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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설 <아리랑> 25-2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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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9,055회 작성일 16-01-25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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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모란봉언저리에서 감돌던 새벽안개가 걷히면서 릉라도공원숲속에는 불깃한 아침해빛이 진하게 비쳐들기 시작했다. 숲속은 뭇새들의 울음소리며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들로 활기를 띠였다.

숲속길을 벗어난 림진우는 차를 대기시켜놓은 1호수문으로 돌아가려다가 유보도에 내려섰다. 기척없이 잔잔한 강물, 신선한 물비린내를 풍기며 피여오르는 물안개, 아늑한 고요, 그러나 강변의 이 모든 아침 정취도 도무지 기분을 가볍게 하지 못했다.

며칠전에 림진우는 해외동포사업국의 한 일군을 만났다. 그가 찾아온것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 관광선발단에 망라되여 조국을 방문하게 되는 한 재미동포가 진우와의 화상상봉을 요청하였기때문이였다.

《전상음이라고 선생과는 소꿉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라던데 어떻습니까. 선생의 구면지기가 옳습니까?》

《전상음이?》

림진우는 홀연 비수같은것에 가슴을 쿡 찔리우는듯 한 예리한 아픔에 절로 신음소리를 내였다. 이어 솟구치는 격한 감정에 온몸의 피가 말라드는것 같았고 머리가 어지러워났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어데 편찮으십니까?》

그의 얼굴이 어찌나 백지장처럼 질렸는지 일군은 당황해서 어쩔바를 모른다. 림진우는 손을 흔들어 일군을 안심시키고나서 물고뿌를 들었다.

《옳습니다, 소꿉시절의.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아- 옳긴 옳구만요.》 림진우를 긴장하게 지켜보던 일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일전에 미국에서 사는 〈아리랑〉동포관광선발단성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던중에 진우선생이 〈아리랑〉 총연출가라는것을 알게 되였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만나게 해줄것을 부탁했습니다.》

《그 사람이 이때까지 어데서 살았답니까?》

《미국에서 음악가생활을 하면서 살아왔더군요. 정말 미안합니다, 미리 마음속 준비를 시켜야 하는걸. 이젠 됐군요. 얼마나들 기쁘겠습니까.》

《…》

림진우는 볼근육이 솟도록 어금이를 지그시 앙다물며 주먹을 꽉 틀어쥐였다. 후안무치하고 뻔뻔스러운 인간. 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되려 미안하오. 그런데 부국장동무, 나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리유에 대해서는 지금, 이제 이야기해주겠습니다. 아마 내 얘기를 그대로 전해주면 그 량반은 충분히 납득할것입니다.》

림진우는 이야기했다. 그는 감정을 누르느라 자주 말을 끊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난 일군은 한참이나 무거운 표정을 짓고 그린듯이 앉아있다가 뜨직뜨직 입을 열었다.

《음- 언제면 우리 민족은 이런 비극을 끝장내겠는지.

리해는 됩니다만 진우선생, 어쩌겠습니까. 상봉을 요청했을적에는 그도 생각이 여북 많았겠습니까. 저는 그저 선생이 다시한번 심중하게 생각해보고 결심해줄것을 권고합니다.》

그가 돌아간 뒤 림진우는 아무 일도 못하고 거의 한나절이나 번거로운 상념속에 들어있었다.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왔던 전상음의 뜻밖의 소식,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전상음이, 그러니까 자네가 나를 만나고싶단 말이지, 다름아닌 나를. 진우는 혼자소리로 중얼거리며 아래입술을 지그시 감쳐물었다. 걸음을 멈춘 그는 허리에 두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지나간 일들이 삽시에 떠오르며 전처럼 또다시 그를 못 견디게 괴롭히는것이였다.

전상음은 진우와 소꿉시절동무이기도 하고 성장해서는 같이 고생하면서 예술가의 길을 걸은 곡진한 벗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에 건너가 고구려무악을 전수하던중 음악이라는 외피를 쓰고 조선사람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한다는 죄명으로 경찰에 잡혀갔다가 모진 고문으로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도 시름시름 앓다가 두달후에 세상을 하직했고. 하여 진우네 부모들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여버린 상음의 신세가 하도 불쌍하여 동네어른들과 토론끝에 그를 집에 데려왔다.

그 시절 림진우네는 어렵게 살았다. 서울에서 물지게장사를 하며 근근히 생활을 유지하던 아버지가 어느 여름날 차사고로 돌아가자 생계의 무거운 짐은 어린 진우에게 지워졌다. 그때부터 진우는 서울거리를 누비며 물을 팔아 생활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진우, 늘 이렇게 살수야 없잖아?》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야?》

《〈속수지년〉이라구 우리 이젠 몸을 삼가하고 마음을 담을만 한 나이인데 노상 물만 져다팔며 아까운 날을 보낼거 있니? 어떤 뜻을 세우는가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는데.》

《그럼?》

《무엇이든 목표를 세우자꾸나. 난 아버지처럼 음악가가 되겠어.》

《아쟁을?》

《그건 싫어, 고리타분해서. 그게 뭐야? 비행기가 날고 자동차가 왕왕 다니는 시대에, 한옷을 입고 돗방석을 깔구앉아 곰팡내나는 굿가락타령이나 하고. 난 피아노연주가가 될테야.》

이것은 어느날 밤 지친 몸을 끌며 집으로 돌아오다가 상음이 불쑥 림진우에게 한 말이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궁중음악가였던 아버지에게서 교육을 받아서인지 유식했고 특히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있었다.

《그런데 넌?》

《나? 글쎄.》

《이것 봐, 진우. 넌 무용을 하는것이 좋겠어.》

《그건 뭘 보구 그러니?》

《전에 최승희무희의 흉내를 내는걸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넌 원래 힘이 세지 않니. 무용이란 예술감각하구 체력이 동반되여야 하거던.》

상음의 말은 사실이였다. 워낙 뼈대가 굵고 체집이 좋은데다 아버지를 잃은 후 생활전선에 뛰여든 림진우는 물지게장사를 해먹으려면 우선 신체가 튼튼해야 한다는것을 자각하고 매일 이악하게 몸단련을 하군 했다.

신새벽에 일어나 근처의 경북중학교까지 달리기를 하고나서 랭수마찰을 하였으며 평행봉, 철봉도 눈동냥으로 익혀두어 운동대에 올라서면 기계체조선수 못지 않을 정도로 능란하게 하군 했다. 어린 나이에 비해 체격은 또 어찌나 멋있었던지 한번은 단골집의 딸인 리화녀전학생이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에 비유하며 장문의 련애편지를 보내여 진우를 당황하게 만든적도 있었다.

《글쎄. 그런데 돈이 어데 있니?》

《우리 손으로 벌자꾸나, 물도 더 길어팔고,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우린 인생을 무지렁이처럼 살면 안돼. 뜻을 가지고 살아야 해.》

그리하여 그들은 그날부터 《뜻》을 가지고 살기 시작했다. 물지게도 곱으로 메였고 서울역에 나가 하역도 하였으며 때로는 행상군의 짐을 메다주러 백여리길을 걷기도 했다. 결과 전상음은 부민관의 피아노연주가에게서 개별교수를 받게 되였으며 진우는 누이동생 진애와 함께 개인이 운영하는 야간무용전습소에 다니게 되였다.

허나 그것은 불과 한두달, 세상은 그들이 자기의 《뜻》을 실현하게 놔두지 않았다. 돈때문이였다. 야간무용전습소의 비용은 그런대로 눅었지만 상음의 수업료가 엄청나게 높았다. 그래서 진우네 오누이는 다니던 무용전습소를 그만두었다. 차라리 셋이 벌어 한사람을 공부시키는것이 나았던것이였다.

그 어간에 무슨 일인들 겪어보지 못했으랴. 애면글면 일했으나 나날이 높아가는 수업료를 대지 못해 어느날엔가는 진애가 자기의 피를 팔아 보탠적도 있었다.

《진우, 진애, 정말 잊지 않겠어. 내 꼭 으뜸가는 피아노연주가가 되여 진우랑, 진애의 정을 꼭 갚겠어. 진애를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녀자로 만들어주겠어.》

그날 허탈로 자리에 누운 진애의 곁에 끓어앉아 오열에 어깨를 떨며 부르짖던 상음의 목소리는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 일이 연고로 돼서인지 후에 그들사이에는 애정이 싹텄다. 전상음이 하숙집을 구해서 나간 이후 류다르게 오가는 그들사이를 진우가 눈치챘을 때에는 벌써 장래의 일까지 약속한 정도에 이르렀다. 나중에 진애는 전상음의 권고를 좇아 다시 다니던 무용전습소를 그만두고 조률공부를 하게 되였다.

혈연이상으로 그렇게 가까왔던 우리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한것은 과연 언제부터였던가. 8. 15해방이 되여서부터일것이다. 그때 그들은 각자가 하는 일들에 대하여 서로 비난의 감정을 품고있었다. 림진우가 미국인교수에게서 수강을 받으며 정치와 예술의 분리, 예술지상주의와 미국문화를 숭배하는 상음의 견해를 불쾌하게 여겼다면 전상음이는 《단독선거》반대투쟁을 비롯한 반미, 반리승만정치활동에 정력적으로 몸을 담그는 진우를 두고 비리성적인 예술가라고 힐난하였다.

한 인간의 진가를 알려면 고난앞에 세워보라는 말이 있다. 그뒤에 일어난 조국해방전쟁이야말로 매개 인간의 정치적신념만이 아니라 륜리도덕적진가를 가르는 무서운 시험장이였다.

1950년 여름 인민군대의 서울해방과 더불어 조직된 남조선문예총산하 무용가동맹 부위원장사업을 하던 림진우는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시작되자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으로 무어진 전선경비사령부협주단에 망라되라는 지시를 받고 맨나중에야 북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일행에는 물론 전상음이며 진애도 있었다. 순천근방에 이르러 본대오와 합류했을 때 그들은 그만 이 지역에 투하된 적항공륙전대와 조우하여 소조로 분산해서 행동하게 되였다.

이때 림진우가 속한 일행에서 행방불명자가 생겼는데 그는 다름아닌 전상음이였다. 비발치는 탄막속을 헤치며 일행이 그리도 찾고찾던 상음이, 살아서 곧 뒤따라올것이라고 믿어마지않았던 그가 며칠후 뜻밖에도 미군직승기를 타고 머리우를 떠돌 때 진우는 자기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공화국의 운명은 시간문제라면서 일행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대며 《자유세계》에로의 의거를 설교할 때 진우는 억이 막혀 그저 가슴만 쥐여뜯었다.

제 몸의 피까지 뽑아 수강료를 대준 사랑하는 처녀, 해산을 앞두고 굶주림과 병고에 쓰러져 담가에 실린채 사경에서 헤매는 안해를 버리고 일신의 안위를 위하여 도주한 상음의 비인간적인 행동에 분노를 금할수 없어서였다. 그리고 어두운 과거를 불문에 붙이고 재생의 길을 열어준 공화국을 배반한 전상음이라는 인간이 한없이 증오스러워서였다.

림진우는 그날 추격하는 적들과의 총격전에서 어깨와 복부에 부상을 당했다. 한주일이 지나서는 덕천으로 넘어가는 알일령고개밑에서 사랑하는 동생 진애가 숨을 거두었고.

운명직전에 림진애는 굳어져가는 납빛얼굴에 한줄기의 홍조를 간신히 피워올리며 상음이를 찾았다.

《식량 구하러 갔나보지요?》

뭐라고 대답해주랴.

《오빠, 상음씨에게 미안하다고, 부디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전해줘요. 그리고 이것도…》

림진우는 동생이 내미는것을 받아들었다. 천으로 지은 조률기주머니를 풀어보니 그속에는 쪼들쪼들하게 말라들어 새알만 해진 군감자 서너알과 한줌가량의 닦은 강냉이가 들어있었다. 남보다 곱은 먹어야 할 임신부인 제 몸은 생각하지 않고 늘 배고픔에 헐썩이는 상음이를 위하여 자기 몫에서 남겨모은것이리라. 아! 상음이, 너 이놈. 또다시 미칠듯 한 증오가 들뛰였다.

림진우는 진애의 뜬 눈을 감겨주면서 억울하게 요절한 사랑하는 누이동생의 명복을 빌기에 앞서 전상음에게 저주를 퍼부었으며 어느때든 만나면 용서치 않으리라는 독한 마음을 굳혔다.

전후에 림진우는 상음이로 하여 또 한번 크게 마음속 상처를 입었다. 나쁜 놈들이 진우를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도주한 전상음이와 련관시켜 정치적으로 박해하였던것이다.

세월의 흐름은 강하다. 세월은 마치 강물처럼 쉬임없이 흘러가며 칼끝같이 세웠던 그 마음을 부단히 씻어내여 이제는 기억에도 삭막하게 만들어놓은것 같았다. 그러나 전상음이 여적 살아있었으며 오늘은 상봉까지 요청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그것은 다시 형체를 시퍼렇게 드러내며 림진우의 가슴을 못 견디게 괴롭히는것이였다.

내 혹시 지나친게 아닐가. 림진우는 걸음을 천천히 떼옮기며 자문자답을 해보았다. 그의 표현대로 상봉을 요청했을적에는 그가 몇십년전의 전상음이 아닐수도 있지 않는가. 하긴 그동안 무엇을 하며 살았고 어떤 모습을 하고있는지 한번 만나서 알고싶은 호기심 비슷한것이 들기도 했다.

아니, 진우는 소스라치며 자기를 다잡았다. 만난다는것은 상음이를 용서한다는것인데 아무리 세월이 흘러간들 그때문에 입은 정신육체적상처를 내가 어찌 잊을수 있단 말인가. 설혹 그가 달라졌다 해도 마찬가지일것이다. 그렇다 하여 오늘에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문득 승용차경적소리가 들려왔다. 몇걸음앞에 그의 승용차가 와 서있었다. 림진우는 차에서 내리는 운전사를 의아해서 바라보았다.

《아침 첫시간에 교예극장에 가자고 하셨길래 차를 준비해놓고 사무실에 가보니 총연출가동지가 안계셔서, 제 짐작이 맞았군요.》

아, 그렇지. 림진우는 머리를 끄덕이는것으로 그의 말을 긍정했다. 어떻게 할가. 승용차에 다가간 진우는 차문을 열다말고 망설이였다. 몇분동안 그러고있다가 종내 매듭을 짓지 못한 림진우는 자신없는 목소리로 운전사에게 일렀다.

《방향을 바꾸자구. 교예극장엔 나중에 들리기로 하고 국제전신전화국에 먼저 갑시다.》

 

 

 

26

 

열한시를 알리는 시계종소리가 울리였다. 림진우는 검토하고있는 통일장대본을 거두어놓고 언제나 그러하듯 훈련장을 돌아보려고 방을 나섰다. 호각, 구령, 확성기, 음악소리들로 귀가 멍멍할 지경인 경기장의 바깥원형광장이며 아치와 호구사이의 공지는 한구획씩 차지하고 훈련에 열중하고있는 각 대대 출연자들로 들끓고있었다. 창작가들과 출연자들을 고무하기도 하고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도 하며 한시간남짓이 바깥을 돌고난 진우는 1호수문으로 향하다가 강이를 업고 걸어오는 심혜영이와 마주쳤다.

《애를 차에 태워 집으로 보내려고 가는 길입니다.》

어린것을 내려놓고 하늘색훈련복상의의 자락을 내리끄며 심혜영이 하는 말이였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전달에 림진우는 아동장담당창작가에게서 강이가 다리힘키우기운동을 하던중 구간(강진호가 아이의 나이에 맞게 만들어준것이다.)을 잘못 다루어 떨구는 바람에 그만 심하게 다쳤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발톱이 통채로 빠져달아날 정도로 엄지발가락이 짓이겨졌다고 했다. 보건분과의 집중적인 치료에 의하여 위험단계는 지났지만 정상상태를 회복하자면 아직 상당한 기일이 필요했다.

심혜영은 어린 동생도 만나보게 할겸 안정치료에 적합한 저희 집으로 보내겠다고 제기해왔다. 그것이 승인되여서 아는 렬차원을 붙여 집으로 보냈는데 역에 나갔다가 그 녀자가 잠간 자리를 뜬 틈을 타서 달아나 경기장으로 도로 들어왔다는것이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직접 차에 태워 집으로 보내려고 작정했다고 하였다.

림진우는 한무릎을 세워앉으며 어린것의 두어깨를 감싸쥐였다.

《강이, 어서 말해봐. 이번엔 집에 꼭 가야 돼. 알겠나요?》

고개를 외로 틀며 아래입술을 쑥 내민다. 진우는 엄하게 오금을 박았다.

《또 달아빼오문 이 총연출가선생님이 강이 종아리를 갈기고는 아동장에서 아예 빼버리련다. 알아들었지?》

그제서야 어린것은 울상이 되여 집에 꼭 가겠노라고 다짐하는것이였다.

심혜영이와 헤여진 림진우는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경기장의 주석단 맞은편에서는 배경대종합훈련이 한창이였고 바닥과 공중은 교예장의 기재설치작업으로 분주했다. 진우는 선수입장출구앞에서 무선전화기를 목에 걸고 작업을 지휘하는 김재근책임연출가에게 다가갔다.

《수고많구만. 진호동무가 안 보인다?》

《어허- 림동무도 늙긴 늙었구려. 요전에 내가 말해주지 않았댔던가. 진호동무가 출장을 떠난다고 말이네.》

《오, 그렇지. 이놈의 건망증은 참.》

림진우는 허거프게 웃었다. 전주 토요일에 진행한 연출실주간총화모임때 강진호가 요소종목에 출연할 배우들까지도 당에서 보장받으려 했던 자기를 반성하며 꼭 제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결의했다는것, 그래서 오늘 아침렬차로 지방체육학원에 떠난다는것을 재근연출가가 이미 말해주었던것이다.

《한데 림동무, 저들은 웬 사람들이요. 보자니까 오전 첫시간에도 와서 어물대던것 같던데, 어제두 왔댔고.》

진우는 김재근의 손짓을 따라 배경대앞에 몰켜서있는 사람들을 눈주어보다가 말해주었다.

《해외동포들 같구만. 요즘 조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어데서 듣고 왔는지 〈아리랑〉 훈련장을 참관일정에 넣어달라고 요구한다나보오. 특히 배경대에 관심이 크답데.》

《배경대? 그럼 험담이나 시비질하러 온 인간들도 있겠구만.

듣자니 그런 작자들은 애초부터 헐뜯을 잡도리를 하고와서 〈아리랑〉을 본다질 않소, 기가 막혀서.

내 근간에 대외손님을 초청하는 부서에 말해주려고 했댔는데 그런자들은 이 〈아리랑〉에 아예 이름조차 들여놓지 못하게 해야 하오.》

《원, 재근동무두. 여보, 색안경을 낀 사람에게는 세상이 한가지 색갈로 보이는 법이요. 허튼 잡도리를 하고 온 인간들이 달리 표현할것 같소. 아마 그런 사람들은 길가에 서있는 나무 한그루 보고도 색다른 험담질일거요. 까짓거, 실컷들 입방아를 찧으라지. 구데기 무서워 장을 못 담그겠나.》

《하긴 그렇지.》

김재근은 허튼일에 과민을 보인 자기가 민망스러운지 대머리를 내리쓸며 멋적게 웃었다.

그는 무선전화기에 대고 몇마디 하고나서 진우에게 물었다.

《그래 작품수정은 잘돼가시오?》

《거의나 끝냈소. 오후에 제출하면 래일쯤엔 예술위원회에서 마련을 보겠지.》

《모를 일이다. 십수년 창작생활을 하면서 언제나 명작만 내놓던 림동무가 통일장에 쩔쩔매다니. 것도 두번씩이나 공회전을 하면서 말이요.》

《흠- 》

림진우는 재근의 시까스름에 쓰거워나서 외마디소리를 흘리며 입만 다시였다.

다음날 오후.

5월1일경기장의 2층에 있는 3호휴계실에서는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의 전작품의 흐름과 함께 통일장에 대한 콤퓨터최종모의 심의가 진행되였다. 콤퓨터형광막앞에는 문화성 부상이며 《아리랑》 국가준비위원회 참모장 겸 예술위원회 위원장인 원석현과 위원들, 통일장창작에 관여했던 몇몇 창작가들이 앉아있었다.

곧 대형콤퓨터형광막에 《아리랑》자막이 새겨지더니 모의화면들이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검푸른 두만강을 건너가는 한척의 나루배, 그우에 타고있는 망국민들을 형상한 제1장 《아리랑민족》의 제1경 《눈물젖은 두만강》으로 시작된 《아리랑》은 민족의 백년사를 큰 폭을 가지고 하나하나 그루박으며 생동하게 펼쳐보이고있었다. 화면은 때로 경기장상공에 터지는 축포며 화려한 전광장식들, 체육명수들과 무용수들의 동작들, 률동가락들, 배경대가 그리는 구호며 글자, 그림기교들, 매 장면마다 높이와 생김새가 조형적으로 달라지는 봉화대의 불길을 집중적으로 주의깊게, 오래동안 나타내보이기도 하였다.

시간이 퍼그나 흘러갔다. 화면에는 드디여 문제의 통일장이 현시되고있었다. 배경대에 《분렬의 장벽을 짓부시고》라는 제목이 그려지면서 암전이 되였고 바닥 저끝에서 한점의 불길이 서서히 타올랐다. 곧 조국통일주제의 연연한 노래선률에 맞춰 암전이 해소되면서 붉은색, 노란색, 미색저고리를 입은 출연자들이 등장하여 백두산과 한나산을 배경으로 춤을 춘다. 통일력사를 가로막는 도전인듯 배경대에는 맹수처럼 날뛰는 광풍이며 파도가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암전속에 한점의 불길이 타오르고 그것이 단번에 확대되여 바닥에 거대한 붉은색조선지도를 형상하는것이였다. 동시에 배경대에는 7. 4북남공동성명, 6. 15북남공동선언이라는 글자가 큼직큼직하게 새겨지였다.

원석현은 탁자우에 깍지껴서 올려놓았던 손을 풀며 느슨한 몸자세를 취하였다. 그것을 본 진우는 이번에는 그리 랑패를 보지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매번 심의가 끝날 때면 석현의 몸자세가 늘쌍 꼿꼿해있었던것이다. 원석현이 자세를 풀적에는 긍정적인 반응이 있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다.

진우는 조용히 속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통일장담당창작가가 다른 기관에 조동되는 바람에 장창작과제가 진우에게 넘어온지는 불과 한달전, 그 어간에 대본창작은 몇번이나 공회전을 하였는가. 원석현이나 보조창작가들의 고충도 있었지만 대본의 기본주인인 림진우에게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다.

사실 이번의 대본창작은 예술가로서의 총화작이나 같은것이여서 심혈을 깡그리 기울이였다. 허나 대본은 매번 실패로 끝나군 했다. 그때마다 진우는 자기의 재능에 대한 불신과 좌절감으로 하여 고통속에 싸여있군 했다. 늘 건강미에 넘쳐있던 진우의 모습은 이 몇주일사이에 아주 수척해져 진짜 늙은이가 되여버린듯싶었다.

잠시후 심의가 활발히 벌어졌다. 박력은 있으되 일면적인것, 조명의 번다한 구도, 배경대의 시종일관한 구호식, 선언식의 글자형상들. 의견은 이렇게 적지 않았지만 심의원들과 참가자들은 일치하게 저번보다 통일장이 크게 전진하였다는 평가를 내리였다. 나중에 원석현이 일어나서 통일장의 우단점을 짧게 지적한 다음 심의를 일단락 매듭지었다.

《제기된 의견들은 완성과정에 고치면 될것입니다. 진우동무만 남고 다들 돌아가도 좋소.》

림진우는 사람들이 나가자 석현에게 기다린듯 조급히 물었다.

《동무 소감엔 어떤가?》

원석현은 진우의 긴장한 눈길을 마주보며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그리였다. 심의 전과정에 석현은 심의자들의 의견을 집계하여 발언하였을뿐 크게 자기의 견해를 내놓지 않았던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동감일세. 한데 그 체조장 말이네, 체조칸에서 의견이 있어하지 않나?》

《?》

《내가 보건대 중간부에 무용수들을 등장시키니 체조장다운 맛이 적어. 개성이 전혀 보이지 않거던.》

《그래? 참작해보세.》

《아니야. 참작이 아니라 무용수들을 빼게. 그래야 체조장의 개성이 나와.》

《이건 뭐 관료주의를 부리는건가? 참작해보겠다질 않나. 자넨 창작실무에 지내 깊이 간섭하는것 같구만.》

《또 또 고집 부린다. 무용수들을 등장시켜 무슨 형상효과를 얻는다는건가. 그래야 안무가출신 총연출가가 욕심을 부리다못해 독선적으로 나간다는 뒤말밖에 들을거 없어. 체조장을 그리 해놓으니까 전작품의 고저생리가 둔해지지 않나. 더이상 고집쓰지 말게.》

《허, 이런.》

림진우는 아예 두말을 못하게 자르는 석현의 태도에 손을 들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물러서면서도 한마디 정정하는것은 잊지 않았다.

《거 언제 봐야 원동문 고집, 고집하며 날 몰아대는데 제발 부탁하네만 표현은 똑똑히 하게. 그건 고집이 아니라 주장이야, 주장.》

원석현은 흰이를 벙글서 드러내였다. 젊어서 예술활동을 같이했고 예술행정일군으로부터 문화성의 책임일군사업을 하는 오늘까지 진우와 작품때문에 이마를 맞대고 토론이나 언쟁을 한두번만 하지 않았지만 진우는 언제한번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 않는가. 긍정은 되면서도 제 의도가 굽혀진것이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였다.

《그 성미 언제 가면 고치겠는지. 하긴 그런게 있어야 림진우지. 이보라구, 진우동무.》 원석현은 진우의 손에 아직도 들려있는 대본을 손짓하며 등받이에서 웃몸을 뗐다. 《이번엔 작품이 희망이 보여, 이자 말한 그런 부분을 내놓고는.》

《원동무, 정말 동무는 작품이 될수 있다고 보나?》

림진우는 따라일어서며 믿어지지 않는지 되물었다.

《이런 의심군 봤나. 방금 말해주지 않았나.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러는건가.》

《어째서 그런지 내겐 전혀 마음에 안 들어. 창작할 때부터 우선 감정이 생기지 않아 내키지 않더란 말일세.》

그들은 휴계실을 나섰다. 사무실앞에 이른 원석현은 채 하지 못한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진우가 여전히 어두운 안색을 하고있었던것이다. 석현은 그의 팔굽을 가볍게 잡았다.

《작품에 지내 포화되였구만. 우리 기분전환도 할겸 걷지 않겠나?》

《그러세.》

림진우는 흔연히 동의했다. 그들은 청류벽과 여울목사이에 들어앉은 5. 1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저너머 감색그물식울타리를 높다랗게 둘러친 야외축구경기장이며 송구경기장에서는 애젊은 처녀선수들이 한창 훈련을 하는것이 류달리 눈을 끌었다. 원석현은 거기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 다른 화제를 꺼내였다.

《이것 보게, 진우동무. 그래 아직도 거게 가보지 않았나?》

《어딜 말인가?》

《국제전신전화국에. 아, 거 있지 않나. 미국에서 산다는 동포친구를 만나러 말이네.》

《갔댔네.》

《일두 참.》 원석현은 혀를 찼다. 《진작 그럴걸 처음에 결심했어야지.》

《첨에야 어디 그럴만한 정신적여유가 있었나.》

《것보라구, 그렇다니. 내 짐작이 틀리지 않구만.》 원석현은 또 혀를 차며 진우를 핀잔했다. 《여하간에 로년기에라도 조국방문을 결심했고 친구를 찾았올적에야 무엇인가 바른 리유가 있어 그러질 않았겠나. 진우, 삭이게. 지내 상처가 아프다는것에만 포로되면 큰걸 못 보네.》

《상처, 큰걸 못 본다구? 내가 말인가?》

《그렇네. 사실 그때로부터 얼마나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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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그렇네. 사실 그때로부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나. 동무나 그사람은.》

《그만하라구, 원동무.》

마침내 림진우는 참고참았던 노기를 터뜨리고야말았다. 아무리 누르려고 애썼지만 음성은 격해지고 높아지기만 하였다.

《동무 보기엔 내 그리두 사고가 협소한 인간같으나? 옛 상처가 아프기로서니 내 아무렴 그렇게두 암매하게 처신할것 같으나 말일세. 옳네, 난 거절했댔네. 하지만 일흔고개를 넘은 이 림진우가 이게 무슨 그른 처신인가, 더우기 당의 품에서 성장하고 당의 뜻대로 산다고 항상 자부했던 내가 이 무슨 불충한 행위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고쳐 마음먹었네.》

《…》

《가니까 단념했다더군, 전자우편으로 편지 한장만 남기고. 편지에 그가 뭐라고 쓴줄 아나. 동무짐작이 과히 틀리지 않네. 한마디로 후회, 그래서 용서를 바란다는거네. 속죄한다는거지.》

둘사이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이거 나두 모르게 어성을 높였구만, 미안하이.》

한참후에 림진우는 량해를 구하고나서 석현의 눈길을 좇아 야외경기장을 보다가 무척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석현이, 자네두 김철의 시 〈용서하시라〉를 좋아하지?》

《새삼스럽구만. 그 시를 좋아 안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럼 말해보게. 왜 동문 〈용서하시라〉가 좋던가, 응?》

석현의 대답에 림진우는 긍정했다.

《옳아, 나도 그래서 좋더군. 시인은 자기의 전작품에 흐르는 주도적인 감정을 〈용서하시라〉에 담았거던.》

 

용서하시라 어머니시여

 

림진우는 스적스적 걸으며 나직이 읊었다.

 

무명천으로 통바지해주었다고

투정질하며 어머니의 속을 태우던

이 아들을 용서하시라



 

《〈어머니〉가 세상에 발표되였을때 나는 신문지상에 난 그 시를 읽고서 작가가 창작한 작품들을 모두 음미해보았었네. 〈당중앙위원회 정원을 나서며〉, 〈나는 조선로동당원이다〉, 〈다섯해후면〉, 〈기뻐하노라〉, 〈갈매기〉, 〈동해선〉, 〈새해축배를 들며〉, 〈삼로주이야기〉, 참으로 그의 작품들에는 당과 수령에 대한 흠모, 삶과 인생, 로동과 청춘, 사랑과 우정에 대한 진실한 감정이 맥박치고있었어. 그런데 이 모든 작품들에 흐르는 주도적인 감정은 무엇인가. 당과 조국을 위해 그 무엇인가 더 하지 못한, 그래서 늘 죄책스러워하는 감정, 이것이였지.

원동무도 아다싶이 시인은 한생 붓대로 우리 당을 받들었네. 심장을 꺼내들고 그속에서 끓고있는 피를 잉크삼아 대돌에 글을 쪼아새기듯이 시를 썼거던. 이러한 시인이 항시 당과 조국앞에 속죄의 감정을 품고있었다는것은 평소에 그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정결했는가를 충분히 헤아려볼수 있는것이 아니겠나. 그래서 김철의 시 한편한편, 하나하나의 표현이 그토록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것이지.》

《!》

《내 왜 이런 말을 하는가. 어제 편지를 읽고나니 〈용서하시라〉의 구절들이 새겨지며 적중하지는 않지만 시인과 그 사람을 대비해보게 돼서 그러네. 속죄라, 난 그의 진심이 가늠이 안 가.

그래 그가 도대체 왜 조국에 오려고 하나? 무엇때문에 날 만나자는건가. 어려울 때 조국을 팽개치고 달아나서는 외국에서, 그것도 미국에서 피아노건반이나 두드리며 저만을 위해 살다가 명이 질 때가 되니 갑자기 순결한 감정이 솟구쳤단 말인가.

뭐, 용서해달라구? 후회한다?! 아니네, 아니야. 속죄라는 감정은 아무나 가질수 없는것이네. 오직 참인간만이 가질수 있는거지.》

하긴 그렇다. 원석현은 내심 림진우의 말을 수긍했다. 그로 하여 인간적불행을 당한 진우고보면 응당 그럴수 있지 않는가.

《또 흥분하는군.》

석현은 손을 내저으며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는 화제를 마무리지었다.

《됐네. 그 사람이 다행히두 상봉을 포기했다니 이 문젠 저절로 매듭이 지지 않았나. 이젠 그만하자구. 우리가 필요없는데 신경을 쓰는구만. 하여간 오늘 제기된 의견을 참작해서 대본완성을 최대한 당겨달라구. 우리에겐 시간이 모자라. 〈아리랑〉훈련을 하면서 한켠으로는 〈백전백승 조선로동당〉공연 재현준비를 다그쳐야 하네. 어제 저녁 위대한 장군님의 말씀이 계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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