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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 김신락의 참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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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179회 작성일 16-01-29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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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프로레스링왕자-김신락(1)

 


1950년대 후반기와 1960년대 전반기에 한 체육인이 전세계적인 인기를 모았다.

당시 그의 명성은 동시대의 뛰여난 체육인들이였던 에스빠냐의 축구선수 스테파노, 뉴질랜드의 륙상선수 패터 스넬, 스웨리예의 스키선수 예른베르그씩스텐을 릉가하였다.

그가 바로 무적의 프로레스링선수, 세계프로레스링왕자로 불리운 조선사람 김신락이다.

이 글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몇가지 사실들에 대해서만 언급하려고 한다.

 

날조된 호적

오래동안 일본 나가사끼현의 한 경찰서에는 다음과 같은 호적초본이 보관되여있었다.

《본명-모모다 미쯔히로, 본적-일본 나가사끼현 오무라, 출생일-1924년 11월 14일, 호주-모모다 미노스께》

이 문건은 김신락의 《호적초본》이였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수 없다.

김신락의 고향은 일본 나가사끼가 아니라 함경남도 홍원군이며 그가 태여난 날은 1924년 11월 14일이 아니라 1920년 11월 14일이다.

 

- 함경남도 홍원군에 있는 김신락의 집 -

 

김신락은 1939년에 일본의 인신거간군이였던 모모다 미노스께에게 속아 일본으로 갔으며 10여년동안 스모(일본의 민족씨름)선수생활을 하였다. 일제는 조선사람 김신락을 일본인으로 만들어 《야마도 다마시》를 고취하는데 리용할 흉심을 품고 이런 호적날조행위를 감행한것이다.

그러나 호적을 날조한다고 해서 그의 가슴속에 간직된 조선사람의 넋을 없앨수는 없었다.

 


《력도산》이라는 이름은

김신락은 스모선수생활을 시작한지 2년만에 정식 경기에 참가하였다.

당시 스모경기에서는 스모의 력사적의의와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선수들에게 경기때마다 사용하는 이름을 달아주군 하였는데 이것은 작가나 기자들이 사용하는 필명과 비슷한것이였다. 이런 이름들은 일본의 력사적인물들의 이름을 땄기때문에 력사명이라고도 하였다.

김신락은 첫 경기에 참가하여 《력도산》이라는 력사명을 받았다.

모모다 미쯔히로라는 일본이름을 쓰는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그로서는 그때부터 자기를 《력도산》이라고 칭하였던것이다.


세계프로레스링왕자-김신락 (2)


작은 체구의 프로레스링선수

 

김신락의 키는 176㎝였고 체중은 105kg이였는데 이것은 프로레스링선수치고는 상당히 작은 체구였다.

그와 대전했던 선수들치고 그보다 체구가 작은 선수는 거의 없었다.

김신락에게 세계프로레스링복식선수권을 빼앗긴 샤프형제를 놓고볼 때 형인 밴 샤프는 키가 195㎝, 체중이 115kg이였고 동생인 마이클샤프는 키가 197㎝, 체중이 118kg이였다.

김신락의 손칼타격에 무릎을 꿇은 《걸어다니는 알프스산》- 프리모 카르네라의 키는 202㎝, 체중은 128kg이였으며 중미프로레스링복식선수권을 빼앗긴 《미친 코끼리》-제스 오르데가의 키는 196㎝, 체중은 140kg이였다.

세계 최강의 팔힘을 가졌다는 카나다의 아데리안 바이라죤은 198㎝의 키에 125kg의 체중을 가진 거쿨진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김신락에게 패했으며 193㎝의 키에 240kg의 체중을 가진 《괴력의 사나이》-그레이트 안토니오 역시 김신락에게 지고말았다.

김신락은 자기보다 체구가 엄청나게 큰 그 모든 상대들을 무자비하게 쓸어눕혔다.

 

 

 

 

19차례 차지한 선수권

 

김신락은 선수생활 전기간 국제프로레스링강자대항전선수권을 무려 19차례나 쟁취하였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는 1958년 8월에 《프로레스링의 제우스》라고 불리우던 미국의 루 테즈를 이기고 선수권을 쟁취한 후 사망할 때까지 18차례나 선수권을 방위하면서 한번도 빼앗기지 않았다. 이것은 지금까지 프로레스링계의 기록으로 되고있다.

김신락은 그외에도 세계프로레스링련맹전선수권을 련속 5차례, 아시아프로레스링복식선수권을 7차례나 쟁취하였고 태평양연안 프로레스링복식선수권, WWA선수권을 쟁취하였다.

 

 

김신락과 마지막으로 경기를 한 미국선수인 데스트로이야는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력도산은 가장 뛰여난 프로레스링선수였다. 그런 선수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것이다.》



세계프로레스링왕자-김신락 (3)

 

영원한 웨침

 

어느 한 나라의 한 출판물은 《력도산의 죽음은 20세기 10대수수께끼의 하나》라고 전했다.

1963년 12월 15일 김신락이 사망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망원인에 대한 수많은 가설과 억측들이 꼬리를 물었으나 진상은 아직까지도 공개되지 않은것으로 되여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어떤 수수께끼도 없다. 김신락의 사망후 그의 원쑤를 갚겠다던 수많은 제자들이 경찰에 불리워갔다온이후로 입을 봉한 사실, 수사에서 《세계제일》이라고 흰소리를 곧잘 치는 일본경시청이 그의 사망과 관련한 수사를 의도적으로 외면한 사실, 그의 유산을 관리, 처분할 대리인이 한명도 나서지 않았고 거의 모든 자산이 몇년만에 일본정부에 흡수된사실 등은 많은것을 말해주고있다.

바로 김신락의 생활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자 이에 겁을 먹고 불안을 느낀 일본반동들이 그를 애국의 길에서 돌려세우려고 악랄하게 책동하다가 1963년 12월 15일 깡패들을 시켜 살해하는 귀축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던것이다.

김신락은 떠나온 조국을 한시도 잊은적이 없었다. 니이가다항의 부두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보내주신 귀국선을바라보며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온밤을 잠못 이룬 사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세살이였던 딸 김영숙이 어른이 되여 보내온 편지를 받고 수령님의 한없는 사랑과 믿음에 격정의 눈물을 쏟은 사실, 어버이수령님께 충정의 맹세를 담은 자필글과 지성어린 선물을 올린 사실, 나의 진정한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떳떳하게 말한 사실들이 이것을 잘 말해주고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김신락의 경기장면들을 촬영한 기록영화를 보아주시고 해외의 어려운 조건에서 조선사람의 자부심을가지고 산다는것은 좋은 일이라고 하시면서 그에게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안겨주시였으며 오래동안 해외에 살면서도 조선사람의 넋과 량심을 잃지 않고 살아온 그가 반동들의 손에 희생되였을 때는 그에게 렬사라는 고귀한 칭호도 안겨주시고 유가족들에게 크나큰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절세위인들의 무한대한 애국애족의 세계, 위대한 사랑의 품에서 진정한 조국을 찾고 영생의 삶을 찾은 민족의 사나이-김신락이 이역땅에서 조국을 그리며 웨친 심장의 고백이 오늘도 울려퍼진다.

《나는 조선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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