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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통일음악가 안용구 선생 뇌출혈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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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슴도치
댓글 0건 조회 1,626회 작성일 13-08-1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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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통일음악가 안용구 선생 뇌출혈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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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길상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회장은 "본회의  고문 이시며 민족화해, 자주평화통일 원로, 민족 음악가, 교수이신 안용구 선생님께서 2013년 8월 14일 오후 3시 소천하셨다는 비보를 알려드립니다."라는 부고의 글을 전하면서 "어제께 저녁 6시경 2층으로 올라가시던 중넘어지셨는데 머리에 큰 충격으로 심한 뇌출혈때문에 긴급치료중 소천 하셨다"고 전했다. 향년 85세.

윤 회장은 "민족이 일제의 강점 하에서 탄생하시고 해방후의 어지러운 시기에 서울대학교 음대를 다니셨으며, 독일유학 후 모교에서 교수생활을 하시다가 볼티모어 소재 피바디 음악대학의 초청으로 교수로 초빙되시어 후진들을 양성하셨고, 재미동포사회와 해외에서 음악교류를 통하여 민족화해를 도모하시며 통일성취를 위하여 헌신하신 선생님의 서거는 우리 재미동포연합회 뿐 아니라 전 민족진영, 그리고 바이올린 교육과 민족음악계에 커다란 손실입니다"라고 피력하면서 "장례절차가 결정되는 대로 다시 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전했다. 


한편 민족통신 기자가 고인의 부인과 가진 전화인터뷰에서 김정현 여사는 "남편은 조국의 통일을 너무 너무 갈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반응하면서 이번에도 9월에 혈육이 있는 북부조국에 가려던 참이었다고 말하면서 슬픔을 삼켰다. 그는 또 자녀들이 9월에 아버지를 추모하여 음악회를 준비할 계획이라고 밝히면서 장례일정 등은 16일 오전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의 2남1녀 자녀 중 딸 에나모리씨(필라델피아 교향악단 비올라 연주자)는 아버님의 장례식을 치르고 9월에 부친의 생애를 추모하는 음악회도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고인의 자녀는 장남이 캔사스 교향악단의 첼로연주자로 활약하고 있고 차남은 컴퓨터계통에서 일하고, 자신은 음악가(비올라 연주자)로 부모님 집과 멀지 않는 필라델피아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한편 고인의 제자 리준무 선생(뉴욕 우륵교향악단 지위자겸 단장)부부를 비롯하여 지인들이 고인의 집을 방문하여 이 시간 현재 유족들에게 위로의 마음을 나누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가족 연락처: 410-730-7421 혹은 410-446-2374

 민족통신 보도 자료(2006년 3월): 아래 보도는 7년전 민족통신 취재진이 고인의 댁에 방문하여 하루 밤을 머물면서 취재한 내용입니다. 당시에는 78세였습니다. 그후 7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향년 85세의 일기로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기에 그 슬픔은 더 합니다. 지면을 통하여 유가족에게 조의를 표하면서 7년 전 보도자료를 소개합니다. -민족통신 편집실

             위대한 통일음악가 안용구 선생, 그는 누구인가?

[워싱턴 디씨=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우리 민족, 특히 남녘사회와 해외동포사회에서 배출한 뛰어 난 민족음악가들은 많지 않다. 그 중에는 불구의 몸으로 그리고 어려운 조건에서 "역경을 통해 보람을 창조한 위대한 음악가"가 있다. 민족분단의 아픔을 몸으로 느끼며 실천하는 음악가, 우리 민족이 낳은 걸출한 음악인 안용구 선생(78)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그는 참으로 양심적인 음악가이며 동시에 실천하는 민족음악가, 행동하는 통일음악가이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정경화, 강동석, 김영욱 등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 낸 그는 재미동포 원로음악인으로 알려진 바이올린 연주가이다. 그의 삶과 철학, 통일음악 세계는 무엇일까. 민족통신 편집인은 최근 워싱턴 디씨에 위치한 그의 자택을 방문하여 특별대담시간을 가졌다. 몇 차례 나누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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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역경을 통해 보람을 창조한 위대한 음악가이며 바이올린계의 거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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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방문중 북녘어린이와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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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의 혈육들과 기념촬영


"고통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한국 현대음악사의 큰 별이며 민족음악가로 알려 진 안용구 선생", 그는 누구인가를 취재하기 위해 지난 3월6일 밤 워싱턴 디씨의 교외에 자리잡고 있는 그의 저택을 방문했다. 

 그 때 오는 4월1일 밤 8시 뉴욕 카프만 센터의 "머킨 콘체르트 홀"에서 우륵 교향악단 제77차 연주회에서 연출할 두 젊은이(이작희 바이올리니스트와 김형석 비올라 연주자)와 리준무 지휘자가 함께 연습하는 것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는 또 자신의 음악세계와 민족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고백적 이야기를 담은 303쪽의 자서전 「한 마리 새가 되어」(2004.7 한길아트 출판)의 영문판과 일어판 출판을 위한 준비작업에 한창이었다. 

"어떻게 이런 방대한 내용들을 담은 자서전을 쓰게되었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안용구 선생은 "내 자식들이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 왔는가를 말해주기 위해서, 우리 음악계가 어떤 발자취를 걸어 왔는가를 후진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민족이 통일 없이 장례가 없다는 절실한 생각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쓰게 되었다."라고 그는 설명해 준다. 

 "지금 영어로 번역중이라고 들었는데 그것은 재미동포로서 이해가 가는데 일어로 번역하여 출판할 계획은 어떤 이유에서냐?"고 묻는 질문에 그는 "미국에서 뿌리내리고 살 내 후손들을 생각해서 지금 줄리아드 음대를 나 온 우리 말 하는 2세가 영어로 번역 중이고 일어로 번역하여 출판하려고 하는 목적과 진행과정은 특별한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라고 답하면서 그 취지와 목적에 대해 정리한 "일본어판에 부쳐서"라고 쓴 한 장의 종이를 건네준다. 그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나는 1928년 일제통치하에 태어 났음으로 항상 일본에 대한 원망스러운 생각이 있었던 것은 민족과 민족관계 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오해와 편견으로 살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ㅡ러나 오래 살다 보면 오해와 편견은 그런 데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사상, 종교, 정치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차이가 사람의 이성을 잃게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정신적인 어머니 역할을 해준 일본 여성의 사랑과 휴머니즘이 그러한 모순을 해소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알리고 싶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예술에는 특히 음악에는 국경이라는 거북스러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남녘의 임원식씨, 일본의 외산웅삼씨, 그밖에도 많은 음악가들이 증명해 주었고 내가 미국에서 주선했던 "남북 가곡의 밤" 또는 음악가의 입장으로 나의 조국인 남부조국과 북부조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이유도 그런데 있었던 것입니다. 

『이 책을 펴내게 된 것은 처음에는 할아버지와 다른 문화공간에서 태어나 자라 난 나의 손자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쓴 것인데 이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의 독자들을 위해 출판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지난 2004년 10월 서울에서 도야마씨를 만났을 때 나는 이미 그분의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알고 있던 바, 직접 뵙고 그분의 인품에 감명 받았습니다. 때마침 이 책이 출판되어 그 분이 못 읽으실 줄 알면서도 증정했는데 그분이 번역자 김혜자씨를 통하여 이 책의 내용을 알고 이 책의 출판을 추진하겠다는 말을 듣고 나는 매우 놀랐습니다. 

『도야마씨가 이 책에 흥미를 가진 것은 국경을 초월하한 참 예술가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한 개인의 이야기이지만 일본 독자들에게 우리 민족의 상황 또는 우리 동포들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희망입니다.』라고 그는 피력하고 있다. 그의 외가는 일제 때 독립투사 집안이었다. 그런데 그의 자서전에서 월북하기 전 은사였던 음악인 문학준 선생의 위탁을 받아 지도했던 어린이 제자 미에코의 일본인 어머니와의 인연과 그의 따뜻한 모성애로 일제 통치자들과 미에코의 어머니와는 동등시 볼 수 없었다는 사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안용구 선생의 부인 안정현 여사(75)도 이 사연을 듣고 남편의 입장에 동감한다. 그의 삶을 통해 알게된 미에코 학생의 어머니와의 인연에 대한 내용들을 그의 자서전에서 읽은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도 거부하지 못할 깊은 사연을 발견한다. 기자도 이 때문에 일본어 출판을 계획하여 일본대중들에게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과거사와 정서를 알리고 싶은 그의 불타는 심정을 감지하게 된다. 

우리말에 이어 영어, 일어로 자서전을 출간하려는 준비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재미원로 음악가, 그는 과연 누구인가? 

1974년과 75년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으로부터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히면서 음악인으로 처음 겪는 정치적 탄압을 맛본다. 그것도 정치 탄압을 받으며 광고게재를 거부당하던 한 일간신문을 돕기 위해 격려 광고를 냈다는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80년 서울대 동창회 음악회 일로 샌후란시스코 음악회에 참가한 일이 있었다. 그 때 동포사회 신문들은 "내가 평양에 갔다"고 허무맹랑한 보도를 하였고 "그 후 미국 연방정부수사관(FBI)이 내가 없는 사이에 집을 찾아 와 우리 가족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수사관들이 그 후 나에게 이것저것 물었는데 그 때 아무 일도 아니라면서 북한에 가는 것이 불법이 아니다"라고 모르는 사실까지 설명하여 주었다. "그래서 86년 윤이상 선생의 부탁으로 평양음악회에 갔고, 90년에 남과 북 해외음악인들이 공동으로 치르는 범민족통일음악회에 가게 되었고, 2000년 4월 평양서 열리는 "봄예술축전"에 참가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안 선생은 "이러한 음악활동 때문에 겪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바로 이러한 불합리한 탄압 때문에 겪는 고통의 역정으로 "우리 민족은 하루 속히 통일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뼈저리게 하게 되었고, 그 어떤 고통도 감수하리라고 결심하게 되었다."고 단호한 목소리로 설명한다. 

그가 걸출한 민족음악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이름 난 의사인 아버지의 둘째 부인 아들이며 소아마비로 고생하던 자신을 냉대하며 바이올린 연주를 반대하였던 고통, 민족분단의 고통, 동족상전의 고통, 남녘의 독재정권으로부터 받았던 고통, 그리고 미국동포사회로부터 받았던 고통 때문이었다고 보여진다. 

그는 전쟁시기에 굶어죽기 직전까지 가면서도 그의 가슴에서 바이올린을 놓지 않았다. 어린 시절 외가의 한 친척으로부터 선물 받은 바이올린을 독학으로 공부하여 서울대학의 전신인 경성음악전문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할 정도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진 청년이었다. 이러한 재능과 열정을 발견한 음악의 선구자 임원식 선생이 피난지에서 명맥을 이어가던 이화여고에 소개하면서 그는 이 학교의 음악교사로 활동하게 되었고 이어서 서울대학 음대에서 강의하게 되었다. 임원식 선생은 청년 용구의 남다른 재능을 위해 그의 부친에게 독일유학 자금을 의뢰해 보았으나 여전히 만족한 답을 얻지 못한 채 독일유학의 길을 터 주었다. 그 때가 전쟁이 중단된 직후인 1954년이었다. 그 후 4년 동안 독일에서 당대에 저명한 칼 프로인트 교수로부터, 그리고 다시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건너가 당대 최고의 바이올린니스트 리카르도 오드노포소프 교수로부터 수학한 뒤 1958년 귀국했다. 그는 바로 서울대 교수직을 맡아 강의하면서 케이비에스(KBS) 교향악단 악장으로서, "안용구 현악합주단"의 단장으로, 그리고 매일 그를 찾아오는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바쁜 일정을 보냈다.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 낸 안용구 교수는 독일유학 후 10년 동안 남녘 음악계에서 지도적 활동을 했으나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환경에 부딪쳐 1968년 미국의 유명한 음악대학, 피보디 음악전문대학(Peabody Conservatory of Music) 교수로 자리를 옮겨 34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 당시 미국으로 오게된 3가지 이유는 (1)깊어 가는 부친과의 갈등, (2)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폭압, (3)한국음악계의 시기와 모략 등이라고 그는 설명하며 지난날들을 더듬어 준다.

 그의 제자인 강동석 연세대 음대교수는 세계적으로 이름 난 바이올린 연주가인데 안용구 선생에 대해 "아주 어릴 때 안 선생님을 만난 것이 내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른다. 그때 안 선생님한테 배우기 시작하면서 나의 장래가 바이올니스트로 결정되었다."고 말한다. 

김민 서울대학 음대 학장이며 서울바로크합주단 음악감독은 안 선생에 대해 "엄격하면서도 자상한 선생님의 가르침은 오늘 날 우리나라가 전 세계가 주목하는 바이올린 강국의 이미지를 갖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나에게 선생님의 존재는 시대의 거목이다."라고 설명한다. 

유명한 김영욱 바이올린 연주자는 "선생님은 늘 훌륭한 음악가가 되려면 여러 방면의 지식과 경험, 교양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음악의 세계를 넓고 깊게 이끌어 주신 선생님께 감사한다."고 말한다. 

정경화 바이올린 연주자도 "제가바이올린을 시작한 지 벌써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군요. 처음 선생님께 레슨을 받았을 때 어린 저의 마음에도 너무나 신기하고 기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라며 그의 지도에 고마움을 표시한다. 

세계적인 거장들을 놀라게 한 제자들을 가진 안용구 선생은 걸출한 음악인이며 동시에 음악을 통해 통일염원을 불태우는 민족음악가이다. 이런 음악인의 반려자인 그의 아내 김정현 여사(70)는 이화여고, 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59년 케이비에스 라디오 아나운서, 그 이듬해에 남녘 최초의 텔레비전죤 방송의 아나운서를 하며 당시 남녘 사회에 널리 알려진 유명 언론인이 어떻게 안 선생과 인연이 되었고 그리고 고통스러운 길을 좌절하지 않고 낙천적인 자세로 걸어 왔는지? 이것도 알고 싶었다. [다음에 계속] 

안용구 선생 연락문의처는 (410)730-7421, 또는 (410)446-2374

[워싱턴 디씨=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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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걸출한 통일음악가-안용구 선생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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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다정한 부부로 알려진 가문



[워싱턴 디씨=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위대한 인물의 뒤에는 훌륭한 배우자가 있다"는 말은 안용구 선생의 경우에도 적중한다. 그의 부인 김정현 여사(70)는 안 선생의 방패막이며 불구 된 몸의 한 부분이며 동시에 양심과 정의를 나누는 동지이기도 하다. 당대의 지식인이었고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여사는 풍요로운 가정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생활한 처지였는데 그 많은 남성들을 뿌리치고 여덟 살이나 많은 노총각, 그것도 집안의 강한 반대를 무릎 쓰고 고독한 생활로 성장했던 안 선생을 선택한 이유들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는 지금도 연애시절 가졌던 안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김 여사가 보는 안 선생, 안 선생이 보는 김 여사를 통해 참된 부부의 한 모습을 조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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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부부의 한 모습」을 조명해 본다

 결혼생활 43년이 흘렀다. 59년 서울 케이비에스(KBS)방송 아나운서이며, 60년 테레비죤이 처음 등장하였을 때 첫 여성 아나운서로 활약했던 방송인 김정현. 그는 당대에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인물. 그는 안용구 선생과 인연이 되어 결혼하고 그 후 40여년의 세월을 보냈다. 오랜 결혼생활을 보냈는데 그 생활이 어떠했느나고 묻자 김정현 여사는 "지루하지 않은 행복한 시간들이었다."고 말한다. 안 선생은 오로지 음악에 모든 생을 바쳐 왔지만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가정생활의 빈 공간들 채워야 하는 시간들이었지만 그는 만족한 과거들이이었고 지금도 같은 심정이라고 고백한다.

아침이면 일간 "워싱턴 포스트" 등을 구석까지 읽고 그것들을 종합하여 안 선생과 대화를 나눈다. 민주운동, 통일운동 행사들이 있으면 참가한다. 안 선생 관련 음악회나 제자들 음악회, 자녀들 관계 행사들이 있으면 혼자 또는 부부가 함께 가는 일정들로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낸 것이 김 여사의 미국생활이었다. 

지금은 남편이 설계하여 지은 큰 이층 저택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지난 간 38년 동안의 초기는 눈물과 고통의 나날들이었다고 회고한다. 방송국 아나운서로 활동하던 그 시절의 경력은 이곳 미국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화여대를 나와도 영어 한두 마디에 그칠 뿐 미국인들과 대화 한번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초기의 생활이었다. 남편 몰매 부엌에서 술 한잔을 놓고 흐느껴야 했던 어려운 시절의 이야기들이 안 선생의 자서전에서도 발견된다. 

<##IMAGE##> 김정현 여사는 짧은 영어 때문에 돈벌이를 해 보려고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미용사 자격증을 땄고, 계리사 자격증, 부동산 중계인 자격증 등을 취득하며 돈벌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2남 호와 준은 미국 오기 전에 남한에서 낳아 서너 살 때 데려 왔지만 막내 딸 영희는 미국에 온 1968년 이듬해에 낳았다. 자녀들을 양육하며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며 그리고 사회생활도 겸하느라고 무척 고생을 하였는데에도 그런 추억들은 말하지 않았다. 그의 발자취가 안 선생의 자서전에서 군데군데 발견 될 따름이다. 안 선생은 그의 자서전에서 부인과 관련해 "정현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고 묘사한다. 

여사는 초기의 난관을 극복하고 "김정현부동산" 회사를 차려 놓고 30여 년 동안 운영했다. 그러면서도 워싱턴 디씨의 이화여대 동창회 임원, 비영리 단체인 가정법률상담소 부 이사장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그는 한편 남편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반대와 유신반대 등 남한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여 왔고 남편이 윤이상 선생의 초청을 받아 1986년 평양음악회 참가, 90년 범민족통일음악회, 96년 평양음악회, 2002년 통일음악회 등으로 북부조국을 방문하여 음악활동을 전개하는데 가장 적극적인 후원자로서 그리고 동지적 관계로서 남편을 지원하여 왔다. 

"안 선생과의 결혼생활도 40여 년이 넘었는데 그에 대한 초기 생각과 지금은 어떠하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저는 남편을 언제나 존경하고 있다."고 서슴없이 응답한다. 그는 안 선생을 존경하는 것은 (1)마음이 맑고 변함 없이 곧은 예술가이며, (2)불의를 거부하고 정의를 강조하고, (3)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들을 돕는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이며, (4)도덕과 철학을 중시하는 품성을 지닌 진실 된 음악인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그러면서 자신의 부친이 할아버지 덕택으로 부유한 집 아들로 태어나 난봉피우며 도덕을 무시한 생활을 해 온데 대한 반작용으로 한층 더 안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는 뜻을 내비친다. 

그런가 하면 안 선생은 부인에 대해 "평소에 대담하고 침착한 아내이며 솔직하고 활달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라고 그의 자서전에서 평가하면서 김 여사가 미인이라는 점을 주변 친척들의 말을 빌어 은근히 자랑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기자가 보기에도 김 여사의 언행이나 몸가짐은 누구에게도 호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시원시원하면서도 자상하고 남을 배려하는 성격이었다. 가식이 없으면서도 예절을 지키는 인물이다. 1936년 7월28일 서울출생. 믿어지지 않는다. 70 고희라면 사회원로에 속한 나이인 데에도 운전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은 중년의 여성으로 느껴진다. 

김 여사가 안 선생을 존경하는 또 다른 이유는 국제음악계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안 선생은 일본을 비롯한 동양계 음악인들로부터도 존경받아 왔고 유럽 음악계에서도, 그리고 미국 음악계에서도 존경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점이다. 안 선생은 1986년 미국현악교수협회는 안용구 선생을 "올해의 현악교수"로 선정했고 남한 문교부에서 "문예상"을 시상했고, 1967년 2월18일 독일 뒤브케 대통령으로부터 "문화공로훈장"을 수상한바 있었다. 그래서 안 선생은 "좋은 음악가는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존경 받을만한 예술가는 귀하다."라고 지적하며 제자들에게 음악의 기술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깊은 철학이나 사상이 담긴 혼이 결합되어야 한다고 지도해 왔다. 

한편 안 선생은 아내가 정치외교학과를 나왔지만 음악을 좋아하고 성악을 개인교수 받아 노래실력도 인정받았다고 귀띔해 준다. 김 여사는 실제로 1989년 4월10일 뉴욕에서 열렸던 "분단을 넘어선 우리 가곡의 밤"에 출연하여 청중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고 그 후에도 필요하면 출연하곤 했다. 

 여사는 음악 전반에 대해 조예가 깊었다. 기자가 방문하는 동안 잠시 휴식을 이용하여 씨디 한 장을 꺼내 중요한 장면들을 보여주었다. 고등학교, 대학시절에 귀에 익은 음악이었다. "타이스의 명상곡"이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공연한 작품으로 창녀였던 타이스가 신부와의 사랑에 빠진 이야기였고 장면 장면에 나체의 무용수들이 나온다. 창녀에서 수녀가 된 타이스는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고결한 삶을 찾는다. 그러나 신부는 갈등과 고민으로 몸부림치다가 그 고결한 삶을 거부하고 사랑을 애원하나 끝내 이뤄지지 못하고 타이스는 죽는다. 이 작품이 시사하는 뜻은 깊었다. 김 여사는 이 밖에도 수많은 음악작품들을 담은 씨디들을 쌓아 놓았다. 이것을 보며 이 두 부부는 음악을 비롯한 생활 전반 분야에서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도 느끼게 된다. 

김 여사는 안 선생을 존경했기에 그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남편이 음악을 통한 통일의 길을 걸어 올 때 그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운 길을 앞장서 왔다. 그는 "나는 싸움패였어요" 라고 말하며 통일음악인으로 활약하는 동안 자신이 선봉대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민족의 길, 통일의 길이 고통스러워도 그것을 극복해 나아가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 여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안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친북 인물이라고 비난했지만 개의치 않았다"고 말한다. 이들 부부는 이미 마음의 3.8선을 허물고 통일된 세상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기자는 이들을 만나기 전에 이미 안용구 선생이 펴낸 자서전 「한 마리 새가 되어」를 훑어 보았다. 여러 자서전들을 읽어보았지만 그것들을 읽으면서 몇 차례 눈시울을 적시게 만든 것은 오로지 안용구 선생의 자서전이다.[다음에 계속: "기자가 읽은 소감..."] 

안용구 선생 연락문의처는 (410)730-7421, 또는 (410)446-2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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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통일음악가-안용구 선생③:

『한 마리 새가 되어』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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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구 선생의 자서전적 저서


[워싱턴 디씨=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내 평생에 책을 읽다가 눈시울을 적신적이 별로 많지 않다. 그런데 나는 최근 『한 마리 새가 되어』라는 책을 읽으며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다. 

이 책은 한길 아트에서 2004년 9월에 펴낸 한 음악인의 자서전이다. 바이올린 연주가 안용구 선생의 77년 음악일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그의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 실력에 얽힌 이야기들도 있지만 세계적으로 이름난 유명 음악인들을 배출한 뒷 이야기들도 담고 있다. 이 도서가 담고 있는 내용들은 우리나라 음악세계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의 봉건적 사회상과 분단시대의 처절한 사회상을 감동적으로 반영하여 주고 있다. 

 저자는 피보디 음악대학에서 35년의 교수생활을 퇴직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그는 1928년 원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은 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듣고 바이올린을 잡게 된 과정에서부터 유럽유학 기간과 그 이후 서울대 음대 교수를 거쳐 1968년 미국 피보디 음악대학의 초청을 받기까지 지나온 이야기, 그리고 그 이후 4차례 이북을 방문하면서 남북 해외 음악인들의 만남을 통해 남북 가곡들을 모아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조국통일 없이는 미래가 없다"는 귀중한 역사의 교훈을 가슴 속에 아로 새기게 된다. 

가정문제에서 오는 차별도 어린 시절의 고통이었지만 불구자라는 것 때문에 집안에서 따돌림을 받아야 했던 아픔, 정의롭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자세가 오히려 다른 음악인들에게 시기심과 질투심을 유발시켰던 모순, 분단시대에 동족인 이북을 도와주면 빨갱이 딱지를 붙여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역사를 절감하게 된다. 안 선생은 그러한 삶의 과정에서 고통과 아픔을 역경에 묶어 두지 않고 순경으로 전환시킨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에게 부과된 고통이 바로 하나의 축복이었다. 과연 그 고통 없이 나의 오늘이 있을 수 있었을까? 배고팠던 시절이 오히려 아름답게 회고되어 그렇게 그리울 수 없다. 황혼의 나는 이제 다시 그 옛날의 기쁨과 슬픔을 맛볼 수 없지 않은가."

안 용구 선생의 삶 자체는 우리 민족사의 깨끗한 거울이다. 그의 삶의 철학은 예속이 아니라 자주이고, 식민지가 아니라 독립이며, 불의가 아니라 정의이고, 전쟁이 아니라 평화이며, 분단이 아니라 통일이다. 그의 삶이 이렇게 조명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뿌리가 있었다. 그가 자라면서 정신적으로 영향을 준것은 이모였다. 그는 "나의 이모님은 항일운동을 했다. 이모와 어머니는 처녀의 몸으로 항흥에서 당나귀를 타고 이화학당에 입학하기 위해 서울까지 왔다고 한다. 성격이 강직했는데 이모가 언제나 혁명투사였기에 만나면 유관순 열사 등과 항일운동을 한 활약상을 들려 주었다."고 귀띔해 준다. 

그의 애국정신은 어릴때 이모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분단시대, 특히 박정희 군사독재시절에는 그 철권통치가 무척 싫었다는 고백들이 자서전에 배경으로 깔려있다. 미국으로 오게 된 중요 이유중 하나도 바로 이러한 정치적 암흑시대 때문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는 또 자라면서 그리고 성장한 이후에도 마음에 둔 배다른 맏형의 장남인 조카, 안석교 박사(1929~2001)에 대해 늘 생각해 왔다. 나이는 한살 차이의 조카였지만 친형제 처럼 생각했다. 안석교 박사는 서울 문리대, 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독일에 유학하여 물리학을 전공하고 문헨 공대에서 활약했던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가운데 한 인물이다. 그는 생전에 가진 재산을 털어 20만 달러을 이북 당국에 헌금하여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바 있었다. 그의 부인 한계일 여사는 독일에 거주하면서 오랜동안 통일운동에 참가해 왔다. 이러한 가족사들도 그가 통일음악가로 전환할 수 있었던 한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통일음악가로 활약하기 시작한 계기는 1986년 고 윤이상 선생의 요청으로 분단이후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음악활동을 하게된 때로부터 였다. 그 후 몇 차례 방북하면서 남북 가요들을 연주하는 행사를 주최하게 되었고 그런 과정에 분단이후 월북한 은사와 음악동지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우리 민족이 세계 경쟁 속에서 살아나갈 길은 오직 통일이라는 신념을 굳혔다. 내가 직접 체험한 통일의 염원을 미국에 사는 동포들에게 음악을 통해 일/깨워주고 싶었다. 그래서 1989년 4월10일 뉴욕에서 "분단을 넘어선 우리 가곡의 밤"을 열었고 그후 미국 전역을 돌면서 연주회를 가졌다. 마지막에는 언제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울곤하였다."고 회고한다. 

 1990년 3월23일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린 통일음악회 프로그램에 실린 북녘 예술인들의 축사들 내용이 찐하게 느껴온다. 그 중에 김원균 작곡가이며 인민예술가의 글 한편(227쪽)이 눈을 끈다. 

"북과 남, 해외에서 사는 우리의 모든 음악 예술인들이 애국애족의 마음을 간직하고 단합한다면 각기 자기 위치에서 조국통일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음악의 힘이 얼마나 큽니까. 우리가 조국통일 염원을 실헌하는 길로 사람들이 부르는 좋은 노래를 짓는다면 그 노래는 북에서도, 남에서도, 해외에서도 불리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7천만 동포들에게 커다란 고무적인 힘을 안겨주게 될 것입니다. 곡을 하나 지어도 민족을 생각하고 노래를 하나 지어도 민족을 생각하고 노래를 하나 불러도 통일을 생각하는 바로 이것이 현시대에 음악활동을 하는 우리의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음악인은 아니지만 민족언론인으로서『한 마리 새가 되어』를 읽고 크나 큰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워싱턴 디씨에 소재한 안용구 선생의 자택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를 만나서 78년의 삶을 되돌아 보는 대화를 주고 받으며 다시 한번 그의 삶을 음미하게 되었다. 그는 철학을 가진 음악가이며 동시에 분단의 아픔을 느끼며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걸출한 통일음악가, 민족음악가로 존경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안용구 선생의 저서, 『한 마리 새가 되어』를 필독으로 추천하며, 특히 민주운동, 통일운동에 참여하여 온 사람들은 이 책을 꼭 한번 읽어 주기를 권유하고 싶다. 선우학원 박사를 비롯하여 윤길상 목사, 리준무 선생 등 여러분들도 이책을 추천하고 있다. 

*안용구 선생 연락처: (410)730-7421, 또는 (410)446-2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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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강동석(바이올리니스트, 연세대 음대 교수):
안 선생님을 아주 어릴 때 만난 것이 내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른다. 그때 안 선생님한테 배우기 시작하면서 나의 장래가 바이올리니스트로 결정되었다. 

박은성(수원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한양대 음대 교수):
훌륭한 교수였을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 또한 척박한 이 땅에 실내악운동을 펼친 선구자로 선생님은 참으로 눈부신 활동을 하셨다. 내게 모든 면에 가장 큰 영향을 주셨으니 평생을 두고 감사드릴 뿐이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정경화(바이올리니스트): 
제가 바이올린을 시작한 지 벌써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군요. 처음 선생님께 레슨을 받았을 때 어린 저의 마음에도 너무나 신기하고 기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서울대 음대 학장, 서울바로크합주단 음악감독): 
엄격하면서 자상한 선생님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나라가 전 세계가 주목하는 바이올린 강국의 이미지를 갖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나에게 선생님의 존재는 시대의 거목이다. - 김민

김영욱(바이올리니스트): 
선생님은 늘 훌륭한 음악가가 되려면 여러 방면의 지식과 경험, 교양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음악의 세계는 넓고 깊게 이끄러주신 선생님께 늘 감사한다. - 

[도서 차례] 

내 삶의 고통과 축복

원산의 겨울밤
손목에 매단 성냥갑
병원장집 아들
가출
음악이 내게로 오다

음악을 쥐고
경성음악전문학교
불 꺼진 연주회장, 줄 나간 바이올린
미8군 장교 구락부
나를 키운 미에코 엄마
6.25, 그래도 연주는 계속되고
동생 명학의 죽음
어디로 가야 하나
이화여고 음악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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