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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의 북녘생활 6. 온 나라가 아껴주는 영예군인 내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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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784회 작성일 16-07-0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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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의 북녘생활6] 온 나라가 아껴주는 영예군인 내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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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북녘동포
기사입력 2016-07-04

[편집자 주: 이 글은 북이 군과 주민들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여겨 소개합니다. 특히 남측에도 적지 않은 상이군이들이 있는데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참고가 될 부분이 없지 않다고 생각되는 글입니다.]

 

▲ 어머니의 영상을 보자마자 몸부림을 치며 통곡하는 김련희 씨의 딸, 아빠와 엄마의 예쁜 모습만 어쩌면 그렇게 곱게도 쏙 빼닮은 딸의 절절한 효심이 그의 표정과 목소리만 들어도 알린다. 어서 저 효심 깊은 딸의 소원을 풀어줄 길은 과연 없는 것일까!     ©자주시보
▲ 평양에서 영예군인이자 의사로 재직 중인 남편 리금령씨가 가족의 소중함을 피력하며 김련희씨의 송환을 요구했다.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 김련희씨의 평양가족이 김련희씨의 동영상 편지를 보고 오열하고 있다. 오른쪽이 남편 리금령씨, 왼쪽이 딸 리영금씨.     ©자쥬시보 이정섭 기자

 

 

최고사령관 명령을 받들고 동기훈련을 진행하던 중 부대에서는 기계화부대 이동 중에 차사고가 있었다.

 

군의관으로 훈련을 따라 나갔던 남편은 그 사고로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였다.

 

군의관들과 간호원들의 지극한 정성으로 남편은 회복되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2007년에 제대되어 영예군인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우리 가정은 군인생활을 마감하고  평양을 떠난 지 10년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지방에서의 다년간 군관가족생활을 통해 나는 모든 면에서 한 단계 성숙  발전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조건이 좋을 때는 다 모르지만 제일 어렵고 힘들 때 그 사람의 인간됨을 검열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지방에서 10여년 군인가족생활을 하면서 주민들과 군인들 사이의 혈육으로 이어지는 끈끈한 인간애를 절실하게 느꼈고 군관과 병사간의 형제 같은 친근함과 애병 정신을 읽을 수 있었으며 군관가족들이 농사를 짓고 짐승을 길러 병사들에게 더 많은 고기를 먹일 수 있는 정책을 펼치는 당의 군인사랑을 심장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나는 평양에 돌아와 10년 전 지방에 내려가기 전에 다니던 김책공업종합대학 양복점에 들어갔고 남편은 같은 김책공업종합대학병원 의사로 배치를 받았다.

집은 대학 옆에 있는 중구역 교구동에 배정받았고 딸은 집 가까이에 있는 중구역 동안고등중학교로 전학하였다.

 

딸은 지방에서 배운 태권도 기술로 해서 학교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체력검정이나 체육경기 때마다 주석단에 나가 전교생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쳐주고는 하였다.

 

나는 딸을 키우면서 한 번도 아쉽거나 섭섭하거나 애를 태운 기억이 전혀 없었고 언제나 내 딸이 자랑스럽고 대견했다.

딸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고 특히 건강이 나쁜 엄마걱정으로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아 하군하였다.

 

남편은 영예군인이여서 누구보다도 당의 배려와 국가적 혜택을 많이 받게 되었다.

국가에서는 여러 가지 보약들과 가정 약들을 정기적으로 보장해 주었고 주마다 각종 수산물과 고기를 공급해주었으며 청류관이나 옥류관, 향만류에 가서 식사할 수 있도록 표를 보내주었다.

 

명절마다 옥류관이나 여러 봉사단체들에서 3-4명씩 조를 무어 집으로 이동봉사를 나와서는 우리 가족을 앉혀놓고 손풍금을 치며 노래공연도 해주었고 준비하여온 음식을 펴놓고 한 가족이 되어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군 하였다.

대학병원에서도 많은 관심을 돌려주었다.

 

식당이나 문화시설, 관광시설, 그 어디를 가도 “의사, 교원, 영예군인 우선 봉사합니다” 라는 글이 붙어있어 사회적으로 영예군인들을 우대하는 기풍이 서있다.

봄철에 한두 달 식량공급을 전량 해주지 못하고 보름배급을 줄때에도 의사, 교원, 영예군인만은 식량을 전부 공급하도록 하였다.

 

우리는 10여 년 군인가족생활에서 단련된 모습으로 각자 맡은 일에서 언제나 남들보다 앞장섰다.

남편은 대학병원에 제대군인들은 많지만 단 한 명뿐인 영예군인이여서 선생들의 거울이었고 본보기였다.

 

언제나 어렵고 힘든 일의 제일 앞에는 남편이 서있었고 병원에서 제일 애를 먹고 있던 렌트겐촬영기 문제도 남편이 솔선 나서 완벽하게 해결하여 보건신문과 대학신문에도 여러 번 실리게 되었다.

 

남편은 열정적이고 성실했으며 정이 많은 사람이여서 자기 것을 아끼지 않고 남들에게 모두 배려하는 성격이었다.

국가에서 영예군인을 위해 귀한 수산물을 보내오면 맛있는 매운탕을 끓여 대학병원에 입원해있는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군하였다

그리하여 대학기숙사생활을 하는 지방생들은 나의 남편을 친형처럼 좋아하고 따랐다. 

 

참으로 영예군인들을 위한 당의 사랑과 배려는 끝이 없었고 그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는 남편의 마음은 환자들을 위한 길에 남김없이 바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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