추어보는 글발이 있다.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기 바랍니다.》

그것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지금으로부터 19년전 평양산원 의료일군들에게 보내주신 친필서한의 글발이다.



본사기자 조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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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주인공역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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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조청미 인민배우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공연이 온 일본땅을 진감시키던 근 40년전 어느날 한 동포소녀가 꽃다발을 안고 찾아왔다.
 《선생님처럼 노래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평양음악무용대학(당시)에서 배우면 되지요.》
  꽃분이와 같은 가극배우가 되고싶은 열망을 안고 잠 못 들던 16살 소녀는 마침내 귀국의 배길에 올랐다.해마다 교육원조비를 보내준 어머니조국이 그를 희망의 넓은 길로 부르고있었던것이다.
  우리 식 발성법을 익혀주고 한점 외로움도 가셔주며 손잡아 키워주신 어버이의 품속에서 평양음악무용대학(당시)을 졸업한 그는 소원하던 대로 피바다가극단의 배우가 되였다.

 그가 4년후에는 혁명가극 《피바다》의 어머니로 되였으니 사회주의조국의 품에 안겨 성공한 가수,그는 국제콩클수상자 인민배우 조청미이다.

 수십차례에 걸쳐 경애하는 장군님을 몸가까이 뵈오며 그이의 손길아래 관록있는 배우로 성장한 그는 오늘도 11년전 영광의 그날 혁명가극 《피바다》공연을 몸소 보아주시며 장군님께서 하시던 말씀을 잊지 못한다.
 주인공인 어머니역을 한 배우가 노래를 잘 부르니 작품의 수준이 쑥 올라간다고,혁명가극 《피바다》의 품위에 맞는 진짜 주인공역감이라고…
 이국땅에서 굳어진 발음과 억양때문에 고충을 겪는 그의 괴로움도 다 헤아려 대사 한마디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품을 들여 완성시켜주신 어버이장군님,그이의 믿음은 정녕 끝이 없었다.공훈국가합창단의 선창에 사회예술단체의 독창가수로서 제일먼저 조청미를 불러주셨던것이다.
 남성합창과 소리통사리가 굵고 성량이 풍부한 녀성중음가수의 선창을 결합하여 다시 형상하니 노래 《우리는 하나》의 양상이 더 살아나고 품위도 한결 높아졌다는 어버이장군님의 평가를 받아안은 조청미는 얼마후 또다시 감격스러운 일에 접하게 되였다.공훈국가합창단의 선창을 하는 그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친히 보내주신 장군님께서 그해 4월에는 수많은 총련동포들에게 그의 자랑스러운 공연모습을 보여주도록 하시였던것이다.
 그날 축하의 꽃다발속에 묻혀 행복에 겨워 울고웃는 딸에게 그의 어머니는 말했다.
 《세상에 꿈같은 일이 있다더니 너를 보고 한 말이였구나.아버지의 마음까지 합쳐 우리 가정의 은인이신 장군님께 큰절을 올리고 싶구나.》
 수많은 주단역가수들을 훌륭히 키운 그는 현재 김원균명칭평양음악대학에서 교편을 잡고있다.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인민이 좋아하는 선군시대 가수들을 더 많이 키워내는것,여기에 그의 락이 있고 생의 보람이 있다.

본사기자 조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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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뒤를 이은 멋쟁이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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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영 지휘자
 국립교향악단의 공연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력있는 녀성지휘자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게 될것이다.
 섬세하고 재치있는 손세,부드럽고 풍만한 정서가 흐르는 우아한 률동으로 관중을 매혹시키는 그는 과연 어떤 녀성인가.

 허문영,올해 48살인 그는 국내외에 이름난 지휘자였으며 만수대예술단 단장이였던 허재복선생의 딸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허재복선생이 뜻밖에 세상을 떠났을 때 그토록 아끼시던 예술인재를 잃은것을 두고 못내 가슴 아파하시며 그를 영생의 언덕에 세워주시였다.그이께서는 허재복동무가 아들이 없어서 늘 섭섭해하였다고 하시면서 아들 못지 않게 아버지의 뒤를 훌륭히 잇도록 허문영을 평양음악무용대학(당시)에 보내주시였다.
 아직은 미숙한 녀학생의 지휘모습을 보아주시며 손세가 꼭 아버지를 닮았다고 대견해하시면서 그가 견문을 더 넓힐수 있도록 머나먼 배움의 길로 떠밀어주신 경애하는 장군님,
 그렇게 키워주신 녀성지휘자가 무대우에서 자기의 재능을 남김없이 과시할 때면 제일먼저 박수도 보내주시고 그 사이에 많이 발전했다고,이제는 관현악지휘자로서의 체모가 다 갖추어졌다고 만족해하시였다.
  어버이장군님의 축복속에 실력과 배짱을 키우며 허문영은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관록있는 지휘자로 자라났다.
 《아리랑》,《그네뛰는 처녀》,《매혹》,《문경고개》,세계명곡들을 비롯하여 그가 지금까지 형상한 작품들은 수십편이나 된다.
그가 지휘봉을 잡은 때로부터 20여년세월이 흘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3대에 걸쳐 우리 당에 충실한 음악가가정이라고 말씀하시였던 그의 가문에 또 한 세대의 전도양양한 음악가후비가 자라고있다.
본사기자 김순영


주체101(2012)년 로동신문 3월 8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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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로동신문/민족통신 종합 2012-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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