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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노길남 민족통신 대표, 그는 누구인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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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슴도치
댓글 1건 조회 2,371회 작성일 14-03-29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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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최재영 편집위원] 2014 4 초순이 되면 청년처럼 활동해 오던 민족통신 대표 편집인은 칠순을 맞는다. 그리고 금년은 민족통신이 창간된지 15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가 된다. 그래서 민족통신 편집위원회는 이러한 시기를 맞아 재미동포 인터네트 언론, '민족통신' 분신이라고 있는 노길남 박사, 그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70 삶을 조명해 보기로 하고 3차례(, , ) 걸쳐 그의 인생역정을 알아본다. 그중 두번째 특별대담() 여기에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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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노길남 민족통신 대표, 그는 누구인가()
 
[질문]이번에는 한국민주화운동과 조국통일운동과 관련하여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재미동포 언론인으로서 어떤 것이 계기가 되어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진영에 참여하시게 되었는지 우선 듣고 싶습니다.
 
[답변]사실은 고등학교 1학년때 고려대학생 영향으로 우리는 4.19 일어나기 하루 전인 4.18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었고, 대학에 들어가서부터는 한국문제연구회서클활동 회원으로 가입하기 시작하면서 한일굴욕외교 저지규탄 시위에 참여하며 선배들과 시위도 조직하고, 선동선전 일꾼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공안당국에 쫒기는 적이 있었는데 때가 대학2학년이었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대학을 마치지 못하고 1965 말께  군대에 입대해서 복무기간을 마치고  학교에 다시 돌아와 보니  또다시 3선개헌 저지투쟁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때에 또다시 운동권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대문경찰서, 남산의 중앙정보부 등에 연행되어 고초도 겪은바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71 2월에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3년이 지나 미국유학을 떠났습니다. 미국에 와서 고학하며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간신문에 있을 때는 정치에 관심이 없고 무관심 상태였습니다. 1979 1016일부터 20일까지 부마사태가 터졌고, 26일에 박정희가 오른팔이었던 김재규의 총에 쓸어졌고, 그후 5개월만에 또다시 대형사건, 1980 5.18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습니다. 타임지, 뉴욕타임스, 로스엔젤레스 타임스, 헤럴드익재미너지 미언론들까지 대서특필로 광주항쟁을 보도했습니다그런시기에 카나다 맥길대학에서 제작한 광주항쟁의 이모저모를 기록영화로 보면서 청년학생들과 광주시민들이 자기나라 군인들로부터 대학살을 당하는 역사를 바라보며 차마 맥놓고 앉아 있을 없었습니다. 양심이 그것을 묵과할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생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질문]한국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조국통일운동으로 전환한 것은 어떤 것이 계기가 되었는지요?
 
[답변]박정희 군사독재반대, 전두환살인독재 반대운동, 다시말하면 한국민주화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정치가 제대로 가지 못하고 퇴보하고 답보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크게는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한국정치풍토에서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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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님의 댓글

고슴도치 작성일

이어서 계속....

[질문]한국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조국통일운동으로 전환한 것은 또 어떤 것이 계기가 되었는지요?
 
[답변]박정희 군사독재반대, 전두환살인독재 반대운동, 다시말하면 한국민주화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정치가 제대로 가지 못하고 퇴보하고 답보하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크게는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한국정치풍토에서 가장 걸림돌이 자주권 부재, 즉 주권이 없는 나라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둘째는 분단기득권 세력과 외세가 밀착하여 분단을 영구화하려는 움직임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조금 쉽게 설명한다면 한국이 군사통수권도 스스로 행사하지 못하는 처지이며 주한미군이 한국 땅에서 우리 동포들을 살인해도 치외법권적 입장에서 감옥에도 가지 않고 웃으며 제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막힌 경우들을 많이 관찰하여 왔습니다. 미선이 효순이 사건 뿐만 아니고요. 그리고 주변국 일본과 미국같은 지배세력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긴장과 분단을 부추기며 자기 이익챙기기에 급급해 왔다는 역사적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관찰했고, 고찰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분단기득권 세력이 무기로 사용해 왔던 것이 이른바 ‘국가보안법’입니다. 한국의 양심세력을 무차별하게 탄압해 온 것이 이 악법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민간단체 범민련을 죽이려고 그리고 양심정치인들의 세력인 통합진보당을 죽이려는데 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민주화운동과 조국통일운동은 선후가 없으며 동시적으로 결합하여 진행한다고 생각하여 왔기 때문에 이러한 운동들에 참여하여 온 것입니다.
 
[질문]노길남 박사님의 발자취를 보면 1980년대에는 주로 한국민주화운동에 힘을 많이 기울였던 것 같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조국평화통일운동에 힘을 더 기울여 오셨던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잘 보셨습니다. 나는 1980년 광주항쟁을 통해 역사의 눈이 떴지만 한국민주화운동을 지원하면서도 해외동포로서는 조국의 평화통일운동에 그 지위와 역할이 훨씬 더 높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민주화운동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한국의 국민들, 특히는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양심적인 종교인, 양심적인 지식인, 민족적인 기업인들 등이라고 봅니다. 여기에 우리 해외동포들은 지원역량 내지는 보조역량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국평화통일운동은 우리 해외동포들이 남과 북과 함께 해외동포들도 당당한 한 주체가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북 해외동포 3자연대운동의 기구로서 1990년 제1차 8.15범민족대회를 계기로 역사적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 탄생되었고, 그 이후 역사적인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2005년에 6.15민족공동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남측, 북측, 해외측에 각각 지역본부들이 조직되어 이른바 광범위한 남,북, 해외 3자연대 상설기구가 창립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나는 범민련 결성을 추진하는 준비위원으로 그리고 6.15해외측 위원회를 결성하는 준비위원의 한 사람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왔던 것입니다.
 
[질문]그렇군요. 저는 이민온지 이제 10여년 역사로 길지 않기 때문에  해외운동의 흐름을 대충 이해하는 수준이지만  이번 대담을 통해 그 역사의 줄기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포사회 기성 언론들이나 한국의 보수족벌언론들은 해외동포 통일운동진영이나 한국의 통일운동진영을 가리켜 친북이니 종북이니 하면서 폄훼하여 왔는데 그것은 왜 그렇다고 생각하시나요?
 
[답변]그렇게 매도하지 않으면 분단기득권 세력과 이를 뒤에서 밀어주는 외세가 발붙일 공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처음 한국민주화운동에 참여할 때에는 민주운동진영이라고 불리웠지요. 그 다음에 민주운동 진영을 반정부 세력, 그 다음에는 반국가 세력, 그 다음에는 친북세력, 그리고 요즘에 와서는 종북세력으로 매도하며 모략하고 있는 것이 애국세력에 대한 호칭 변화과정이었습니다. 그 호칭도 마지막까지 온것 같습니다. 종북 다음에 무슨 호칭을 또 만들어 왜곡할지 아마도 분단기득권 세력은 지금 아주 고민하고 있을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러한 호칭을 받아 온 사람들은 모두 애국세력이라고 보면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중들은 분단기득권 세력의 중상과 모략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질문]노길남 박사님은 일반 언론들에서는 흔히 ‘친북언론인’이라고 호칭하는데 이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며 반응하십니까?
 
[답변]조,중,동은 물론 연합뉴스까지도 ‘민족통신’을 친북성향 언론, 그리고 나에게 대해서는 친북언론인이라고 칭하며 가끔 다른 언론기관들과 대담할 때 물어보는 기자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럴때, “ 아니요”라고 대답하지  하지 않고 “그렇습니다”라고 반응하면 상대편이 조금 당황하는 표정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당연히 아니라고 할텐데 그렇다고 선뜻 대답하니 기대에 어긋난 대답이라는 뜻이겠지요. 솔직히 말해 친북하지 않고 화해평화가 이뤄집니까?  그리고 북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친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너무나 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질문]그러면 남측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답변]남측이 적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친남해야 되지요. 나는 남과 북을 하나의 조국으로 보는 남북관, 혹은 민족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이나 북을 딴나라로 보지 않습니다.  단지 남과 북을 적대화하려는 정치인들을 비롯하여 언론인들, 지식인들을 혐오하고 질타하는 것이지 남과북이 화해하고 협력하여 서로 평화를 만들어가면서 손을 잡고 평화통일을 이루자는 세력이라면 그가 어느 계층이든 어느 직위에 있건 상관없이 모두가 한겨레, 한민족이 아니겠습니까. 언제, 무엇때문에 우리가 갈라져 살아야 했습니까? 그래서 조,동,중이 대표적으로 욕을 많이 얻어 먹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글만 쓰면 남북화해협력이 아니라 이간하고 분열시키려고 안간힘을 써 왔다는 사실들은 초등학교만 나와도 알수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반자주, 반민주, 반평화, 반통일세력을 미워하는 것이지 남북이 화목하게 잘 손잡고 평화통일을 이루자고 하는 세력이라면 무엇때문에 미워하고 분노하겠습니까?
 
[질문]노길남 박사님께서는 1980년 민중항쟁이 터지면서 전적으로 자주운동, 민주운동, 통일운동에 적극 참여해 오셨고, 이런 운동 때문에  40년 미국생활 중에 45차례나 직업을 바꿔야 했잖습니까?  그렇다면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에도 많은 시련이 있었을 줄로 압니다.  그 중에 가장 가슴에 맺힌 일들이 있다면 한두가지 듣고 싶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듣고도 싶습니다.
 
[답변]한가지는 나의 처, 두딸과 한국에 있는 동생과 어머니에게 정말로 미안한 생각입니다.  지금은 홀로 계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지만 나의 가슴에 미안한 마음은 그대로  내 심장 한 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고백한다면 80년 광주항쟁이 터졌을 때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이런데 마음 편하게 살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당시 다섯식구를 위해 한생을 사는가, 아니면  7천만 겨레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나의 작은 힘이라도 보태며 한 생을 사는가에 대해 한때 무척 고심했습니다.  결국 후자를 택했습니다.  그 결심이후 지금까지 30여년의 세월을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앞만보고 뛰어 온 것으로 돌아보게 됩니다. 지난 시기 많은 시련들이 있었지만 우리민족의 역사가 너무나 기구하였기 때문에 그 같은 시련은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코리안이라면 그가 어디에 살든지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힘쓰겠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결심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결심때문에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아직도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질문]본격적으로 운동에 뛰어든것이 34년째가 되었고, 노길남 박사님께서 직접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신 기간도 무려 27년이 되는 것 같습니다. 민족통신의 전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민족연구회’가 12년, ‘민족통신’이 창간된지 올해로 15주년이 되잖습니까?  많은 일들을 해 온 이 두조직을 설명해 주시고 2014년 주요 계획들이 있으면 소개해 주면 좋겠습니다.
 
[답변]우선 함께 일하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유상준 동지와 지금도 27년째 함께 일하고 있는 손세영 동지와 이정호 동지를 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면서도 ‘한민족’연구회’를 운영할때 재정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많이 지원해 주었던 애국자들입니다.  ‘한민족연구회’는 동포중산층 인사들 33명으로 구성하고 실행위원 7명이 1987년 11월11일 발족한 단체인데 이 조직을 만들어 한 일들은 동포사회여론조사, 민족상을 제정하여 통일운동 진영에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는 단체, 인물들을 발굴하여 시상하고, 민족장학생들을 선발하여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지원해 주는 사업들을 운영해 오면서 다른단체들과 연합하여 자주, 민주, 통일의 목소리에 한 목소리를 실어주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12년째 되던 1999년 봄 ‘한민족연구회’를 해체하고, 같은 해에 인터네트 언론, ‘민족통신’을 창간하여 해외동포 통일운동진영의 매체로서 그 지위와 역할을 해 왔습니다. 또한 미국주류사회 평화운동단체들과도 밀접한 연대운동을 벌이는데 한몫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을 가능하게 한것은 미국의 동부지역, 중부지역, 서부지역, 카나다 지역 등에 후원자들 120명 가량이 헌금하여 주어 지금까지 운영할 수 있었고, 운영위원들과 편집위원들이 월정헌금을 내면서 함께 일해 왔습니다. 돌이켜 보면 ‘민족통신’은 역사에 유례없는 언론매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적같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주, 민주, 통일운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니라  많은 분들이 애국헌금으로 도와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지금까지 ‘한민족연구회’와 ‘민족통신’을 사랑해 주시고 지원해 주셨던 여러분에게 심심한 사의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금년으로 창간15주년이 되는 오는 11월에 뜻깊은 창간기념 행사도 구상중에 있습니다. 
(다음에 계속…)
 
*[특별대담]노길남 민족통신 대표, 그는 누구인가(상)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othernews&wr_id=4927
 
 
*관련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lp-tEscDIGY
 
https://www.youtube.com/watch?v=KNfJI5H4xF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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