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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설 <새나라> 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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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11,460회 작성일 15-11-2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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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생활은 우리 장군님의 어깨우에 크고작은 짐을 너무도 많이 얹혀드리군 했다. 안타까운것은 당시의 환경에선 그럴수밖에 없었다는것이였다. 누가 그분의 일을 대신할수 있단 말인가. 위인만이 발견할수 있고 해결할수 있는 복잡한 문제들은 장군님의 어깨우에 층층만층으로 덧쌓여지군 했다.

정근식의 문제도 례외가 아니였다. 리주연은 정근식을 만났던 결과를 장군님께 보고드렸다. 결과가 신통치 않아서인지 리주연의 표정도 씨원치 않았다.

《저에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줄 아는 능력이 부족한가 봅니다.》

《좀 자세히 들어봅시다.》

장군님께서는 만년필을 놓으시고 리주연과 마주앉으시였다.

오늘 리주연은 서성고무공장에 정근식을 만나러 갔다가 허탕을 쳤다. 공장에서 대준 주소대로 집을 찾아가니 그는 널직한 퇴마루에 나앉아 낚시대를 손질하고있었다. 그것부터가 우선 리주연의 깔끔한 눈에 거슬렸다. 남들은 건국을 한다고 뛰여다니는데 신수멀끔한 량반이 명주바지저고리차림으로 올방자를 틀고앉아서 낚시대나 주무르다니…

거친 말마디들이 불쑥불쑥 튀여나오려 했지만 리주연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한 례절을 생략할수 없었다.

《리주연이라고 합니다. 도인민위원회에서 일을 보지요.》

웬만한 사람이라면 기념집회때마다 주석단에 오르군 하는 리주연을 모를리 없건만 달팽이도 부러워할만큼 바깥일에 흥미를 잃고 사는 정근식은 정말로 그를 몰랐다. 언젠가 이름은 들은적이 있는것 같은데… 부위원장이라고 했던가?

《헌데 무슨 일루?…》

리주연은 찾아온 용건은 뒤로 미루고 낚시도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낚시질취미가 대단한 모양입니다?》

《나한텐 낚시질재미가 세상을 더 살아야 할 리유의 전부이지요. 50평생을 살고나면 세상살이가 시들해지는건 어쩔수 없는가 봅니다.》

《왜 그렇게 인생을 허무하게 생각합니까?》

《누군가 말하기를 현대인의 특징은 허무라고 했지요. 호젓한 강가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앉아있느라면 서로 속고 속이며 더 많이 가지겠다고 오구작작대는 인간세상이 우습게 생각되지요. 그래서 중들이 깊은 산속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혼자 살았는가봅니다. 허위로 가득찬 속세에서 괴롭게 살기보다는 정직한 짐승들을 벗삼아 사는게 더 마음 편했을테니까요, 허허.… 이거 초면에 객적은 소리를 해서…》

정근식은 쓰겁게 웃었다. 제가 한 말이 스스로 역겨웠던 모양이였다. 리주연은 방안을 두루 살피다가 책상우에 놓여있는 지구의에 눈길을 멈추었다. 큼직한 석탄덩이처럼 새까맣게 먹칠해놓은 지구의를 보며 리주연은 아연해졌다.

《지구의는 왜 저렇게 됐습니까?》

《그게 지구의 본색이라고 보았습니다. 창세기전처럼…》

정근식은 비양조의 웃음을 지으며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리유가 뭡니까? 왜정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나라가 해방되지 않았는가요? 지구의 방방곡곡에서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선포하고 새 사회를 건설하고있는 때가 아닙니까?》

《그럼 지금은 창세기라고 해두지요.》

정근식은 퉁명스레 한마디 했다. 청하지 않은 손님으로 왔으면 용건이나 내놓을것이지 별 시비를 다 한다는듯 한 점잖은 신호였다.

리주연은 강량욱서기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상기하며 세상일에 팔짱끼고 돌아앉은 이 사람을 건국의 마당으로 끌어내기가 조련치 않으리라는것을 예감하였다.

리주연은 자기가 찾아온 목적을 직선적으로 털어놓았다.

《시인민위원회에서는 보통강개수공사에 평양시민전체가 떨쳐나서야 한다고 선전사업도 하고 로력동원증도 발급했는데 어째서 자기대신 로력을 사서 내보냈는가요?》

정근식은 깜짝 놀랐다.

《그 일때문에 왔습니까, 도부위원장어른이?…》

《예, 리유를 알고싶어서요.》

《그러니까… 그게 잘못되였다는건가요?》

《대단히 잘못되였지요.》

《어째서요? 나야말로 그 리유를 알고싶은데요? 누가 나가서 일하든 제 몫을 하면 되지 않는가요? 더구나 가난한 사람은 일해주는 대신에 품삯을 받아서 좋을거구.…》

정근식은 그것이 왜 잘못이라고 하는지 놀라왔고 리주연은 정근식이 정말로 제 잘못을 모르는게 놀라왔다.

《당신은 아직도 왜정때처럼 돈이면 다 해결되는줄 아는 모양인데 우리가 바라는건 당신의 애국심입니다. 지금 공사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로력동원증에 도장을 받을 때마다 나라를 위해서 땀을 바쳤다는걸 확인받는 그 순간이 기뻐서 하루일의 피곤이 다 달아난다고 합니다. 그게 애국심이 커간다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애국자가 될수 있는 그 기회를 스스로 버린셈입니다. 혹시 그 동원증을 종교에서 말하는 면죄부처럼 생각한게 아닙니까?》

정근식은 돈이 부정당한다는게 이상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다시 물었다.

《어쨌든 건국을 하자면 돈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기본이라구 하셨습니다. 장군님의 개선연설에서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고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라고 하신 말씀은 사람들의 애국심을 내라는 맡씀이란 말입니다.》

《나도 그 말씀만은 천금보다 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국심이라…》

정근식은 눈을 꾹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지금까지 리완용이 같은 매국노만 되지 않으면 그럭저럭 부끄럽지 않게 살수 있다고 믿어왔었다. 설사 북조선에 공산정권이 선다 해도 역적이 아닌데야 겁낼게 뭔가. 그래서 해방직후 장대재교회당의 최장로가 월남하자고 꼬드기는것도 따라가지 않았었다. 그런데 리주연의 말을 들어보면 공산정권하에서는 애국자만 살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공연히 속이 비틀어진 정근식은 감았던 눈을 뜨며 리주연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지금 무산계급의 정권을 세우자고 하는듯 한데 그럼 나는 어떻게 됩니까? 평등한 세상을 건설하자는 구호밑에 프로레타리아의 마치가 내 집과 공장을 들부시면 나두 빈털터리가 될게 아닙니까. 게다가 나두 꼭 공사장에 나가서 감탕판에 무릎을 걷어올리고 땀흘리며 질통을 져야 이 세상에서 살수 있는 허가증을 받는다는건데 음… 그건 좀 너무한데요. 모세의 십계명에도 로동에 성실하라는 말은 없었지요.》

《그만하시오! 》

매사에 침착한 리주연이였지만 정근식의 의식적인 도발을 듣고만 있을수 없었다. 장군님의 말씀을 받고 왔으니만큼 정근식을 잘 설복해서 공사에 동원되도록 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더이상 부처님처럼 점잖게 처신할수 없었던것이다. 리주연은 분노한 눈길로 정근식을 쏘아보며 격분을 터쳤다.

《당신은 자기가 얼마나 무서운 허무와 회의의 수렁늪에 빠졌는지 모르고있소. 당신은 지금 장군님의 건국사상을 믿지 못하고있단 말이요. 장군님께서는 당신같은 사람도 이 공사를 통해서 애국자로 성장하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고 하시였소. 이 거세찬 시대의 흐름에 합류하지 못하고 건국의 구경군노릇을 하고있는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나를 여기로 보내시였소. 그런데 당신은 뭐가 어쨌다구…》

《장군님께서… 나를?…》

정근식은 무릎을 반쯤 세우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하 벌린 입도 다물지 못하고 퀭해진 표정으로 리주연을 바라보기만 했다.

리주연은 더 마주앉아있고싶지도 않아 훌 일어서고말았다. 문지방을 넘어서며 그는 다시 오금을 박았다.

《당신두 장군님께서 지난 3월에 발표하신 20개조정강을 읽었겠지요? 그런데 아직도 모세의 십계명타령이요? 당신이 없어도 우린 이 공사를 해낼거요. 당신은 팔짱끼고 앉아있지만 장군님의 건국로선을 받들고 우리 인민들이 어떤 새세상을 건설하는가를 당신은 보게 될거요.》

리주연이 대문을 나설 때까지 정근식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굳어져있었다.…

장군님께서는 심각한 안색으로 리주연의 보고를 끝까지 들어주시였다.

해방된 오늘까지도 이 땅의 변혁을 믿지 못하고 은둔해있는 그 사람이 한편으로는 섭섭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프시였다. 그 사람의 지난날이 얼마나 모질었으면 그렇게까지 현실을 믿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들도 하나하나 손잡아 이끌어 건국의 마당에 내세워주는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내가 한번 만나봐야겠습니다.》

그이께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시고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오후에 선전부문일군들과 만나기로 약속하시였는데 그전에 정근식이부터 만나보셔야 할것 같았다.

당황해난것은 리주연이였다. 자기가 결김에 훌 떠나온탓에 그이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는 결과를 빚어냈기때문이였다.

《장군님께서 그 사람을 찾아가신단 말입니까? 제가 다시 가보겠습니다.》

《함께 갑시다. 이것은 다만 그 사람한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각계층 군중이 우리 인민정권을 진심으로 믿는가 안 믿는가 하는 심중한 문제입니다.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이 거친 세상을 살아오면서 많이 속히우고 마음속에 상처도 많이 받은것 같은데 우리는 품을 들여서라도 그에게 인생의 환희를 찾아주어야 합니다.》

장군님께서는 먼저 집무실을 나서시였다.

잠시후 장군님께서 타신 승용차는 리주연의 안내로 정근식의 집근방에서 멎었다. 골목이 좁아 차를 먼발치에 세우고 대문앞에까지 걸어가시였다.

《이 집입니다.》

장군님께서는 리주연이 가리키는 대문앞으로 다가서시여 몸소 대문을 두드리시였다.

《계십니까?》

대답이 없었다. 다시 손바닥으로 굳게 닫긴 대문을 텅텅 두드리시며 좀더 크게 소리치시였다.

《주인님 계십니까?》

그래도 안에서는 인적이 없었다.

《주인이 없는게 아닙니까?》

리주연이 의아해서 하는 말이였다. 장군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였다.

《주인이 없으면 어떻게 대문빗장을 안에서 걸었겠습니까? 아마 주연동무한테서 얻어맞은게 아파서 머리를 싸매고있는 모양인데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골방에 들어박힌 은둔자를 만나기가 그렇게 쉽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다시 대문을 두드리시였다.

《주인님 계십니까?》

그때에야 안에서 미닫이문이 드르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 누구요?》

별로 반갑지 않다는듯 한 소리였다.

《주인님을 뵙자고 왔습니다.》

손님의 례절있고도 위엄있는 음성에 집주인은 어쩔수 없었던지 신발을 끌며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의 빗장을 벗겼다.

대문은 마지못해 열리는듯 찌꿍 하고 신경질을 부리며 열렸다.

순간 정근식은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깜짝 놀라며 숨을 들이그었다.

어떻게 김일성장군님께서 자기 집 대문앞에 서계실수 있단 말인가?

장군님께서는 인자하게 웃으시며 정신을 못 차리고있는 정근식에게 인사를 하시였다.

《안녕하십니까?》

《장군님! 제가 그만 장군님을 몰라보았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정근식은 두손을 합장하고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장군님께서는 걸음을 옮기시며 친근하게 물으시였다.

《집구경이나 합시다. 그런데 안주인은 어디 갔습니까?》

《예, 시장에 나간다면서…》

정근식은 한발 먼저 방안에 들어가 방금전까지 베고 누웠던 베개를 치우고 방석을 내놓으면서 루루이 변명했다.

《실은 아까 도부위원장어른한테서 얻어맞고 누웠댔는데 부끄러운 꼴을 남에게 보이기 창피해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도 잠자코 있었댔습니다.》

《이왕 매를 들였던바에는 단단히 치자고 이렇게 다시 왔습니다. 하하…》

장군님께서는 집주인의 옹색한 마음을 풀어주시려고 호탕하게 웃으시며 방안을 둘러보시였다.

십장생을 그린 병풍과 리주연에게서 들은대로 책상우에 놓여있는 먹칠한 지구의, 옻칠한 탁자우에 놓인 리조 백자기접시에서 풍기는 과일향기, 창가의 어항, 벽에 걸린 족자들…

장군님께서는 묵화로 게와 기러기를 그린 단원(김홍도)의 족자를 유심히 감상하시였다.

무성하게 자란 갈밭속에서 제가끔 기여다니는 게무리들은 탄력있고 민활하게 다리를 놀리며 마치 설렁거리는 소리를 내는듯 한데 가을바람이 우수수 갈밭을 흔들고있는듯 생동한 화폭이였다.

잠시 그림을 감상하시던 장군님께서는 옆에 서있는 리주연에게 물으시였다.

《주연동무 보기엔 게가 모두 몇마리입니까?》

리주연은 장군님께서 정근식을 되게 비판하실줄 알고 긴장해있다가 뜻밖의 질문을 받고 어리둥절해졌다. 장군님께서 한번 세여보라고 재차 말씀하신 뒤에야 그는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모두 열세마리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웃음어린 어조로 리주연에게 정확히 세여보라고 충고하시였다. 리주연은 머리를 기웃거리더니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꼭꼭 짚어가며 하나, 둘 하며 세나갔다. 틀림없이 열세마리였다.

《분명 열세마리입니다.》

《주인님은 몇마리로 알고있습니까?》

긴장해있던 정근식은 장군님께서 우정 화제를 돌리신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이미 알고있던대로 대답올렸다.

《열세마리올시다.》

《다 틀렸습니다. 열네마리입니다.》

리주연이도 의아해졌지만 정근식은 더 놀랐다.

저 그림을 걸어놓은지도 몇년 잘되는데 자기는 지금껏 열세마리로 알고있었던것이다. 그럼 한마리는 어데서 나타났단 말인가.

장군님께서는 보조개가 패이는 특징적인 미소를 지으시고 손을 드시여 그림의 한곳을 가리키시였다.

순간 정근식이도 리주연도 동시에 《아!》하고 탄성을 터쳤다. 무성한 갈숲짬으로 몇개의 게다리가 보였던것이다. 정근식은 장군님을 우러르며 찬탄을 금치 못했다.

전설로만 들어오던 장군님의 천리혜안을 제 눈으로 확인했으니 왜 그렇지 않으랴.

《저는 여태 그걸 보면서두 갈뿌리인줄만 알았댔습니다.》

정근식은 숨어있던 게를 찾아낸것으로 해서 그림의 가치가 더 높아졌다고 생각하는것인지 어린애처럼 기뻐하였다.

장군님께서는 그림앞에서 물러나시며 슬쩍 기본문제에로 들어가시였다.

《저 숨어있는 게가 주인님을 닮은것 같지 않습니까?》

정통을 찔리운 정근식은 방금전까지 멋도 모르고 좋아한 자기가 천하게 여겨졌다.

장군님께서는 건국에 바쁜 시간을 내시여 굳게 닫긴 대문을 두드려주시고 골방속에 은둔해있지 말고 밝은 세상으로 나오라고 몸소 손을 내미시는데 그 깊으신 뜻은 알지도 못하면서 주책없이 허허 웃고있었으니 자기 감각이 얼마나 둔해졌는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서글퍼졌다.

장군님께시는 정근식과 마주앉으시고 흉금을 터놓으시였다.

《난 주인님이 보통강개수공사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가 섭섭하고 인민정권을 믿지 못하고있는게 안타까워서 속시원히 이야기를 나누어보자고 찾아왔습니다.》

정근식은 송구스러워 몸둘바를 몰랐다. 오성재가 처신을 어떻게 했기에 장군님한테까지 그 일이 알려지고 도부위원장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이실직고했길래 장군님께서 이런데까지 걸음하시게 했단 말인가. 하긴 따져보면 누구를 탓할것도 없었다. 정근식은 이렇게 된바에는 여태 머리속에 웅크리고있던 의문점들을 깨끗이 털어버리고싶었다.

세상의 리치를 아침에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는데 혼돈과 애매함으로 가득찬 머리가 정리된다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을수 있었다.

《제가 불민한탓으로 국사에 바쁘신 장군님께서 초라한 저희 집대문을 몸소 두드리시게 한 죄는 따로 벌을 청하겠습니다만…》

정근식은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철없는 초학도를 훈계하는셈치고 가르쳐주십시오. 내 지금껏 이 세상에 잠시 머무르는 손님흉내를 내면서 허무주의면사포를 쓰고있었던것은 이 땅에 인류가 바라던 만민평등의 사회가 세워질수 없다는 절망감때문이였습니다. 중국의 공자가 <덕으로 인도하고 례로 다스리는 정사를 펴야 한다>고 했지만 그게 현실화되여본적은 동서고금에 없었습니다. 물론 장군님께서만이 이 세상에 무릉도원을 세우자고 팔걷고 나서신줄은 내 아무리 바깥일에 깜깜이래두 모르는바 아니지만 그게 과연 가능한가 하는것입니다. 세상이 벅적 떠들어댄다고 귀구멍을 넓히고 엉치를 들썩거리는것은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지요.》

정근식은 머리속에 있던것을 단숨에 쏟아놓았다.

그리고 초조한 기색으로 장군님의 말씀을 기다렸다.

장군님께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정근식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시고나서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주인님의 심정이 리해됩니다. 하긴 만민평등의 세상을 건설하자는 구호가 어제 오늘 처음 나온것은 아니지요. 우리 나라 력사만 놓고보아도 진보적인 학자들은 봉건적인 전제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속에서 왕권신수설을 배격하고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사상을 내놓았습니다.

김시습이나 리수광도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고 했고 후기 실학의 대표자였던 정약용도 민권옹호사상을 내놓았습니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내놓은 인내천사상도 당시로서는 진보적이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으로 인민을 위한것이였는가.》

장군님께서는 자리를 고쳐앉으시며 력사가 인민을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데 대하여 알기 쉽게 개괄하시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봉건전제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민본사상, 민권옹호사상, 평등과 민주주의사상, 인내천사상 등이 형성되였지만 그것은 주로 봉건통치체제내에서의 리상적인 정치를 주장한것으로서 민중에게 절대적인 지위와 권리를 부여하지 못한것이였다. 또한 그것은 물질적부의 생산자로서의 민중의 능력은 인정하였으나 사회변혁의 능력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전면부정하는 사상이였으며 민중을 정치의 주인으로가 아니라 통치의 대상으로 본 사상이였다.

유미자본주의나라들에서도 정권의 형태가 공화제냐 군주제냐, 정권의 활동방식이 민주주의냐 독재냐 하는 론의가 정치학의 주되는 내용으로 되면서 국민주권사상, 주권재민론사상이 형성되였다.

《유토피아》나 《태양의 도시》에서는 사적소유가 없고 무위도식자가 없는 리상사회를 그리면서 국가주권을 민주주의적으로 조직할것을 공상하였다. 그러한 사상들은 프랑스에서도 미국에서도 나왔지만 그것은 다 민중을 기만하고 부르죠아독재통치를 위장하기 위한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것이였다.

《그러나 우리 조선의 혁명가들은 해방된 조국땅우에 인류가 리상으로만 그려오던 진정한 인민의 나라를 세우자고 합니다. 그래서 로동자들은 공장의 주인이 되게 하고 농민들은 땅의 주인이 되게 했으며 20개조정강을 발표하였습니다. 보통강개수공사도 토성랑인민들이 더이상 수해를 입지 않게 하자고 나라사정이 허락치 않지만 인민의 힘을 믿고 일판을 벌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주인님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세기적변혁들을 제 눈으로 목격하면서도 의식적으로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근식은 부정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런 세상이 세워진다는게 쉽게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숱한 현자들이 하느님흉내를 내면서 지구상에 에덴동산같은 락원을 만들어보자고 인간을 교화해왔지만 세상은 아름다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어떤 새로운 교리로 백성의 세상을 건설하려고 하십니까?》

《나의 건국리념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인민에 대한 사랑과 믿음입니다. 종교에서는 인간을 신의 피조물로, 귀소개념이 없는 불쌍한 어린 양으로 보았다면 나는 인간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자주적인 존재로 봅니다. 인간은 자연과 사회의 주인이며 제 운명의 주인입니다.》

정근식은 장군님의 론리정연한 말씀에 무엇이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하늘이 준 이 기회를 놓치고싶지 않아 좀더 대담하게 말씀드렸다.

《제가 너무 외람된것 같지만 한가지 더 묻겠습니다. 지금 항간에서는 북조선이 곧 쏘련의 가맹공화국으로 된다는 말이 나돌고있습니다. 설사 그렇지는 않다 해도 북조선엔 사회주의정권이 서겠는데 그러면 나같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장군님께서는 정근식의 단순성앞에서 웃지 않을수 없으시였다.

《주인님은 세상일에 귀구멍을 넓히지 않는다고 하시더니 그런 잡소리까지 다 들으셨군요. 식자가 있는 어른이 돌아가는 소리 몇마디로 세상을 재단한다면 그 이상 서글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반동놈들이 민족주의자들이나 지식인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을 헐뜯느라고 별의별 소리를 다하고있는데 이건 다 애국적민주세력의 단합을 막아보려는 비렬한 수법입니다. 우리가 건설하려는 사회는 로동자, 농민, 지식인들과 함께 기업가나 종교인들에게도 나라의 혜택이 골고루 한몫씩 차례지는 사회, 말하자면 온 민족을 위한 사회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놓으십시오.》

그래도 정근식은 잘 리해되지 않았다.

《그런 리론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알건대 사회주의정권형태는 콤뮨과 쏘베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콤문형태의 정권은 존재기일이 너무 짧았고 쏘베트는 프로레타리아독재사회로서 민족보다 계급을 우선시하지 않습니까?》

《빠리콤뮨의 운명이 짧았던것은 그것이 도시로동계급만을 위한 정권이기때문이였습니다. 그리고 로동자와 빈고농, 병사들을 위한 쏘베트정권하에서는 그 초시기에 즉시적인 사회주의실현이라는 구호밑에 일사천리로 강행된 재산의 공유화와 유산계급일반에 대한 일률적이고 무자비한 숙청이 민족단합에 일정한 지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보적민주주의의 구호밑에 인민대중의 리익을 철저히 옹호하는 진정한 인민의 새 나라를 세우자고 합니다. 우리는 그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그 누구의 흉내를 내지 않고 어디까지나 조선식으로 건국을 해나가야 합니다. 조선사람에게는 미국옷도 맞지 않고 쏘련옷도 맞지 않습니다. 때문에 맞지도 않는 다른 나라 옷을 입을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맞는 조선옷을 만들어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는 조선혁명의 성격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실정에 맞는 조선식민주주의길로 나가자고 합니다. 주인님이야 정치의 가갸거겨를 모르는 사람도 아닌데 인민이 자주시대의 주인으로 등장한 력사의 흐름을 외면해서야 되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가슴에 차오르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시고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주인님은 모든것을 허무적으로 대하면서 지구의에 먹칠이나 하는것으로 어두운 이 세상을 복수하려고 하신 모양인데 그건 대단히 잘못되였습니다. 왜냐면 그건 아름답고 밝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해온 인류의 력사를 모욕하는것으로 되기때문입니다. 멀리 볼것도 없이 우리 항일투사들은 적들에게 두눈을 빼앗기고도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고 웨쳤습니다. 말을 들으니 선생은 그 무슨 허가증이 비싸다고 하셨다는데 그러지 마십시오. 이 땅우에 진정한 인민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 땅우에서 자주적인간으로 살수 있는 권리를 가지기 위해 20성상 혈전만리를 헤쳐온 투사들도 감히 그런 재세는 하지 않습니다. 주인님같은분들도 마음편히 잘살게 하자고 목숨을 바친 그네들의 령혼이 바람세찬 만주벌판에서 아직도 잠들지 못하고있는데 그 말을 들으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내가 더 섭섭한것은 주인님이 오성재농민의 인격을 너무도 무시한것입니다.》

《예? 그건…》

정근식은 변명이라도 하려는듯 고개를 들다가 그만 흠칫하고 굳어졌다. 장군님의 안광에서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섬광과도 같은 빛을 보았던것이다.

장군님께서는 준절한 음성으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주인님은 오성재라는 한 인간을 모욕했습니다. 그 순박한 농민이 주인님한테 신세진것을 잊을수가 없어서 규정에 어긋나는줄 알면서도 동원증을 받을 때 그의 처지가 얼마나 난처했겠는가를 생각해보았습니까?》

정근식은 들었던 고개를 푹 떨구었다. 장군님께서는 다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던것이다. 자기는 오성재에게 선심을 쓰고 그 인정을 리용해서 그의 육신을 부려먹으려고 했었다.

본의든 아니든 결국은 그렇게 되였다. 공사장에서 제정한 로동규정을 어기는것으로 해서 그의 립장이 딱해질수 있다는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장군님께서는 그토록 노하신것이였다. 지지리 눌리워 살아온탓에 본인조차도 자기가 모욕을 당하는줄 모르고 모욕당한 평범한 한 농민의 존엄을 지켜주시려고 바쁘신 시간을 내신것이다.

세상살이가 싫어졌다는것은 세상리치를 다 알았기때문이라는 자기의 견해가 얼마나 어리석고 협소한것이였는가를 자인하면서 그는 장군님앞에서 머리를 들수 없었다.

그러나 장군님께서는 결코 그의 경거망동을 단죄하시자고 오신것만은 아니였다. 그이께서는 석탄덩이같은 지구의를 빙글빙글 돌리시며 확신에 넘쳐 말씀하시였다.

《주인님이 믿든 안 믿든 우리는 인민의 힘으로 이 땅에 락원을 일떠세울것입니다. 이제 우리 인민들이 얼마나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이 지구우에 건설하는가를 주인님은 꼭 보게 될것입니다. 주인님도 멀찍이 앉아서 구경만 하지 말고 건국의 길을 나와 함께 손잡고 걸읍시다. 나는 인민의 세상을 념원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 동지로 믿고싶습니다.》

《장군님!》

정근식은 장군님께서 떠나가신 뒤 그만 대문앞에 주저앉았다. 마치 파도사나운 바다우에서 폭풍에 내동댕이쳐진것처럼 몸을 주체할수가 없었다. 한참만에야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방안에 겨우 들어선 그는 허탈상태에 빠진 사람처럼 맥없이 늘어져버렸다.

예전에는 고독을 즐기며 살아왔건만 오늘만은 사람이 그리웠다. 누구하고든 마주앉아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머리속의 온갖 찌꺼기들을 분수처럼 뿜어버리고싶었다.

정적이 드리운 방안에서는 십장생을 그린 병풍속의 해와 산과 소나무와 거부기들이 그렇게 속을 태우면 자기들처럼 오래 살지 못한다고 충고하는듯 정근식을 조용히 지켜보고있었다.



40

 

장혁수로부터 정근식의 로력동원증을 돌려받은 오성재는 며칠째 남모르게 속을 썩이고있었다. 지금도 그의 귀전에는 장혁수가 동원증을 돌려주며 하던 말이 생생히 남아있었다.

《나도 이 동원증을 별치 않게 생각했댔수다. 누가 대신하든 제 몫을 하면 되는줄 알았지요. 리주연부위원장한테서 장군님말씀을 전달받고서야 정신이 들었수다. 장군님께서는 그 동원증은 단순한 통제수단이 아니라 그 사람이 건국에 바친 공로를 보증해주는 애국증서와 같다고 말씀하셨대요.》

《애국증서라구?》

《예. 그리구 건국은 돈으로 하는게 아니라 애국의 마음이 기본이라구 하셨대요.》

오성재의 얼굴빛은 컴컴해졌다. 정근식에게 동원증을 돌려주기가 난감했던것이다. 장혁수가 그걸 모를리 없었다.

《형님 손으로 돌려주기 딱하다면 내가 돌려주겠수다.》

《아니, 아니… 내가 주지.》

오성재는 동원증을 쥔 손을 얼른 움츠렸다. 장혁수의 살갑지 못한 성미에 정근식한테 가서 떡떡거리면 제 립장이 더 옹색해질것 같았던것이다. 그렇게 받아넣긴 했지만 오성재의 마음으로서는 화로불을 뒤집어쓰고 참으면 참았지 사람의 체면을 가지고서는 정근식에게 그걸 되돌려줄 용기가 전혀 생길것 같지 않았다.

은혜를 입을 때 같아서는 하늘에 가서 별이라도 따다 바치고싶었는데 그까짓 육신을 대신해주는 일도 못해주게 되였으니 이 딱한 사정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어제 저녁에도 그는 정근식의 집앞에까지 갔다가 종시 대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돌아섰다. 생각끝에 그는 현장치료실에 나가있는 수영을 찾아갔다.

그날도 수영은 마당 한옆에 걸어놓은 돌가마에서 음료수를 끓이고있었다. 나무가 잘 마르지 않아서인지 불길이 씨원치 않았다. 처녀는 머리에 재티를 얹으며 후- 후-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러다가 그만 연기를 삼키고 눈물이 찔끔 나오게 재채기를 했다. 치료실에서 나오던 간호원처녀가 재미있다는듯 까르르 웃었다. 수영이도 웃었다.

현장치료실에는 남자의사 한명과 수영이 그리고 간호원이 한명 나와있는데 남자의사는 치료가방을 메고 병원에서 회진하듯 넓은 공사구간을 돌아다니고 수영이와 간호원은 치료실을 지키면서 찾아오는 환자도 봐주고 음료수를 끓여 현장에 내가군 했다. 수영은 날이 갈수록 현장치료대에 자원해나온것을 긍지롭게 여기고있었다. 옛날에는 공사판이라는데가 막사람들이 모여서 온갖 륜리적인것들을 무시하고 막되게 사는 무지막지한 생활무대라는 인식만 있었는데 여기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땀을 아끼지 않았을뿐아니라 누가 더 많은 땀을 흘리는가 경쟁이라도 하는듯싶었다. 그렇게 열성적으로 일하다가도 쉴참이면 힘든 기색없이 어깨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예상치 않았던 기쁜 일에 부닥치면 그 기쁨이 곱절 커지는 법이다. 악행의 범람속에서 선행의 쪼각이나마 찾아보려고 애쓰던 지난날에 비해볼 때 수영에게는 공사장의 풍경이 놀랍기만 했다. 그래서 처녀는 그 아름다운 풍경에 자그마한 꽃 한송이라도 보태는 심정으로 자기 맡은 일에 열성을 냈다.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친절하고 어떤 때는 하얀 위생복자락을 날리며 공사장을 돌아보고 하루에 두번씩 꼭꼭 물을 끓여 음료수를 보장하고… 며칠전에는 사창장마당에서 꽃무늬를 새긴 사기물고뿌를 열개나 사왔다. 누가 시킨것도 아니건만 그걸 사는데 한달분 생활비를 다 털어넣었다. 장사군녀인에게서 고뿌를 살 때에도 값을 깎지 않고 달라는대로 돈을 치르었다. 마치 물건을 흥정하면 공사장에 바치는 자기의 정성을 제스스로 흥정하는것 같아서 그럴수 없었던것이다. 로동자들이 그 깨끗한 고뿌로 음료수를 마시며 기뻐하는것을 보니 자기의 마음도 함께 즐거워졌다. 생활이 이렇게 즐겁고 무한히 자기를 헌신하고싶어본적이 언제 있었던가.

《수고하누만.》

《아이, 아저씨 오셨어요!》

수영은 손수건으로 눈굽을 찍어내며 오성재에게 인사를 했다. 오성재는 돌가마를 걸어놓은 곳에 쭈그리고앉았다.

《나무를 너무 많이 넣었구만.》

그는 불이 당기지 않은 장작을 몇가치 꺼내더니 나머지는 서로 엇갈리게 쌓아놓고 부채질을 해댔다. 연기만 피워올리던 불무지에서는 얼마 안있어 탁, 탁- 소리를 내며 불길이 솟구쳤다.

《고마워요, 아저씨!》

오성재는 장작을 두어가치 더 밀어놓고 일어섰다.

《물까지 끓여서 보장하느라 수고하는데 인사야 우리가 해야지. 우리같은 사람들이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봤나? 원래 여기는 물이 나쁜데 끓인물을 먹으니 인젠 배탈나는 사람이 없거던.》

《그럴거예요. 100도에서 5분만 물을 끓이면 세균뿐아니라 일부 비루스들도 죽는답니다. 물은 45분정도 끓이면 저항성이 센 간염비루스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미생물들이 다 죽거던요.》

제 기분에 잠긴 처녀는 오성재가 말을 못 알아들을수 있다는것은 생각지도 않고 어려운 학술용어까지 섞어가며 신바람이 나서 설명했다. 물을 끓이면 물속에 있던 효소, 박테리오파쥐, 항생소와 같은 생물학적인자들을 포함하여 물의 화학적처리에 의해서도 잘 없애지 못하는 발암성물질들을 효과적으로 없앨수 있다는것, 끓였다가 식혀서 오래된 물에서는 세균이 더 많이 번식할수 있기때문에 하루가 지난 물은 다시 끓여서 마셔야 한다는것…

오성재는 수영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처녀의 명랑한 기분에 말려들어 입을 벙글서하고있었다.

《아이참, 제가 괜한 소리를 하는군요.》

수영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가마우에 앉은 먼지를 닦아냈다.

《그런데 참, 어떻게 오셨어요? 어디 아프세요?》

오성재는 어줍게 웃었다. 정작 말을 꺼내자니 또 혀가 굳어졌다. 하지만 여기서까지 말을 못하면…

그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참이나 우물거리다가 정근식의 로력동원증을 천근처럼 무겁게 꺼내들었다.

《사실은 이것때문에…》

《그게 뭔데요?》

수영은 정근식이란 이름을 보고도 사연을 짐작하지 못했다.

《이게 왜 아저씨한테 있었어요?》

《사실은…》

오성재는 맥락이 닿지 않게 한마디씩 중얼거리는데 너무도 난해해서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고서는 도대체 알아들을수 없었다. 오성재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것은 당연한것이였으니 생활을 아름답게만 보고있던 처녀에게는 이런 문제를 풀이할수 있는 방정식이 없었던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공사지휘부에서는 건달군이나 모리간상배들이 돈으로 로력을 사서 내보내는 현상에 대해 계급적안목을 가지고 문제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고있었다. 공사선전요강에는 이 공사에 품 한자루 바치기 아까와하는 그런자들은 인민의 새세상에서 살 자격이 없는 력사의 반동으로 락인하고있었다. 수영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외삼촌이 그런 부류에 속한단 말인가? 아니야! 외삼촌은 그런분이 아니야!

처녀에게는 눈앞의 모든것이 갑자기 생기를 잃어버린듯싶었다. 외삼촌에 대한 원망과 자신에 대한 창피감 그리고 오성재아저씨에 대한 죄스러움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수영은 진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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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수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안됐어요, 아저씨. 동원증은 저에게 맡기세요.》
오성재가 몇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떠난 뒤에도 수영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처녀의 심중을 대변해주려는듯 물가마는 뚜껑을 달랑거리며 끓고있었다. 벙싯해진 뚜껑짬으로는 하얀 증기가 더 참아내지 못하겠다는듯 씩- 소리를 내며 세차게 뿜어나왔다. 하지만 수영은 자기의 답답한 마음을 그렇게 속씨원히 내뿜을데도 없었다.
(오늘 저녁에 가서 외삼촌에게 말하면 성내지 않을가? 어쨌든 할 말은 해야겠어. 그래야 외삼촌도 세상일에 랭담한 은둔자의 복면을 벗어버릴수 있어. 물이 끓으면 세균이 죽는것처럼 외삼촌도 이 공사의 도가니속에 잠겨보아야 해. 건국의 열풍을 맞으면 어제날에 뒤집어썼던 그 복면이 답답해서라도 제손으로 벗어던질거야.)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수영은 밥상을 물린 뒤에 조심히 웃방으로 건너갔다. 벽에 걸린 족자며 책상우의 골동품 그리고 십장생도 병풍을 비롯하여 옛스러운 기물들은 그 방에 들어서는 사람을 천년전의 아득한 과거로 끌어들이는듯싶었다. 이 방의 주인은 자기가 살아보지 못한 과거속에 현재의 자기를 은페시키려는가? 과거만이 그에게 안정을 주기때문인가? 이 방에서 현실을 느끼게 해주는것을 부디 찾아본다면 창문턱우에 놓여있는 어항속의 금붕어들뿐이였다. 어항속에 갇혀있긴 하지만 어쨌든 살아움직이고있었다. 공작어들은 빛갈고운 꼬리를 하늘거리며 한가로이 헤염쳐다니다가 사람이 다가오자 풀숲사이에 숨느라고 부산을 피우고있었다. 위풍스럽고 점잖은 신선어는 무서울게 뭐냐는듯 긴 수염을 한껏 뻗치며 거드름을 피우고 꼬리긴 금붕어는 툭 불거진 눈망울을 디룩거리면서 숨을 필요도 없고 위세를 부릴 필요도 없다는듯 안개같은 긴 꼬리를 흐느적이며 한자리에 꼼짝않고 떠있었다.
그러고보면 꼬리긴 금붕어가 방주인의 생활방식을 제일 많이 닮지 않았을가? 수영은 자기의 대비적고찰이 황당해서 쓰거운 웃음을 지었다.
《할 말이 있느냐?》
좀해서는 웃방에 올라오지 않는 조카딸의 거동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정근식이 먼저 물었다.
《오늘 오성재아저씨를 만났댔어요.》
수영은 로력동원증을 내놓으며 외삼촌의 기색을 엿보았다. 정근식은 탁자우에 내려놓은것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외삼촌을 볼 면목이 없대요.》
《면목이 없기는 그 사람이나 나나 마찬가지다. 그 사람은 나한테 면목이 없다지만 나는 나라앞에, 장군님앞에 면목이 없게 됐구나. 내가 그 사람을 욕보이게 했지. 그리구 너한테두 면목이 없다.》
외삼촌은 예상외로 헌헌한 태도를 보였다. 수영이로서는 기껏 준비했던 선전제강이 필요없게 된셈이였다. 그런데 장군님앞에 면목이 없다는건 무슨 소린가?
정근식은 의아해하는 조카딸에게 장군님께서 집에 다녀가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장군님께서 우리 집엘?… 이 모든걸 알고계신단 말이예요?》
수영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정근식은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계신다. 나 정근식이 일생동안 일신의 도를 잃지 않으려고 애써왔다만 부끄럽게두 장군님께 건국의 훼방군으로 알려지게 되였구나.》
수영은 외삼촌의 탄식을 수긍하고싶지 않았다. 이제라도 공사에 참가하여 그 수치를 씻을 생각은 않고 인격타령만 하고있는것이 잘 납득되지 않았던것이다.
《그런데 왜 공사장에 안 나가세요?》
정근식은 조카딸의 마음을 꿰뚫어보려는듯 한참이나 수영을 바라보았다.
《내가 쉽게 결심하지 못하는것은 현실의 모든걸 정말로 믿어야 한다는 확신이 없기때문이다. 게 좀 앉아라.》
정근식은 진지한 태도로 탁자앞의 참대의자를 가리켰다. 지금까지는 세상일을 론할만 한 대상으로 보지 않았던 조카딸이지만 그동안 공사장에 나가있었으니 자기의 의문을 풀어줄수도 있다고 생각되였기때문이였다.
수영이가 의자에 앉자 정근식은 성급하게 물었다.
《너는 현장치료대로 거기에 나가있었으니 느끼는바가 있겠는데 네 보기엔 어떻드냐?》
《뭐가요?》
《네 보기엔 공산당이 세우는 새 나라가 돈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귀히 여기는 그런 세상이 분명한것 같은가 말이다. 선사시대로부터 오늘까지 돈이 외면당해본적은 세상 그 어디에서도 없었다. 유다가 은화 서른냥에 예수를 팔았다는것만 봐도 돈이 어떤것인지 알만하지 않느냐.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오성재 그 사람의 인격을 모욕했다고 나를 꾸짖으시였다. 장군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돈보다 사람을 앞에 놓는 새세상이 분명하겠지만 정말로 그런 지상천국이 운수사나웠던 이 나라에 세워진다는게 쉽게는 믿어지지 않는구나.》
정근식은 수영에게 자기 고민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 세월에 그는 너무도 많이 기만당해왔었다. 민족의 리상향에 대한 순결한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군 할 때마다 다시는 그럴듯 한 리론이나 시대풍조에 속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오늘에 이른 정근식이였다. 오는 바람, 가는 바람 다 따르며 인생의 돛폭을 올리기에는 먹은 나이도 많고 닻을 내린 포구도 그만하면 안정감이 있었다. 그런데 건국의 세찬 바람은 세월이 덮어준 허무의 락엽을 그의 가슴에서 날려버리고 희망의 돛폭을 펄럭거리게 해주었다. 한번 더 믿어볼가? 이제 돛을 올리고 떠났다가 인생에 또다시 풍랑을 만난다면 영영 침몰하고말것이 아닌가… 바로 그런 리유로 해서 그는 현실을 선뜻 믿을수 없었고 공사장에 나가볼 결심을 하루하루 미루고있었다.
《내 질문이 너무 커서 한마디로 대답하기는 어려울게다.》
정근식은 수영의 대답을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수영은 할 말이 있었다.
《아니예요. 말할수 있어요.》
《응?》
수영은 공사장에서 일어나는 경이적인 일들에 대해 외삼촌에게 할 말이 많았다. 남자들만 아니라 녀자들과 늙은이들도 공사장에 자원진출하여 땀을 흘리고있는데 대하여, 맹인들이 서로 손을 잡고 흙을 져나르는 눈물겨운 광경에 대하여, 앓는 남편을 대신하여 온 가족을 데리고나온 장별리의 녀인에 대하여 자기가 보고 들은것을 다 말하고싶었다.
그러나 그는 한가지만 말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건설자들에게 음료수를 꼭 끓여서 공급하라고 말씀하시였답니다. 외삼촌, 이게 믿어지세요? 하지만 사실이예요. 전 매일 두번씩 음료수를 끓이면서두 장군님께서 왜 그토록 로동자들을 아끼시는지 다는 리해하지 못하고있어요.》
정근식은 눈을 꾹 감고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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