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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설 <새나라> 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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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7,091회 작성일 15-12-01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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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비는 한대중으로 퍼부었다. 게다가 세찬 바람까지 못되게 불어치는통에 공사장은 뽀얀 비발속에 잠겨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작업을 그만두려 하지 않았다. 질통을 지고 달리다가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달리고 경사진 제방으로 오르다가 미끄러지면 기여서라도 오르군 했다. 온몸이 비에 젖고 감탕에 매닥질되였지만 일손을 놓고 짜증을 부리는 사람은 없었다.

운상은 건국로력대원들과 함께 남교제방을 보강하는 작업장에서 떠나지 못하고있었다.

장마가 시작되자 운상의 신경은 고도로 긴장되였다. 그는 매일매일을 시험관앞에 선 학생의 심정으로 살고있었다. 자기가 설계한 제방이 엄혹한 자연의 세례를 끄덕없이 막아낼것인가? 제일 미타한 곳이 남교제방이였다. 수문을 시공하면서 10m높이로 동시에 올려쌓은 제방은 새 통수로를 꺾어돌리는 곳에 위치하고있기때문에 물의 압력을 제일 많이 받는 곳이였다. 그래서 흙가마니를 제방의 안쪽에 올려쌓기로 하고 아침부터 그 역사질을 하고있는것이였다.

점심도 건느고 일손을 다그친 덕에 작업은 오후 두시가 남짓해서 마무리지을수 있었다.

건국로력대원들은 녹초가 되여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밥을 먹자 해도 가설막까지 걸어갈 힘이 없었다.

그때 마침 수영이가 끓인 물통을 들고 작업장에 찾아왔다.

처녀는 여기저기 주저앉아있는 사람들에게 김이 물물 피여오르는 따끈한 물을 권했다.

《마시세요. 몸이 좀 녹을거예요.》

그러나 사람들은 비속을 뚫고 자기들을 찾아온 처녀의사를 보는 순간 벌써 온몸이 훈훈해지는것을 느꼈다. 처녀의사가 가지고온것은 한고뿌의 더운물이 아니라 자기들은 찬비속에서 탈이라도 만나면 안되는 귀한 존재라는것을 알게 해주는 뜨거운 마음이였던것이다.

그 순간에 수영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선녀같은 신성함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지금껏 자기 안해를 포함하여 녀성일반을 천시해왔고 따라서 녀성의 아름다움에 대해 정리해볼 기회를 가져보지 못했던 사람들도 그 순간에만은 가슴이 뭉클해져 수영에게 제가끔 인사를 했다.

《의사선생, 고맙수다.》

운상은 남들처럼 물고뿌를 받아들고 타는듯 한 눈길로 처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지금 누구보다도 진정으로 온 세상이 다 듣도록 고맙다는 말을 처녀에게 하고싶었다.

(오늘은 내 말하리라, 설사 거절당한다 해도 사랑한다고 말하리라!)

운상은 처녀가 현장을 떠날 때 무작정 따라갔다.

사람들이 자기네 두사람을 지켜본다는것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수영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오늘 저녁에 이 자리에 나와주오. 할 말이 있소.》

그리고는 처녀가 뭐라 항변할새없이 돌아섰다. 자기의 결심은 절대적인것이기때문에 반대의사를 표시할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는 몇걸음만에 다시 멈춰서서 오금을 박았다.

《무조건 나와야 하오. 기다리겠소.》

그때의 운상에게서는 예전의 례절있고 정중한 지식인청년이 아니라 사랑에 열렬한 사나이의 기상만 보일뿐이였다.

건국로력대원들이 돌아간 뒤에도 운상은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제방을 보강하긴 했지만 강물이 불어날수록 마음의 불안도 커갔던것이다. 그는 수문권양장을 짓느라 대충 웃설미를 올려놓은 곳에 들어가 비를 그으면서 한편으로는 강물이 더 불어나지 않고 얌전해지기를 빌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처녀가 나타나기를 빌었다.

벌써 저녁때가 다 되여 날은 어두워지고있었다. 비는 여전히 그칠줄 몰랐다. 그렇게 빌었건만 강물은 계속 불어오르고 그때까지 수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처녀가 자기의 언행에 모욕을 느끼고 아예 나타나지 않으려는가.

그는 처녀가 기다려지면서도 한켠으로는 은근히 두려웠다.

(정작 나타나면 말을 어떻게 할가? 사랑한다고?… 자신없어.)

자신없을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언제 사랑이라는걸 맛보았던가. 지나온 생활의 갈피를 아무리 뒤져봐도 그것이 사랑이였다고 규정할만 한 장면은 끼여있지 앉았다.

그가 리해하고있던 사랑의 세계는 환희와 행복의 세계였다. 그런데 식민지민족의 지식인청년에게는 민족의 운명, 자기 개인의 운명에 대한 불안과 울분은 차고넘쳤어도 환희와 행복은 깃들 자리가 없었다. 해방과 함께 잠자던 인생의 환희가 눈을 뜨긴 했지만 역시 사랑의 세계는 감당하기 어려울만치 벅차고 신비한 세계였다.

그래서 운상은 지금 처녀를 만나자고 큰소리치긴 했지만 자기의 진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가슴을 조이고있었다.

그는 눈덩이처럼 커지는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보려고 권양장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비발속에서 제방을 오락가락하며 혹시 미타한 부분이 없는가를 다시 살펴보았다. 사품치는 흙탕물은 제방의 중간쯤에서 철썩거리며 새로 쌓은 제방을 물어뜯군 했다. 운상은 물결의 못된 장난질을 원망스레 내려다보며 수문가까이로 오다가 딱 굳어졌다. 제방반대켠으로 물이 줄줄 새나오고있었던것이다. 그는 황급히 제방아래로 내려갔다.

물은 수문콩크리트를 친 부분과 제방뚝이 련결되는 곳에서 새나오고있었다. 물이 새는것을 그대로 방임해둔다면 틈새가 점점 넓어져 뚝이 허물어지는것은 물론이고 지탱점을 잃은 수문도 넘어질것이다.

운상은 더 생각할새없이 제방우에 미리 준비해두었던 흙가마니를 끌어다 안쪽에 보강하기 시작했다. 뚝이 허물어지면 자기가 이 땅에 처음으로 만들어세운 수문이 파괴된다. 그렇게 되면…

날은 이미 어두워진데다 남교제방은 기본공사장과 좀 떨어져있는 곳이여서 주변에는 소리쳐불러올 사람도 없었다.

그런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젖먹던 힘까지 총동원하여 질질 끌어다 쌓기를 그 몇번…

이제는 더 쌓을 흙가마니도 없고 남은 기력도 없었다.

흙가마니가 하나만 더 있으면 좋겠는데, 하나만 더…

무엇이 자기를 그런 행동에로 떠밀었는지 운상은 알수 없었다.

그는 허리까지 물속에 잠그고 발더듬으로 지탱점을 찾은 다음 물이 새나가는 틈새기에 자기의 가슴을 가져다댔다. 두팔을 넓게 벌린 자세로 온몸을 제방에 밀착시키니 몸도 마음도 이상하게 편안해졌다.

사람이 살아가느라면 자신이 장하게 느껴지는 그런 때가 있는 법이다. 어떤 의로운 행동을 하고난 뒤에 찾아오는 그런 감정은 일생에 몇번밖에 맛볼수 없다. 운상은 이 시각 제방우에 엎디여 그 감정을 흐뭇하게 맛보고있었다.

한때는 건축가로서 개인의 명예만을 생각하던 자기가 아니였던가. 그래서 조선의 건축가로 자처하면서도 보통강의 탁류를 청소해버리는 일에서 자신의 몫을 찾을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보통강개수공사와 더불어 인민의 건축가로서 삶의 자세를 다시 세워주시였으니 이제부터는 장군님께서 바로잡아주신 그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먼 인생길을 곧바로 걸어갈 자신이 있었다. 그때문에 운상은 스스로 자신이 장해보이고 수영이앞에, 나라앞에 그리고 장군님앞에 부끄럽지 않은 자신을 발견한것으로 하여 마음이 편한것이였다.

사품치는 강물에 떠내려오던 굵직한 통나무가 제방을 직각으로 때리고 빠른 물살을 따라 빙그르르 돌면서 허리어방을 치는 순간에 운상은 자기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모험을 하고있는가를 깨달았다. 공포의 전률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줄달음쳤다. 그러나 그는 제방에서 몸을 뗄수 없었다.

수영이가 제방에 나타난것은 그무렵이였다. 저녁때까지도 처녀는 여기로 나올 결심을 못 내리고있었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오고 비도 멎지 않으니 수영의 마음은 안정을 찾을수 없었다. 자기가 안나가면 그 사람이 차디찬 비속에서 밤새 기다릴것만 같았다. 그는 치료실안에서 오락가락하며 자기를 설복하느라 애썼다.

(넌 지금 자신을 속이고있어. 넌 그 사람을 사랑하고있으면서도 코대를 높이는거야. 네가 코대를 높일게 뭐 있어?… 네가 나가지 않으면 그 사람이 밤새 기다릴수 있다는 생각은 왜 못해?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야. 아까 그 사람의 눈빛을 봤지? 호랑이눈빛같은… 요전날 김정숙녀사님께서도 사랑은 성실하고 열렬하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그러니 어서 나가봐라.)

결국 수영은 콩당거리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제방으로 나오지 않을수 없었다.

제방우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자기의 예측이 빗나간것으로 해서 수영은 실망을 안고 돌아섰다.

그때 강물우에서(틀림없이 물우에서였다.) 자기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영선생이요? 나 운상이요.》

수영은 소리난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리와 어깨만 내놓고 제방에 엎디여있는 운상을 어렴풋이 알아보았다. 알아보았다기보다 그렇게 느꼈다.

《거기서 뭘 하세요? 무슨 일이예요?》

《빨리 가서 흙가마니를 가져오오. 물이 새고있소.》

사태를 짐작한 수영은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정신있어요? 빨리 나오세요!》

《젠장, 물이 샌다지 않소? 제방이 위험하단 말이요!》

제힘으로는 운상을 끌어낼수 없었다.

히긴 누가 와도 마찬가지일것이다. 여기서는 누구든 제방이 먼저이고 자기 목숨은 그다음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수영이도 물속에 들어섰다.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무작정 뛰여든것이다. 그 순간에는 물이 무섭지도 않았다.

무서운것은 운상의 신상에 닥치는 위험이였다.

운상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가오! 빨리 나가지 못해!》

그래도 수영은 물살을 헤저으며 운상의 곁에 다가갔다.

그리고 말했다.

《힘께 있자요.》

그 말이 담고있는 의미가 하도 커서인지, 가슴을 치는 세찬 물살때문인지 숨이 가빠났다.

그러나 운상은 얼굴을 이그러뜨리며 사납게 소리쳤다.

《안돼! 흙가마니부터 가져오라는데, 빨리!》

처녀는 물러나지 않을수 없었다. 그 정황에서 사람도 제방도 구원하자면 운상의 말대로 해야 한다는것을 리성으로 깨달았던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요.》

수영은 울먹이는 소리로 한마디 남기고는 어둠속으로 내달렸다.

우산을 언제 집어던졌는지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자기가 울고있다는것도 몰랐다. 그렇게 달리면서 처녀는 조금전에 자기가 했던 말을 상기했다.

(함께 있고싶었어, 물속이든 불속이든… 그가 내 말을 알아들었을가?)

운상은 알아들었다.

그런 순간에는 깊숙이 묻어두었던 진정도 쉽게 알아듣는 법이다. 가식은 한가할 때에만 머리를 내밀군 한다.

(고맙소, 수영이, 함께 있고싶었소, 언제나… 동문 내가 소리친것을 용서하겠지? 젠장, 하필 이런 정황에서…)

수영이가 사람들을 데리고 달려왔을 때 운상은 의식을 잃고있었다.

지체없이 그를 현장치료실로 날라갔다. 밝은 불빛아래 옷을 벗기고 보니 다리와 어깨에서 심한 상처가 드러났다.

그동안에 피는 얼마나 흘렸을가… 떨리는 손으로 상처에 소독솜을 가져다대자 운상은 해쑥해진 얼굴을 찡그리며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냈다. 수영은 조심스레 물었다.

《정신이 들어요?》

운상은 힘들게 눈을 떴다. 처음에 보이는것이 수영의 얼굴이였다.

운상은 처녀에게 뭔가 말하고싶었으나 안타깝게도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수영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싶어하는지 알았다.

《걱정마세요, 제방은 무사해요.》

운상은 다시 눈을 감았다.

환자상태를 봐선 병원에 후송해야 했지만 수영은 여기서 치료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은 홍수의 위험이 가셔지지 않았는데 자기가 목숨을 내대고 지킨 그 귀중한 창조물을 내팽개치고 병원에 마음편히 누워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때문이였다.

처녀는 운상의 침대곁에서 꼬박 새웠다. 그래도 피곤을 몰랐다. 누구의 방해도 없는 조용한 방에서 수영은 운상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을 조이기도 하고 앞날의 행복을 공상속에 미리 맛보며 혼자서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운상은 새벽녘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말없이 처녀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모포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우에 수영의 손이 살며시 얹혀졌다. 수영은 운상에게 손을 꼭 잡히운채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말하지 마세요, 난 다 알아요.)

그들은 시간의 흐름도 잊고 오래동안 그렇게 굳어져있었다. 마치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것은 자기네 둘뿐인듯싶었다.




54

 

정근식은 서성교를 넘어섰다. 그는 손수레를 끌고 공사장으로 가는 길이였다. 광목천으로 지은 후렁후렁한 작업복을 입고 꽁무니에 수건을 차고있는 그의 모습은 올데갈데 없는 로동자차림이였다. 지하족은 끈을 바싹 당겨신었다.

손수레에는 예전에 공장설비를 더러 축소하면서 제집창고에 가져다두었던 전동기가 실려있었다. 그는 오늘에야 비로소 공사장에 나갈 결심을 한것이였다.

은둔자 정근식이 드디여 허무주의면사포를 벗어던진것이다.

그 정신적인 변화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사흘전에는 오성재가 우정 그를 찾아왔었다.

오성재는 자기가 나쁜 놈들의 꼬임에 빠져 나라앞에 큰 죄를 지을번 한 일과 장군님께서 자기를 용서해주신것은 물론 토지소유권증서를 돌려주신 전설같은 이야기를 자초지종 들려주었다.

《난 지금껏 버러지처럼 살아왔수다. 나처럼 못난 놈은 세상에 더 없을거우다. 나 같은게 무슨 사람이겠수? 그런데도 장군님께서는 금수보다 못한 이놈을 사람대접해주시면서 이제는 보통벌도 수해를 입지 않게 됐으니 농사를 잘 지어서 남부럽지 않게 잘살라고 하시였수다. 글쎄… 나 같은 놈도 나라의 주인이 돼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단 말이우다, 으흑…》

오성재는 목이 꺽꺽 메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 부실한 놈이 돼서 주인어른 신세를 갚는다는게 도리여 장군님한테까지 근심을 끼쳐드렸수다. 하지만 나두 이제부턴 사람답게 살겠수다. 장군님 바라시는대로 살아야 사람다운 생활을 할수 있다는걸 알았으니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겠수다.》

정근식은 오성재가 생판 낯선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판판 달라질수 있는가? 이 사람이 불과 한달전까지만 해도 사람답게 산다는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불행앞에 공손히 머리숙이군 하던 사람이라고 누가 믿겠는가. 별치 않은 동정앞에서도 눈물이 글썽해지던 사람이 지금은 정근식이 자기보다 먼저 세상의 변화에 눈뜨고 장군님뜻을 받들어 사람답게 살겠다고 떵떵 큰소리치고있는것이다.

자기가 이 세상에 등을 돌려대고있는 사이에 해방된 이 땅은 지난시대의 오물을 밀어내면서 선하고 정의로운것이 확산되는 방향으로 아름답게 변하고있는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나도 이 생활을 외면할 리유가 없지 않는가.

그런데 바로 어제 저녁에 리주연부위원장이 또 정근식의 집대문을 두드릴줄이야…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정근식이라는 작은 물방울이 건국의 대하에 합류할 때까지 열번이고 백번이고 찾아가보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리주연은 길게 말하지 않았지만 정근식은 자기가 서야 할 위치를 깨달았다. 장군님의 말씀은 재만 남았던 그의 가슴에 전혀 새로운 질적변화를 일으키면서 희망의 불길을 지펴주었던것이다.

공사장에 당도한 그는 그때 나무레루를 놓던 곳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전동기를 부리웠다.

밀차를 밀던 임성민은 영문을 알수 없어 정근식에게 물었다.

《아바인 누구십니까? 이걸 왜 우리한테 주는가요?》

《나도 평양시민이요. 내 그만 망녕이 들어서 돈으로 이 공사를 욕되게 했으니 이렇게라도 그 죄를 씻어볼가 하오.》

정근식은 얼른 그 자리를 떠났다.

공사장을 여기저기 찾아다니던 그는 마침 사람들속에 섞여있는 리찬을 붙들었다.

《내 오늘에야 목욕재개하고 왔습니다. 늦기는 했지만 시인선생한테 내 모습을 보이고싶어서 이렇게 찾아다니던중입니다.》

리찬은 정근식의 아래우를 훑어보며 빙그레 웃었다. 《차림새부터가 합격입니다. 이 공사장에서 땀흘릴 자격이 있단 말입니다.》

《땀흘릴 자격이라… 그게 애국심을 가진 사람만이 이 공사에 참가할수 있다는 소린데… 참 좋은 말입니다.》

잠시후 리찬은 질통을 하나 얻어가지고 나타났다.

감탕판이여서 그들은 아예 신발도 벗고 바지가랭이를 무릎까지 걷어올렸다.

정근식으로서는 난생처음 해보는 토목로동이였다.

《무겁지 않습니까?》

리찬이 묻는 말이였다.

《무겁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가벼워진것 같습니다.》

《그거 명담입니다.》

리찬은 정근식의 심중이 리해되는지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내 시 하나 읊을가요?》

리찬은 질통을 한번 추스르고나서 제방으로 걸어가며 시를 읊었다.

 

무거운 짐 지고서 닫는 사람은

숨차다 고개길을 탄치 말고서

때로는 맘을 눅여 탄탄대로의

이제도 있을것을 생각하시오

무거운 짐 지고서 닫는 사람은

기구한 발부리만 보지 말고서

때로는 춘하추동 사방산천의

뒤바뀌는 세상도 바라보시오

이 짐이 무거움에 뜻이 있고요

이 짐이 괴로움에 뜻이 있다오

무거운 짐 지고서 닫는 사람이

이 세상 사람다운 사람이라오

 

정근식은 일에 재미가 나서 힘든줄도 모르고 시간이 흐르는것도 몰랐다. 자기가 수영이를 만나야 한다는것도 잊고있었다.

점심때가 되여서야 질통을 벗어놓던 그는 우뚝 멈춰섰다.

제앞에 수영이가 서있었던것이다.

《수영아!》

놀라움과 반가움이 수영의 얼굴에 엇갈려 나타났다.

점심시간에 음료수통을 들고나왔던 수영은 모색이 신통한 사람을 보고서도 설마하는 생각에 외삼촌을 찾지 못하고있었다.

온통 감탕칠을 하고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린 외삼촌이 질통을 지고있는 모습을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수영이로서는 그럴수밖에 없었다.

《외삼촌!》

수영은 외삼촌에게 달려와 팔소매를 붙잡고 어린 소녀처럼 콩당콩당 뛰였다.

《어떻게 오셨어요. 정말 일하러 나오신거예요?》

《일하러 나왔다기보다는 천국을 구경하러 왔다.》

《천국이요?》

《그렇다. 이야기는 천천히 하구 밥부터 먹자. 오래간만에 일을 했더니 출출하구나. 어디 식당이 없냐?》

《그럼 오후에도 일하시겠어요?》

수영은 잘 믿어지지 않는듯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렇지 않구.》

《좋아요. 오늘 점심엔 내가 내겠어요.》

《그래? 참 귀인을 만나서… 아뿔싸!…》

돌아보니 불같은 시인은 또 어디로 달려갔는지 그 자리에 없었다.

천국을 구경시켜준 값으로 점심 한끼라도 대접하고싶었는데 아쉽기 그지없었다.

합수목에서는 하당골쪽으로 가는게 뺑대거리까지 가는것보다 빨랐다. 수영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걷던 정근식은 조차장 다리근방에 앉아있는 음식장사아낙네들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수영아! 먼데 음식점을 찾아갈것없이 저기 가서 한그릇 사먹자꾸나.》

수영은 기겁을 했다.

《외삼촌, 정신있어요? 길바닥에서 어떻게?…》

그러거나말거나 정근식은 조카딸의 팔을 잡아끌었다.

《저걸 사먹는 사람이 따로 있다더냐? 난 우선 배가 고파죽겠다.》

다리근방에는 떡장사, 지짐장사, 국수장사들이 음식함지들을 앞에 놓고 길량옆으로 주런이 앉아있었다.

공사판에는 이런 음식장사아낙네들이 모여들기마련이여서 점심을 안 가지고 온 건설자들이 벌써 여기저기 패를 지어 앉아있었다.

정근식은 국수장사아낙네앞에 다가서며 제법 너스레를 피웠다.

《여기선 성안에서보다 값도 눅고 량도 많다는데 아주머니, 거 국수 두그릇 얼른 말아주시우.》

사람단련에 치여난 장사군아낙네는 정근식의 금새를 제꺽 알아보았는지 되려 제편에서 송구스러워했다.

《에그, 어르신은 이런데서 자실분이 아닌데요?》

《허허, 이 아주머니 사람 가린다. 아주머니손이 커보여서 왔으니 찾아온 손님 쫓지 말구 얼른 주시우.》

《에그, 어쩌나… 륙모소반두 없는데…》

《그냥 들고먹지요. 하여튼 많이만 주시우.》

수영이가 자꾸 소매를 당겼으나 정근식은 모르는체 하고 버티고있었다. 아낙네는 국수사발을 들었다놨다하며 골라보았으나 몽땅 이빠진 사발들이라 할수없이 그중에서 깨끗해보이는 사발에다 국수를 담아주었다. 본래 건설자들을 대상해서인지 아니면 정근식의 너스레가 효험을 보았는지 좌우간 국수사리도 흐뭇하고 돼지고기편육도 무드기 놓아주었다. 수영은 창피스러웠지만 국수그릇을 받아들지 않을수 없었다.

정근식은 국수그릇을 손에 들고 길옆에 쭈그리고앉았다.

《어서 먹자.》

예전에 명월관이요, 해락관이요 안 다녀본데가 없고 고기쟁반이요, 랭면이요, 온면이요 안 먹어본게 없었지만 지금 먹는 메밀국수처럼 맛있어본적은 없는것 같았다.

이따금씩 불어치는 바람에 길가의 황토색먼지가 후추가루처럼 국수그릇에 떨어졌지만 정근식은 개의치 않았다.

외삼촌옆에 쪼그리고앉은 수영은 저가락질할념을 못하고 존경어린 눈길로 외삼촌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외삼촌의 식성을 잘 알고있었다. 외삼촌은 미식가였다.

그 까다로운 식성때문에 외삼촌어머니가 늘 마음쓰며 사는걸 수영이가 왜 모르랴. 외삼촌어머니는 남편의 구미를 맞추기 위해 음식의 맛과 색, 담는 그릇에 이르기까지 신경을 썼다. 그 덕분에 언제나 따뜻하게 덥힌 은수저를 들고 자개박이밥상에 마주앉아 반짝반짝하는 놋밥바리의 뚜껑을 열군 하던 외삼촌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 외삼촌은 로동의 즐거움, 평범한 사람들이 느끼는 생활의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우정 텁텁한 흉내를 내는것 같았다. 하긴 오래간만에 일을 했으니 배도 고프시겠지…

어쨌든 벽에 걸린 족자나 감상하던 외삼촌이 이렇게까지 갑작변이를 일으켰다는게 수영이로서는 놀랍기도 하고 눈물겹도록 고맙기도 했다.

《외삼촌, 정말 맛이 있어요?》

수영은 자기것을 외삼촌의 그릇에 덜어주며 물었다.

《나한테 물어볼게 있니? 너두 먹어보면 나한테 덜어준걸 후회할게다.》

수영은 외삼촌의 기분에 말려들지 않을수 없었다. 처녀는 대담하게 저가락을 들었다. 저쪽에 앉아 탁배기를 마시는 사람들이 이쪽을 흘끔흘끔 쳐다보는걸 보면 자기가 현장치료실 의사라는것을 아는게 분명한데 까짓거 흉보겠으면 보라지… 남보기 창피하다고 굶을수야 없지 뭐…

먹어보니 정말 맛이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두사람은 다시 공사장쪽으로 오다가 산기슭의 넓다란 공지에 나란히 앉았다.

오래간만에 배불리 먹고 들바람을 맞으며 앉았느라니 정근식은 기분이 둥둥 뜨는것 같았다.

《난 오늘 세상에 다시 태여난 기분이다.》

그렇게 허두를 떼놓고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푸른 하늘의 흰구름을 바라보며 지나간 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내가 일본에 가서 공부할 때 장질부사에 걸린적이 있었단다. 그래서 도꼬교외의 어느 격리병동에 실려갔지. 고열에 떠서 가물거리는 의식속에서도 난 죽어서는 안된다는 한가닥 의지의 가냘픈 줄을 놓지 않았다. 그때 제일 그리운게 사람이더라. 누군가 내 손만 쥐여주어도 힘이 되련만 격리병동이라는데가 저승행의 마지막정류소나 같아서인지 누구도 나를 돌아보지 않더구나. 이미 저승에 가신 어머니가 왜 그렇게 원망스럽던지… 어머니의 무덤이라도 파보고싶도록 사무치게 어머니사랑이 그리웠고 인간의 정이 그리웠지만 세상은 나에게 곁눈 한번 주지 않더구나. 그때부터 난 세상전체에 더 랭담해진것 같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 나와보고 난 인간에 대한 무관심의 력사가 이 땅에서 끝장났다는것을 확신했다. 이건 틀림없다.》

수영이도 외삼촌의 생각과 다를바 없었다. 그동안 공사장에 나와있으면서 처녀는 많은것을 배웠다. 예전에 그는 생활에서 자기중심주의로 사고하면서 많이 받으려고 했었다. 사람들의 리해와 양보를 받으려고 했고 사랑을 받으려고 했다.

덮어놓고 받으려는것은 거지의 자세이고 아낌없이 주려는것은 어버이의 마음이라고 했다. 하늘의 태양은 자기의 빛과 열을 지상만물에 주기만 할뿐이고 달라는것이 없는데 인간도 서로 그렇게 살수 없을가. 그러나 자기자신을 포함하여 인간은 다 리기적이고 타산적인 존재여서 남에게 준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받으려고 했다. 안데르쎈의 동화는 실현될수 없는 꿈에 불과한것이였다. 그런데 태양의 성질을 그대로 닮으신 성인같은분이 이 나라와 이 나라 인민들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꾸어놓으실줄이야.

《전 여기로 나올 때까지만 해도 김일성장군님께서 왜 이 공사를 중시하시는지, 어째서 건설자들에게 음료수를 꼭 끓여서 공급하라고 그토록 신신당부하시였는지 잘 몰랐댔어요.

장군님께서 평범한 사람들을 제일 사랑하시는 리유를 똑바로 알게 되면 앞으로의 생활방식도 정리될것 같구 내가 살아가야 할 이 나라의 본질을 알것 같더군요.

난 알았어요! 장군님께서 건설자들을 사랑하시는건 어떤 타산이나 필요성때문이 아니였어요. 그저 자기 조국, 자기 민족이기때문이예요. 그분은 온 민족을 혈육처럼 생각하시는데 혈육을 사랑하는데야 어떤 리유가 필요없지 않나요. 말하자면 그분은 하늘의 태양같으신분이예요. 난 이곳에서 환상적인 동화의 세계가 현실화되여가는것을 분명히 보았어요. 이젠 이 세상이 마음이 놓여요.》

정근식은 조카딸의 잔등을 두드려주었다.

《네 말이 옳다. 력대적으로 누구나 옥좌에 오르면 자기의 절대권력을 시위하는 일부터 벌려놓았지. 그래서 반대파를 청산하는 칼부림을 하고 피라미드를 쌓거나 사치한 궁전을 짓는데 재부를 탕진했거던, 현명한 백성들은 통치자를 숭배한것이 아니라 무서워하고 증오했지. 그런데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제일 불쌍한 토성랑인민들을 구제하는 일부터 시작하시였으니 오늘 공사장에 나와보고 난 이것이 그분의 진심이라는것을 믿게 되고 그분의 인간상을 더 깊이 알게 되였구나. 인민을 가장 열렬히 사랑하고 가장 위대하고 힘있는 존재로 력사무대에 내세우는것이 그분의 한생을 관통하는 좌우명이고 그분이 세우시는 새 나라의 본질이 틀림없다는것을 믿게 되였단 말이다.》

4년전 보통강의 수해로 공장을 잃고 왜놈들에게 끌려가 매까지 맞을 때는 그것이 이 세상의 마지막모습이라고 생각했던 정근식이 오늘은 새세상의 첫 장면을 본 심정이여서 마냥 입을 다물줄 몰랐다.

《외삼촌, 고마워요!》

수영은 떨리는 소리로 진정을 담아 말했다.

《나한테 고마울건 없다. 이 나라에선 다르게 살수 없지 않겠느냐?… 이렇게 사는것이 옳게 사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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