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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설 <대박산마루> 제 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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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7,276회 작성일 15-12-26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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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비행기는 태평양상공을 날고있었다.

리금순이 시창으로 일망무제한 대양을 내다보고있다.

멀리 수평선쪽에 하늘이 낮게 드리워서 대양과 하나로 어우러졌다. 하늘과 대양의 경계짬으로 보라색채광이 뿜겨져나온다. 미구에 항아리만 한 불덩이가 불끈 솟아오르고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가 드러난다. 보라색을 밀어내고 금빛이 세상을 물들인다.

갈매기도 금빛이고 안개도 금빛이고 수면우에서 풀떡풀떡 뛰는 물고기도 금빛이다. 바다는 안개와 물고기와 날새들의 세상이다. 그러나 바다가 아무리 넓고 아름다와도 거기서 사람은 살지 못한다.

강물은 바다로 흘러든다.

한번 바다로 흘러들어온 강물은 자기가 떠나온 고장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

그것을 끌어갈 힘이 없는것이다.

이것이 바다세계의 리치이다.

사람의 세계는 어떠한가?

사람은 력사의 풍운속에서 흩어졌다가도 다시 제 고장으로 돌아간다.

피줄이 있고 강력한 모국이 있기때문이리라!… 하여 지금 리금순은 공화국주석님앞에 앉아있다. 서울에 나갔던 리금순이 부모형제들이 한강다리에서의 참사로 다 희생된 사실을 알고 까무라쳤던 일과 그후의 고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주석님께서는 매우 비통해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갈린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공화국을 믿지 않아서 고생을 하시였습니다.》

《네, 죄가 돌았습니다.》

리금순이 눈물을 흘리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를 측은히 바라보시다가 어딘가 조심스럽게 물으시였다.

《김석진원사의 안부를 알고싶으실텐데…》

《주석님, 이미 들어서 알고있습니다.》

《그러신가요?》

《저의 의례원이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주석님, 정말 고맙습니다!》

리금순이 다시 눈물을 쏟았다.

《상처입은 부인의 마음이야 어디 가겠습니까. 다 민족분렬의 비극입니다. 통일을 위해 함께 힘씁시다.》

《네.…》

《부인, 이번 기회에 령감을 만나보셔야지요?》

《그만두겠습니다. 괜히 령감의 마음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대신 주석님.》

《말씀하십시오.》

《제가 데리고나갔던 두 아들이 있습니다. 령감의 피줄이지요. 그들이 자기 부친을 만날수 있도록 주석님께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이 주석이 할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눈물속에 대화를 나누던 리금순은 끝내 오열을 터뜨렸다.

《이러지 마십시오, 부인!》

수령님께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계속하시였다.

《민족의 원시조를 찾으니 흩어졌던 동포들이 만나게 되고 피줄이 이어집니다. 이게 통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번에 단군과 단군조선에 대하여 좀더 명백히 하려고 외국의 학자들과 교포학자들을 초청하였습니다. 부인도 학자인만큼 의문점들이 있으면 제기하십시오.》

《네… 그런데 주석님.》

무슨 일입니까? 말씀하십시오.

리금순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허진경씨의 문제인데

《나도 그의 유서를 보았습니다. 죽음으로써 죄를 씻고 민족앞에 도움을 주려고 했더군요.》

그이께서 소탈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허진경씨가 죽기전에 저한테 조국에 묻히고싶다는 소원을 말했습니다. 주석님, 가능하겠습니까?》

그이께서 잠시 생각하다가 좀 심각한 어조로 대답하시였다.

《그건 이 주석도 답변을 줄수 없는 문제입니다. 조상을 욕되게 한 죄는 죄중에도 가장 용서받을수 없는 죄이기때문입니다. 나는 그가 우리 제도를 외면한것도, 남조선당국의 어용학자가 되여 우리 제도를 헐뜯은것도 용서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금순은 그이의 입가에 우뢰소리가 터져나오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잠시후에 계속된 김일성동지의 말씀은 너무도 조용하시였다.

《우리 인민들에게 내가 말해보겠습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옹졸하지 않았습니다!》

《주석님!》

 

견에는 김석진원사가 출연하였다.

중구난방으로 제기하는 해내외학자들의 질문에 그는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아래에 회견기록을 전한다.

물음;전자상자성공명년대측정법으로 유골의 년대를 측정하는 경우 5만년전의것만 할수 있지 않는가?

대답;이 년대측정방법으로는 지금으로부터 5만년전의것뿐아니라 현재의것도 측정할수 있다. 이것은 리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이미 국내외에 다 확증된것이다. 그러므로 전자상자성공명년대측정으로 5만년전의것만 측정할수 있다는것은 사실과 맞지 않으며 우리가 5천년전의것을 측정했다고 조금도 의심스러울것이 없다.

물론 젊은 화석뼈년대를 측정하는 경우에는 측정기능과 장치의 기술상태에 대한 정확성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단군유골은 그리 젊은 년대의것도 아니며 낡은 기계로 한두번 실험해보고 수치를 맞춘것도 아니다. 이 년대수치는 우수한 기술집단이 수십차례 시험하여 얻어낸것이다.

물음;단군뼈가 5011년전의것이라면 200년 좌우의 편차가 생기지 않는가?

대답;물리적분석에서 표준편차가 없는것이란 지금까지 없다고 말할수 있다. 보도를 통하여 알려졌지만 이 년대값의 표준편차는 ±267년이다. 상대오차가 5.4%이다.

그리고 이 수치는 단군의 사망년대가 아니라 출생년대이다.

사망년대로 리해하는 견해들이 나돌고있는데 그것은 전자상자성공명년대측정법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물음;년대의 한자리수까지 밝히는것은 무리가 아닌가?

대답;오랜 시간에 걸쳐 현대적측정수단으로 측정한것이기때문에 큰 무리가 없을것이다. 그리고 우리 학자들은 상대오차가 5.4%이며 편차는 ±267년이라는것을 밝혔다. 그러므로 여기서 한자리수를 밝혔다고 하여 무리하다고 할수 없을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한자리수치까지 밝힌 례는 허다하다.

물음;단군릉에서 나온 유골의 년대를 과학적으로 밝히는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왜 년대를 정확히 측정할수 있는 방사성탄소 14년대측정방법을 적용하지 않고 전자상자성공명측정법만으로 했는지?

대답;년대를 측정하기에 앞서 우리 학자들은 어떤 년대측정법을 적용하겠는가에 대하여 심중히 론의하였다. 그것은 측정방법에 따라 시료로 쓰는 뼈의 량이 차이가 크기때문이다. 방사성탄소14년대측정법으로 년대를 측정하자면 한번 측정하는데만도 500g정도의 뼈가 소비되여야 한다. 과학적인 년대를 산출해내려면 여러번 반복측정하여야 한다는것은 더 말할나위 없다. 예로부터 시조릉으로 전해오는 무덤에서 나온 뼈이고 또 도굴행위로 하여 뼈들이 일부만 남아있는 조건에서 그처럼 많은 량의 뼈를 소비할수는 없었다.

그러나 전자상자성공명년대측정법으로 년대를 측정하는데는 수십번 반복하여 년대를 측정하여도 0.5g정도의 뼈이면 충분하다. 이 년대측정방법의 과학성여부에 대해서는 앞서 이야기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이 방법으로 년대를 측정한것은 원시조의 유골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과학적인 년대를 측정하려는데 있다.

물음;단군이 생존하였다고 하는 기원전 3천년기의 무덤이 어떻게 고구려양식의 무덤으로 될수 있는가?

대답;그것은 고구려사람들이 단군릉을 개건한 사정과 관련된다.

본래의 단군릉은 강상무덤과 같은 돌무덤이였거나 관산리 1호무덤과 같은 대형고인돌무덤이였을것이다.

기원 3세기이후 평양지방에 진출한 고구려사람들이 이 오래된 단군릉을 그대로 둘수 없었으므로 개건하였는데 이때 단군릉을 자기들의 무덤양식으로 고쳐만든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사람들이 자기들의 시조인 동명왕과 함께 단군을 원시조로 숭배하였다.

단군을 원시조로 숭배한 고구려사람들이 오래된 단군릉을 보고 개건하였을것은 충분히 짐작할수 있는 일이다.

물음;기원전 3천년기의 무덤에서 어떻게 금동관이 나올수 있는가?

대답;그것은 고구려사람들이 단군릉을 개건할 때 금동왕관을 새로 만들어 단군의 유골에 씌워서 묻은것으로 인정된다.

고구려사람들은 단군릉을 개건할 때 무덤만을 고구려양식으로 만든것이 아니라 부장품도 고구려양식으로 새로 만들어 묻었을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번에 발굴할 때 그 무덤에서 드러난 유물은 모두다 고구려시기의 유물이였다. 회색의 도기도 그렇고 관에 박았던 관못도 철제품으로서 다른 고구려무덤들에서 흔히 보는것과 같은것이였다. 그러므로 유골의 년대와 부장품의 년대는 일치하지 않았다.

물음;단군의 유골이 5011년전의것이라면 신석기시대인데 어떻게 청동문화에 기초한 강력한 국가권력이 나올수 있었는가?

대답;기원전 3천년기가 신석기시대라는것은 지난날의 견해이다. 단군릉발굴이후에 우리 고고학자들은 호남리 표대유적과 덕천시 남양리유적을 비롯한 대규모의 부락터 유적을 발굴하고 집자리들의 층서관계와 년대측정치들에 기초하여 평양지방에서 청동기시대가 기원전 4천년기 후반기부터 시작되였다는것을 확증하였다.

물음;조선의 땅은 지질상으로 보아 기원전 3천년기의 유골이 남아있을수 없는 땅이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수천년전의 유골이 나왔다고 하니 그것을 어떻게 믿을수 있겠는가?

대답;우리의 사회과학원에서 발표한 《단군릉발굴보고서》를 다시 보는것이 좋겠다. 다시말하여 석회암지대에 묘실을 만든 경우에는 지질학적특성을 론할수 없는것이다. 북반부에서도 그렇고 남반부에서도 인류화석이 발굴되고있지 않는가?

지질학적조사자료를 보아도 단군유골은 5천년동안 보존될수 있었다. 석회암지대에 묘실을 만들어놓았기때문에 단군유골은 가용성물질이 많은 물기와 지하수의 침습을 받았다. 석회암지대의 지하수는 가용성광물질을 용해시키는 한편 용해된 광물질들을 침전시키거나 결정으로 만든다.

광물질이 포함된 지하수나 물기가 뼈조직의 미세한 구멍에 침습되여 가라앉거나 결정으로 되면 뼈에서는 화석화가 진행된다. 단군유골에서는 화석화되여가는 경향이 인정되였다.

가용성물질이 많은 지하수에 젖어있는 유골이 잘 보존된다는것은 하나의 상식으로 되고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를 보아도 력포사람(고인단계), 만달사람(신인단계), 룡곡사람(신인단계)의 뼈를 비롯하여 수만년전의 유골이 회령시 남산리 검은개봉유적에서 발굴되였고 현재 고인돌무덤들에서도 사람뼈, 동물뼈들이 수많이 나오고있다.

특히 얼마전에 발굴된 성천군 룡산리 순장무덤에 주의를 돌려주기 바란다.

당신들의 우려를 예견해서 우리 학자들은 그 무덤을 발굴한 다음에야 《단군릉발굴보고》를 세상에 내보내였다.

물음;어제까지도 단군을 신화적인물로 보다가 어떻게 되여 갑자기 실재한 인물로 보게 되였는가?

대답;반복되지만 다시 대답하겠다.

그것은 단군릉이 발굴되고 거기에서 사람의 뼈가 나왔으며 그것의 년대측정결과가 5011년으로 나왔으니 그 뼈야 단군의 뼈로밖에 달리 볼수 없지 않는가. 단군의 유골이 나온 사실은 단군이 실재한 인물이라는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일찌기 《기자묘》도 파보았는데 그것은 가짜였기때문에 거기에서는 사람뼈는 물론 아무것도 나온것이 없었다.

그러나 단군묘에서 사람뼈가 나왔고 그 년대가 5011년으로 측정되였으니 그것은 틀림없는 단군의 무덤이다.

이러한 사실에 의하여 우리는 단군을 신화적인물이 아니라 실재한 력사적인물로 보게 되였다.

물음;강동의 단군릉이 진짜 단군의 무덤이라고 인정한 근거는 무엇인가?

대답;《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지》, 《리조실록》의 《숙종실록》, 《영조실록》, 《정조실록》 등에 강동 서쪽 3리되는 곳에 큰 무덤이 있는데 그것이 단군묘라고 명백히 기록되여있으며 또 문헌기록에 지적된 그 무덤에서 나온 유골이 5천년전의것으로 측정된 조건에서 그것을 단군의 무덤으로 보지 않을수 없다. 년대측정결과가 문헌기록의 정확성을 확증하였는데 어찌 진짜 단군의 무덤으로 보지 않을수 있겠는가?

물음;평양을 고대문화의 중심으로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대답;평양지방은 고인돌무덤이 가장 많이 집결되여있는 곳이다. 평양지방에는 수백개로 이루어진 고인돌무덤떼가 집중분포되여있다.

가장 이른 형식의 고인돌무덤도 평양지방에만 있으며 대형고인돌무덤도 평양지방에 많고 다른 지방에는 훨씬 드물다.

큰 부락터도 평양근방에 집중분포되여있다.

평양지방에서 드러난 큰 부락터의 실례로서는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의 표대유적과 남경유적, 황주군 고현리와 송림시의 석탄리유적, 덕천시 남양리유적 등을 들수 있다. 이 유적들은 100여개이상 집자리가 분포되여있는것들이다.

그밖에 가장 이른 시기 비파형단검과 조롱박형 단지도 평양지방에서 알려졌다.

이런 사실은 평양이 고대문화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후에도 평양은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해왔다.

물음;북에서 측정한 단군의 년대가 문헌자료에 나오는 단기나 기존학설과 맞지 않기때문에 믿기 어렵지 않는가?

대답;단기(단군이 나라를 세운 해)는 단군이 중국의 요임금이 왕으로 된 25년째 되는 해(기원전 2333)에 나라를 세웠다는 문헌자료에 기초하여 만들어진것인데 단기의 기준으로 된 요임금시기자체를 중국학자들자체가 미덥지 못한것으로 보고있다.

왜냐하면 중국력사에서 믿을수 있는 년대는 공화원년(기원전 841년)부터이고 그 이전 요임금시기는 이 공화원년을 기준으로해서 사마천(기원전 2세기말~1세기초 중국의 사학자)때로부터 거꾸로 추산한 믿음성이 덜한 년대이기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성이 없는 요임금 25년에서 나온 단기자체도 정확한것이라고 볼수 없는데 하물며 부정확한것을 기준으로 하여 과학적으로 측정된 단군유골의 년대를 믿을수 없다고 하는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실 우리 선조들이 단군의 건국년대를 요임금때에 견준것은 우리 민족의 력사가 매우 오래다는것을 당시 그들이 알고있던 중국의 첫 임금 요에 비교하여 말하자고 한것일뿐 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러므로 믿음성이 없는 요임금시대 대신에 과학적으로 검증된 단군유골의 년대에 근거하여 단군의 건국년대를 론하는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물음;지금까지 학자들은 고조선의 건국년대를 기원전 10세기이전으로 잡아왔는데 갑자기 기원전 30세기초에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것은 무엇때문인가?

대답;지금까지 력사학계에서 고조선의 건국년대를 기원전 10세기이전으로 보게 된것은 당시까지 알려진 자료에 기초하여 내린 결론이였다.

그러나 단군이 고조선의 건국시조가 명백하고 그 유골의 년대가 과학적으로 검증된 조건에서는 잘못된 년대를 바로잡는것은 응당한 일이다.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과학적수치를 믿지 않고 무엇을 믿겠는가?

우리는 새로 얻어낸 고고학적, 인류학적감정결과에 기초하여 종래의 기존관념을 전면적으로 검토하고 고조선건국년대도 단군의 활동년대에 기초하여 설정하는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기성관념에 포로되여서는 과학을 발전시킬수 없다.

물음;지금까지 고조선의 발상지를 중국 료동지방으로 잡아왔는데 북에서 갑자기 평양이라고 하니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대답;새로운 과학적자료들이 축적되고 연구사업이 심화됨에 따라 기성리론이 더욱 보강될수도 있고 새롭게 변화될수도 있다.

평양에서 단군릉이 발굴되고 그 유골의 년대가 과학적으로 확증된 새로운 환경에서 우리 학계에서는 단군관계문헌사료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사업을 진행하는 한편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류역일대에서 단군 및 고조선관계유물에 대한 조사발굴과 연구사업을 심화시켰다.

그리하여 단군이 태여나 건국위업을 이룩한 곳도 평양이며 고대조선문화의 발상지-중심지도 평양이라는것을 확증하게 되였다.

새롭고 유력한 근거자료에 의거하여 새로운 결론을 내리는것은 과학연구사업에서 응당 있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물음;최근 《조선통사》 등 북에서 출판한 력사책들에서 단군을 원시사회의 군장으로 서술하였는데 왜 갑자기 고조선의 건국시조로 보는가?

대답;최근에 우리 력사책들에서 단군을 원시사회의 군장으로 서술했다고 하는것은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아마 남쪽학자들이 그렇게 써온것을 보고 혼돈해서 말하는것 같다.

최근에 우리 학계에서는 단군신화를 분석하면서 신화에서 나오는 단군이 고조선의 건국시조라는것을 론증하는 글을 냈으며 《조선전사》증보판에서는 이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개괄하였다.

이번에 단군릉이 발굴되면서 단군신화가 허구가 아니라 사실을 신비하게 엮어놓은 력사였다는것이 증명되였다. 자기 건국시조를 신격화하는것은 다른 민족의 력사에서도 흔히 볼수 있는 현상이다.

물음;강동의 무덤이 진정 단군왕릉이라면 단군이 세운 고조선의 국가가 5011년보다 훨씬 이전에 평양에 존재했다고 보아야 하겠는데 이와 같은 가설을 인정할수 없다는것이 남조선학계의 정설인데 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답;강동의 무덤은 의심할바없이 단군의 무덤이다. 그러나 고조선국가가 5011년 퍽 이전에 존재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말은 틀린 이야기이다.

5011년은 단군이 사망한 년대가 아니라 출생년대라는것을 다시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 년대에는 허용오차가 있다.

그래서 우리 학자들은 고조선의 건국년대를 기원전 30세기초로 잡는것이다. 그리고 단군뼈의 년대검증자료에 기초하여 고조선의 건국년대를 잡는것은 가설이 아니라 과학이다.

물음;이남에서는 단군유골에 대한 남북력사학자들의 공동조사와 연구를 즉시 실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울려나오고있는데 북의 의향은 어떤가?

대답;요즘 남측의 출판물을 보니 대부분의 론조들은 우리의 단군릉발굴결과에 대해 그것은 민족의 대경사라고 하면서 환영하고있다.

이것은 조선민족으로서 응당 가질수 있는 긍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부 문제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고싶어하는것도 의례히 있을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일부 론자들은 불순한 동기로부터 시비질하고있다.

학자들이 기성관념에 물젖어 의문을 표시하는것은 어느 정도 리해할수 있는 일이지만 단군릉발굴결과를 두고 《황당무계》하다느니, 북이 《정통성강조》를 목적으로 《창작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느니 하는따위의 소리를 함부로 하는것은 참으로 학문밖의 험담이며 그야말로 불순한 정치적목적에서 출발한 비난이라고밖에 달리 해석할수 없다.

앞에서도 강조하였지만 단군이 실재한 인물이고 그가 세운 고조선이 기원전 30세기초에 평양에서 건국되였다는것은 고고학적, 문헌학적연구결과에 나온 결론이지 정치를 앞세우고 단군뼈를 만들어내여 얻은 결론이 아니다. 5천년전의 사람의 뼈를 만들어낼수야 없지 않는가?

우리는 단군릉발굴에 대한 발표를 서두르지 않고 연구를 심화시킨 다음에야 발표했다.

일부 입이 삐뚤어진 사람들의 도전을 예견했던것이다. 그때문에 우리 학자들이 수고를 했다. 피도 흘렸다.

우리 학자들이 이러한 노력을 남조선학자들도 응당 평가해야 할것이다.

불순한 정치적목적에서 단군유골을 대하면서 《공동연구》를 하자고 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용납할수 없다. 모를것이 있어 우리 학자들에게 문의하여 배우려고 하거나 시조의 유골을 찾은데 대하여 기쁜 마음을 안고 유골을 직접 보고싶어한다면 그들에게 언제든지 단군조선의 력사를 풍부히 하기 위한 공동연구의 문이 열려질것이다. 다만 북남의 학술교류에 《국가보안법》이 적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물음;북이 단군릉발굴을 북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정치적목적에 리용하는것이 아닌가?

대답;과학은 어디까지나 과학이다. 우리는 단군릉이 발굴되고 그 무덤에서 나온 뼈가 단군의 유골이라는것이 확증되였기때문에 그 결과를 발표한것이다. 정견의 차이에 관계없이 조선민족이라면 누구나 다 시조 단군의 유골을 찾은데 대하여 기뻐할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배달민족이 아니다.

단군이 평양에서 우리 민족의 첫 국가인 고조선을 세웠다는것은 엄연한 력사적사실이다. 우리는 력사적사실을 있는 그대로 발표했을뿐이다. 여기에 무슨 정치적목적이 있겠는가. 있다면 조선민족이 단군을 원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이라는 긍지를 높일수 있게 된데 대하여 내외에 크게 자랑하는것이며 이 민족적자랑을 안고 전민족이 굳게 단합하여 하루빨리 민족분렬의 비극을 끝장내는데 이바지하는것뿐이다.

우리 학자들의 이 순결한 애국애족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을 어찌 조선사람이라고 하겠는가.

우리 공화국의 정통성에 대해 다시 말한다면 우리 국가의 헌법에 씌여있는것처럼 우리의 정권은 항일의 혁명전통을 계승하고있다. 이것이 우리 정권의 전통이다. 우리 학자들은 항일의 산아, 항일의 전통을 이어받은 공화국의 산아인 동시에 민족의 아들들이다.

우리들은 민족의 아들로서 조상을 찾고 조상의 첫 나라인 조선에 대하여 밝혀놓았을뿐이다.

조선은 어떠한 나라인가.

유구한 나라이다.

단일한 나라이다.

조선은 자기의 건국시조릉이 있는 세계 유일의 나라이다.

세계를 둘러보면 어디에 이런 나라가 있는가. 전통이 위대하면 계승도 위대한 법이다.

바야흐로 21세기를 향한 조선은 그 이름과 같이 더욱 빛날것이다!

물음을 제기한 사람들은 답변자인 김석진원사에게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시하며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이때 원사는 그 경의와 박수가 자기가 받을것이 아님을 알고 몸둘바를 몰라했다. 한것은 제기된 질문들이 김일성동지께서 예견해주신것과 거의 같았으며 원사는 이 회견에서 그이께 올렸던 서면대답을 옮겨놓았던것이다.

얼마나 선견지명하신가!

그이이시야말로 단군과 단군조선문제에 완전히 도통하고계시는 력사학의 성인이실뿐아니라 천재적인 정치적예지로 단군문제가 완벽한 해결을 보도록 이끌어주신 위대한 수령이시다!

원사는 달아오른 가슴을 누르고 마음속으로 그이께 경의를 드리며 박수를 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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