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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권 줬으니, 나머지는 알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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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중
댓글 0건 조회 1,660회 작성일 12-12-09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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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대선, 투표장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대통령을 직접 뽑아보지 못한 기자는 '사상 처음으로' 지난 6일 투표장으로 향했다. 50대 후반으로 접어든 기자가 단 한 번도 우리 대통령을 뽑아보지 못한 이유는 이렇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시작된 체육관 선거가 대학생활, 군대생활, 복학, 대학원 시절까지 이어지며 선거를 잊어버렸다.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이런 저런 나라에서 걸핏하면 별단 장군이 대통령이 되고, 어느 날에는 육군 상사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날아 들던 시절이었다. 우리도 그 대열에 끼어 있었으니 크게 소외감 같은 것이 들지 않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잊혀진 선거, 잃어버린 선거

어렸을 적부터 보아 온 정든 각하가 충복의 손에 유명을 달리한 이후의 낙심을 잊지 못한다. '아, 이제 우리도 투표를 하는구나' 하며 그날을 손꼽아 세고 있던 어느날 새벽, 12·12의 주인공들이 보낸 날센 아저씨들이 동아리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모두 꺼져버려!"를 외쳤다. 이 한 마디에 캠퍼스는 다시 얼어 붙었고, 선거는 다시 체육관에 갖혀 버렸다. 또 잊혀지기를 강요받았다.  

1986년 1월 1일 미국 유학길에 오른 이후로는 선거권을 아예 잃어버렸다. 대신, 미국의 대선을 실컷 구경하면서 발 동동 구르며 눈으로 가슴으로 본국 선거에 동참했다. 12·12 쿠테타의 주역 가운데 하나가 30%대 대통령이 되는 바람에 한숨 쉬며 5년을 흘려보내고, '대도무문'을 외치던 민주투사가 '야합'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대권을 잡는 세월이 왔다.   

'그나마 진전'이라며 위안을 삼고 있던 이 시절, 같은 클래스의 키 껑충한 아랍 친구가 "너희나란 아직도 육군 소장이 대통령 하는 거 맞지?"라며 툭 던진 말에 화들짝 놀라 "입닥쳐! 그 무슨 소리야. 우리 대통령은 민간인이라고!" 눙을 치기는 했으나, 화가 치밀며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모멸감이들었다.

1998년 대선에서 처음으로 '정상적인' 민주정권이 들어섰던 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수십 년간 켜켜이 쌓인 '열등감'이 와르르 무너진 그날, 투덜거리는 아이들과 아내를 차에 밀어넣고 처음 유학 생활을 한 미시간으로 내달렸다. 날아가듯 1200마일(1930km)을 달린 그날, 눈발을 맞으며 모텔에 막 들어갔을 때 텔레비전에서 김 대통령이 와이셔츠 차림으로 IMF 대책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었다. 문득 그 '아랍놈'을 어디에선가 찾아내어 눈을 부라려 주고 싶었다.

이후로 무슨무슨 연대들이 "바꿔, 바꿔"를 외치며 국회의원 낙선·낙천 운동을 하는 뉴스를 신기한 듯  미국 방송에서 보았고, 부산에서 노무현이 한숨쉬며 뿜어냈던 절망의 담배연기가 빛고을에서 부터 희망으로 활짝 피어오르는 장면도 보았다. 5월 어느 날, 그 희망이 애처롭게 봉화산 절벽으로 밀려 떨어지는 장면이 고장난 듯 미국 방송에서 나오고 또 나오는 걸 보며 다시 깊은 절망감을 맛 보았다.

절망에는 날개가 없었다. 각고의 세월,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몸을 던지고 많은 국민적 희생을 치르며 천신만고 끝에 꽃을 피우는가 했던 민주주의가 아집과 불통의 '산성'에 막혀 뒷걸음질 치는 장면을 가시 발 동동 구르며 목격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선거를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살아온 '제외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재외국민의 '제외'에 대한 부당성이 마침내 법원에서 설득력을 얻어 승소하고 국회에서 우여곡절 끝에 재외국민 투표 시행안이 확정되던 날, 솔직히 긴가 민가 무덤덤 했다. 헤어진지 오래돼서 잊어버리고  살기로 작정한 지 오래된 터에, 남의 할머니와 북의 할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당국의 주선으로' 만났을 때 갖게 된 어색함과 불편함 같은 것에 감히 견줄 수 있을까.     

조용한 '첫 경험'... 일단 좋았다

무려 8시간 30분을 달려간 고난의 '투표 행군'이었다.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투표소가 있는 애틀랜타 한인회관 입구까지 480마일(772km). 오전 11시 30분에 출발하여 플로리다 오칼라 목장지대, 게인스빌 대학촌, 레이크 시티, 아직 추수가 덜 끝난 조지아 목화밭, 지미 커터 생가 국립뮤지엄을 지나 트럭커들의 난폭운전을 피하다 길을 잘 못들어 헤메기도 하며 지역 투표소에 도착하니 오후 8시. 점심과 두 차례 기지캐 켜는 시간(50분)을 제외하고 줄곳 달려간 결과다.  

투표 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기에 좀 더 일찍 와서 투표를 한다 해도 하루 저녁은 어차피 어디에선가 숙박을 해야 했다. 싸구려 호텔에서 자고 다음날 오전 8시 30분에 비로소 투표를 했다. 생애 첫 대선 투표용지를 마주 대한 것이니 실로 감격스러웠으나, 조용히 '첫경험'을 치렀다.       

'먼데서 온 손님'은 우리 부부뿐이 아니었다. 서울중앙지법원 파견 연수교육으로 체플힐에 와 있는 김준우(41)씨 부부와 한국일보 디지털 뉴스부 양홍주(39) 기자 부부도 자녀들을 대동하고 6시간을 달려와 아침 일찍 투표를 마치고 '인증샷' 사진을 찍었다. 이들 부부도 애틀랜타에서 하루 저녁을 묵었다고 했다. 

이른 시간대는 아무래도 원거리 투표자들이 많이 몰려드는 듯 했다. 아이들을 대동하거나 여행복 차림새로 보아 그렇다. 10시가 가까워지면서  애틀랜타 현지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차를 몰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평일이어서인지 줄을 서지는 않았으나 한인회관 문이 계속 여닫힐 정도로 투표자들이 꾸준히 몰려들었다. 

약 1시간 30분 동안 30명이 투표를 마친 가운데, 나이든 커플 2명 등을 포함하여 8명의 중장년 및 노인 투표자들을 제외하고는 20-40대 젊은 층이 80%를 차지했다. '뭔가를 위해 차를 몰고 왔다'는 의지가 얼굴 표정과 걸음걸이에 묻어나 보였다. 특히 젊은이들의 표정은 밝으면서도 진지했다. 

분위기에 고무된 김동원 선거관은 "대부분의 본국 언론들이 재외국민 선거권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를 내보내고 있지만 여기 교민들은 투표권 행사에 매우 긍정적"이라며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만큼 앞으로 제도와 시스템을 보완하면 분명히 등록율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목타게 선거권 부활을 주장해온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재외선거가 이뤄진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재외선거제도로는 등록율이 15%를 넘기기는 불가능하다는 예상들이 많다. 이번 대선에서 재외선거인 등록율이 10%(22만 3천557명)에 턱걸이를 한 가운데, 애틀랜타 총영사관은 등록율이 3.61%(3699명)로 전 세계 해외 공관에서 꼴찌를 차지했다. 

내년 1월에 철수한다는 김 선거관은 "6개주에 한인들이 넓게 산재해 있는 데다 대중교통이 없는 점도 투표 등록율이 낮은 원인"이라면서 "어려운 여건에서나마 하루종일 달려와 투표를 하는 교민들에게 머리가 숙여진다"고 고마워 했다. 최현경 참관인(미동남부 한인상공인연합회 회장)은 "지난 총선 투표에서는 마이애미에 사는 여성이 미국인 남편과 14시간을 달려와 투표한 일도 있어 너무 놀랍고 당황스럽기까지 했다"며 '본국에서 현지의 사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고 지적하고 대폭적인 제도 개선을 주장했다. 

'접시에 담긴 수프'를 '부리'로 먹으라니!

낮은 등록율로 시말서까지 쓴 것으로 알려진 김 선거관은 "본국에서는 재외선거와 관련하여 편의성보다는 공정성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이 있는 게 사실"이라며 "첫 출발인 만큼 점진적으로 제도 개선이 이뤄질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관할 지역에서는 현재까지 단 한 건의 선거 부정행위도 없었다'는 김 선거관의 언급을 고려한다면 차기 선거에서는 편의성 개선에 우선적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남북한 면적과 비슷한 크기의 플로리다에는 최소 6만 명에서 최대 9만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다. 옛날 본국으로 말하면 웬만한 소도시 인구를 갖고 있는 곳에 투표장을 두지 않는 이유에 대해 플로리다 한인들은 납득하지 못한다. 더구나 중·소규모 업소를 운영하고 있는 대부분의 한인들 가운데 이틀치 벌이를 손해보고 상당한 비용을 들여가며 8시간이나 14시간씩 운전하여 30초면 충분한 '도장찍기'를 하러갈 한인들이 얼마나 있을런지. 

기자는 '최소 투자로 투표한다'며 차를 몰았으나 비용이 만만치가 않게 들었다. 자동차 가스비 85불, 식사비 68불, 호텔비 80불을 포함하여 235불(한화 26만 원)이 들었다. 여기에는 친구 집에 가서 자고 밥 사먹으라며 딸에게 준 40불은 포함되지 않았다. 미리 220불짜리 비행기표를 구입해 투표 여행을 할 계획인 한 지인이 잡은 비용 500불에 비하면 매우 저렴하게 든 투표비용이다. 

분명한 것은, 현재의 재외선거 제도가 이솝우화에 나오는 '수프 앞에 앉은  거위' 꼴과 흡사한 처지의 상당수 재외국민들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여전히 '제외'선거로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참정권은 주어졌으나, 참정권을 행사할 수 없는 다수가 존재하는 선거는 '보통·평등' 선거 원칙에 반하는 제도이다. 부산 사는 김씨가 짐 싸들고 아이들과 함께 차를 몰아 저 꼭대기 신의주나 청진에 가서 투표를 하는 이런 Stupid(멍청)한 제도라니.  

왕복 17시간 운전에 비용 235불을 들여 40여년 만에 설렘으로 참석한 잔치. 앞으로 응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게 사실이다. 별로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은 이메일 등록이 마감일을 수주 앞두고 허용되는 걸 보며 재외선거의 '공정성 문제'보다는 '당리당략'의 냄새가 짙게 풍겼던 터라 씁쓸함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언제까지 '제외' 국민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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