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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별의 세계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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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892회 작성일 22-10-21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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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4

한봉숙은 딸 설미와 같이 화물자동차 적재함우로 올라갔다. 만포에 왔다가는 도농촌경영위원회의 자동차라고 한다.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어뜩새벽부터 모여온 사람들이 다투듯 기여올랐다. 출장원, 장사군, 청년돌격대원, 늙은이, 아낙네들이 비좁게 올라앉았다.

안경을 낀 똥또무레한 사나이가 한봉숙을 자꾸 곁눈질하더니 은근하게 잡아끌었다.

《내앞으로 다가앉구레. 그러다 떨어질랴구.》

사나이가 끄는대로 안쪽에 비집고 들어갔다. 목도리를 벗어 설미의 목과 허리를 감고나서 어둑시그레한 길앞쪽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한봉숙, 그가 찾아가는 미지의 길, 무엇이 기다리고있을가. 겹치는 시련일가, 행복일가?…

지금은 11월 하순, 평양을 떠나던 장마철의 그날로부터 석달이 지나갔다.

페염을 앓는 설미때문에 숱한 사람들이 분주탕을 피우던 그 밤… 비전향장기수 김진서동지의 두 딸과 돌격대청년, 꿀병을 안겨주던 장사군녀인 그리고 금속공업부에서 국장으로 일하던 리수진…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마음만은 가난해지지 않은 고마운 사람들이였다. 특히 잊을수 없는것은 리수진이였다. 그날밤 설미를 안고 사품쳐 흐르는 골개강을 건느던 일과 어느 농가에 들려 밤을 꼬박 밝히던 일들을 어찌 잊을수 있으랴.

집주인들이 열에 들떠있는 설미를 위해 빈방에 불을 때주고 잠자리까지 펴주었다. 설미를 가운데 눕히고 서로의 전반생을 낱낱이 더듬던 두사람… 날이 밝았을 때엔 석유등잔심지가 다 타들었고 두사람의 코구멍은 그을음으로 메워져있었다.

집주인들은 그들, 나이차이가 심한듯 한 《부부》가 앓는 딸애때문에 눈한번 붙여보지 못한것이라고 동정하며 진료소 녀의사집으로 아들을 때려 보내기까지 했다.

무섭고 괴롭던 그밤은 그렇게 석유등불로 밝혀졌다. 누가 말했던가. 리수진 그 사람이 말했던가, 아니면 봉숙이 말했던가?!…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고 새 생활을 찾아야 한다고!…

드디여 자동차가 떠났다. 진정 새 생활을 찾아 떠난 봉숙이였다. 찬바람이 얼굴을 후려쳤다. 만포에서 강계까지는 130리길이다. 인생의 먼 길에 비긴다면 보잘나위없는 한 토막이련만 봉숙에게는 운명적인 전환의 길이다.

그때 설미의 몸이 추서자 봉숙은 신의주에 있는 삼촌을 찾아가려던 종전의 생각을 버리고 만포의 어머니한테로 갔다. 리수진과 마주 앉아 밤을 밝히던 그 밤에 결심한것이였다. 얼마간 어머니한테 눌러있다가 석유등불빛이 암시해준 그 길로 주저없이 달려가려는것이였다.

어머니는 야단스러운 지청구로 딸을 맞았다.

《뭐 집을 뛰쳐나왔다구. 리혼을 했어? 제멋대로 나와?… 어이구, 이년아, 오긴 왜 왔어. 제 푼수에 맞는 마참한 총각을 골라잡으라구 그만큼 일렀는데두 오지랖 넓게 돌아치더니 이게 무슨 꼴이냐, 이 죽일 년아!》

원래 소란스러운 어머니였다. 더우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풀죽도 이어가기 힘든 이때 그런 큰 간부댁에서 떵떵거리며 사는줄 알았던 맏딸이 눈먼 애까지 데리고왔으니 기가 막혔을것이다.

《그래 이제부터 어떻게 할셈이냐. 네년이 뭐 할줄 알아? 남들처럼 농사일을 해봤니 손에 기름칠을 해봤니. 음악교원이랍시구 풍각쟁이노릇만 했지. 그래 네가 계피술 빚어 장사를 하겠니, 비럭질을 하겠니.

되지도 않을 소리. 얼마간 있다가 갈데가 있어? 그래 너같은걸 받자 할 사람이 있다던?… 어이구, 이년아. 닥치구나 있을게지.》

봉숙은 어릴 때부터 이러한 어머니에게 습관되여있었다. 동생인 룡숙이 같으면 대바람에 맞받아 소리치며 왁살스러운 어머니를 눌러놓았을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쪽을 많이 닮은 봉숙은 조용히 참고 천둥소리가 멎기를 기다릴뿐이였다. 천둥소리는 요란스러워도 떨어지는 비방울은 거의나 없는것이 바로 어머니성미였다.

눈물겨운 곤궁이 시작되였다. 봉숙은 적들의 끈질긴 봉쇄로 인한 어려운 형편을 수도 평양에서도 적지 않게 보고 듣고 했지만 이토록 혹독한 시련인줄은 다 알지 못했었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굶고 아이들이 떠도는것을 보면서 억이 막혔다. 여태 류정총국 부총국장인 유성만댁에서는 식량걱정이라는것을 몰랐다. 오히려 더 풍청거리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집을 뛰쳐나온것은 생활의 어려움이 아니라 나날이 더해만가는 박정한 부부관계때문이였다.

밤마다 어머니는 딸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정한 그네들을 욕질하고 분통이 터져 가슴을 허비였다. 공연무대에서 눈에 띈 봉숙이를 유성만부총국장이 며느리를 삼겠다고 했을 때 펄펄 뛰던 어머니였다. 그 집 아들이 승용차를 가지고왔을 때에도 봉숙이를 모질게 닥달질했었다.

《어이구, 이년이 눈이 멀었구나. 동정 못 다는 가시내 맹물 발라 머리 빗는다더니 어쩌문 저런 의뭉한 녀석을 따라가겠다는거누?… 내 눈은 못속인다, 못속여! 능갈치게 구는 그 속내를 모르겠어? 그래 네 눈엔 그 녀석이 깨꾸막질하는것도 안뵌단말이냐. 쇠통 꾸며대구 얼려넘기는 수작질에 속다니. 어이구, 이 미친년아!…》

뒤늦게야 봉숙은 남편에게 전처가 있었다는것을 알게 되였고 그처럼 의젓하고 례절바른 그가 병적으로 의심이 많고 잔인하기까지 하다는것을 눈물속에 체험하였다. 안해가 남자들과 마주 서거나 웃기라도 하면 미칠 지경이 되는 그였다. 집에 온 남자손님을 바래주는것도 허락하지 않았고 옆집남자의 손을 빌리는 경우에도 주먹이 날아들고 《개같은 년!》하는 상욕이 터지군 했다.

더더욱 참을수 없는것은 남편이 안해를 노복처럼 취급하는 그것이였다. 시어머니, 시누이들까지 합세하여 온갖 시시껍적한 일까지 다 시켜먹으면서도 노상 눈을 할기고 흉을 보고 《깡지》를 《팠》다. 그들은 한봉숙을 지체높고 권세있는 가문에 어쩌다 굴러들어온 무지렁이 촌것으로 여기며 과분하게도 호사를 시킨다고 여겼다.

가장인 시아버지 유성만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어떤 하찮은 일로 남편이 끼얹은 세수물벼락을 맞고 울고있는 며느리를 세워놓고 안해로서, 며느리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하여, 울음소리가 집밖으로 나가지 않게 처신을 잘할데 대하여 끝없이 훈계하는것으로 지체높은 부총국장댁의 가정비사에 두툼한 막을 내리는것이였다.

딸 설미도 그 희생물이 되였다. 남편이 안해의 머리끄뎅이를 잡아 태질했는데 어머니 치마폭에 매달려 울고있던 딸애가 끓는 세탁물에 구겨박히는 일이 벌어졌다.

온 집안이 법석 끓었다. 《데퉁스러운 며느리》, 《올꾼이》탓에 딸애가 눈을 상했다는것이였다.

설미의 눈을 고치려 여러 중앙병원들을 찾아다녔지만 아직 어리니 좀 더 나이를 먹어야 수술할수 있다고 했다. 설미가 차츰 앞을 보지 못하게 되자 귀찮은 식객으로 치부되고있는 한봉숙에 대한 태도는 더 표독스러워졌다.

이렇게 흘러온 결혼생활이였다.

참다 못해 리혼을 간청했다. 그러자 또 온 집안이 분노했다. 특히 시아버지 유성만은 벌레씹은 상이 되여 펄펄 뛰였다. 그에게는 며느리의 운명보다 자기의 명예와 평판이 더 귀중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칼부림도 서슴지 않을 기상이였다.

그러나 인제는 모든것이 끝났다. 어찌하여 봉숙은 지금껏 결단을 내리지 못한것일가?… 잃어버린 10년, 잃어진 청춘… 현재 해군부대의 통신군관인 동생 룡숙이는 언니의 사정을 알고 벌써 몇해전부터 집을 나오라고 소리쳤었다.

《바보야, 언닌!… 이제 후회할 때가 있지 않나 봐!》

어머니를 닮아 드세고 굽힐줄 모르는 룡숙이여서 그라면 한달도 참아내지 못했을것이다. 그리고 그저 뛰쳐나오는것이 아니라 죄다 들부셔버리며 진저리나는 사람들 잘 계시오, 아직도 우리 사회에 당신네같은 위선자들이 있다는게 부끄럽소! 하고 침을 탁 뱉았을것이다.

두달동안 어머니는 어느 하루도 가슴을 허비며 지청구를 늘어놓지 않는 날이 없었다. 설미를 위해 따로 쑤었던 타개죽을 떠주면서도 울분을 터뜨렸다.

어머니의 지청구도 힘겨운 일이였다. 봉숙은 드디여 출로를 찾아냈다. 리수진이 엄중한 철도사고에 대한 련대적책임(철근, 강재를 빼돌려주었으므로)을 지고 철직된후 강계에 가있다는것을 알았던것이다.

어머니에게 《그 사람》을 찾아가겠다고 했다. 아닐세라 노발대발…

《이년아, 그 사람이 널 오라구 하던?… 어혈진 도깨비 개천물 마시듯 또 무슨 재구를 치지 못해 그러니. 응?!》

봉숙은 어머니품에 머리를 박으며 눈물로 속삭이였다.

《난 알아요. 그 사람도 불행한 사람… 그가 국장일을 볼 때라문 꿈도 꾸지 않겠지만… 지금은 얼마나 외롭고 힘들겠어요. 그처럼 어질구 맘씨 고운 사람에게 힘이 된다면 난 무슨짓인들 다 하겠어요.》

《이것아, 무슨 힘이 된다는거냐. 이처럼 바른 때에…》

《안예요. 어머니. 바른 때라구 인정까지 말랐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걱정마세요. 엄마…》

이번만은 어머니도 소리치지 않았다. 반대로 오래도록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다. 별안간 드세고 옹골찬 녀인으로부터 설음과 아픔에 못이겨 쇠진해버린 한 늙은이로 변해버린듯 했다.

어머니의 그 울음소리가 지금도 귀전에 쟁쟁하다. 봉숙은 머리를 숙이고 팔소매로 눈굽을 찍었다.…

경적소리가 울렸다. 자동차는 구배진 령길을 돌아내리고있었다. 찬바람이 목덜미를 어이는듯 했다.

《엄마, 나 추워.》

설미가 달팽이처럼 몸을 옹송그리며 하소했다.

《참아야 해. 추워도 참자.》

그렇게밖엔 더 할 말이 없는 봉숙이였다. 참아야 한다. 참고 이겨내야 한다.

이것도 그날 밤 리수진 그 고마운 사람이 해준 말이였다.

《엄마.》 설미가 물었다. 《이제 가면 누구랑 같이 사나?》

봉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말했다.

《기차칸에서 만났던 사람, 너를 안고 밤새 뛰여다니던 그 아버지한테 간다.》

《아버지?… 그럼 우리 아버지가 되나요?》

《됐다. 잠자코 있어. 그건 나도 모른다.》

그렇다, 잃어버린 10년이다!… 봉숙은 또 머리를 수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잃어진 청춘, 아니 가장 귀중한, 인생의 목적이기도 한 사랑을 도적맞힌 10년이였다. 스물한살 애젊은 나이에 첫걸음을 잘 못 뗀탓에 죄다 잃고 죄다 뺏겼다. 그 사랑을 다시 찾을수만 있다면, 그럴수만 있다면 정녕 죽음이라도 맞받아나갈것이다. 늦긴 했지만 이제라도 주저하지 않을 생각이다. 정녕 인생길은 다시 시작하는 법이 없다. 출발이 잘못됐다고 해서 차갈이하는 기차처럼 뒤로 돌아가 다른 선로로 다시 출발할수는 없다. 도중에 넘어진대도 넘어진 그 자리에서 또 달려야만 한다.

하여 봉숙은 지금 리수진을 찾아가는것이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바치는것이 사랑이며 행복이다. 바치는것만큼 사랑이 온다!…

초겨울의 흐릿한 아침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간밤의 추위에 얼어붙어있던 엷은 구름이 불그레하게 물들고있다.

《엄마, 나 발이 추워.》

설미가 뾰조롬한 입술을 내밀며 울상을 했다.

《발은 춥다고 하지 않아. 시리다고 해야지.》

봉숙은 설미의 신발을 벗기고 두발을 자기의 무릎사이에 끼웠다. 등뒤의 안경낀 사나이가 봉숙을 끄당기며 자기쪽에 더 바싹 붙으라고했다. 그 친절함, 그 은밀함… 봉숙의 남편도 처음엔 그러했었다.

봉숙의 두눈을 들여다보며 《그 깊은 호수속에 얼마나 많은 총각들이 빠져 헤염을 쳤습니까?》 하고 봉숙이도 어느 책에서 읽은것같은 시적인 말을 속삭이였던것이다.

그러나 리수진은 전혀 달랐다. 젊은 녀인과 마주 앉아 밤을 새우면서도 은밀한 말 한마디 비치지 않았다. 무엇때문인지 노상 겁에 질린것처럼 불안에 몸을 떨군 했었다.

봉숙은 아침해살에 생기를 띠기 시작한 숲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어데선가 솔가리타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왔다. 몸은 사정없이 떨렸지만 마음은 거뿐해졌다. 얼마전까지 절망속에 몸부림치며 살아왔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였다.

새날, 새 아침은 반드시 온다. 그 아침이 얼마나 밝고 청신한가함은 지지리 괴로운 밤의 어둠속에서 눈물을 삼켜본 사람들만이 안다.…

×

리수진이 여기 고미덕에 온것은 두달반전이였다. 로동단련을 위해 내려온 그를 기계공장지배인이 부업지개간을 하는 청년돌격대에 보냈던것이다.

모두가 청년들이여서 리수진을 아바이라고 불렀다. 좋은 청년들이였다. 누구도 그를 비웃지 않았고 무랍없이 대하며 과거경력 같은것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도착한 첫날에 벌써 소대장과 고수머리총각, 체구가 크고 우악스럽게 생긴 털보 장윤보(장털보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많았다.)와 가까와졌다. 마침 그날이 장윤보의 생일이였다. 하루일을 끝낸 청년개간자들이 식당으로 쓰이는 풀막에 모여앉았다. 고수머리총각이 구해온 《농태기술》이 한고뿌씩 차례졌다. 소대장이 연설했다.

《동무들, 오늘은 우리 장털보동무 귀빠진 날이고 수진아바이가 로동단련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윤보동무의 안해가 살아있으면 이렇게 허술히 보내진 않을것이요. 수진아바이 가족들이 있었으면 더 잘 차렸겠지만… 너무 섭섭해하진 말자구.

동지들이 차린것인데! 고난의 행군을 하는 때니만큼 부족한것두 많지만 뭐 괜찮소. 쭉쭉 냅시다. 우리의 귀중한 장윤보동무 생일을 축하해서, 수진아바이 건강을 위해서, 우정을 위해서 또 부업지개간을 위해서!》

소박하고 진실한 그리고 감동적인 연설이였다. 노래는 또 얼마나 많이, 목이 쉬게 불러댔던가. 장윤보는 거나해지자 자기의 18번이라는 《머루야 다래야》를 세번씩이나 불렀다. 수진이도 끌어내였다. 나중엔 모두 어깨를 겯고 《동지애의 노래》를 불렀다. 생일연과 리수진의 돌격대입직을 겸해 축하한 모임을 끝내면서 소대장이 말했다.

《래일의 전투를 위해서 일찌감치 잠들것, 잠자리에서 주정부리는 녀석은 입에다 가랑잎을 틀어박소. 소처럼 밤새껏 새김질을 하게스리.》

모두 떠들썩 웃어대며 자기들의 풀막으로 흩어져갔다. 황소같은 장윤보가 수진이를 자기네 풀막으로 잡아끌었다. 허리를 잔뜩 굽히지 않고서는 들어설수 없는 풀막, 그러나 소박하고 뜨거운 정을 지닌 사람들이 사는 집이였다.

여기서 두달반을 일했다. 일은 고되고 굶주림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일이 많았지만 마음은 편하였다. 수진은 자기가 인생의 밑바닥에 굴러내린것이 아니라 뜨거운 인정의 새 집에 옮겨왔을뿐이라는것을 깨달았다. 인제는 여기에, 청년개간자들이 사는 땅에 뿌리를 든든히 박은것 같았다. 바로 그 무렵 한봉숙이 딸 설미와 같이 리수진을 찾아왔다.

땅거미가 깃들 때였다. 소대장이 그들 모녀를 데리고왔다.

《아바이, 왔수다. 여기까지 찾아왔수다!》

수진이의 핼쑥해진 두볼이 벅찬 흥분으로 푸들거렸다. 먼저 설미부터 끌어안았다.

《설미야, 나를 알겠지. 응?!》

한봉숙은 그가 그리도 반갑게 맞아주는것을 보고 한손으로 입을 막으며 어깨를 떨었다.

《어떻게 알구 예까지 왔소?》 이번엔 봉숙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새 어떻게 지냈소?》

소대장은 자취를 감추었고 풀막은 아직 비여있었다. 하루일을 끝낸 소대원들이 식사를 하러가는듯 했다.

풀막안으로 모녀를 끌어들였다.

《어데로 가던 길이요?》 수진이 또 물었다. 《직업은 구했소?… 물론 교편을 잡았겠지. 어떻소, 바로 맞혔소?》

《…》

한봉숙은 입을 열지 못했다. 추위때문에 입술이 얼어붙은듯 했다. 설미가 겁먹은 목소리로 대신해주었다.

《우린 여기루 왔어요. 엄마가…》

《설미야!》

한봉숙이 가늘게 부르짖었다. 아직도 허리를 구부린채 앉지도 않고있었다.

《용서하세요. 의향도 묻지 않구…》

《?!…》

비로소 수진은 모든것을 깨달았다. 별안간 목이 타들고 앉은 자리에 가시가 돋은듯 했다. 수진은 목을 눌러 기침소리를 짜내며 솜옷주머니를 급히 뒤졌다. 그러나 무엇을 찾았는지 그 자신도 몰랐으므로 곧 손맥을 놓고 발끝을 바닥에 문질렀다.

좀 더 용기를 낸 한봉숙이 또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문… 전 사실 거기서 절 몹쓸년으로 보지만 않는다면 할수 있는껏 옆에서 돕고싶었어요. 이렇게 말하기까지, 여기로 오기까지 쉽지 않았지만… 큰 맘 먹구 왔습니다. 설미한테도 말하구…》

《?!…》

수진은 담배진이 누렇게 쩌들은 손톱으로 자기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숨이 차올라 견딜수 없었다.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고 뻐근한 아픔만이 탄내처럼 스며들었다.

《용서하세요.》

한봉숙의 가는 속삭임.

설미가 울기 시작했다. 그 어린것도 그 침묵의 뜻을 깨달았던것이다. 가냘픈 그 흐느낌소리가 또 수진의 가슴을 아프게 쥐여뜯었다.

《울지 말아, 얘.》

목소리가 남의 소리 같았다. 껄끄럽게 뒤설레는 혼탁된 마음, 손끝까지 저려드는 아픔, 그 역시 막 울고싶었다. 설미야, 네가 무엇을 안다고 그런단말이냐. 내가, 이 중로배 수진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하니. 변절자라는 무서운 그림자가 내 몸을 칭칭 감고있다는걸 알기나 하냐말이야!… 그는 헝클어지고 반나마 빠지고있는 머리칼을 움켜잡았으나 다시 맥없이 손을 떨어뜨렸다.

《고맙소, 봉숙동무.》 그는 가래끓는 소리로 힘들게 말하였다. 《나도 설미같은 딸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소. 사실 이렇게 찾아와준게 얼마나 고마운지… 다는 모를거요. 내 마음을… 하지만 잘 생각해보시오. 여기선 날 아바이라 부르오. 아니, 내가 말하자는건 그게 아니구… 정말이지 불쌍한 설미를 위해서 내가 무얼 할수 있겠소. 힘도 없구… 또 여기서 얼마나 고생스레 사는지 알기나 하오?》

한봉숙이 풀막을 떠이듯 허리를 폈다. 그 녀자의 두눈이 번뜩인듯 했다.

《알아요. 저도 다 알아요. 어렵게 살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구… 그렇지만 거기서 예전처럼 국장사업을 하구 고생을 모른다면 제가 왔겠어요? 아녜요. 그날밤, 설미때문에 온밤 새우면서… 저는 봤어요. 고정하구 량심적인분이 고충을 겪고있는걸… 봤어요. 지금까진 내가 제일 불행한줄 알았지만…》

《봉숙이!》

《마저 말하게 해주세요. 지난 10년간… 물질적으로는 풍족한 생활을 해온 저였어요. 피아노와 고급쏘파, 랭동기, 세탁기, 비데오, 애완용개며 갖가지 의복, 식료품… 부족한게 없었지만 집을 뛰쳐나왔어요. 풀죽과 타개죽도 없을지언정 진실한 사랑이 몇천배 더 귀중하다는걸 피눈물로 체험했어요. 그래서 찾아온거죠. 어리석게두 이렇게 나오실줄은 모르구… 걱정마세요. 조용히 물러가겠어요. 그렇지만… 정말 고마왔어요. 이 말만은 꼭 하고싶었는데… 인젠 됐어요.》

《…》

수진은 후려맞은듯 했다. 시꺼멓게 터갈린 손으로 통나무깔개를 긁으며 입술을 악물었다. 안된다. 절대로!… 청년개간자들도 견디기 어려워하는 고미덕등판, 닥쳐온 엄동에 누가 이들 모녀를 먹여주고 재워줄수 있으랴. 그리고 보다 중요한것은 수진에게는 다른 운명이 지워져있는것이다!…

소대장이 달려와 빨리 식사를 하라고 소리쳤다.

《장털보가 특식을 준비했수다. 자, 빨리요!》

그들은 식당으로 갔다.

얼마후 수진은 모진 마음을 먹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봉숙이 역시 말없이 따라 일어섰다. 수진의 눈길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는것이 알렸다.

《갑시다.》

수진은 어데로 가야 하는지 밝히지 않았고 봉숙이도 그것을 묻지 않았다.

수진이 먼저 설미를 안고 앞서 걸었다. 그날밤도 이렇게 설미를 안고 폭우속을 걸어갔었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의 등판, 영영 헤여져가는 길일수도 있다.

《차잡이를 할 때까진 내가 도와주겠소.》

한봉숙은 감각마저 잃은듯 했다. 차디찬 별빛이 반사되는 그 두눈엔 이미 눈물도 없었다.

갑자기 수진은 흠칠했다. 걸음을 멈추고 앞을 막아선 시꺼먼 담벽을 바라보았다. 소대장과 장윤보, 고수머리총각, 전체 소대원들이 막아서서 말없이 쏘아보고있었다.

장윤보가 제일먼저 앞으로 나서더니 그에게서 설미를 빼앗았다. 설미가 놀라서 부르짖었다.

《엄마!-》

장윤보가 달래는데 자갈씹는 소리같았다.

《일없다. 얘, 우린 좋은 사람들이다. 엄마랑 도와주자구 그런다. 가만 있어.》

칼바람이 귀바퀴를 얼구며 윙윙거렸다.

수진이도 봉숙이도 얼어붙은듯 꼼짝하지 못했다.

고수머리총각이 씨근거렸다.

《아바이, 아바인 너무해요!》

소대장이 한발 나섰다.

《아바이, 우리가 그새 아주머니랑 애때문에 풀막까지 지어놨는데 왜 보냅니까. 이 밤중에 가면 어디루 가라는겁니까. 예?… 우리한테 먹을게 없구 덮구 잘게 없어서 그러시우? 우리가 그렇게 인정사정두 모르는 막 돼먹은것들루 보이는가요?》

《우리한테 물어보기나 했수?》 장윤보가 소리질렀다. 《난 아주머니랑 온거 보구 속으로 울었수다. 울면서두 얼마나 반갑던지… 아주머닌지 누이동생인지 잘 모르긴 하겠지만… 아바일 돕자구 오지 않았수. 그런데 아바인 뭐이요? 너무 하우다. 너무해요!》

격하게 우들거리는 그를 소대장이 눌러놓았다.

《아바인 아직 우리 로동자들을 잘 모릅니다. 아픈 소리지만… 중앙기관 국장까지 했다면서 우릴 뭘루 아는가요. 에? 굶어죽드래두 도토리 한알 쪼개먹는 우리를… 그렇게 보지 마시우. 모욕하지 말란말이요!》

심장이 후둑거렸다. 이들 뜨거운 심장을 지닌 로동자들앞에서 용렬한 자신이 부끄러웠고 고마움에 목이 잠겼다.

장윤보가 봉숙이를 잡아끌었다.

《갑시다. 집으로 가자구요. 풀막이긴 해두 괜찮수다. 아 아, 일없다는데.》

고수머리총각이 따라가며 뭐라고 했다. 청년들이 일시에 그들을 따라갔다.

웃음소리가 울려왔다. 수진이만 남았다. 초물같이 진하고 뜨거운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있었다.

…보름이 지난 뒤 청년개간자들은 짐을 꾸려지고 고미덕을 내렸다. 새로운 전투장, 중소형발전소건설장이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이번에도 털보 장윤보가 설미를 안고 소대의 맨 앞장에서 걸어가고있었다. 설미가 챙챙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시내물 굽이굽이 어데로 가나

넓고넓은 저 바다 품으로 가네

내마음 훨훨 어데로 가나

구름너머 그리운 장군별님께

리수진은 말없이 맨 뒤에서 따라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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