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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61. 적의 환경을 어떻게 투쟁에 활용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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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259회 작성일 23-02-0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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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61

적의 환경을 어떻게 투쟁에 활용하였는가

[민족통신 편집실]



          시위중인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1) 적의 환경을 우리의 이익에 알맞게 적용하는 것도 투쟁이다.

투쟁 가운데 소위 법률의 저촉을 받고 감옥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적의 법률도 자신의 이익에 맞게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당시 생활형편상 법률전문가인 변호사를 살 수 없는 처지에서 감옥생활을 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남에게 의뢰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는 자기자신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하에서, 적들의 법률책인 행정소송법, 헌법학개론, 형사소송법, 등을 사서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내 자신의 항소이유서도, 검찰 답변서도, 청주보안감호소에 있을 때 2년마다 갱신 이유에 대한 답변서도, 보안감호처분도 헌법에 위배된다는 행정소송제기도 다 내가 써서 제출했다. 그렇게 되니 우리 동지들 것도 내가 써서 제출 하기도 했다.

감옥에서 우리 동지들 중 반공법 조작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은 광주에서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최명호씨도 테러를 겪고 74년 5월이 만기인데 적들은 전향하지 않는 한 그냥 내보낼 수 없다는 정책적 조치에 의해서 교화과에서 사회참관을 시켜준다고 데리고 나가 사회 모 식당에서 친형님과 단둘이 만나 식사를 하는 동안 형님의 질문에 당당하게 말한 것이 반공법에 저촉이 된 것이다.

이때 형님은 교화과에서 사전 교육을 받고 동생을 전향시키기 위해서 어떤 말을 질문하라고 지시를 받은 것이었다.

그때 형에게 말한 것으로 형님이 동생의 고발자가 되었다.

만기 전에 놈들의 사촉을 받아 고발했다. 일단 고발하면 못나가고 전향하면 집행유예로 나간다.

그래서 최명호 씨는 못나가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 받을 때 교화과에서 전향하면 집행유예로 나갈 수 있다고 하여 전향을 했다.

그에게 교화과에서 답변서를 써 주었다. 그가 마음이 차지 않아 나보고 써 달라해서 고문구타 불법적인 장면을 적나라하게 써준 것을 몸에 품고 나가서 재판을 받는데, 재판장이 그에게 나가기 위해서 마음에 없는 짓을 다 한다고 꾸지람을 하여 그것은 내가 쓴 것이 아니라 교화과에서 써준 것이라고 하면서 내가 써준 서류를 내어 재판장에게 주었다.

그러나 결국 1년 6개월을 받고 말았다.

그렇게 살다가 살아 나가 돌아가셨을 것이다 당시 50대였으니 말이다 고향은 해남이다

그후는 저들이 만기전에 조작 고발을 하지 않고 만기가 되면 다 내 보냈었다. 재판 받고 돌아와 병사에 전방시켰다.

그후에 내가 교화에 불러나갔을 때, 정보부놈이 와서 강철영 교화과장에게 앞으로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내게 알려주기도 했다.

광주에서 이런 못된 승냥이들이 인간의 탈을 쓰고 마음대로 날뛰는 일이 있었다.

청주 보안감호소에서 살 때 2년마다 기간 갱신이 있을 때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답변서를 써서 불법부당함을 적의 헌법과 법률에 위배된다고 써서 제출한 동지는 불과 몇동지 뿐이었다.

나도 서울 고법에 행정 소송을 제기해 재판을 받았으나 기각을 당하고 말았다.

이유는 “전향하지 않고 과거 죄약을 뉘우치는 경우가 전혀 없고 사회안전법과 처우에 대한 불평불만이 많으며 서준식 단식투쟁에 가담했다”는 것이었다.

써서 제출한 동지나 안 쓰고 받아만 보는 동지나 감옥을 살기는 마찬가지이나 죽는 시간까지도 가능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삶의 원칙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89년 당시 2년 갱신처분을 받고 행정소송을 하는데 돌아가신 배동준 동지와 김광길 동지도 내가 대필해 주어 서울 고법에서 1차 재판을 받고 2차 재판일을 남겨두고 만기 전에 석방시킬 수 있었다.

몇몇 동지들과 같이 보안감호처분을 철폐해 달라고 국회청원도 했었다.

그리고 검사나 국회의원들이 국정감사차 감호소에 왔을 때 말하지 말라고 단속은 하지만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어 앞을 지날 때 손을 들고 감호소 현 처우와 사회안법 폐지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들이 다녀간 다음에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혼자 나서서 하느냐고 불려나가 협박을 받기도 했다.


2) 감옥에서의 공부

감옥에서는 자기가 공부하고 싶은 책은 못보게 제한한다. 감옥엔 영어와 법률서적 한방 침구서류 밖에 없기 때문에 한방책과 침구요법을 공부하기도 했다.

침구요법을 공부하여 자기 스스로가 놓을 수 있는 위치는 자기 몸을 스스로 놓아야 남을 놓을 수 있기 때문에 자기몸도 놓고 나중에는 운동하다 발목을 삐었을 때 침이 잘듣기 때문에 간수들도 놔주기도 했다.

그런데 침을 만들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철사를 구하기 힘들고 또 매일 검방하기 때문에 감추기 여간 힘들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철사를 갈아서 침구로 만드냐가 중요하다.

철사는 소제를 통해 구하는 데 구매물을 사주면 구할 수 있으나 세면바닥에 갈아서 침구를 만드는데 거의 한달이 되어야 완성된다.

약은 안티프라민을 소독수로 쓴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통해 만든 침을 매일 검방에 숨길 데가 마땅치 않아 검방시에 나쁜놈 한데 걸려 뺏기기도 할 때는 여간 서운하지 않다.

검방 때 발견된 침구를 감호과에 보고하면 불려나가 상말로 존나게 두들겨 맞는다.

나는 대여섯개 만들어 사용하다가 석방될 때에 발바닥에 넣고 양말을 신고 나왔다. 간수가 아는 사이라 양말을 벗어보라고 하지 않았다.

지금도 가지고 있다. 나와서 돌파리 한방 침구사가 되지 않고 다른 직장에서 일을 했다

감옥은 공허한 휴식 공간이 아니라 혁명전선에 재 진출할 기간이기 때문에 전향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향하지 않고 어떻게 생활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는 밥만 먹고 가만이 앉아 있지 않고 각박한 생활 속에서도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동지들을 위해서 다시 말하면 대렬을 위해서 어떻게 투쟁했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원칙에서 산다고 했지만 부족한 점이 많이 있다는 것도 많이 느끼고 있다.

신념의 고향으로 올라간 한춘익 동지는 독방에서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말을 잘 못했었다.

주는 밥만 먹고 가만이 앉아서만 생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혼자 독방에 있어도 읽을 거리가 없는 경우 혼자 씨부렁 대기도 하고 감방에 한권의 책이 있는 경우는 항상 책을 보고 소리내어 읽기도 하는 동지가 있는가 하면, 자기 자신과 다른 동지들을 위해 투쟁하는 동지들도 있었다.

가족과 연락이 닿는 동지와 닿아도 도움을 못받거나 전혀 받지 못하는 동지들이 대부분이다.

약이나 구매물들을 사먹는 동지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동지들이 많이 있다.

적들은 전혀 없는 동지와 있는 동지들을 따로따로 전방시킨다. 그래놓고 매일 감방 검사 때 만약 약이나 구매물이 적발되면 불러나가 조사를 받는다.

그 때 사준 동지와 먹은 동지는 중벌까지 받는다. 그래서 여간 어려움이 아니다. 그래도 주고 받고 한다.

장기간 감옥생활을 어떻게 하는가는 천차 만별이다. 그래서 감옥은 휴식공간이 아니라 혁명전선에 재진출하기 위한 준비기간 답게 어떻게 동지들(대렬)을 위해 투쟁했는가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부닥친 자기 주위 환경을 자기 또는 대렬을 위해 어떻게 활용했는가는 투쟁의 원칙이기 때문에 자기 개인 이익만을 생각하였는지 아니면 대렬을 위해 생활했는가를 회고해 보는 것이다.

이는 자기 혁명정치 사상을 고수한 비전향 동지들에 관한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필자도 그 정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생활 한다고 했지만 부족함을 많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자성하면서~~...

2023년 2월5일 필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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