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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3-3. 인도네시아의 자주화를 가로막은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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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102회 작성일 22-11-14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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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자주화를 가로막은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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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고 류태영 박사

 

1만 8 100여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는 인구수가 세계 4위이며 령토의 크기는 200여만㎢에 달한다.

최근 어느 한 자료에 의하면 인도네시아의 전체 인구중 86%가 이슬람교도이라고 한다. 아마도 세계에서 이슬람교도가 가장 많은 국가라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그외에 그리스도교인, 힌두교인을 비롯한 기타 종교인들도 있다.

인도네시아의 국민은 360개이상의 종족과 인종집단들로 이루어져있으며 언어는 250여종류이지만 주로 17개의 언어를 제각기 사용하고있다. 공식언어는 인도네시아어이지만 약 3천만명이상의 인구가 중어, 영어와 네데를란드어를 사용하고있다.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섬들로는 쟈와, 쑤마떼라, 깔리만딴, 쑬라웨씨 등의 섬들을 들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간추린 력사

 

고고학자들은 B.C. 50만년전의것으로 추정되는 쟈와원인의 뼈가 발굴된 인도네시아를 인류발상지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만큼 인도네시아는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는것이다.

력사를 거슬러올라가면 B.C. 3000년경부터 아시아에서 몽골계이주민들이 인도네시아에 정착하여 수세기동안 살면서 인디아-아리안계의 사람들이 혼혈되여 후에 큰 종족을 이루었다.

A.D. 1~2세기이후부터는 힌두교 및 불교의 시대가 도래하여 8세기경에 불교가 번성했으나 13세기에 이르러 페르샤로부터 상인들이 인도네시아에 접근하기 시작하여 힌두교왕국을 이슬람교로 개종시켰다.

그후 15세기말 뽀르뚜갈식민주의자들이 처음으로 이 나라에 침입하였으며 그뒤를 이어 인도네시아에 들어온 에스빠냐는 이곳에 카톨릭교를 전파했다.

1602년에는 네데를란드가 인도네시아에 침입하여 네데를란드 동인디아회사를 개설하고 침략을 시작하여 1799년에 이르러서는 인도네시아의 전역을 거의다 장악하였다. 침략자들은 농산물과 기타 자원들을 대대적으로 략탈하여 자기 나라로 날라갔다.

그 이후 프랑스가 인도네시아를 일시 점령했지만 나뽈레옹의 몰락으로 인하여 인도네시아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후 네데를란드는 1815년부터 인도네시아에 대한 식민지통치를 또다시 재개했다.

인도네시아의 곳곳에서는 네데를란드의 가혹한 통치에 항거하는 투쟁이 련이어 일어났다.

이 투쟁의 앞장에는 인도네시아의 독립투사 수카르노가 서있었다.

그는 1927년에 인도네시아국민당을 조직하고 네데를란드로부터 독립을 주장하여 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불안을 느낀 네데를란드침략자들은 수카르노와 그의 동료들을 검거하여 투옥하였다. 수카르노는 1929년-1931년까지 반둥에 있는 네데를란드감옥에 투옥되였으며 1933년-1942년까지 류형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42년 교활한 일본은 재빠르게 인도네시아를 침공하여 1945년 련합군에 항복할 때까지 3년동안 인도네시아를 통치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영국과 네데를란드침략자들은 다시 인도네시아에 되돌아와 4년동안이나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지연시키고 방해했다.

하지만 굴할줄 모르는 인도네시아민중들의 투쟁에 의하여 1949년에 마침내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이룩하게 되였다.

 

건국의 아버지 수카르노대통령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이 인도네시아에서 쫓겨간 후인 194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축하하면서 수카르노를 초대대통령으로 내세웠다.

그런데 해방과 독립을 축하하면서 대통령까지 내세운 인도네시아에 이게 웬 일인가?

네데를란드가 또다시 들어와 인도네시아에 대한 식민지통치를 계속하겠다고 억지를 부리고있는것이였다.

이로 인하여 인도네시아민중들의 가슴속에 차넘쳤던 해방과 독립의 기쁨은 사라졌고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할수밖에 없었다. 쟈와섬을 중심으로 하여 수카르노가 지휘하는 게릴라전이 4년동안 또다시 계속됐다.

그러던 1949년 2월 유엔은 중재자로 나서 네데를란드에 유리한 네데를란드-인도네시아련방공화국을 발족시킨다는 내용의 어처구니없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은 창설된 초창기부터 시종 이런 불공정한 역할만 하고있었던것이다.

수카르노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네데를란드가 인도네시아를 포기하고 떠나가는 마지막순간까지 게릴라전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드디여 네데를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완전히 포기하고 떠나갔으며 인도네시아는 1950년 8월에 자주적독립을 다시 쟁취했다. 수카르노는 게릴라전을 지휘하면서 독립준비위원회라는 지하조직을 통하여 독립된 나라의 민중들이 공통적으로 갖추어야 할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상교양사업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있었다.

사상교양의 과제를 《건국의 5원칙》(판챠실라)이라고 하는데 즉 1. 신앙, 2. 민족주의, 3. 인도주의, 4. 의견일치, 5. 사회정의 등이다. 수카르노는 우의 원칙을 대통령의 정치적소신으로 삼고 변함없이 실천했다.

인도네시아독립후 랭전시대가 한창이던 때에 수카르노는 국내문제뿐만아니라 국제문제에 대해서도 용감하게 소신을 밝히였다. 그는 인디아의 네루, 유고슬라비아의 찌또, 에짚트의 나쎄르와 함께 쁠럭불가담운동의 조직에 참가하였다.

수카르노대통령은 자기자신이 이슬람교신자이고 또 인도네시아인구의 절대다수가 이슬람교도임에도 불구하고 집권초기부터 종교의 균등화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수많은 종족, 다양한 종파들을 규합하여 종족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인도네시아를 명실공히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건설하려고 전력을 기울였다.

1955년에 수카르노대통령은 아시아, 아프리카나라들의 반둥회의를 주최하여 인도네시아의 외교적립지를 강화하고 제3세계국가들의 단합을 촉구하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놀기도 하였다.

또한 수카르노대통령은 인도네시아를 고립시키고 자주적발전의 길을 가로막는 미국과 서방세력들의 책동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1965년에 유엔에서 탈퇴하는 단호한 조치도 취했다.

인도네시아의 민중은 수카르노대통령의 용단을 열광적으로 지지하였고 민중들은 수카르노대통령이 내놓은 정치적구호에 깊은 공감을 표시하였다.

한편 수카르노대통령이 지향하는 사회주의정책로선을 절대지지하는 사회주의당원수는 1960년대초에 300만명에 달하였다.

하지만 수카르노대통령에게는 국가운영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3년간의 강점기간 일본이 모든것을 망쳐놓은 후유증이 아직 남아있었고 네데를란드인들이 소유하고있던 대기업들이 갑자기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생긴 피해 또한 속히 회복할수 없는 커다란 사회적문제였다. 그리고 수카르노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미중앙정보국의 음모와 기도가 끊임없이 계속되고있었다. 뿐만아니라 미국이 지원하는 인도네시아의 우파세력이 기승을 부리면서 좌파정권과 충돌하고 지방에서 폭동을 일으키고있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조건하에서 수카르노대통령은 사회주의나라들과의 뉴대를 더욱 강화했다.

특히 수카르노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주석과 서로 왕래하면서 두 나라의 굳은 뉴대를 전세계에 과시하였으며 보다 강경하게 서방제국주의에 맞서나갔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수카르노대통령이 벌리고있는 사회주의적국가운영과 쁠럭불가담운동에 제동을 걸기 위하여 전보다 더 집요하고 로골적인 방법으로 인도네시아를 압박하였다.

미국은 막대한 량의 물자들을 인도네시아의 우파세력들과 친미군벌집단에게 비밀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지원해주었으며 미중앙정보국은 비밀공작을 추진시키면서 반정부쿠데타를 로골적으로 지원하였다.

1957년에 있은 수카르노대통령에 대한 암살미수사건도 그 하나의 고리였다.

그때 수카르노대통령은 지방순회를 하면서 어느 한 초등학교를 방문했는데 미국의 군사고문단원의 관여밑에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총격전이 벌어졌다. 다행히 수카르노대통령은 무사했지만 6명의 어린이들이 살해되였다.

이 사건만 보아도 미국이 수카르노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얼마나 집요하게 책동했는지 잘 알수 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민중은 제국주의의 압박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오히려 더 수카르노대통령을 옹호하고 지지했다.

그런데 평생 반제반미투쟁으로 지칠줄 모르고 싸워온 수카르노대통령에게 뜻밖에 비운의 날이 찾아왔다.

1965년 9월 30일 인도네시아에서는 사회주의계렬의 령관급장교그룹이 친미륙군장성들을 제거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이 일어난 후 이 령관급장교들은 라지오방송으로 《미중앙정보국에 매수되여 수카르노정권을 전복시키려고 음모하고있는 매국적장성군벌집단을 좌절시키기 위하여 혁명을 일으켰다.》라고 발표했다.

당시 륙군전략사령부 사령관으로서 사태를 주시하던 수하르또는 친미편에 서는것이 자신에게 유리할것으로 판단하고 반수카르노, 친미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그는 계엄령을 발표하고 일약 친미계엄사령관으로 활약했으며 미국에 긴급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를 절호의 기회로 여긴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은 즉시 필요한 병력과 군사적지원을 제공해주었으며 수하르또는 그 지원밑에서 우익군벌세력을 총동원하여 국가권력을 손에 넣었다.

그리하여 수카르노는 대통령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였으며 만성신장병과 합병증으로 앓다가 1970년 6월 21일에 사망하였다.

수하르또는 수카르노의 장례를 조용히 치르도록 지시하였지만 최소 50만명의 민중이 빈소를 찾아 애도의 뜻을 표했으며 20만명이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때로부터 10년후 수카르노의 명예는 완전히 회복되였으며 그는 오늘 인도네시아민중들의 추억속에 건국의 아버지로 남아있다.

 

미국의 리익과 수하르또대통령

 

1998년 5월 21일 인도네시아의 국민들은 일제히 길거리로 뛰쳐나와 환호성을 지르며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불과 1, 2개월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였다.

건국의 아버지 수카르노 전임대통령을 밀어내고 32년동안이나 장기집권을 해온 수하르또대통령이 사임을 전격적으로 발표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던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여 철권대통령이라고 불리워오던 수하르또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하게 되였겠는가?

여기에 흥미있는 자료가 하나 있다.

1998년 5월 20일 당시 미국무장관 알브라이트는 어느 한 연설에서 《인도네시아의 수하르또대통령은 즉각 사임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놀랍게도 그 다음날에 수하르또는 사임을 발표하였다.

수하르또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사퇴하게 된 리유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수하르또로 말하면 수카르노대통령에 의하여 소장을 거쳐 륙군중장으로, 전략사령관이라는 요직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이러한 수하르또는 1965년 9. 30사태를 계기로 친미군벌로 돌변하여 사회주의를 지향하고있던 수카르노정권을 붕괴시켰으며 좌익세력에 대한 숙청을 감행했다. 그후 그는 32년동안이나 집권하였다.

그가 이렇게 할수 있은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의 비호조장과 《원조》가 있었기때문이였다.

9. 30사태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은 호상 수시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인도네시아좌익세력의 움직임을 파악하고는 수하르또의 계엄사령부가 적극적인 분쇄작전을 즉시 전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작전이 좌익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소탕작전으로 되도록 하였다.

이뿐이 아니다.

미국은 수하르또가 집권한 후 군사고문들을 파견하고 직승기를 비롯한 각종 무기들을 원조의 명목으로 넘겨주는 등 수하르또정권의 유지를 위해 각방으로 책동하였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수하르또정권에 대한 정책에서 줄곧 당근과 채찍을 쓰는 상투적수법을 적용해왔다.

한편 수하르또정권은 서방에 문호를 활짝 개방하여 서방의 자본이 활개치게 하였다.

서방의 언론들은 수하르또정권시절에 경제성장이 이룩된듯이 선전하고있지만 그것이 인도네시아의 귀중한 천연자원들이 서방에 헐값으로 넘어간 대가라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있다.

이렇게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의 비호조종에 의하여 출현했고 그들의 리익을 위해 존재해온 수하르또정권이 마침내 민중의 거세찬 항거에 부딪쳐 붕괴의 운명에 처하게 되자 미국은 당근과 채찍정책으로 한때 요긴하게 써먹은 수하르또대통령을 미국의 체면을 손상시킨다는 리유로 헌신짝 버리듯 포기하고 강압적으로 퇴진시켰던것이다.

 

수하르또정권의 이후와 오늘의 인도네시아

 

1998년에 수하르또대통령의 후임으로 등장한 하비비에대통령은 불과 16개월만에 정권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압둘라만 와히드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그 역시 취임한지 20개월만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인도네시아의 건국의 아버지 수카르노 초대대통령의 딸인 메가와띠 수카르노 뿌뜨리가 2001년 7월 23일 인도네시아의 제5대대통령으로 등장한것이다. 이로써 인도네시아의 첫 녀성대통령이 태여나게 되였다.

원래 메가와띠는 부대통령이였는데 와히드대통령이 집권을 시작하자마자 부정부패행위로 탄핵되여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자동적으로 대통령직을 넘겨받았던것이다.

어쨌든 메가와띠가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이 된것은 사회에서 소외받는 소상인, 도시빈민들을 비롯한 일반민중이 메가와띠를 지지했기때문이였다.

결국 민중으로부터 배격받은 친미엘리뜨들의 집권여당인 콜카르당은 집권 수십년만에 참패를 당한셈이였다.

현실은 민중을 떠난 그 어떤 정치도 성공할수 없다는것을 보여주었다.

메가와띠대통령은 2002년 3월에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국방위원장과 뜻깊은 상봉을 하고 두 나라사이의 대화와 교류문제를 토의했으며 부친이 김일성주석과 맺었던 우호와 사상적, 동지적관계를 추억하였다.

2005년 4월은 김일성주석의 인도네시아방문 40돐이 되는 해이며 동시에 김일성화가 세상에 태여난지 40돐이 되는 해이기도 하였다.

1965년 4월 김일성주석께서는 인도네시아의 유명한 보고르식물원을 참관하시였는데 그때 주석께서 란과계통의 특이한 꽃을 보시고 참 아름다운 꽃이라고 말씀하시자 옆에서 보고있던 수카르노대통령은 《이 꽃에 김일성수상각하의 존함을 모시도록 하였으면 합니다.》라고 청을 드리였다. 그러자 그곳 식물원 원장도 《이 꽃을 김일성화로 합시다.》라고 이야기하였다.

김일성주석은 겸허하게 사양했지만 수카르노대통령은 주석께서 반제투쟁에서 세계적으로 큰일을 하고계신다고 하면서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수카르노가 거듭 청을 드려서야 김일성주석은 그의 청을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국민들의 조선인민에 대한 찬양의 표시로 받아들이시였다.

그 시기 수카르노대통령은 김일성주석과 각별한 친분관계를 맺고있었다. 그만큼 수카르노대통령은 김일성주석의 위인상에 깊이 매혹되였던것이다.

메가와띠대통령은 자기 임기를 성과적으로 마치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하여 유도요노대통령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군장성출신인 유도요노대통령은 집권후 그 어떤 외부세력에도 구속받지 않으려는 의향을 표시하기도 하고 반둥회의 50돐 기념행사에 참가하기도 하면서 자주적인 립장을 취하고있다.

또한 인도네시아정부는 가자지역에서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부상자들이 발생하자 의사들을 파견하여 구호사업에 힘쓰면서 유태복고주의를 반대하고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복잡다단한 길을 걸어온 인도네시아의 력사를 돌이켜볼 때 앞으로 유도요노정권의 정치동향이 크게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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