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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9] 제3세계의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영국과 프랑스 100년 전쟁의 원인과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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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슴도치
댓글 1건 조회 15,162회 작성일 12-08-15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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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편집 시간 2012.08.16 01:31:56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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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9] 제3세계의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영국과 프랑스 100년 전쟁의 원인과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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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9] 제3세계의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영국과 프랑스 100년 전쟁의 원인과 결과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은 9번째 연재글 "제3세계의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이 발생한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오늘의 서구 열강들은 그 어떻한 죄의식을
표현하지 아니하고 비극적인 100년 전쟁에 대하여 옳바른 론평과 정직한 평가를 기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으로 제3세계의 눈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저지른 비극적인 100년 전젱의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옳바른
역사적 평가를 시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진다."라고 조명했다. 그의 아홉번째 글을 여기에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9]제3세계의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

영국과 프랑스 100년 전쟁의 원인과 결과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영국과 프랑스 100년 전쟁의 원인과 결과
프랑스의 캐톨릭 교회와 영국 성공회 교회의 분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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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유태영 박사
중세기 유럽 역사를 고찰하는데 있어서 영국과 프랑스를 빼놓고 이야기를 할 수없다. 오늘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과 결탁하여 서구열강의 중심에 서서 제3세계 나라들을 괴롭히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이 발생한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오늘의 서구 열강들은 그 어떻한 죄의식을 표현하지 아니하고 비극적인 100년 전쟁에 대하여 옳바른 론평과 정직한 평가를 기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으로 제3세계의 눈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저지른 비극적인 100년 전젱의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옳바른 역사적 평가를 시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그래야만 영국과 프랑스가 중세기에서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 역사에 끼친 모든 부정적인 영향들을 옳바로 인식하고 대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1. 영국의 원주민과 노르만디의 침략



영국에 살고 있던 원주민은 켈트족인데 켈트족은 영국 본토에서 약 2400년 동안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원주민 켈트족은 그들의 몸에 그림을 그리는 풍습이 있 었는데 그리스어로 그들을 “프레타니카”라고 불렀다. 이 그리스어가 원인이 되여 훗날에 영국을 “브리톤, 브리티쉬”라고 부르게 됬다고 한다.

켈트족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오래 동안 받고 있으면서 로마화가 되고 있었으나 로마 제국이 망한 후에 켈트족도 패망하여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등 여러 곳으로 분산됬다.

영국 땅에서 켈트족을 추방하고 점령한 세력은 “색슨족”과 “앵글로족”이었다. 이두 개의 종족은 서로 연결하여 하나의 종족으로 동화되였으며 하나의 민족으로서 1500년동안 살아 오는 과정에서 <영국의 국민성>을 형성했다. 이들은 영국인의 땅의 명칭을 <앵글로족이 사는 땅> 이라고 스스로 불렀다.

이러한 역사가 유래되여 오늘의 <잉글랜드, 영국>이 되었던 것이다. 영국은 잉글랜드 본토에서 오래 동안 살고 있던 토속 민족들의 소중한 종교를 뿌리채 타파하여 멸종시키고 케톨릭 교회를 받아 들임으로서 영국은 기독교국이 되고 있었다.

AD 700년대에 이르기까지 영국인들은 알프레드 대왕의 통치와 전통을 확립하여 수백년 동안 장구한 태평세월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수 세기의 오랜 평화와 번영 후에 영국은 AD 780년대에 이르러서 바이킹족의 침략을 받는 운명에 처하게 됬다. 바이킹족은 원래 스칸디나비아 북쪽에서남하하여 내려온 원주민인데 바이킹족이 잉글랜드를 침략한 때는 8세기 중엽부터 10세기 말까지 약 200년 동안 영국을 지배했다. 바이킹족이 정권과 무력으로 영국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영국이 침략자인 바이킹족을 지배하고 흡수하고 있었다고 역사는 전해주고 있다.

1066년에는 프랑스의 북부 지역에 속하는 노르망디의 통치자인 윌리엄 장군이 잉글랜드를 점령하여 잉글랜드 땅에 윌리엄 왕조를 새로 창건했다. 노르망디 사람들은 역시 원래는 바이킹족에 속하는 같은 종족들인데 북유럽에서 부터 남하하여 프랑스의 북부지역에 정착하여 프랑스에 종속된 민족으로서 오래동안 살고 있었다.

노르망디의 통치자 위리엄 장군은 프랑스의 왕정에 예속된 통치자로서 프랑스 왕의 지시를 받고 있는 왕의 신하의 신분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한 프랑스 왕의 전통과 권위의 소유자 이었다. 그럼으로 <영국 왕실과 프랑스 왕실>은 역사적으로 오래 전부터 같은 뿌리를 갖이고 있다.

노르망디의 윌리엄 장군 (윌리엄 공)이 잉글랜드를 침공한데 대하여 영국인들의거센 반격이 1066-1075년 까지 계속됬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노르망디 윌리엄 장군의 통치에 곧 순응함으로서 윌리엄 장군의 잉글랜드 정복은 성공했다.

노르망디의 윌리엄 장군 (윌리엄 공)이 영국의 왕이 되여 윌리엄 왕조는 1066년부터 1200년까 134년 동안 계속됬다. 윌리엄 왕조가 134년 동안 영국을 통치하는 정권하에서 영국은 완전히 프랑스의 일부가 되고 있었다.

프랑스 인들이 대거 영국정부의 고관직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영국의 읠리엄 왕가와 프랑스의 왕족들간에 결혼이 수 없이 많이 이루어 지고 있었다. 그럼으로 영국에서 영어보다는 오히려 불어가 더 우수한 언어로 사용되는 특이한 현상이 한 때 벌어지고 있었다.

영국의 왕족들이 프랑스의 막대한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기형상이 벌어짐으로 한 때 프랑스가 영국에 예속되는 것 처럼 보이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의 왕족들이 프랑스 왕정에 대한 내정 간섭이 공공연하게 성행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영국의 왕족들과 프랑스 왕족들 사이에 결혼이 수 없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왕위계승 문제에 있어서도 이해관계가 직접 연결되여 있었다.

두 나라 왕족들 사이에 혼혈이 성행되고 있었을 뿐만 아라니라 프랑스 왕가의 여자가 결혼을 할때 거액의 부동산을 지참금으로 가지고 영국으로 왔기 때문에 이로 인한 재산권문제가 양국간에 심각한 대립의 문제로 항상 발생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왕가들의 결혼 이야기를 하나 간략하게 기록한다.

영국의 윌리엄 왕조의 헨리 2세는 프랑스를 방문하는 기회에 프랑스의 왕 루이 7세의 왕비인 엘리노아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엘리노아 왕비는 프랑스의 왕루이 7세인 남편과 이혼하고 영국의 왕 헨리 2세와 결혼을 하여 영국으로 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엘리노아가 결혼 지참금으로 남프랑스를 몽당 가지고 영국으로 왔다고 한다. 남프랑스를 소유하게된 영국의 헨리 2세는 프랑스의 왕보다 더 많은 영토를 프랑스에서 소유하게 되었으니 “꿩먹고 알먹는 행운아”가 됬다.

이와 같은 여러 종류의 정치적인 원인과 종교적인 이유 그리고 왕가들의 영토 싸움이 프랑스와 영국 두 나라 사이에서 항상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른바 <영국과 프랑스 100년 전쟁> 이었다.


2.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에 대하여



영국과 프랑스 100년 전쟁이 1337년에 시작됬는데 그 보다 9년 전인 1328년에프랑스와 영국사이에 프랑스 왕위계승 문제로 극심한 대결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의 카페왕조의 샤를 4세 왕이 아들 게승자가 없이 사망했다. 프랑스는 후계자가 없이 사망한 샤를 4세 왕의 4촌형제인 필리프 6세를 왕의 게승자로 선정하여 국가적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에게 반기를 들고 나섰다. 그가 반기를 들고 나선 이유가 무었인가?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는 프랑스 카페왕조에 속한 후손으로서 후계자 없이 사망한 샤를 4세 왕의 친 누이가 된다.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어머니의 혈통으로 프랑스의 사망한 샤를 4세가외삼촌이 된다는 이유로 에드워드 3세 자기자신이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엉뚱한 주장을 하면서 프랑스에 반기를 들고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의 엉뚱한 주장을 거부하고 말었다. 이에 분개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의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하여 프랑스의 중요한 양모의 공급을 중단했다. 뿐만 아니라 그 때 당시 유럽 최대의 포도주의 생산지를 영국이 보유하고 있었음으로 포도주의 공급도 중지했다.

프랑스는 영국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내에 있는 영국이 소유하고 있는 막대한 왕족들의 주요한 부동산들을 몰수한다고 선포했다. 이와 같은 사건들의 연발로 인하여 이른바 <영국 프랑스 100년전쟁>이 시작됬던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은 열전과 휴전을 여러번 되푸리 되면서 1337년 부터 1453년 까지 장장 116년 동안 치열한 전쟁이 단속적으로 게속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100년 전쟁발생의 최초의 이유와 원인을 다시 한번 더 간략하게요약하면 세 가지 이다.

ㄱ. 프랑스의 샤를 4세 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한 후에 프랑스 왕의 계승권을 놓고 영국의 왕인 에드워드 3세가 어머니의 핏줄을 이유삼아 프랑스 왕위의 계승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에드워드 3세의 왕의 게승권 주장을 거부하고 사망한 샤를 4세의 후계자를 프랑스 가문중에서 왕의 4촌 형제인 필리프 6세를 프랑스 왕의 후계자로 선정해 세웠다.

이런 일로 인하여 영국의 왕인 에드워드 3세와 프랑스의 새로 세운 왕인 필리프 6세 사이에 불화와 반목과 대립이 날로 심화되고 있었다.

ㄴ.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에게 막대한 경제적인 손실을 끼치기 위하여 양모와 포도주의 수출을 완전히 금지했다.

유럽의 최대 양모 생산지 프랑드르와 포도주의 최대 생산지인 사스코뉴 지역은 본래 프랑스 땅이 었다. 하지만 노르망디 윌리엄 장군이 잉글랜드를 점령하고 왕이 되여 통치하게된 후 부터 이 모든 중요한 지역을 영국이 소유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이 프랑스 땅에서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자원을 다시 회복하기를 오래 전부터 원하고 있었는데 100년 전쟁의 이유와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ㄷ. 프랑스의 북부지역의 노르망디 출신인 윌리엄 장군이 1066년에 잉글랜드를 점령하고 영국의 왕이 되여 통치를 시작했으며 그의 후손들이 영국에서 윌리웜 왕조를 형성하여 800여년을 통치했다.

수세기 동안 프랑스의 왕족과 영국의 왕족 사이에 결혼이 성행하였음으로 영국의 왕족과 왕비들이 프랑스에서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많은 땅을 놓고 영국은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프랑스는 이에 맏서서 반대하고 있었다.

프랑스 안에 있는 땅은 무조건 프랑스가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프랑스의 당연한 국가의 주권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역사적 맥락에서 소유권을 주장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두 나라 사이애 대립이 계속하고 있었다. 100년 전쟁의 이유와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위의 세 가지를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의 좁은 의미로 이유와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보다 큰 이유와 원인은 경제적인 손실문제 뿐만 아니라 유럽의 주도권 문제와 그리고 종교적으로 로마 캐톨릭 교황청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상반된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 두 나라의 분쟁의 또 하 나의 이유와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영국과 프랑스 100년 전쟁을 4기로 분류한다.

제1기 (1337-1360) 개전과 동시에 영국이 우세하여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모든 영토의 통권을 공식 인정했다.

제2기 (1369-1389) 프랑스가 우세하여 영국이 통치권을 주장하고 있는 땅의 일부를 프랑스가 다시 탈환하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제3기 (1415-1429) 전쟁이 재개되여 영국이 우세한 가운데 영국의 왕 헨리5세가 프랑스의 왕권의 계승자가 된것을 인정하고 있음으로 프랑스는 큰 위기에 빠져 있었다.

제4기 (1429-1453) 큰 위기에 뻐져 있는 프랑스를 “잔 다르크”라는 애국 여성이 혜성처럼 나타나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어 냈다.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이란 벌것이 아니라 순전히 영토전쟁이었다. 그리고 이 영토전쟁의 골짜는 중세기에 유명했던 양모의 생산지와 포도주의 생산지에 대한 쟁탈전 이었다. 1453년에 100년 전쟁이 끝난 이유도 역시 양모와 포도주의주요 생산지가 완전히 프랑스의 손으로 돌아 왔기 때문에 전쟁이 끝날 수 있었다.

1475년에 영국과 프랑스는 <평화 협정>을 맺음으로서 100년 전쟁은 완전히 끝 났다. 하지만 한가지 큰 문제점이 남아 있었다. 이 큰 문제점은 영국이 프랑스와 <평화 협정>을 맺음으로서 영국은 완전히 <섬나라>가 되고 만다는 문제이었다.

그것은 영국은 본래 부터 <잉글랜드, 섬나라>인 고로 <평화협정>은 곧 영국이 섬나라로 원상복귀를 한다는 뜻 이었다. 영국이 대륙을 소유하려는 꿈은 프랑스와 <평화협정>을 맺음으로서 완전히 깨지고 말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1475년에 <평화 협정>을 맺으면서 영국이 긑까지 고집스럽게 주장한것이 하나 있었다. 영국이 끝까지 고집스럽게 주장한 것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도버 해협 건너편에 있는 육안으로도 바라 볼 수 있는 프랑스의 칼레 Calais 항구도시만은 영국이 끝까지 통치권을 유지하겠다고 하는 고집스러운 주장이다.

영국이 끝까 <칼레, Calais>항구 도시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는데 대하여 프랑스가 양보함으로 영국은 일단 성공하기는했다. 하지만 10년 후인 1558년에 영국의 고집스러운 통치권의 욕심은 종결되고 말었다.

영국이 유럽 대륙의 작고작은 일부에 대한 통치권을 끝까지 주장을 했지만 영국의 대륙에 대한 욕심과 미련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었다. 그리하여 영국은 본래의 작은 섬나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3. 칼레 항구도시의 비극적 위기를 구출한 6인 영웅들의 이야기



영국과 프랑스 100년 전쟁 초기에 영국은 프랑스의 북부지역에서 크게 승리하여 북부 전지역을 영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북부 도시인 칼레, Calais 항구 도시만은 시민들의 결사 항쟁으로 난공불락의 도시로 유명했다.

프랑스 북부지역이 모두 다 영국군에게 정복을 당했는데, 유일하게 칼레 시만은 11개월 동안 극심한 기근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항쟁을 하고 있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분노를 이르켜 칼레 시민들에게 특명을 내렸다.

만일 칼레 시민들 중에서 6 명이 11개월 동안의 항쟁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자발적으로 교수형을 받으려 나온다면 칼레시 전체에 대한 사면을 허락하겠다라고 하는 에드워드 3세의 특명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에드워 3세의 특명에 대하여 제1 첫번째로 교수형을 받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선 사람은 칼레 시에서 가장 부자로 알려진 “생피에르라” 이었다.

생피에르라의 희생정신에 감동 받아“내가 죽겠소”라며 나선 사람들이 속출했다.

법률가 “장 테르라”
카레 시의 시장 “외흐타슈”
상인 “장 테르”와 그의 아들 한 사람
무명의 일반 시민 2인

칼레 시를 구원해 내기 위하여 교수형에 자발적으로 나선 사람들은 모두 6명인데 생피에르라는 6명에서 자가자신 까지 합치면 7인이 되여 1인이 초과되는 것을 알게 됬다. 그런데 생피에르라는 그 날 밤에 자기 집에서 혼자 스스로 자살을 했다는 놀러운 사실이 발생했다.

에드워드 3세는 교수형을 받으려 오는 6인 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렸다.

<칼레 시를 구하려고 교수형을 받으려 올때 6인들은 옷을 입지 말고 내복만 입은 상태로 오라. 목에는 교수형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동아줄을 각자 목에 걸고 오라>

이제 내일이면 교수형을 받아 죽음이 임박하고 있는 그날 밤에 영국의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인 필립파의 눈물의 호소가 놀라운 기적을 초래하고 있었다. 도대체어떤 기적이었나?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인 필립파는 임신중 이었는데, 만일 에드워드 3세의 명령으로 인하여 6명이 처형된다면 그들의 죽음이 아직 태어나지 못한 우리들의 아기에게 불길한 전조를 가저다 줄지 모름으로 저들을 살려달라 라고 하는 피립파 왕비 의 눈물의 호소 이었다. 왕비의 눈물의 호소에 감동을 받은 에드워드 3세는 내일집행할 에정인 6인에 대한 교수형을 정지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필랍파 왕비의 눈물의 호소는 기적을 나타냈다. 칼레 시를 구하기 위하여 교수형의 죽음을 자청했던 6인은 기적적으로 죽음을 면했을 뿐만 아나리 칼레 시의 전체 시민들의 생명도 구해낼 수 있었다.

이 놀라운 칼레 시의 기적적인 사건은 1337년에 100년전쟁이 시작된 후 바로 10년째 되는 1347년 8월 3일에 발생한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1347년 8월 3일에 칼레 시는 기적적으로 죽음의 위기를 면하기는 했다. 하지만 영국은 칼레 시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통치하는데는 성공했다. 영국은 1558년까지 211년 동안 도버 헤협의 프랑스 영토에서 노른자위인 노르망디 칼레시를 통치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뎅이 Les Bourgeois de Calais라는 작품을 제작하여 칼레 시의 고위층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 6명이 살신성인적 애국심과 죽음을 감수하는 희생정신으로 칼레 시를 구출했던 역사적인 사건을 후세에게 전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조각가들은 전승의 기념으로 조각 작품을 제작하지만 로뎅은 정반대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6인의 정신에 감명을 받아서 교수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질 운명을 자청하고 나선 모습을 담은 동상을 제작했던 것이다. 로뎅은 1880년에 6인의 모습을 담은 조각을 제작했으며 오늘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12개 박물관 에서 로뎅의 6인의 조각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1450년대에 조선반도의 역사에 단종 복위 운동을 이르킨 <사육신>들이 비참하게 처형을 당한 비극적 사건과 프랑스 칼레 시의 6인들의 이야기는 대조가 된다.


4. 프랑스를 구출한 잔 다르크 여성 영웅 이야기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은 제1기와 제2기 그리고 제3기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 1429년경에 이르러 프랑스는 영토의 반을 이미 영국에게 빼앗기고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왕권마저 영국에게 강탈당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왕위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그 때 당시 프랑스의 수도인 렝스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샤를 7세는 가는 길마저 영국군에게 점령을 당하여 대관식을 연기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위기에 처해 있는 프랑스에 잔 다르크가 등장 했다. 잔 다르크는 16세때 <천사의 계시로 프랑스를 구출하라는 사명을 받았다>라고 주장한다. 잔 다르크는 거침 없이 군부의 사령관에게 달려가서 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위기에 처해 있는 샤를 7세는 신하의 옷을 입고 왕세자의 신분을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왕세자를 곧 알아보고 샤를 7세의 대관식을 장담했다. 잔 다르크의 용기와 지혜로 인하여 샤를 7세의 대관식을 올릴 수 있게 됬다.

잔 다르크는 여장부로서 샤를 7세를 설득시키고 그에게서 받은 군부대를 이끌고 전선으로 달려 나갔다. 여장부 사령관의 용기에 감동을 받은 프랑스 군대는 그동안 영국군에게 빼앗겼던 프랑스의 중요한 지역인 오를레앙을 탈환했으며 계속하여 영국군을 격파하여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잔 다르크는 <신의 게시를 받았다>라고 선언하고 남자 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흰 갑옷을 입고 병사들 앞에 용감히 서서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 그녀가 이끄는 프랑스 군인들은 치솟는 사기로 영국군을 상대하는 곳마다 승리하기 시작했다.

100년 전쟁으로 초토화된 프랑스와 전쟁에 지친 프랑스 국민들에게 있어서 잔 다르크는 기적과 같은 존재였으며 <승리의 여신>이자 <행운의 여신>이 되고 있었다. 잔 다르크의 명성과 인기는 프랑스에서 최고 절정에 이르러 샤를 7세의 인기를 능가하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기 까지했다.

잔 다르크를 <성녀>또는 <신의 증인> <여장군>등 여러가지로 표현되여 민중의 추앙을 받고 있는데 대하여 영국은 물론 프랑스 편에서도 잔 다르크에 대한 평가와 시선이 엇갈리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잔 다르크는 1430년 5월 23일에 프랑스 콩비에뉴 방어전투에서 영국군의 포로로 잡혔다. 잔 다르크가 영국군에 포로로 잡힌데 대하여 프랑스는 침묵을 지키고만 있을 뿐이었다.

영국은 프랑스에게 몸 값을 지불하면 그 대가로 잔 다르크를 석방하겠다고 제안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영국에게 아무 응답을 하지 않었다.

프랑스 파리 대학 신학교는 잔 다르크에 대하여 “이단” 이라는 혐의를 걸어 종교 재판을 요청했다. 영국 왕가측도 종교재판에 동의하여 잔 다르크를 영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했다.

잔 다르크에 대한 종교재판은 1431년 2월 21일 부터 시작하여 14회의 심리를 거듭하면서 계속됬다. 종교재판은 잔 다르크가 교회의 성직자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신적인 접촉을 주장하는 것은 심리적 착각이며 우상숭배의 성격이라고 논증했다.

만일 잔 다르크가 그의 잘못을 시인하고 종교재판의 판정을 받아 들인다면 영국교회는 그의 죄과를 단순죄로 인정하고 용서를 하겠다고 협박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법정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녀는 자기의 순수한 참된 신앙적인 사명감과 프랑스를 위한 양심의 절개를 끝까지 주장했다. 1431년 5월 28일에 잔 다르크는 걸국 이단으로 선고를 받아 화형에 처형되었다.

잔 다르크가 영국의 종교재판에서 화형에 처형을 받게되는 위기에 대하여 프랑스는 끝내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 샤를 7세 왕가와 프랑스 교회는 25년이 지난 후에 1456넌에 이르러서 영국이 잔 다르크를 화형에 처형한 판결은 잘못된 판결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이 잔 다르크에게 선고한 재판을 파기한다고 선언하고 잔 다르크의 명예를 회복한다고 선언 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정치 쇼이며 종교적 위선인가?

뿐만 아니라 이 보다 더 웃기는 것은 로마 캐톨릭 교회는 영국 교회가 잔 다르크에게 부당한 화형을 선고한 잘못에 대하여 일언 반구의 비판의 말이 없이 다만로마 케톨릭 교회의 권위를 과시하면서 잔 다르크를 <성녀>로 추앙한다고 1920 년에 발표 했다. 이것도 역시 캐톨릭 교회의 허상을 나타내 보이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을 끝 뱆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은 순전히 동질의 백인들끼리 100년 동안이나 싸운<영토분쟁>과 <왕위다툼>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으며 왕족들과 귀족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전쟁터에서 무명의 수백만 수천만 민중들이 희생을 당한 사실도 알게 됬다.

어쩌면 백인들이 창조해낸 비극적 세계사를 보며 또 하나의 악마를 보는듯 하다.

프랑스에 잔 다르크 성녀가 있는것 처럼 우리 나라의 역사에도 <유관순 성녀>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칼레 시의 비극적 운명을 구출해 내기 위하여 죽음을 감수하기로 자발적으로 나셨던 <6인 사건>이 1347년에 발생했던것 처럼 우리 나라의 역사에도 1456년에 구국적 사명감으로 죽음을 각오한 <사육신> 사건이 있었던것이 생각 난다.

하지만 매우 유감스러운 것은 칼레 시의 <6인 사건>은 조각가 로뎅의 작품으로 승화되여 세계 역사의 조명을 받고 있는데 비하여 우리 나라의 <사육신 사건>은그들의 유골이 한강변 노량진에 안장되여 있을 뿐이다.

하루 속히 우리의 소원인 조국통일의 그 날이 오면 로뎅의 솜씨 이상가는 우리 민족의 우수한 멋진 솜씨로 자랑스러운 <사육신>의 조각상을 전세계에 과시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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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유태영 박사 2012-08-15]

민족통신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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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설님의 댓글

정설 작성일

유태영 박사님의 세계사에 대한 통찰 늘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본 글에서 언급하신 사육신을 칼레 6인과 대비하기는 그 비유가
좀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 됩니다.

역사를 해석하기에 따라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조선의 사육신은
그 저항의 명분을 국가 정통성 유지에 두었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당시 보수 기득 핵심세력으로써 토지개혁 등 새로운 개혁 내용에
반발하여 끝까지 저항하다가 밀린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정설인
것으로 압니다.

혹 본 내용이 잘못된 것이라면 실제적 학설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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